|
3.1운동 기념 연합예배 포스터.
포항에 3·1운동 기념탑 세워질 듯
덕수공원 유력… 당시 여천시장엔 표지석 설치
경북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난 포항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기념탑’이 건립된다.
이두우 3·1운동 100주년 준비위원(전 포항시의원)은 이강덕 포항시장으로부터 3·1운동 기념탑 건립을 약속받았다고 9일 밝혔다.
이 위원은 “1919년 3월 11~12일 ‘3·1운동 만세운동’이 일어난 당시 영일군 포항면 여천시장(현재 포항소망교회~꿈틀로~육거리)에 표지석이 설치되고 충혼탑이 세워진 포항 수도산 덕수공원엔 3·1운동 기념탑이 건립될 것”으로 전망했다.
포항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여했던 최경성·송문수 포항교회 장로(현 포항제일교회) 중 일제 군경에 검거되지 않고 돌아온 송문수 장로와 그와 뜻을 함께한 수백 명의 포항교회 교인·주민들에 의해 장날인 11일 여천시장에서 촉발됐다.
이튿날인 12일 저녁에는 포항교회 교인, 주민 등 수천 명이 수 km의 시가지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 운동은 경북에서 최초다.
주동자 송문수, 이기춘, 이봉학, 장운한 등 4명의 포항교회 교인은 일본 관헌에 검거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로 인해 3·1운동은 22일 청하와 송라면, 27일 송라면 대전리 두곡 숲, 4월 1일 연일과 동해, 장기, 오천, 대송, 달전,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흥해,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에 이르기까지 경북 곳곳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포항 기독교계는 “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포항면 여천시장에 ‘3·1운동 기념탑’을 건립, 선인들의 송고한 정신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 애국·애향하는 마음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고 우리나라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를 불렀다고 해서 ‘기미독립운동’ 또는 ‘3·1만세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언론인홀리클럽 공동취재반
............
포항문화원이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최근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을 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은 포항 송라면 대전리 3·1운동 기념관과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등을 찾아 당시의 기록을 조사하고 유족들을 만나 면담한 내용을 실었다.
또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포항면 3·1운동 관련 판결문 원본을 입수해 정확하게 번역함으로써 그동안 앞뒤가 연결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들을 바르게 정리했다.
일본 외무성 보고 자료도 찾아 보완했다.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 발행인 이두우 전 포항시의원(포항제일교회 장로·당시 포항교회)을 만나 포항·영일지역 3·1운동을 집중 조명했다.
-포항 3·1운동은 경북 3·1운동의 효시라 불린다. 포항지역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구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영남지역 최초였다.
이 운동에 영일군 포항면의 최경성(36)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장로, 송문수(37) 포항교회 장로 등이 참여했다.
최경성 장로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 체포, 구속됐고 송문수 장로는 포항으로 피신했다.
송문수 장로는 포항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인 장운환 교인 등에게 대구 3·1운동을 들려줬다. 이들은 11일 포항장날인 여천시장에서 포항 3·1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최경성 장로와 송문수 장로가 대구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뭔가?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 선교사가 일찍이 대구에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데 이어 1905년 포항에 포항교회를 개척했다. 대구남성정교회와 포항교회는 형제교회였다.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남성정교회 목사였다.
이만집 목사가 포항교회 최경성 장로와 송문수 장로 등을 설득해 대구 3·1운동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만집은 독립선언 서명자 33명명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기독교인)의 권유로 대구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포항 3·1운동과 대구 3·1운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는 근거는 뭔가?
△대구 3·1운동의 모의가 노회의 임원들 중심으로 이뤄졌고, 교역자들을 비롯한 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장서 운동을 주도했다. 계성학교 교사들과 신명여학교 교사들은 학생대표들을 만나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체포된 76명의 주동인물 중 5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포항 3·1운동도 마찬가지다. ‘포항제일교회 100년사’와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포항교회 교인들과 포항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임시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영일군 포항면의 인구는 1천436가구 6천588명이었다. 이중 일본인이 381가구 1천604명으로 전체 인구의 24.35%를 차지했다. 거사를 계획하고 추진했다면 사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많았을 텐데…
△거사가 탄로나 송문수 장로와 이기춘(영흥학교 교사), 이봉학, 장운환 등 4명이 체포됐다. 이 소문이 시내로 전파됐다. 포항장날인 11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여천장터에 운집했다. 주동자들은 검거됐지만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다.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으나 다음날 저녁 포항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에 모여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시내 수 km를 행진하던 동안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 군중의 수는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운동은 22일 청하면과 송라면, 27일 송라면 대전리 두곡 숲, 4월 1일 연일과 동해, 당기, 오천, 대송, 달전,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에 이르기까지 경북 곳곳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당시 영일군와 포항면의 행정구역에 대해 설명해 달라.
△당시 영일군은 흥해면, 곡강면, 달전면, 연일면, 오천면, 동해면, 대송면, 포항면, 장기면, 봉산면, 창주면, 청하면, 송라면, 죽남면, 죽북면, 기계면, 신광면 등 17개면과 225동리를 관할했다.
포항면은 1931년 포항읍으로 승격됐고, 1949년 포항시로 승격됐다. 포항시는 1995년 영일군과 통합, 도농통합 포항시가 됐다.
-포항 3·1운동을 주도한 교인과 교회에 대한 일제 군경의 핍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3·1운동 뒤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사환이었던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했다.
포항교회는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 받는 등 시달림을 받고 피해도 입었지만, 교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교회는 이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교회는 상처 받은 교인들의 영성회복을 위해 부흥회를 개최했고, 사회 회복에도 앞장섰다. 교인들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거금 900원을 헌금했다.
평양숭실전도대가 이 지역의 교인들을 위해 격려차 방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포항에서는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던 여천장터 만세운동과 청하·송라면 주민들의 주동이 된 청하장터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청하장터 만세운동의 발단은?
△청하·송라 3·1운동은 1913년 이익호가 설립한 대전교회에서 태동됐다.
이익호가 송라면장에 부임한 뒤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교회, 청하 읍내에 청하교회, 청하 유계리에 유계교회를 설립했다. 기독교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을 4개월 앞둔 1918년 11월 6일 45세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아들 이준석, 이준업이 대전교회 옆 초가삼간 자택을 중심으로 3·1운동을 펼쳐나갔다.
청하·송라면의 3·1운동은 송라면 대전리 출신 14명과 청하면 출신 9명이 주도했다.
-청하·송라면의 3·1운동 일부 주동자도 사전에 발각돼 검거됐다고 하던데…
△이익호의 아들이자 대전교회 교인인 이준석과 이준엽이 같은 교회 영수인 윤영복과 청하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했다.
윤영복은 청하교회 영수인 오용간과 같은 교회 교사인 윤영만을 찾아 22일 청하면 덕성리에서 열리는 장날 거사하기로 했다.
윤영만이 거사 당일 덕성리 시장(청하장)으로 가다 일경에 검거됐으나 윤영복 등은 이날 오후 1시 30분 덕성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부르는 함성은 시장을 진동시켰다. 주동자 23명은 그날 일경에 검거됐다.
송라면 대전리 마을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27일 대전리 두곡 숲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더 세차게 불렀다.
-이 만세운동은 후세에도 이어졌지요.
시위 확산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뭔가?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됐다는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공식기록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집회인수는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천509명, 구속자가 4만7천명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천678만8천400명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그렇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그동안 군사·경찰에 의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변경했다.
이 운동은 해외 언론에서도 큰 반응을 보였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인홀리클럽 공동취재반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고 있다. 이중 1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포항·영일지역 3·1운동은 어떤 분들이 주도했나?
△영일군 포항면의 3․1운동도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됐다.
포항면의 경우는 주동자 100%가 포항교회의 교인이거나 이 교회 부설 영흥학교의 교직원이었다.
영일군 청하면․송라면의 경우도 덕성교회와 대전교회 교인들이 주동자로 나섰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
동리를
포항의 3․1운동사는 포항․영일에서 항일 운동을 한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부여, 애국․애향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념으로 집필했다.
3
이 사건은 1919년(기미년) 3월 1일에 일어났고 우리나라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를 불렀다고 해서 ‘기미독립운동’ 또는 3․1만세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인계기가 됐다.
3․1운동은 3개월가량 시위 형태로 지속됐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공식기록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집회인수는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천509명, 구속자가 4만7천명이었다.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1천678만8천400명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를 계기로 강경책 내지는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하던 일제 조선총독부는 그동안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됐다.
이 운동은 해외 언론에서도 큰 반응을 보였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대표 33인
이중 1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전국 218개 군 중 211개 군이 시위에 가담하고 대중화, 폭력화되어 갔다. 해외로 파급되어 만주, 연해주 등 해외 한인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집회 1천542회, 참가인수 2백2만3천98명, 피수자 46만948명,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5천961명.
대구- 집회 4, 2만3천명 참가, 212명 사망, 870명 부상, 3천270명 투옥
영일-집회 3, 1천700명 참가, 58명 사망, 190명 부상, 57명 투옥
.........................................................................................................
1914년 3월 1일-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도의 관할구역과 부, 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이 조정됐다.
경북은 1부, 23군, 272면, 3천228리동으로 통폐합됐다.
이때 종전의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 등 4군이 영일군이 됐다. 17명과 225동리를 관할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임시호구조사 결과
연일군 포항면은 1천436호 인구 6천588명이었다.
한국인 1천50호 4천954명이었고
일본인은 381호 1천604명이었다.
일본인이 포항면에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24.35%였다.
△포항 사립 영흥학교 개교
최경성을 비롯한 포항교회(포항제일교회) 교인들은 일본인들이 세운 심상소학교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배워야 이 민족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데 생각의 일치를 봤다. 교인들은 1911년 11월 1일 초가 5칸의 예배당에 학교를 개설했다.
최경성 장로가 이 학교 초대 교장을 맡았다. 교사는 김기숙, 교육과목은 국문, 한문, 산출, 성경, 찬송가였다. 학생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포항․영일 지역 3․1운동의 전개 과정
포항의 3․1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여한 포항 사람들이 주동이 돼 1919년 3월11일 포항면세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12일까지 계속됐다.
이 운동은 22일 청하와 송라면, 27일 송라면 대전리 두곡 숲, 4월 1일 연일과 동해, 장기, 오천, 대송, 연일, 달전,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 등 각 면, 동으로 확산됐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영일군에서 3․1운동 시위는 9회, 참가인원 2천9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 380명, 피검자 320명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봐다 결코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없다.
포항면 3․1운동은 대구 3․1운동에 참여했던 최경성과 송문수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에 옮겨졌다.
1934년 경북도 경찰부에서 고등계 형사가 꼭 읽어야 할 자료를 정리하고 편찬하여 관내 부․군 경찰서에 비치한 대외극비 기록인
일제가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 보면
소요경로는 독립선언 서명자 33명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이 대구의 이만집에게 권유했음이 발단이 되어 기독교 학교의 교사․학생이나 일본 또는 경성으로부터 귀향한 학생․기독교 목사․신도들이 주동자였다.
3월 8일 대구에서 기독교 북장로파가 경영하는 학교와 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등이 시위운동을 시작했다. 군중이 뒤를 따랐다. 그 수가 800명가량 됐다.
경북에서 3․1운동 관련으로 사법처분을 받은 자만 1천823명이나 됐다. 926명의 검속 대상자까지 포함하면 2천749명이나 된다.
대구 3․1운동은 영남 3․1운동의 효시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발화됐다.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운동의 모의가 노회 임원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주도했다.
이 시위로 체포된 76명의 주동인물 중 54명이 기독교계 인물이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북장로파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은 2월 24일 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이갑성이 내방하여 독립시위운동에 대해 진력해 줄 것을 권유 받았다.
같은 파 김태련 목사와 이야기 했다.
이만집은 장로파 부속 계성학교 교사들과 같은 파인 신명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2월 18일부터 3월 9일까지 도내 각지에서 소집되어 장로파 주최의 대구성경학원 성서강습에 참가 중인 신도 50명 중 14~15명에게 소요참가를 권유했다.
경상도의 연락책임을 맡은 이갑성은 서울 3․1운동 초기단계부터 깊숙이 개입된 사람이다.
독립선업서 서명자 33인중에 한사람으로 뽑혀 서명까지 했다.
그가 맨 처음으로 대구에 있던 이만집․이상백․백남채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의한 사람이다.
이갑성은 1919년 3월 1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생인 이용상을 시켜 이만집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만집은 대구사람으로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였다.
이만집은 같은 교회 조사인 김태련과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신정교회 장로)와 더불어 거사를 논의했다.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세를 규합했다. 교사들은 학생대표들을 만나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만집,김태련, 정재순, 정광순 등은 포항교회의 장로와 신도들에게도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포항지역에는 일찍이 대구의 남성정교회를 설립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 선교사가 1905년 5월 포항에도 포항교회를 개척해 두었다. 남성정교회와 포항교회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교회였다.
남성정교회 목사인 이만집 등은 포항교회 장로 최경성과 송문수를 영입했다.
포항에서 간 최경성은 이때 나이 36세였다.
송문수는 37세였다.
최경성은 대구 3․1운동 현장에서 검거됐고, 송문수는 포항으로 도망쳐 왔다.
최경성과 같이 검거된 포항 사람으로는 허담, 허방, 장해동 등이 있다.
장해동은 영일군 송라면 조사리 출신으로 기독교 북장로파가 경영하는 사립계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허담은 역시 조사리 출신으로 1918년 2월 18일부터 3월 9일까지 경북도매 각지에서 소집되어 위 장로파 주최의 대구성경학원 성서강습에 감가 중인 신도 50명 중 한 사람이었다.
대구 3․1운동 관련 판결문 번역본을 보면 대구 3․1운동 초기 준비단계 내지 점화단계를 놓고 볼 때 거의 기독교인 중심의 운동이었다.
운동의 모의가 노회의 임원들 중심으로 이뤄졌고, 교역자들을 비롯한 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운동을 주도했다. 체포된 76명의 주동인물 둥 53명이 기독교계 인물이었다.
최경성은 포항제일교회 영수에 임명됐고 포항제일교회 장로다.
대구서 검거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포항지역 3․1운동은 대구 ․3․1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경북에서 처음이다.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포항면의 3․1운동’ 관련 판결문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송문수, 이봉학, 이기춘, 장운환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포항교회 장로 송문수는 같은 교회 장로인 최경성과 같이 대구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돼 구속됐고, 송문수는 잡히지 않고 9일 포항으로 돌아왔다.
그와 평소 뜻을 같이 했던 이기춘, 이봉학, 장운환 외 1명이 송문수 집으로 찾아가 대구 시위상황을 물었다. 장운환은 포항교회 영수이면서 그 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이다.
이봉학은 같은 교회의 집사이다.
이기춘은 같은 교회의 교인이다.
송문수가 제의했다. 동참의사 밝힘.
거사일인 포항 장날(여천시장)인 11일로 잡았다.
11일 4명 모두 일본 관헌에 붙잡혔다. 거사가 탄로 났기 때문이다.
송문수 징역 6월, 이기춘과 이봉학 징역 5월 선고했다.
이 소문이 시내에 전파되자, 포항장날인 11일 수 백 명의 군중이 장터로 운집했다.
비록 주동자는 검거돼 없었지만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했다.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다.
하지만 12일 저녁에는 포항교회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흩어졌던 군종들이 다시 모였다.
포항교회에 모여든 신도 수백 명은 등불을 들고 시가로 나와 만세를 부른 후 포항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학교 서편에 모였다.
이들이 시내 수km를 행진하던 동안 지켜보던 시민들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다시 영흥학교에 모였을 때는 군중의 수가 천여 명이 됐다.
△일제 핍박
포항교회와 영흥학교는 포항면 3․1운동 진원지로서 포항 3․1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다.
3․1운동 뒤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사환이었던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했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포항교회는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등 시달림을 받고 피해도 입었지만, 신도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 어려움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성처받은 교인들의 영성을 위해 부흥회를 갖고 교인들의 영성훈련에 앞장섬으로써 교회와 사회의 회복에 앞장섰다.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교인들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900원을 헌금했다. 뒤이어 평양숭실전도대가 이 지방의 교인들을 격려차 방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수가 크게 증가했다.
△영일군 청하․송라면의 3․1운동
청하․송라 3․1운동은 1913년 이익호가 설립해 둔 대전교회에서 태동했다.
이익호는 청하향교의 자의를 맡아 유림들과 교분을 쌓았다.
사립광흥학교 교장을 맡아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송라면장으로 부임한후 1913년 3월 2일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교회를 세웠다. 청하 읍내에 청하교회를 설립했다. 청하 유계리에 유계교회를 설립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1918년 11월 6일 4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유지는 장남인 이준석, 3남인 이준업에게 이어졌다.
이준석과 이준업 형제는 대전교회와 옆에 있던 초가삼간 자택을 중심으로 3․1운동을 펼쳐나갔다.
이익호는 이후 청하 장터 3․1운동 가담자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청하․송라면의 3․1운동은 송라면 대전리 출신 14명과 청하면 출신 9명이 주도했다.
이익호의 아들이자 대전리 예수교 교회 집사인 이준석, 이 교회 교인 이준엽, 이 교회 영수 윤영복은 이곳에서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윤영복은 18일 같은 면 청하교회의 영수인 오용간과 그의 친족 형인 청하교회 교사 윤영만을 찾아갔다.
22일 청하면 덕성리에서 열리는 장날에 거사하기로 약정했다.
대전교회 교인들과 청하 덕성교회 교인들, 유계교회 교인들 세 규합.
이 교회들은 모두 이익호가 설립하거나 깊이 관여되어 있던 교회들이다.
22일 덕성리 청하장날
윤영만이 덕성리 시장으로 가다 경찰에 검거됨.
22일 오후 1시 30분 덕성리 시장에서 윤영복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름.
독립만세 함성은 시장을 진동시켰다.
주동자 23명이 일경에 검거됨.
23명이 체포됐지만 송라면 대전리 마을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27일 다시 대전리 두곡숲 속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드높게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런 모습과 정신은 후세에도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대전리 어린이들은 골목골목에서 어른들이 행하던 만세모습을 흉내내는 만세놀이를 계속했다.
이에 일본 경찰이 수시로 마을에 들어와 그런 행동들을 제지하며 핍박했던 관계로 80여 호이던 가구 수가 50여 호로 줄어들고 말았다고 전한다.
지역사람들은 이 마을을 ‘3․1만세동’이라고 명명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청하의 만세시위는 2회, 참가인원수는 500명, 부상자 수는 50명, 피검자 수는 4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피검자(범죄혐의가 있어 수사기관에 일시적으로 잡혀 있는 사람)
△시위 확산
영일군 3․1운동은 1919년 3월 11일 포항면 여천장터의 만세운동을 시발로 22일 청하장터의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물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4월 1일 연일․지행(현 장기)․오천․대송․달전 등 각 면에서 수백 명씩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다가 해산됐다.
그날 밤 8시에는 동해면에서 수백 명이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그 이튿날인 4월 2일에는 기계면 뒷산에 봉화가 오르더니 죽장면에서부터 일어나서 신광․청하․송라․흥해 등 각 면에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박은식의 ‘한국돌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영일군의 3․1운동 시위 횟수가 9회, 참가 연인원은 2천900명, 사망자가 40명, 부상자는 380명, 피검자는 320명으로 나타났다.
△포항․영일지역 3․1운동의 특성
한국 기독교는 복음 수용 초기부터 일제의 침탈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위상을 구축하여 갔다.
따라서 3․1운동에 기독교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로 인한 피해도 막심했으나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민족의 종교’로 자리를 매길 수 있었다.
영일․포항지역의 3․1운동도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됐다.
포항면의 경우는 주동자 100%가 포항교회의 교인이거나 이 교회 부설 영흥학교의 교직원이었다.
청하․송라의 경우도 덕성교회와 대전교회 교인들이 주동자로 나섰다.
영남지방의 동직규합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이갑성을 통해서 진행됐다.
이갑성은 자신이 기독교 교인이었으므로 영남지방에서 그가 접촉한 인물은 대다수 목사나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였다.
교회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선 이유는 당시 나라 안에서 독립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뭉칠만한 조직체로 교회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상 실망과 불안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며 마음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곳이라는 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민중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의지하게 되고 또한 교회는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단체가 아니면서도 고난에 처한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터전을 제공하게 됐다.
당시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직접 정치운동에 함께 하지는 않았다.
△3․1운동
3․1운동은 우연히 각자 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물결과 때를 같이 하여 이미 대구 3․1운동이전부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기획되고 준비되었던 것이다.
대구 3․1운동을 기획한 이만집 목사, 그와 연결된 포항교회의 최경성, 송문수 장로, 송라면 조사리 교회의 허담 목사, 청하, 유계, 대전교회를 개척한 이익호, 이들을 통할하여 담임하던 박문찬 목사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포항 여천장터와 청하 장터의 거사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가 있다.
포항의 3․1운동은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포항 3․1운동 현창사업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직업과 신분의 구별 없이 줄지어 일어났다.
포항에서는 옛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던 여천장터의 만세운동과 청하․송라면 사람들이 주동이 된 청하장터의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동해․연일․대송․장기․구룡포․흥해․기계 등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이루어졌다.
△송라면 중산리 ‘기미 3․1독립의거기념비’
1970년에 들어와서 박일천 등 뜻있는 분들이 지역 국회의원과 사단법인 3․1동지회 경북지회를 설득해 ‘기미 3․1 독립의거 기념비’를 건립키로 했다. 서기 1970년 3월 22일 세움
경북에서 가장 빨리 3․1만세운동을 한 포항지역에 기념물 하나 없음에 애석히 여기고,
대전리 주민의 드높은 애국심에 영일군 향지는 이 마을을 3․1만세촌이라고 적었다.
마을 전체가 80여 호인 한마을에서 14인의 3․1의사가 난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3․1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 그때 애국심이 불타던 송라면 대전리 14인과 청하면 출신 9명의 애국청년들이 선봉이 되어 3월 22일 청하면 장터에서 만세의거가 일어났다.
포항시는 3․1만세운동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알리고자 1986년 두곡 숲에 3․1의거 기념비를 세웠고, 2001년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리 3․1의거 기념관’를 건립했다.
2002년부터는 매년 포항시 3․1절 기념행사를 대전리 두곡 숲에서 거행해오고 있다.
포항 3․1운동의 발원지인 포항제일교회에서도 매년 3․1이 속한 주일날에 ‘3․1절 기념예배’를 드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