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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 이훈
윤대녕의 「상춘곡」 자세하게 읽기
윤대녕의 「상춘곡」은 ‘내’가 최란영과 10년 전에 만나서 7년 동안 헤어졌다가 열흘 전에 다시 만나고 나서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한 날까지 기다리면서 여자에게 쓰는 편지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란영에게 보낼 ‘나’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다.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 전부터 나는 당신께 한 번쯤 소리나는 대로 편지글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중략)
선운사에 내려 온 오늘로 꼭 나흘째입니다. 이곳은 미당을 길러 낸 땅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죠. (중략)
열흘 전, 실로 칠년 만에 당신과 해후했을 때 당신은 내게 벚꽃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월 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남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북향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개화 남쪽 지점을 당신의 고향으로 정한 겁니다. 이곳 선운사는 십 년 전에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아닙니까.(윤대녕, 「상춘곡」,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생각의나무, 1999, 11-2쪽. 앞으로 이 작품을 인용할 때는 마지막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적기로 하겠다.)
난영이 앞산에 벚꽃이 피는 날에 만나자고 했으니 ‘나’는 그날을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꽃이 필 남쪽으로 미리 가 있는 것이다. 그곳이 10년 전 둘이 결정적인 인연을 맺은 고창 선운사다.
이 소설에서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신문에도 제법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최란영은 3년 전에 남편과 이혼하여 지금은 포천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 두 사람 외에 매개자로 인옥이 형과 미당 서정주가 나온다. 인옥이 형은 ‘나’의 고등학교 때 선생인데 ‘내’가 군대 갔다 와서 대학에 복학하자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빼어난 시적인 직관력을 드러내는 화가다. 또한 그는 최란영의 고종사촌이기도 해서 둘이 서로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재회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인물의 성격은 김화영의 설명에 기대는 게 좋다.
이보다 더 확실한 길 찾기의 안내자는 없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포천 산정호수 근처로 들어가서 그림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이처럼 구도자의 공간과 수련 양식을 갖추면서 길 찾기의 시범 보이기로 변한다.(김화영, 「별을 찾아가는 그림」, 윤대녕,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378쪽.)
미당은 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만 지적해 두기로 한다.
이 소설은 통과 제의(initiation)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입문은 일상적인 세계를 벗어나서 죽음에 가까운 시련을 겪고 거듭나는 것으로 끝난다.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적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이르면, 영웅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신이 됨)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사취(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는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使者).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조셉 캠벨, 이윤기 옮김, <<세계의 영웅 신화>>, 대원사, 1989, 242-4쪽.)
비에른느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요약해 놓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통과 제의라는 것은 신성한 힘을 매개로 하여 신분을 바꾸는 것,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를 따라서 말하자면, 밭고랑에 뿌려진 씨앗처럼 우선 죽어야만 완전한 성장이 기약되는 한 그루의 초목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통과 제의로부터 모든 통과 제의의 공통적인 시나리오를 추출해 낼 것이다. 상호간의 차이점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음악적으로 말해서 동일한 주제에 대한 변주에 불과할 것이다.(시몬느 비에른느, 이재실 옮김, <<통과 제의와 문학>>, 문학동네, 1996, 19쪽.)
통과 제의는 죽음과 재생, 혹은 자기 부정과 새로운 자아실현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둘은 만나자마자 헤어지고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고백대로 “죽어 산 것”(23쪽)처럼 지냈다. 시련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봄이 되어 “연둣빛, 그러니까 3월의 빛”(18쪽)을 찾아 나섬으로써 재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과 제의의 구조와 겹치는 것으로서 이 작품의 구조를 봄과 가을의 대립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봄은 사랑, 삶, 가을은 이별, 죽음으로 나타난다. 둘이 봄에 만나서 가을에 헤어질 뿐만 아니라 다시 봄에 만나는 구도로 되어 있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둘이 헤어졌을 때의 정황이 봄의 상징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그렇게 읽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인옥이 형의, “봄은 삶과 죽음이 만나 다투는 계절이야. 지금도 힘없는 노인네들이 도처에서 꽃을 보며 쓰러지고 있을 거야”(31쪽)라는 말은 이 소설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암시를 제공해 준다. 그는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선생인 셈이다. 이와 함께 ‘내’ 여행이 시작되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인옥이 형의 삼인전이 끝나고 나서 같이 간 뒤풀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도 봄이 시련을 거친 다음에 오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봄이 거저 오남. 한차례 물을 쏟아 냇물을 불쿠고 꽃샘바람인지 뭔지가 맵게 몰아쳐 간 다음에야 그놈의 홍목당혜 코빼기가 보이지.”
말본새를 보면 누군가 금방 알겠지요? 인옥이 형은 술만 들어가면 사투리도 뭣도 아닌 이상한 투로 말이 변하지요.
“말도 말그라, 낸 마흔이 넘어서야 봄이 무섭다는 걸 알았는기라. 그때부텀 이래 봄만 되면 가렴증이 도진다 아이가. 이혼하고 나서부터 봄만 되면 미치게 애가 배고 싶은데 이거 무서운 일 아이가?”(15쪽)
그러면 죽음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10년 전의 인연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때 ‘나’와 최란영은 둘 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나’는 제대해서 복학을 준비하고, 최란영은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었다. 둘은 인옥이 형의 첫 개인전이 열리는 날 만나게 된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독단적으로 사랑한다는 식의 말을 한다. “안 그래도 방금 전공 과목을 확실히 정한 참입니다. 최란영 당신으로 말입니다.”(24쪽) 이 도발적인 발언은 인옥이형이 ‘내’게 복학해서 뭘 하겠느냐고 묻자 “전공을 바꿔 천문학과나 갈까 생각중”(19쪽)이라고 대답한 것과 연결된다. 이 말은 들은 최란영의, “천문학으로 전공을 바꿀 거란 얘기는 사실인가 보네요?”라는 질문에 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이런 억지를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당연히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일 당장 내가 먼저 선운사로 내려가겠다! 머리를 밀고 석상암에 들어가 있을 테니 유급을 시키든지 너도 전공을 바꾸든지 맘대로 해!(24쪽)
정말 ‘나’도 얘기하다시피 “그다지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무모한 사랑”(25쪽)이다. ‘나’는 난영에게 선언한 대로 선운사로 내려간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가도 그녀는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문득 잠든 내 얼굴에 감겨 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지요. 그것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오래 그 소리에 귀를 던져 두고 있다가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보았지요.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중략)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26쪽)
둘은 “아침 내내” “부처님 발 아래서 물과 불이 다 타고 마를 때까지 정사를 치”른다(27쪽).
학기가 시작되어 복학하고 나서 ‘나’는 최란영이 열성적인 운동권이라는 것을 안다. 6․29선언이 나올 즈음이니 운동권으로서는 가장 절정의 시기라고 할 만해서 그녀와는 잘 만날 수가 없다. 물론 ‘나’로서도 앞으로의 삶에 대책이 없었기 것 때문에 그녀에게 적극적일 수 없었다. 그런데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만났더니 그녀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내’가 옆에 없었다며 ‘나’와의 일을 “재수없이 돌부리에 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33쪽)고 말한다. 나중에 인옥이 형한테서 그녀가 ‘나’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낙태시킨 것을 들어 알게 된다.
그리고 수술을 받을 때 같이 있었던 남자가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같은 운동권의 사람이라는 것도. 이 남자는 나중에 여자의 과거를 들먹거리며 이혼을 요구하고 이뤄지자 애까지 데려가 버린다.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줄곧 스스로에게 갇힌 삶만 산”(35쪽)다. “몇 년 동안 죽어 산 것만 같”(29쪽)다고도 한다. 그녀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3년 전에 이혼하여 아이도 빼앗기고 지금은 인옥의 형이 작업실로 쓰던 괭이나무 집에 살고 있다. 이 나무는 뒤에서 이미지를 살필 때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또 난영이는 눈병을 앓고 있다. 왜 그랬을까? “눈으론 당최 안 보이는 부분도 있게 마련”(23쪽)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또 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점을 알려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동안 너무 노하고 살”(38쪽)고, 그리고 “상대한테 자신 없어하는” “사랑”(41쪽)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두고 내린 무의식적인 자기 처벌일 수도 있다.
“배는 부르네요.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렇게 혼자 배불리 먹었나 모르겠네요.”
“지금 애 생각하는 건감?”
“········”
“자식한테 뭘 해주고 싶어 너무 안달하지 말어. 나중에 가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한 겨.”
“별로 자신 없어요.”
“상대한테 자신 없어하는 게 한편 사랑 아닌감? 자신 만만한 게 어디 사랑이냐? 그냥 뼉다구 폼이지.”
(중략)
“그래, 니가 사는 일을 불쾌하게 생각하면 남들은 한수 더 떠 불행해지는 법이여.”(40-1쪽)
또 그녀의 목소리는 “짚신처럼” 파삭파삭하게 나빠져 있었고 거기에다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참에 얘기하자면. 그날 못내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당신의 그 목소리 말이지요. 처녀 적 명주실 같던 목소리는 어쩐 일인지 짚신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이혼을 하고 나서 그렇게 됐다고 당신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지요. 그놈의 사람 종자 때문에 미치는 것들도 수두룩한데 그깟 목소리 하나 갖고 뭘요,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내 귀에는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더라도 부디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까지 나빠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12쪽)
여기까지가 10년 전에 시작됐던 인연과 다시 만나기까지의 죽음의 과정이다. 그러면 이제 재생의 과정을 살펴보자. 선운사행(참고로 “윤대녕의 인간학이 불교에서 입고 있는 혜택”은 황종연, 「유적의 신화, 신생의 소설―윤대녕론」, <<문예중앙>> 1995 겨울, 176쪽을 볼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여행은 과거의 ‘나’나 우리를 부정하고 인간적으로 거듭나는 재생의 봄을 맞이하려는 준비 과정이다. 선운사에서 ‘나’는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난영에게 해 주는 사랑의 이야기면서도 자신을 응시하는 반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선운사에서 ‘내’가 배우는 것은 마음의 눈을 맑고 밝게 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얼른 생각하면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미적 성질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만들어 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산신각 앞에 물에 젖은 수선화 몇 송이가 향내를 맡으며 샛노랗게 피어 있더군요. 아름답더군요. 이제 나도 꽃을 보면 왜 꽃이 아름다운가를 조금은 알 듯합니다.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나도 한 겹씩 마음이 털어내지는 걸까요? 그러면서 비로소 사물이 스며들 틈이 조금씩 생기는 걸까요?
아, 그렇습니다. 그날 내가 당신에게서 보았던 것은 바로 그 틈이 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 아닌 다른 것들이 끼여들 틈 말이지요. 나는 당신의 그 벌어진 틈들 사이로 고운 빛이 소리 죽여 드나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45쪽)
마음을 열자 10년 전의 ‘내’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내’ 아이가 환생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둘의 사랑이 부활하는 것도 가능해지게 된 셈이다.
애 밴 여인네를 본 것은 벚나무 길에서였습니다. (중략) 그녀를 보며 왜 내가 또 당신을 떠올렸을까요. 10년 전 내 아이를 가졌을 때의 당신의 모습 말입니다. 그 아기의 애비는 오늘처럼 엄마 옆에 없었지요. 그리하여 아이는 어느 날 돌부처가 되어 버리고 도솔암 동백 한 송이거나 잉어 한 마리로 환생해 오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봅니다.(50쪽)
동백꽃을 보러 온 미당이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도 “하지만 나는 벌써 보고 가네”(52쪽)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의 눈으로 진실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시작하면서 미당의 매개적 역할은 뒤에서 얘기하겠다고 했는데 그 첫째가 바로 이것이다.(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당을 두고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벚꽃을 피워 봄을 기리는 <상춘곡>을 노래하는 일에 있어서 미당 이상의 길잡이는 찾기 어렵다. 그의 불교적 세계관, 그 문학의 신화적 구조, 떠돌이 기질, 뜨겁고 붉은 피를 맑게 하는 그 비길 데 없이 섬세한 가락으로 보아 최상의 안내자일 수밖에 없는 미당은 그리하여 당연하다는 듯이 이 노래의 대단원에 몸소 입장한다.”(김화영, 앞의 글, 382-3쪽.)) 마음의 눈을 열어야 세상의 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난영은 그러지 못해서 ‘나’와 헤어지게 됐는지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이 다시 만났을 때 난영이가 눈병에 걸린 것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눈을 뜨고 있으면서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응징하면서 눈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미당은 불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되살아나오는 소생의 의미를 깨닫도록 해 준다. 그가 소개하는 선운사의 만세루 내력을 들어보자.
“선운사가 백제 때 지어졌으니 만세루도 아마 같이 맨들어졌것지. 그러다 고려 땐가 불에 타 버려 다시 지을라고 하는디 재목이 없더란 말야. 그래서 타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어떻게 다시 맨들었는디 이게 다시 없는 걸작이 된 거지. 일본의 무슨 대학 교순가 하는 사람도 여기 와서 이걸 보고는 척 알아냈어. 불심으로 치자면 대체 이런 불심이 어딨냐는 거야. 그래서 이렌가 여드렌가를 여기 묵으며 날마다 만세루에 가서 절을 하다 갔더란 말씀야.”(53쪽)
불에 타다 남은 나무 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이 걸작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생하는 구체적인 형상이 만세루고 벚꽃인 셈이다. 이런 깨달음이 결합하여 아직 피지 않은 벚꽃을 볼 수 있게 된다. 미당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의 말씀대로 만세루는 타고 남은 것들을 조각조각 잇대고 기운 모양으로 대웅전 앞에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기둥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사위가 어두워진 경내에서 나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서 있었지요. 뭇사람들이 무심할 리 없듯이 뭇사물도 무심히 보면 그저 안 보이고 마나 봅니다. 캄캄한 어둠 속, 어쩐지 환해진 마음으로 경내를 돌아 나오다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흘끗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게 됩니다. 만세루 안에 하얗게 흐드러져 있는 벚꽃의 무리를 말입니다.(54)
여기서 ‘타고 남은 것’이 사실은 ‘나’와 난영을 뜻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둘 다 ‘화톳불’이었던 것이다. 이 화톳불의 이미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따라서 통과 제의의 구조를 완결하는 것이어서 따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통과 제의의 구조를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는 이미지들을 보자. 먼저, 난영이 머물고 있는 집에 서 있는 괭이밥나무다.
당신은 마을에서도 한참 벗어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괭이밥나무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뭇사내들도 눈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십상인 그런 을씨년스러운 집이었습니다. 마당가엔 검은 나무가 한 주 서 있었지요. 처음에 나는 그걸 밤나무로 알았더랬습니다. 아무래도 긴가민가 싶어 인옥이 형한테 물었지요.
“밤에 고양이가 올라가 혼자 밥 먹는 나무여. 이제 알건남?”(41쪽)
괭이밥나무 집은 우선 마을에서 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어울려 모여 사는 곳이 함축하는 의미를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밤’이 되면 고양이가 이 나무에 올라가 ‘혼자’ 밥을 먹는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홀로 밥 먹는 것만큼 처량한 것도 많지 않을 듯싶다. 이런 어두운 느낌을 강화해 주는 것은 밤이라는 요소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을의 ‘낮’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밤이어서 나무도 ‘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잘못 알아본 밤나무도 밤(栗)나무가 아니라 밤(夜)나무로 읽힌다. 그런데 여기서 밤이나 검은 색은 외롭고 단절된 분위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거세한 죽음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인옥이 형 말마따나 이 집 주인인 난영이와 ‘내’가 “그 동안 너무 노한 채 쇠문 속에 자신들을 가두고 살아온 것”(46쪽)의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이혼하고 아이마저 빼앗긴 난영의 처지야말로 이 괭이밥나무 자체라고 해도 좋다. 10년 만의 해후를 끝내고 이 집을 떠나오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는 데서도 이 점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인옥이 형과 나는 괭이밥나무 집에 당신을 혼자 남겨 두고 밤길을 달려 다시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43쪽)
여기서도 ‘혼자’라는 점이 되풀이되고, 다시 괭이밥나무 집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과 대비된다.
다음으로 ‘화톳불’을 들여다보자. ‘내’ 눈에 비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던, 난영의 첫인상과 그런 인상이 바뀌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당신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머리 좋은 미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당신은 가슴을 꼭꼭 여며 놓고 절대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타입입니다. (중략)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그런 여자들은 마음이 불편하고 숨이 차서 좋아하질 않습니다. 적어도 당신 이름이 최란영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날도 그랬습니다. 또한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목소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이 인옥이 형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불쑥 이런 느낌을 받고 있었드랬습니다. 아, 이 사람 마음속엔 늘 화톳불이 타고 있구나라고 말입니다.(20쪽)
인용문 그대로 난영의 차가운 첫인상이 그녀의 마음속에 늘 타고 있을 화톳불 때문에 바뀌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화톳불을 난영의 손톱에서 보고야 만다. 이렇게 하여 “갑작스럽게” “무모한 사랑”(25쪽)이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술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소주 두 잔에 손톱까지 금세 붉어졌습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인옥이 형은 벌써 간 듯합니다. 괜찮다면 한 병 더 하고 가죠.”
술이 더 먹고 싶어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굳이 까닭을 들라면 그 붉은 손톱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때부터 당신과 갑자기 얘기가 하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당신한테 감춰져 있던 그 화톳불을 손톱에서 훔쳐 본 다음부터 말이지요.(22쪽)
그런데 그녀 혼자만 화톳불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녀의 손톱을 생각하면서 정염의 화톳불을 피우고 있었다.
허구한 날 문지방을 베고 누워 나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내 화톳불만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지요. 산에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를 보듯 당신의 붉은 손톱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26쪽)
따라서 둘이 만나자 “아침 내내 괴로운 젊은 중생 두 것들이 부처님 발 아래서 물과 불이 다 타고 마를 때까지 정사를 치르”(27쪽)는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화톳불이 서로 만나 결국 자신들을 태운 셈이다. 그러므로 “타고 남은 것들을 조각조각 잇대고 기운 모양으로 대웅전 앞에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54쪽)는 만세루야말로 다시 소생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환상으로 본 벚꽃도 그렇다. “만세루 안에 하얗게 흐드러져 있는 벚꽃의 무리”(54쪽)야말로 타고 남은 것들이 이어져서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고 믿”(56쪽)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만세루에 그토록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미당이 준 깨달음도 깨달음이지만 난영을 향한 ‘내’ 사랑을 투사하고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세루를 보고서 “환해진 마음”(54쪽)이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중략)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56쪽)
결론적으로 「상춘곡」은 이미지들을 뛰어나게 잘 활용함으로써 사랑의 재생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