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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파다 순례는 햇볕이 강하고 더운 한낮을 피해 밤에 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아침에 하산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상의 기온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두꺼운 패딩이 필수다. 반팔의 청년들에게 면 가디건 하나씩을 사 입히고, 오후 불식인 난다 스님을 옆에 두고 우리끼리 냠냠. 완전히 밤소풍 가는 기분이다.
드디어 스리파다 앞에 왔다는 설레임에 찟고 까불다 식당 주인에게 간식용 삶은 계란을 부탁했더니 난다 스님이 막 웃으신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성스러운 스리파다를 앞두고는 경건한 몸과 마음을 만드느라 육고기, 생선, 계란같은 비린 것은 절대 먹지않고 차 정도만 마신다고... 스님께 몇 개 드실거냐고 묻지 않았다면 불경스럽게도 스리파다 안에서 계란을 까먹을뻔 했다.
스리파다 입구의 사원에 들러, 이 밤 이곳에 있을 수 있게 된 인연에 감사함을 표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새벽 두시쯤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방이 없어 좁은 차 안에서 복닥거리기도 뭣해 밤 열시쯤 스리파다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결정적 실수, 얼어죽을뻔 했다) 어둠 속 왕관을 쓴듯한 스리파다의 삼각형이 환하다. 한발 한발 떼다 보면, 시간이 날 저 불빛 안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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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공기가 찬데 스리랑카 젊은이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씼는다. 처음 스리파다에 온 사람들은 무명실을 걸으며 스리파다에 오르는 것이란 난다 스님 말씀에 무명실 두 꾸러미를 샀다. 빳빳한 무명실이 나무와 풀과 사람 사이를 지나 거미줄처럼 얽힌다.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이 무명실에 걸리고, 우리들의 인연처럼 실과 실이 얽키고 설키어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끝없는 계단을 아이를 안은 부부, 사리를 입은 맨발의 여인, 소년 소녀 아이들, 젊은이, 노인들이 오르고 있다. 걸음조차 불안정한 노인이 자식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걸음을 뗀다. 스리파다를 오를 때 부르는 스님의 노래를 노인이 받아 부른다. 무명실처럼 노래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 맨발로 스리파다를 오르면 내생에 남자로 태어난다고 하여 맨발로 걷는 여인들이 많다. 발바닥도 아플뿐더러, 난 남자고 여자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 운동화를 신은채 묵묵히 정상의 불빛을 향해 걸음을 뗀다.
중간 중간에 차를 파는 가게가 있고, 얼굴만 스치면 '아유보완'이라고 인사하며 스친다. 빠르게 걸으면 세시간이면 당도한 거리를 네시간에 걸쳐 느릿 느릿 걷는다. 해발 2천미터에 대한 두려움이 느린 발걸음에 흡수되어 버린다. 스리파다를 밝힌 환한 등불이 바로 머리 위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설탕을 듬뿍 넣은 짜이를 한잔 마시고 심호흡을 한다. 저 계단 모퉁이만 돌면 성스러운 발자국이 있는, 붓다를 만날 수 있는 스리파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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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과 대륙을 넘나들며 30년 동안 약 12만 킬로미터를 걸은 위해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도 성지 순례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도 감탄해 마지 않았던 스리파다가 바로 눈 앞에 있다. 구름 사이를 통과한다. 바로 눈 앞의 정상이 돌면 까마득하고 다시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드디어 정상, 피로감과 안도감을 바람이 말갛게 씻어준다.
신발을 벗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거룩한 발자국 앞에 섰다. 아직 돌들이 태양열을 머금고 있어 따스하다. 금색으로 칠해진 보호각 안의 발자국 위에 연꽃이 가득하다. 손을 모으고 황금색의 돌에 이마를 닿게 하여 삼배를 올린다. 발자국을 지나면 스님이 독경을 하며 이마에 지혜의 점을 찍어준다. 참배가 끝나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서 스리파다에 참배한 횟수만큼 종을 친다. 처음 스리파다에 온 나는 한번, 난다 스님은 다섯번, 청년들은 세번씩 종을 쳤다.
부처님의 발자국(혹은 아담의 봉우리)이 있는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들여다보면 커다란 보석이 보이며 이 보석에 진짜 발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확인 불가능하다. 얼떨결에 줄서 손 모아 합장하고 삼배하고 떠밀려 나왔으니까.
거룩한 발자국, 즉 우리의 선조인 아담 _그에게 평화를_ 의 발자국은 펑퍼짐한 곳에 두드러져 있는 거무스름한 암석에 찍혀 있다. 거룩한 발은 암석 속에 푹 빠져 들어가 그 자국이 깊이 패어 있다. 발자국의 길이는 11쉬부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엄지 발가락을 부분을 떼어갔다. - 위대한 여행자 '이븐 바투타'의 스리파다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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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는 시멘트 맨바닥에 바람이 숭숭, 발 디딜 틈 없이 화장실에 가면 자리가 없어지는 아수라장이다. 스리파다의 바람, 추위에 대한 대비를 했는데도 이까지 부딪히는 한기는 당할 재간이 없다. 아침 동 틀때까지는 잠을 자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새벽 두시, 구석에 파고들어 몸을 누인다. 옆의 국제 거지 아저씨가 신경질을 내며 거적대기 한개를 휙하고 던져준다. 한시간쯤 오돌오돌 떨며 누워있었다.
냉기가 흐르는 바닥에 모로 누워 뒤척이다 밖으로 나왔다. 자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니 세상에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바람 사이로 하얀 구름이 흐르고, 별이 쏟아진다. 멀리 산골짜기 사람의 집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몸을 날려버릴것 같은 바람, 순례자들이 잠든 스리파다 정상에 다시 올라간다.
부처의 발자국이든, 아담의 발자국이든, 시바의 발자국이든 이미 이곳에 오른 순간 내겐 다 똑같은 의미이다. 발자국 보호각 때문에 발자국을 친견하든, 볼 수 없든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람 소리만 가득한 이 밤, 이 곳에 있다는 사실만이 가슴 뻐근하게 자각되었다. 경내를 배회하니 건물안에서 시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마이크로 불러주는 청년들이 들어오란다. 거절하고 온 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상쾌했던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처마밑으로 피신했더니, 그곳에도 사람이 오글오글하다. 이 많은 사람들은 왜 이 세찬 바람 속에서 추위에 떨며 이 곳에서 밤을 지새는걸까. 저마다의 가슴에 담은 다른 소망 한점이 뭘까. 바람이 더욱 세차진다. 구름에 반사된 하얀 빛이 어둠을 밝힌다. 주황색 깃발이 밤새 펄럭인다. 웅웅 바람이 운다. 밤새 홀로 만난 이 바람, 내 생애 가장 추웠던 이 밤을 아주 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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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스님의 가사 색깔의 닮은 주황의 띠가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른다. 검은 빛이 진청으로 바뀐다. 세상 만물이 표정을 드러내고, 산과 산 사이에 골을 만든다. 칼바람이 온 몸으로 파고든다. 해가 이 시간에 뜨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양말도 없이 면 가디건 하나로 스리파다의 밤을 지샌 청년들은 완전 오그라 붙었다. 계단에 앉아 산과 산 사이에서 찬란하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숙연하게 바라본다.
해가 뜨고 이천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세번씩 해오던 푸자 의식이 진행된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공양물을 들고 경건하게 원을 그린다. 사람들도 신발을 벗고 두 손을 모으고 그들의 뒤를 따라 부처님의 발자국을 향한다.
부처님은, 아담은, 시바신은 왜 자신의 발자국을 이곳에 이토록 뚜렷이 남겨 놓았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의 얄팍한 심장에 쐐기를 박기 위해? 눈에 보이는것이 다는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눈에 보여야 믿는다.
모서리에 매달린 종을 한 번 쳤다. 바람 사이로 종소리가 이내 사라진다. 연이어 두 번을 친게 아니라 도착해서 한번, 내려가기 전에 아쉬워 한번 쳤으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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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스리파다를 내려가야할 시간, 밤새 바람에 추위에 입술이 새파랬던 청년들의 얼굴에도 햇살이 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어젯밤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간다. 낮 열두시까지는 문을 여는 밥집이 없어 다시 차밭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 구불 구불한 길을 달려 어제 차를 마셨던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누와라엘리야에 도착하니 벌써 늦은 오후, 스리파다가 꿈같이 아득하다. 우리들은 누와라엘리야에 방을 잡고, 난다 스님과 세 청년은 캔디 사사나 스님 절로 돌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이별은 아쉽고, 우리들은 깊은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난다 스님, 한국에 오시면 꼭 전화하셔야해요. 난 난다 스님의 폴라로이드 사진 뒤에 네임펜으로 굵게 내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다. 우리들이 스리파다에 다녀왔던 흔적은 그것뿐이었다.
첫댓글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가 이곳에 와서
감탄할 만한 경관이네요..
"바람 사이로 하얀 구름이 흐르고, 별이 쏟아진다
멀리 산골짜기 사람의 집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더이상 말이 필요 없네요..
명상이 깊어지게 되면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별들이
내면에서 하나로 느껴진다는데..
가깝고도 먼 그날을 기약해봅니다 ^^
너무 고생스러웠던 밤이라 담에 스리랑카와도 스리파다는 패스해야지 했는데, 어느새 꼭 가야할 곳으로 바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