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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신석기 시대
경남 창녕昌寧의 신석기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은 현재까지 창녕 비봉리 패총(사적 제486호)이 유일하다. 비봉리 유적은 낙동강 하구부에서 상류 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내륙에 자리 잡고 있어 연안에서의 생활 모습과 강을 접한 내륙에서의 생활 모습이 함께 확인된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신석기 출토 유물로는 기원전 6000년께로 추정되는 통나무배(木)와 망태기를 비롯해 다양한 토기‧석기, 골각기 등이 있다. 사냥을 통해 획득한 동물 뼈인 사슴 뼈, 멧돼지 뼈, 물소 뼈 등이 확인됐고, 사육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개 뼈도 나왔다. 또 재첩·굴·꼬막 등 해수와 담수를 이용한 생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유물과 식물 유체(도토리·가래·솔방울·조·각종 씨앗류 등)도 다양하게 확인됐다.
이곳에 정착해 살던 창녕의 신석기인들은 주변에서 채집한 도토리, 가래, 솔방울, 조개 등을 먹고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개를 사육하는 등의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의 청동기 시대
창녕군은 서남쪽을 돌아 흐르는 낙동강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농업이 정착돼 다른 지방에 앞서 부족 국가가 형성됐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창녕에서는 장마면의 창녕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호)를 비롯해 영산면 죽사리‧신제리, 부곡면 청암리‧사창리, 도천면 도천리 등 각지에서 지석묘가 확인된다. 이외에도 매장 유구의 내부 구조 및 매장 방식을 보여 주는 부곡면 사창리 석관묘군 등이 있다. 또 송현동 선사 유적, 학포리 신포마을 등과 같은 유물 산포지를 통해 청동기 시대 창녕에는 본격적인 인간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녕 사창리 유적과 유물
창녕 지역에서 청동기 매장 유구의 내부 구조 및 유물 매장 방식이 조사된 최초의 예는 창녕 사창리 유적이다. 사창리 유적은 부곡 사창리 소하천이 범람해 형성된 충적지면에 조성돼 있으며 총 24기의 청동기 매장 유구가 확인됐다. 매장 유구는 다양한 구조 형태를 보이고 유물의 부장 양상도 독특하다.
유구의 매장 주체부에서 확인된 ‘두광족협頭廣足狹’ 형의 구조는 피장자의 형질학적 신체 구조를 이해한 상태에서 계획적인 설계를 가지고 무덤을 구축했고 ‘관棺’이라는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창리 유적의 출토 유물은 돌칼과 돌화살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양은 유구의 수에 비해 매우 빈약한 편이지만 다양한 매납埋納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가공이 덜된 제품의 석기를 부장하거나 돌칼을 일부분을 떼어낸 채 부장, 돌칼의 검날을 인위적으로 이등분하고 나란히 부장해 구축 공정에 함께 매납하는 등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매납 방식은 무덤을 구축할 때부터 피장자뿐만 아니라 무덤을 조성한다는 행위에 대한 의례적 개념을 보여 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가야
가야는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을 포함해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에 위치했다. 그 명칭은 가야加耶, 가야伽耶,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야는 변한의 12소국, 소국 연맹체, 초기 고대국가 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기원전 1세기 낙동강 유역에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및 초기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가야의 문화 기반이 성립됐다. 서기 2세기께 이 지역에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변한 12국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기록하고, 각 지역에 성립한 가야 소국의 모태로 보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 고령가야古寧伽耶(함창), 대가야大伽耶(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소가야小伽耶(고성), 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 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의 명칭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 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이를 변한 소국 연맹체 또는 전기 가야연맹체라고 부른다.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5세기 초에 몰락하고,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5세기 후반의 전성기에는 22개의 소국으로 형성됐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괄하여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분열했다. 532년에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562년에는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가야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됐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창녕 교동校洞과 송현동松峴洞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구릉 일대에 조성된 고대 비화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까지 이어진다.
고분군에는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 120여 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 180여 기 등 모두 300여 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분포에 따라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눠지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둘러싸고 중소형 무덤이 밀집 분포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다. 하나의 봉분 안에 하나의 덧널이 있는 형태이며, 별도의 딸린덧널(副槨)이나 순장덧널(殉葬槨)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가야 고유의 무덤 구조인 구덩식돌덧널무덤에 입구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로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무덤 형태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만들어진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공간을 구획하여 쌓아 올렸는데, 이는 철저한 계획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이자 낙동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여러 가야는 물론이고 신라‧백제‧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신라·백제에서 전해지거나 영향을 받은 장식말갖춤(裝飾馬具), 금동관金銅冠, 청동세발손잡이솥(靑銅製鐎斗),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 은제허리띠와 대가야의 귀걸이, 일본산 녹나무로 만든 관, 사슴뿔로 만든 긴 칼(長劍), 조개장식 말띠꾸미개(貝製雲珠)등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 외 출토된 토기는 비화가야만의 특색 있는 무늬와 형태를 가진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를 비롯해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긴목항아리(長頸壺)가 대표적이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대부분의 무덤들이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녕이 신라로 편입된 이후인 7세기까지 고분군 내에 신라식 돌방무덤이 소규모 군집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가야에서 신라로의 무덤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의 성립과 발전, 가야에서 신라로의 전환 과정, 고대 한반도 안팎의 정치 세력 간 교류와 교섭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교동 Ⅰ지구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에서 이어지는 구릉의 경사면과 서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 계곡부를 경계로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눠진다. 그동안 발굴 조사된 무덤 명칭을 고려해 각 지구의 이름은 ‘교동 지구’와 ‘송현동 지구’로 구분하는데 각각 교동 Ⅰ‧Ⅱ지구, 송현동 Ⅰ‧Ⅱ지구라고 부른다.
교동 Ⅰ지구는 고분군의 서쪽에 뻗어 있는 구릉 꼭대기의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그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중소형 무덤과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가지 능선을 따라 흩어져 있는 소형 무덤을 포함한다. 이곳에서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은 22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은 60여기 이상 확인된다.
현재 교동 지구에는 7호분을 중심으로 14기의 봉분이 정비·복원돼 있다. 7호분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내에서 가장 큰 무덤이며, 그보다 작은 대·중·소형 무덤이 주위를 둘러싼 형태로 밀집돼 있다. 7호분을 중심으로 5~11호분이 둘러싸고 있고, 11호분의 남동쪽 능선 아래로는 12~14호분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7호분에서 다시 북쪽으로 뻗은 능선에도 1~4호분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다.
교동 지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7호분은 무덤 규모와 흙을 쌓아 올린 방식 면에서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2호분은 신라의 전형적인 무덤 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으로 비화가야와 신라의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무덤으로 평가된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교동 Ⅰ지구 7호분
교동 Ⅰ지구 7호분은 교동 Ⅰ지구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무덤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대형 무덤으로 1918년과 2011년에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7호분 주위로 중·소형 무덤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비화가야 지배층의 계층 분화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보인다. 7호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원형 봉분으로 그 중심에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을 두었다. 봉분은 직경이 31m이며, 돌덧널은 길이 9m, 너비 1~1.6m, 높이 1.8m로 가야 무덤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무덤의 공간을 나누고 흙을 쌓는 과정에 당시 최고의 토목 기술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고, 무덤을 쌓는 다양한 의례의 흔적도 확인됐다. 무덤의 규모를 비롯해 금동관, 청동뿔잔(靑銅角杯), 말안장鞍橋, 장신구 등 다양하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 볼 때 무덤 주인공은 당시 창녕의 최고 지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교동 Ⅰ지구 14호분
교동 Ⅰ지구 14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무덤 분포도에는 표시돼 있지만 봉분이 없어 그동안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가 2013년 발굴 조사에서 실체가 알려진 무덤이다.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의 크기는 길이 5.5m, 너비 0.9m이며 벽은 화강암을 쌓아 만들었다. 돌덧널은 4개의 공간으로 구분해 유물과 시신을 안치했는데, 시신의 발치 쪽에서 여러 명의 사람 뼈가 출토돼 순장이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돌덧널무덤이지만 무덤의 구덩이(墓壙)를 ‘凸’자 형태로 파고 한쪽의 짧은 벽을 마지막에 만들어 입구로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창녕 돌덧널무덤의 특징으로 13호분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확인된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교동 Ⅱ지구 67호분
교동 Ⅱ지구 67호분은 교동 Ⅱ지구 서쪽 무덤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무덤이다. 그동안 봉분이 없어 무덤의 실체를 모르고 있다가 2009년 주변을 정비하는 발굴 조사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났다.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이며, 돌방은 벽의 일부가 주택에 의해 훼손됐지만 거의 도굴되지 않아 만들어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다. 돌방은 길이 6.5m, 너비 1.4m, 높이 1.7m이며 뚜껑돌은 9매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돌방은 5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주검과 유물, 순장자를 안치했으며 순장자는 주검의 발치 쪽에서 확인됐다. 은제허리띠銀製銙帶, 장식말갖춤 등의 장신구와 토기류, 무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으며, 유물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출토 위치가 달라 비화가야 장례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야 소녀 송현이를 만나다
2007년 12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15~17호분의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조사 과정에서 송현동 15호분의 주인공과 함께 네 명의 순장자가 확인됐고, 가장 안쪽에 있던 인골은 도굴의 피해가 적어 잘 보존돼 있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중심의 여러 연구기관이 1년간의 연구 기간 끝에 완벽히 복원해 낸 이 인골의 주인공이 1500년 전 주인을 따라 순장된 비화가야 소녀 ‘송현이’이다.
송현이는 16세 가야 소녀였다. 송현이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인골을 분석했다. 생전에 빈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흔적과 무릎 연골의 손상이 발견돼 송현이는 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송현이는 순장 당시, 왼쪽 귀에 금동 귀걸이를 달고 묻혔는데 지배층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죽었다는 것은 당시 그 죽음을 예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송현이는 고대 가야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로서 1500여 년이 지난 지금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창녕의 삼국시대
창녕의 삼국시대 초기 모습은 뚜렷하지 않으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불사국’의 기록은 창녕에서 삼한시대부터 유력한 정치체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시대 초기 창녕을 밝힐 수 있는 이방면 초곡리 1002번지 유적(소장미마을 고분군)에서 목곽묘가 조사됐다. 이후 삼국시대 유적이 본격적으로 확인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창녕읍의 여초리 가마터, 계성면의 계성리 유적 등을 비롯해 낙동강을 따라 다양한 유적이 확인된다. 여초리 가마터는 영남 지역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가마터로 가야 토기의 생산 기술과 유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계성리 유적의 경우 마을 유적으로 당시의 집터와 생활 모습이 잘 남겨져 있었다.
5세기가 되면 창녕 전역에서 유적이 확인되는데, 그중에서도 창녕읍‧계성면‧영산면의 수장급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최고 수장자들의 무덤군으로 보이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경우 5세기부터의 석곽묘와 석실묘 등 수백 기의 무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 고분군들에서 확인되는 무덤, 토기 형태 등은 창녕의 독자적인 모습을 갖춰 당시 창녕은 가야의 일원으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6세기 이후 가야 지역에 대한 신라의 군사적 행동이 일어났고, 창녕은 신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까닭에 급속하게 신라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결국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가 설치되면서 창녕은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창녕에서의 신라 토기 유행, 대형고분군의 소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사벌의 왜계 유물
‘철’은 가야와 주변 나라가 교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고,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띤 교류로 바뀌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은 산맥이 장벽을 치고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 낙동강을 향해 열려 있는 지형지세를 갖춘 창녕은 다른 지역과 소통하는 데 낙동강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도 낙동강을 매개로 남강, 황강, 회천을 통해 가야 세력과 밀접하게 교통하고 있었음은 물론 낙동강 하구까지 비사벌의 문화적 특징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바다 건너 왜국과의 교류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송현동 7호분에서 배 모양의 녹나무 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등에서 이모가이(芋貝‧아열대 소라고둥)를 사용한 말띠꾸미개, 계성리 수혈주거지에서 일본 고훈시대(고분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하지키계 토기 등이 출토됐다. 녹나무관은 길이 3.3m, 폭 0.8~0.9m로 대형의 것이다. 녹나무는 아열대성 수목으로 이렇게까지 큰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다. 따라서 배와 불상을 녹나무로 많이 만드는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철에 대한 답례품으로 왜국의 특산품인 녹나무가 제공됐거나 지배층 간의 교류를 보여 주는 예로 추정된다.
이모가이는 열대 해역에서 서식하는 조개로, 일본에서는 야요이弥生 시대 이후 오키나와산 조개와 해산물을 운반하기 위해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규슈를 연결하는 교역로가 있었다. 창녕에서 출토된 것들은 이 교역로로 들어온 오키나와산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하지키가 출토된 지역은 부산‧김해 지역의 동남 해안 지역에 집중되는데 창녕을 포함해 경산 임당 유적, 경주 사라리 유적과 월성로고분군 등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계성리 수혈주거지에서 출토된 하지키계 토기의 경우 창녕에서 유일한 것으로 일본 긴키 지역에서 제작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운반됐을 가능성, 창녕 지역 또는 김해‧부산 지역에서 제작된 모방품일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도 가야 토기·덩이쇠(鐵鋌‧화폐이자 강철을 만들 때 쓰던 재료로, 일정한 크기로 주조한 판형 철괴) 등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며, 스에키(백제와 가야의 영향을 받은 회청색 토기)라는 일본식 도질토기와 이전에 없던 다양한 철제품 등이 유행했다. 이러한 유물들로 보아 창녕은 주변 나라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왜국과도 밀접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대왕과 창녕
신라 제24대 진흥대왕(재위 540~576)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신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황룡사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국가 발전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역사서 <국사國史>의 편찬이나 청소년 수련 조직이면서 일종의 인재 등용 제도인 화랑도 창설 등 내정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왕은 이와 더불어 대내적인 영토 확장에도 힘썼다. 백제 성왕聖王(재위 523~553)과 함께 551년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한 후 553년에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까지 확보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였다. 이어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벌해 가야 지역을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았다. 진흥왕 순수비로 보건대, 신라 영토는 북방으로는 함경남도 함흥 지방까지 확장됐다.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함에 있어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창녕은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진흥왕은 창녕을 군사적 요충지로서 인식하고 하주를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561년에 세워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문 제3단에 임금을 수행한 군신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그 인원이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보다 규모가 큰 42명에 이르며, 사방군주四方軍主 4명, 상주上州‧하주下州‧하서아군河西阿郡 장군 등 고위급 지방관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특히 비문 말미에 있는 ‘村主註聰智述干麻叱智述干’ 부분에서 다른 지역 촌주들과 달리 창녕 지역의 촌주가 2등급에 이르는 높은 관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아 당시 창녕은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속의 창녕
신라는 663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정복하고, 676년 당나라에 승리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부터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통일신라로 부른다. 698년 발해 건국 후에는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뒤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신라의 고유한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 백제‧고구려 및 당나라의 선진 문화 수용과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다.
또 신라의 국교인 불교는 통일 후 더욱 크게 융성했다.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전환되고 민중불교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며, 의상과 원효 등과 같은 고승의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혜공왕(재위 765~780) 이후 반란 등이 잇따르며 왕권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진골 귀족들은 왕실에 대해 서로 연합하며 각기 독자적인 사병 세력을 거느렸고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들이 크게 대두됐다. 신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갈수록 축소되고 이후 후백제, 후고구려 등이 세워지면서 신라의 존립은 흔들렸다. 결국 935년 11월 경순왕(재위 927~935)이 고려에 자진 항복하면서 약 1000년간 유지됐던 신라는 막을 내렸다.
통일신라 속의 창녕은 757년(경덕왕 16) 화왕군으로 개칭되며 주변의 현풍, 청도군 풍각, 계성현까지 관할했다. 이 시기 주요 유적으로는 신라 8대 사찰로 알려진 관룡사를 비롯해 보림사지, 옥천사지, 용흥사지, 대흥사지, 보광사지,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 옥천리 석조여래좌상, 구계리 석조여래입상, 고암면 감리 마애여래입상, 직교리 당간지주, 퇴천삼층석탑,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34호, 보물 제520호) 등 불교 관련 유적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673년(문무왕 13) 원효元曉(617~686)가 관룡사에서 화엄경을 설법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는 것으로 보아 창녕에서 불교가 매우 융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창녕의 산성
창녕 지역의 외곽을 둘러싸는 낙동강 변의 구릉과 내륙의 산지에는 산성이 분포한다. 강변을 따라 입지한 성산산성城山山城, 고곡산성鼓谷山城, 구진산성九陳山城과 내륙의 산지에 입지한 화왕산성火旺山城, 목마산성牧馬山城, 신당산성新堂山城, 영축산성靈鷲山城, 동리산성 등이 대표적인 창녕의 산성이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크게 돌로 쌓은 성벽과 흙과 돌을 혼합해 쌓은 성벽으로 구분된다. 내륙의 산지에 위치한 목마산성과 신당산성이 돌로 쌓은 대표적인 사례이며, 화왕산성, 영축산성, 동리산성이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해 쌓은 성이다. 강변에 입지한 산성과 산성 사이, 내륙의 산지에 입지한 산성과 산성 사이를 연결하면 낙동강과 내륙의 산맥을 따라 긴 선으로 연결됨이 확인돼 창녕 지역의 방어 체계와 관련해 주목된다. 특히 화왕산 정상에 위치한 화왕산성과 화왕산성 아래에 만들어진 목마산성은 성의 둘레가 1km를 넘는 대형 범위의 창녕지역 중심 산성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식 조사가 부족해 명확히는 알 수 없는 형편이나, 화왕산성의 성문터와 연못 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5세기 중엽 무렵의 유물들이 확인돼 5세기 무렵에는 산성이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목마산성, 신당산성, 영축산성, 성산산성 등에서도 5~7세기 무렵의 유물들이 수습됐다. 성 내부의 시설 역시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화왕산성, 목마산성의 내부를 일부 조사한 결과, 물을 저장하는 시설과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확인됐다. 이를 통해 볼 때 창녕 지역의 산성은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삼국시대부터 축조되고 사용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창녕 지역의 산성은 낙동강을 따라 길게 배치되고 있는데, 내륙 산지의 산성 역시 낙동강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낙동강을 주요 감시 대상으로 낙동강 방면에서 내륙으로 진출해 오는 적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에는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왕산성 연지 유적
창녕 화왕산성에 대한 기록 중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비롯해 이후 지리지, 읍지 등에서 화왕산성 및 산성 내 연지蓮池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산성 내에는 3곳의 연지가 존재하는데 그 중 가운데 연지는 화왕산 정상의 분지상 계곡부에 위치하며, 평면 형태는 사각형에 가깝다. 둘레돌은 거의 수직상으로 쌓았으나, 윗부분의 약 50㎝ 정도는 들여쌓기하여 계단 모양을 이룬다. 연지 내에는 입수 시설과 배수 시설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연지 내로 흘러 들어가는 물은 연지의 서쪽 부분인 계곡부의 상류와 북쪽과 남쪽 사면에서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한다.
연지에서 출토된 유물들로는 편병扁甁,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 반구병半球甁, 손잡이 달린 항아리(把手附甕) 등의 토기류와 철제의 솥, 약연藥碾, 가위, 자물쇠와 열쇠, 청동제의 접시, 합盒 등 생활 금속기가 확인됐다. 철제 대도, 도자, 찰갑札甲(작은 미늘을 꿰매어 몸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기승용 갑옷) 등의 무기류, 철제 재갈, 청동 방울, 호형 등자壺形鐙子(말을 탈 때 항아리 모양의 발걸이) 등의 마구류, 목제 인형, 목간 등의 목기류 등이 출토됐다. 연지 내부 퇴적토 바닥에서 확인되는 유물 대부분은 9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것으로 보아 연지의 축조 시기는 9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연지의 1차적인 기능은 화왕산성 내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연지의 바닥 부분에서 경주 왕경 지역에서 출토될 법한 수준의 초두鐎斗(자루솥), 철제 가위, 청동 유기, 청동합, 약연 등이 다량 출토된 점으로 보아, 화왕산 연지의 성격이 성내 생활에 필요한 용수 확보의 기능과 더불어 의례적인 기능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의 불교 유적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전진의 스님 순도가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불교는 토착 신앙과 융화, 발전하며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녕 지역에서 언제부터 불교가 번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건립된 561년 이후 통일신라의 불교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룡사(창건 신라 진평왕 5년‧583년), 옥천사지, 보림사지(창건 신라 경명왕 7년‧923년), 토천리사지, 인양사지(창건 신라 헌덕왕 5년‧810년), 술정리사지, 직교리사지, 법화암, 대흥사지, 죽림사지, 보광사지, 용흥사지 등 많은 사찰의 분포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관룡사의 경우 현재에도 대웅전(보물 제212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 약사전(보물 제146호), 약사전 삼층석탑,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사적기 등 다양한 유물이 남아 있어 당시 대규모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양사지는 그 존재가 창녕 인양사 조성비(보물 제227호)를 통해 알려졌는데 그 후 주변 발굴 조사 과정에서 나온 인양사와초仁陽寺瓦草 명문기와를 통해 확실한 뒷받침이 이뤄졌다. 또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연화당초문전蓮花唐草文塼도 나와 인양사의 규모 및 위상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지 및 사찰 외에도 창녕읍을 중심으로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직교리 당간지주 등이 밀집된 것으로 보아 이곳을 중심으로 대규모 사찰이 밀집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통일신라 석탑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창녕의 고려시대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940년(태조 23)에 ‘화왕군火王郡’은 ‘창녕군昌寧郡’으로 개칭된다. 창녕이란 지명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행정 조직만 개편됐을 뿐 실질적으로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파견되지 않아 과거부터 지방을 다스리던 관료나 토호土豪가 행정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인 중앙의 통치 권한이 미치게 된 것은 1018년(현종 9) 전국의 지방 편성이 이루어지면서부터다. 이때 창녕군은 밀성군(현 밀양)에 소속된다. 이후 1172년(명종 2년)에는 감무監務가 파견됐다. 또 창녕군과 같이 밀성군에 속했던 계성현은 1366년(공민왕 15)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밀성군으로 이속됐다. 창녕의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창녕읍 말흘리 유적, 말흘리 고려시대 건물지 유적, 장마면 초곡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창녕의 조선시대
조선시대 창녕의 모습은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에서 주로 보인다. 조선 초 군현제 개편 당시 창녕에도 영향이 있었는데 1394년(태조 3) 밀성군 영현領縣이었던 계성현이 영산현에 합쳐졌고, 1414년(태종 14)에는 창녕군이 창녕현으로 강등되면서 감무를 현감으로 고치는 규례에 따라 창녕현과 영산현에 현감이 파견됐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구수戶口數는 창녕현 825호(4352명), 영산현 257호(1134명), 계성현 214호(972명)이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1552~1617)가 이끄는 의병들이 남강과 낙동강의 왜군 수송로를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해 8월에는 의병장 성천희成天禧(1553~?)가 창녕을 탈환했다. 정유재란 때에도 이 지방의 의병들이 산성을 수축하고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631년(인조 9) 성지도成至道의 역모 사건으로 창녕현이 폐현돼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1637년에 다시 복구됐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호구수는 창녕현 6192호(2만 8163명), 영산현 4264호(1만 9848명)이었다. 1895년(고종 32) 5월 칙령 제98호에 의해 팔도제가 폐지되고 23부府로 바뀌면서, 현의 호칭을 군郡으로 고치게 된다. 이때 창녕현과 영산현이 각각 창녕군과 영산군으로 바뀌고 군수를 두게 됐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해 23부제가 실시돼 창녕군과 영산군은 대구부에서 경상남도로 속하게 됐다.
사직단社稷壇
우리나라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 통치이념을 강조한 성종이 사직을 제도화한 이후 각종 제의와 기우제祈雨祭·기곡제祈穀祭가 사직단에서 거행됐다. 특히, 고려 의종 때 자세히 정비됐는데 그 내용은 ‘고금양정예문古今洋定禮文’에 수록됐고, <고려사>에도 내용이 잘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조선시대의 사직제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우리나라 사직제의 원형이 고려 중기에 마련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직제는 고려 때 마련된 사직제가 그대로 계승돼 시행됐다고 알려진다.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정기적인 사직제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장마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 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 전란의 극복을 위한 기원 등이 행해짐으로써 국가 제의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태조 2년(1394) 사직단의 축조를 시작해 개경 환도 등으로 중단됐다가 태종 7년(1407)에 완성됐고,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소실과 증축이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사직단의 직위도 태사단太社壇, 태직단太稷壇으로 높여졌다가 일제강점기에 사직제가 폐지되고, 1911년 2월에 사직단의 구조물 모두가 총독부로 인계됐으며 이후 1922년에 사직공원이 조성됐다.
창녕 사직단은 발굴 조사를 통해 제단, 담장의 기초 시설과 축대, 계단, 부속 건물지가 확인됐다. 제단은 흙을 성토하지 않고 구릉의 정상부를 일부 절토하고 부분적으로 흙을 덧붙여 방단方壇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단을 설치하기 위해 대지臺地를 인위적으로 조성했고, 남쪽 담장의 동남 모서리는 초축 시 90도의 직각에서 보축하면서 말각末角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입구는 계단의 형태를 띠며 동·서·남쪽에서 확인되는데 특이한 점은 출입구의 방향이 대칭되지 않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담장 바깥에 건물지가 위치하나 창녕 사직단의 경우는 제단에 인접해 담장 안쪽에 부속 건물을 조성하는 등 문헌에서 규정된 사직단의 예제禮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변용이 있는 창녕의 지역 색을 가지고 있었다.
제기도설祭器圖說
제사는 하늘, 땅, 그리고 조상을 사람과 이어주는 의례였다. 제사를 올리기 위한 제물을 담는 제기는 일상 용기와는 다른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특히 유교를 사회규범으로 삼은 조선 왕조에게 그 의미는 컸으며, 국가의 의례 정비와 함께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는 <세종실록 오례 길례서례 제기도설五禮 吉禮序禮 祭器圖說>에 35종으로 정리됐다.
제기도설에는 제기의 모양이 그려져 있고, 이름‧용도‧재질‧규격 등이 제시돼 있다. 초기에는 금속을 사용했으나 재료의 부족으로 도자로 대신하게 된다. 현재 도자 제기로는 보簠, 궤簋, 작爵, 준樽, 이匜 등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에 상감분청사기 제기는 제기도설의 금속 제기 모양처럼 세밀하게 무늬가 장식됐다. 그러나 이후 다양한 분청사기의 단계로 가면서 생략과 변형이 시도됐다. 이어 관요가 설치된 후에는 백자 제기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창녕의 교육기관
창녕에서는 전 시기에 걸쳐 그 시대에 맞는 교육을 실시했을 것으로 보이나 교육의 예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고려시대 사상의 중심은 불교이나 교육은 유교식이었다. 학교 제도는 경학과 국자감에서의 관학과 사학 12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학이 융성했다. 창녕의 경우 교육기관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성석린成石璘(1338~1423), 장일張鎰(1207~1276) 등 학문적으로 뛰어나 등용된 인물이 배출된 만큼 탄탄한 교육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조선시대에는 창건 초부터 배불숭유를 지도 이념으로 삼아 널리 성리학에 입각한 윤리를 교육철학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학교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나뉘며 관학의 경우 성균관‧종학‧사학‧향교‧잡과 교육의 5가지로 나눌 수 있고, 사학의 경우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창녕 지역에서 관학의 경우 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와 관련된 창녕향교, 영산향교, 계성향교 등이 있었다. 그외 잡과는 지금의 실업 교육과 같은 것으로, 현감이 있던 창녕현에서 비공식적으로 필요에 따라 잡학 교육이 권장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학의 경우 1620년(광해 12) 고암면 우천리에 관산서원이 창건 된 후 광산서당, 구니서당, 물계서원 등 20여 개소의 별사別祠나 서원이 설립됐다. 이외에도 부용정‧만옥정‧백암정‧관산재‧동산재 등 자손들의 교육과 조상의 제를 지내기 위한 목적을 가진 재齋‧정亭 등도 남아 있다.
조선 보부상과 창녕 상무사
상무사商務社란 1899년 상업과 국제무역, 기타 상행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전국 보부상단 업무도 관장했다. 보상은 주로 정밀하고 고가인 잡화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다니는 ‘봇짐장수’이며, 부상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등짐장수’다. 원래 보상과 부상은 각각 별개의 행상 조직으로 성장해왔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전국적이고 단일적인 조직으로 합쳐지게 된다.
창녕 상무사는 1884년부터 결성돼 창녕과 밀양 지역을 관할하던 보상단(右社)과 1899년 결성돼 활동하던 부상단(左社)을 함께 일컫는 명칭이다. 원래 창녕과 밀양이었던 관할 지역은 1885년 창녕‧영산‧현풍으로 변경됐다가 1900년 현풍을 제외한 창녕‧영산이 됐다. 창녕 지역에는 1888년 영도소營都所가 설치돼 운영됐으며 다른 지역의 상무사와 달리 우사 조직을 중심으로 어과전‧어곽전‧면전‧포전 등을 탄력적으로 운영해 보상단과 부상단의 영역 구분을 완화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상무사는 해체됐으나 상무소 체제로 바꿔 창녕 지역에 집중 활동했다. 이후 1920년 조선총독부 청원 후 다시 상무사 체제로 바뀌고 창녕 지역 상권을 장악했지만 그전의 상업적 성격이 축소되고 친목계적 성격이 확대됐다.
창녕 상무사 우사의 자료는 충청남도 지역의 보상단 자료에서 일부만 나타났던 보상단의 조직운영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함으로써 보상단의 운영 체계를 부상단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