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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선생님께 관한 것도 눈으로 본 것이고 귀로 들은 것을 증거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께서 예수님께 대해서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제 육이오 동란을 중심으로 전후 사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증언하겠습니다. 육이오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제 서울 대전 차츰차츰 전선이 가까워진다는 말을 듣고 광주도 곧 시간문제예요. 광주에 계신 믿는 어른들이 평소에 이 현필 선생을 존경하던 분들이 다시 말하면 공포심에서 찾아온 것이지요. 어떻게 했으면 할까하고 앞길이 캄캄했지요. 보따리를 싸가지고 피난오시기를 이 선생님께 와서 귀화한 것입니다. 거기가 일명 밤나무골 이라고 그래요. 방림동 광주시 방림동 밤나무골인데 거기가 인구가 드문 곳인데 대개 교회의 경건한 대개 부인들이지요. 또 남자 어른들 몇 분계시고 근 150명 생사를 같이하기 위해서 모였어요. 죽기를 같이 하기위해서 모여 버렸어요. 갈 곳이 없습니다.
소식을 들어보니까 처녀로 한국에 나와 가지고 참 환갑이 넘도록 가깝도록 여자 선교사로서 전도하시다가 수피아중고등학교를 창설하신 그 교장님이 나는 한국 사람이오. 나는 미국으로 안갑니다. 미국 정부 명령을 거절하고 인제 순교하기 위해서 자기 사택에 홀로 남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 이미 그때는 종교지도자들은 다 부산으로 다 망명하고 없지요. 광주시내에는 신도들과 무명한 농부 가사 평민들만 남아있었지요. 일반 국민들만 그러니까 그 선교사님을 누구 한사람 모시고 그 어디 가서 피난할 사람이 없지요. 혼자 죽음을 앞두고 카텐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인민군에게 체포당하면 순교당할 작정이에요. 내가 생명을 바쳐 선교하던 한국인데 내가 어떻게 한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 가냐? 그런 참사랑을 지니신 분이지요. 그 소식을 접하시고 이 선생님이 부랴부랴 그 밑에서 일보시던 전도사와 운전수를 인제 보내서 '안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앉아서 죽을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봅시다. 그러니까 피난을 가십시다.' 권면을 해서 갑시다. 하니까 그럼 나를 누가 데리고 가느냐? 아 이 현필 선생이 그렇게 소원 합니다.
그렇다면 내 몸 맡기겠다. 허락하셨어요. 이 현필 선생은 교직자가 아닙니다. 신앙으로 보면 평 교인입니다. 무명한 농부입니다. 그래서 낮에 나타나면 안 되지요. 아무도 몰래 비밀리, 비밀리 어두움을 타서 그 밤나무골로 오셨다 그래요. 저는 그때 화학산 기슭에서 고아 한 7-8명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못 봤습니다. 이 지혜 있는 이 선생님 이지요. 절대 이렇게 냉정하신 거지요. 그렇게 귀하고 하나님의 딸이 왔지만 방으로 모시지 않아요. 왜 방에 그득그득해 피난민이 그러니까 숲속에 가시밭에 아무도 몰래 숨겨놓으신 거예요. 은거하시도록 그 얼마나 명철하시며 조용하시고 그렇게 차분하십니까요. 그 해가 진 다음에 한복 옷을 입으라 하시고 무명 베, 가사 수건을 쓰라 하시고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해서 한국 사람이 지금 바지게 올라가도록 앉아 계시도록 하고는 그때 젊은 청년 7-8명이 바지게지고 이렇게 들, 넘고 산 넘고 해서 장장 광주에서 그 도암면 중촌 마을이 칠 십리라 해요. 그러나 돌아갔으면 팔십 리이겠지요?
그렇게 밤으로, 밤으로 낮에는 숨어계시다가 밤으로 바지게로 지고 가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벌써 앞뒤에 따라오는 고아들이 그때 벌써 고아원 출발한지 1년이 되었으니까 고아들이 약 백 명 또 따라오는 그 신자들이 한 4-5십 명 그래 백여 명이지요. 이 선생님 고향에 함께 피난 와 있거든요. 사람들이 그득해요. 그럼 비밀리 가신 곳이기 때문에 바지게에 지고 온 선교사님을 어디로 들어가시라 할 곳이 없어요. 방방이 그득하니까 그래서 숲속에 숨어계시라 하시고 또 밤이 되면 화학산으로 지고 또 올라갔다고 그래요. 그럼 전후좌우에 호위하시는 분이 현재 정 원장님 정 인세 원장님 호위하시고 청년들은 업고 가시고 지고가시지요. 그렇게 해서 그 중촌마을에서 소반마을에 거기는 화학산 중봉이지요. 약 한 1km 되지요. 아 1km 아니야. 한 4km 되지요. 3-4km 거기만큼 지고 올라갔을 때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깊은 산속이니까 거기부터 바지게 내려가지고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인민군이 아닙니다. 유격대, 여순 반란 때 와서 은거하고 있던 지방 유격대지요. 지방 반란군 지방 공산주의 청년들인데 그때 소식을 듣고 육이오동란 소식을 그때야 들었어요. 듣고 7-8명이 총 들고 내려오다가 탁 봤어요. 당신 누구냐고 검열하는데 나는 정 인세올시다. 아이고, 정 총무 고맙소. 그 고아들 할머니들이 전부 일 년 먹기 위해서 김칫독을 담아두고 다 피신해 버렸거든요. 아 당신이 총무님이오? 당신들이 잡수려고 그 무김치 배추김치 담아놓은 것을 우리들이 먹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렇게 보더니 이 여자 외국사람 아니요? 예, 선교사인데 처녀 때 우리나라 오셔가지고 이렇게 교육에 힘쓰시다가 본국에 못가시고 우리하고 같이 피신합니다. 그런데 정 총무님 보세요. 당신은 우리가 아니까 지금 이대로 가시라 하지만 우리가 지금 내무서에 가서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고 체포하러 올 테니까 모시고 계시오. 그리고 내려갔어요. 그 청년들이, 그러니 발견되어 버렸어요. 벌써 저쪽 손에 그 명단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모시고 소반바위라는데 가서 숨어 계신데 밤낮으로 체포하러 옵니다. 선교사를, 암굴에 숨어 계세요. 암굴에 분명히 계신 줄 알고 찾아와도 발견 못하지요. 그러면 고아들이 한 백 명 가까운데 또 일반 신자들은 선교사가 거기 숨은 줄 알고 자기들한테 화가 올 줄 알고 다 도피해 버렸어. 동광원 소년 소녀들만 같이 운명을 같이 하니까 숨어있는데 총칼을 대요. 애기들한테 삼십 명 이십 명 방방이 있으면 너 여기 머리 노란 여자 올라갔지? 말해라. 너 거짓말하면 죽인다. 총 쏜다. 몰라요. 몰라요. 백 명이 한사람 같이 시키지도 않았답니다. 어른들이 몰라요. 몰라요. 하고 절대 이렇게 침묵을 지켜요. 애기들이 봤다는 말 하는 사람 없어요. 누구들 대던지 총칼을 대고 너 여기 미국여자 가는 거 봤지? 몰라요. 다 알아요. 애기들은 알고도 모른다고 그렇게 성령의 어떤 그 현존이라고 할까? 하나님이 직접 입을 봉한 것이지요.
그래서 밥은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지혜가 참 안전하시거든요. 배고프니까 깊은 산중이니까 아무렇게나 해먹자.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돌아가신 화순씨 어머니라고 그 분도 원 몸이 부잣집 부인이 출가했거든요. 그래 이제 유복하신 어머니로서 산에 와 계시기 때문에 믿음직한 그 화순씨 어머니에게 밥을 부탁해요. 그럼 해가 진 다음에 밥을 해서 밥을 막 해가지고 담아가지고 딱 담아가지고 이 방 구들 깊은 속에 밀어 넣어. 밥을 막 해놓을 때 저 사람들이 눈치를 밥 했을 때 잡으려고 밥 먹을 만 할 때 탁 달라 들어 밥을 딱 해서 밀어 넣어 놨는데 와서 보면 이렇게 솥을 떠들어보면 아무것도 없거든 의심이 풀리지 않아요. 여기 선교사 와있지요? 우리 알고 왔습니다. 나 몰라요. 다 그 사람 알고 왔어요. 정보 듣고, 이 현필씨 정 인세씨 선교사 하고 세 명이 여기 숨어있지요? 여기서 밥 해주지요? 나 몰라요. 지금 밥 해놨거든. 나 몰라요. 그럼 가버려요. 그럼 그 사람들이 알고 또 와요. 새벽에, 새벽에 잡으려고 그럼 이쪽에서는 밤중에 열두시나 새로 한시에 꼭 밥 한 끼 잡수셔요. 밤중에 굴속에 같다줘요. 같다 드려요.
그때 정 인세 선생님 그때 나이가 젊어요. 그러니까 와서 가지고 가서 먹어요. 선교사를 어떻게 여자인데 어떻게 혼자 계시라고 합니까? 그래서 금남자매라고 있어요. 젊은 자매님이 항상 몸 옆에 따라다니지요. 거룩하신 처녀인데 그래 두 분이 식구는 네 명이지요? 네 사람 밥을 그렇게 갖다 먹는데 밤에는 오면 흔적이 없으니까 새벽 세 시경에나 들어 닥쳤다고 유격대들이지요. 분 주소 직원들이야. 7-8명이 총 갖고 그런데 새로 한시경이나 선교사님하고 금남 자매는 밥을 내다주고 무거우니까 정 선생님과 이 선생님 두 분은 와서 잡수시거든. 어머니 방에 와서 그러면 밥을 위 아랫방이니까 윗방에 식사를 막 했어요. 식사를 막 끝냈는데 들이닥쳐 유격대가 여기 정인세, 이선생 여기 있지요? 밥 차려드렸거든. 밥 차려 잡수시고 어찌되었든지 흔적이 없이 했지요. 벌써, 그럼 윗방에 계신 줄 알거든요. 나 문 열어 봅니다. 당신 거짓말 하면 죽소. 난 몰라요. 문을 팍 열어버리니까 아무도 없어요.
분명히 거기 두 분 계셨는데 어디 갔어? 그런데 두 분이 잠깐 사이에 영감을 얻어가지고 앞에 원두막에 와 계셔. 3미터 앞에 원두막 있어. 그런데 이 선생님은 밑에가 앉았고 정 선생님은 위에가 앉았다고 2층이니까 그러니까 저기서 오는 거를 보고는 이 선생님은 기어서 선교사가 위태로우니까 선교사한테로 쫒아 가버렸어. 선교사 보호 하려고 그러니까 기어갈 때 안 봤지. 정 선생님은 원두막 위에 있으니까 내려 올수가 없어. 서로 건너다보이니까 에라 죽으면 죽었다하고 드러누워 버렸어. 그런데 인제 창으로 땅속을 막 파. 숨은 줄 알고, 이 런 쇠 덩어리로 분명히 여기서 밥 먹었을 텐데 어디 갔냐 말이야. 원두막에 와서 원두막 밑을 파요. 원두막 위에는 안 봐. 뒤에 드러누웠는데 아이 없다고 허탕 쳤다고 내일 오자고 가버렸다는 거예요. 그래 날마다 숨박곡질이야. 하나님하고 세상하고 그렇게 되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요. 어찌 되었든지 그런 사건이 아슬아슬 또 이쪽에서는 아무리 가도 못 찾으니까 다른 군으로 옮겼다고, 장흥군 쪽으로, 화순군 쪽에서는 못 찾으니까 장흥군 쪽에서 찾아봐라. 장흥군 쪽에서 수색대가 7-8명이 또 올라와. 낮에,
그런데 조용하게 며칠은 조용하니까 안심하고 선교사가 나와서 큰 방에 방으로 나와 있다가 어째 또 영감이 들어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나 기도하렵니다. 하고 집 밖으로 내려갔거든. 저 밑으로, 그러니 선교사가 이 성경을 딱 보고 있는데 대창 든 청년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7-8명 올라가요. 옆으로 있으니까 옆으로 보면 보여. 쭉 올라가. 와 저 사람들 나 잡으러 간다고 알아버릴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와서 여기 선교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가버렸거든. 그러니까 약속한 것 같이 그 시간에 안 잡혀요. 그래 서로 잡히려다 안 잡히고 잡히려다 안 잡히고 그렇게 된 때에 저는 또 어린 고아들이 그건 동광원 고아가 아닙니다. 동광원 고아보다 더 일 년 전에 데리고 산 고아원이 따로 있어요. 제가 이 선생님의 형님의 주막집이에요. 형님 술 그만 못 팔게 하고 그 집에다 제가 선생이거든요. 그리고 그 어머니가 귀주 어머니지요 보모가, 그랬는데 저는 저대로 제 몫의 고아들하고 귀주 어머니하고 도와서 지금 피신하고 광주서 한 백여 명 고아들하고 합류를 안 시켜요. 어떻게 이 선생님이 명철한지요. 합류시키면 이 모든 비밀이 섞어져 가지고 그것이 탄로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있던 고아원에 선교사가 지내는 거예요. 저를 한 보름 전에 와있으라 했어. 이 도구박골에 그 집 다 비어놓고 올라와 버렸거든. 앞을 내다본 분 아니야. 그 집에 선교사 일행이 들어와 두 팀이 되어버렸어. 이렇게 그래 저는 저대로 고아들하고 도구박골 이니까 절대 인제 오도 가도 못하지. 거기도 광주 쪽에서 피난민 7-8명 와버렸다고, 손님들이 그때 그 유명하신 서울 어머니가 거기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계셨어요. 그 서울어머니가 계시던 막이에요. 도구박골이,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날은 한 달이나 두 달하니까 너무 서로 소식이 없고 저도 마음이 그렇게 마음이 그렇게 듭디다요. 소반바위 가야지. 그건 생명을 내놓고 가야지요. 그 판에 무사하게 생각이 안 되어요. 그러면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야 되나 싶어서 그 오 장로님이 옛날 출가해 가지고 은둔해 있던 막이 있어요. 그 도구박골 에서 산길 넘어가면 큰골인데 큰골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봤어요. 정정당당하게 마을길 다닐 수 없는 때에요. 서로 의심하고 체포하고 그럴 때니까 그 주민들은 죄가 없지요.
그러나 공산주의 계열에서 믿는 자를 스파이로 봐버렸거든. 미군 앞잡이로 봤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대해서 여간 의아심이 있고 고발해 버린다고, 그래 마을 함부로 못 다녀요. 그래 사람 없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봤어요. 벌써 늦가을인데 하늘을 쳐다보니 머루가 캄캄해 하늘이 안보여요. 열려가지고, 그건 참말로 정글 같은 곳이야. 하늘이 캄캄한 곳이야. 물이 흐르고 거기를 거쳐 가지고 이 선생님 못가니까 해가 진 다음에 거기 감나무쟁이 거기가 사람이 세 채가 있어요. 소반바우라는 마을이, 아니 소재지요. 소재마을이 한 삼십 가구 사십 가구 거기를 거쳐서 이제 감나무쟁이가 거기 집이 세 채있는데 거기 가다가 서로 발견되면 안 되거든. 거기 사람 모르게 통과할 때는 비지땀이 흐르지요. 사람이 나와 버리면 안 되거든요. 밤중에 가지만 참말로 숨을 조이고 기어서 가거든요. 아무도 안 봤거든요. 그래 소반바위에 가서 보니 화순씨 어머니 혼자 계세요. 집 지키고 밥 해주는 분이시지요. 그 자리는 옛날 고아들이 7-8명 살던 거기도 고아들 저택인데 깊은 산속입니다.
그럼 사진관부인은 화학산 소반바위에서 보모 직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럼 학생들은 한 5명, 선생님은 김 수혜 선생, 그런데 주일날이면 저는 방산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을 사람들이 다 소개를 당해버리고 거기에 정 면장 이라고 정규주 어머니의 남동생이 면장인데 밤에는 밤손님들이 습격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모두 집을 내어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아들 한 그때 10명, 저, 귀주 어머니 그렇게 자기 남동생의 집이니까 화순군 도암면 중촌에 머물고 있다가 결국은 더 안전지대로 방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주일을 보고 있는데 사진관 어머니가 오셔서 주일예배를 같이 봤었습니다. 오후에 이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선생님 조금 뵙시다. 그래서 제가 면담을 했습니다. 그때는 보릿고갭니다. 보리가 아랫마을에는 익어서 누렇고 그 소반바위는 아직도 파랗습니다. 등고선이 아마 칠백고지는 될 것입니다. 아마, 어제 된 일을 설명하세요. 선생님 제가 어저께 이렇게, 이렇게 지냈어요. 그 사연 그 아이들 선생님은 양식이 떨어졌다고 그제 하산하시고 아무리 해가지도록 기다려도 선생님은 아니 오시고 아이들은 배가고파 하기 때문에 그제 선생님은 떠나시고 어제 일이지요. 너무 아이들이 배가 고프겠다 싶어서 자기 평생에 처음으로 그 풋보리를 땄답니다. 아이들 5명 어머니까지 6명 밥인데 눈으로만 어려서 봤던 것을 처음으로 실천해 봤는데 보리를 따놓고 생각해 보니까 이걸 어떻게 해서 아이들 밥을 만드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걸 빨리 말려야 쓰겠다 싶어서, 솥에다 불을 때고 그 보리 파란송아리를 볶아가지고 손으로 비비니까 속안에 빠지지 않습니까?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너무 적어요. 식구가 6사람인데 6홉이나 되어야 밥을 할 텐데 이것이 반 홉 거리나 될 것인데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야 쓰겠다. 두 번만 경험이 있어도 알 텐데 처음이기 때문에 맷돌이 있어요. 거기 소반바위에, 그럼 맷돌질을 해야 하는데 물이 퉁퉁 불어있기 때문에 다시 솥에다 넣고 말리지요. 어느 것은 타고 어느 것은 안 마르고 그렇게 해서 억지로, 억지로 불을 때가지고 손으로 비빈보리를 말렸습니다. 그래가지고 맷돌에 넣어 갈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양이 적어요. 그래 물을 많이 붓고 보리죽을 쑤었습니다. 아이들도 한 그릇 주고 어머니도 한 그릇 잡수셨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할 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자 집에 시집가서 종을 부리고 살던 생활인데 갑자기 이 선생님을 산에서 만나가지고 감화를 받고 비단옷 벗으십시오. 벗고 면 베옷을 입었을 때 남편은 그 젊은 30대 청년인데 갑자기 부인이 화장을 않고 무명옷을 입은걸 보고 미쳤다고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참 온몸이 헌 누덕지가 되도록 맞으시고 매일 때리고 또 때리고 어제까지 고 피아노 쳐주고 비단옷 입고 화장하던 아내가 갑자기 화장을 걷어버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그러니까 그것을 강제로 항복을 받을 량으로
그러니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 반년 얼마나 매일매일 매를 맞고 그래도 비단옷을 안 입기 때문에 결국은 나가라. 그래서 가정에서 추방을 당해가지고 그러고 이 선생님을 찾아서 거기 이 선생님 고향 화성군 도암면 그 산중을 찾아왔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 소반바위에 어린 아이들이 있으니까 가서 어머니가 되십시오. 그래 보모가 되어가지고 산에 오신지 불과 한 몇 달 되었어요. 그런데 육이오 전이지만 해방 후에 양식이 참 귀한 때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오시지 않고 아이들은 배가고프기 때문에 그 풋보리를 따가지고 처음으로 해본 것이지요. 두 번만 해봐도 요령이 생겼을 텐데 처음으로 해봤기 때문에 양이 부족하고 그래서 그때 왜 그 이야기를 하시냐하면 아, 이 못난 자식은 내가 선생님을 원망 했어요. 왜 어제 죽을 쑤기 위해서 물이 없는데 그 소반바위에 가보시면 압니다. 물 나오는 곳이 부엌에서 한 백 미터 내려갑니다. 절벽입니다. 애들도 배가고프지만 어머니도 배가 고파가지고 그 물을 양동이에 떠가지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다리가 떨리던지 우리 선생님이 어린 아이들 가리킬 때 어머니가 밥하면 물 좀 떠다줘라. 이렇게 지도했다면 이 어려운 때 아이들이 물을 길러다 주면 좋으련만 너무 애기들을 생활을 안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종일 먼 산만 보고 앉아있으니 이건 교육이 부족하다. 나는 이렇게 선생님을 원망한 죄인이다. 그 말을 하시기 위해서 그 말을 하세요.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건 내가 고생을 감당해야 할 텐데 애기들이 물 좀 떠다주면 내가 밥하기 쉬우련만, 어쩌면 저 아기들을 먼 산만 보고 앉았을까? 그 마음에 시험이 컸기 때문에 내가 자복을 하지 않고는 못 올라가겠고 고 사연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들어보면 그때 그 상황이 얼마나 곤란했으며 배고픈 생활을 했으며 또 고난이 막심했으며 그 상황이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렇게 올라가시고 그날은 세월이 또 한세월 흐릅니다. 저는 그 사진관부인이 저를 고맙게 보시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세상 말로하면 비밀 된 자기 영성을 고백 하십디다 요. ‘선생님 나 부끄러워요.’ 어제 옛 남편 따라서 그 직장에 다녀오셨다고. 왜? 자기 남편이 군수 발령을 받아가지고 초임을 하는데 나와 자기는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부부지간이 아니오? 내가 명색 남편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군수가 되어가지고 발령한 이 마당에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오? 내 소원이니 나하고 살림을 안 해줘도 좋으니까 부임할 때 거기만 함께 같이 갑시다. 얼마나 진실한 소원하기 때문에 이 죄녀(罪女)가 그걸 거절 못하고 남편을 따라서 부임지에 다녀왔어요. 그 고백을 하시는 거예요. 그건 전 식구는 모르지요. 그 부부가 얼마나 사랑이 깊고 완전하던지 누구든지 부러워했던 부부지간입니다. 가서 보니 두 번째 결혼해 가지고 젊은 아내가 사택에 계시더랍니다.
벌써 미리 와서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따라와서 모녀가 방에 계신데 인사합시다. 그래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의 친정어머니 세 명이 인사하실 때 친정어머니 다시 말하면 그 어머니가 얼굴이 파래가지고 공포를 느끼더랍니다. 자기 딸을 말리려니 참 불행하게 될 성하니까 아 큰 부인 나타났구나. 내 어린 딸은 장래가 어찌될 것인가? 그래서 어머니 염려 마세요. 어머니 행여 라도 마음 놓으세요. 나는 절대 여기 와서 살 여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 앞에 가버리고 나는 이 남편과는 관계없습니다. 절대 딸 걱정 마세요. 안심을 시키니까 얼굴이 좀 훤해지시더라고 아주 젊은 동생을 보고 동생 이 결혼 살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를 않소. 내가 이 짐을 못 지고 나는 버렸는데 내 대신 이짐을 와서 져 준다니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그러나 고생을 할 텐데 나는 참 감사하고 미안할 것뿐이지 나는 절대 이 짓을 안 돌아봅니다. 행여 라도 의심마세요. 그러니까 그 젊은 부인이 아주 눈물을 빠치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시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안 올 곳에 왔다 싶어서 내 갑니다. 그리고 떠나왔습니다. 그래요. 그 후의 일을 아주 눈물겹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게 자랑이 아니에요. 이 공동체에는 옛 남편을 만나본다. 가정을 돌보는 일이 절대 없기 때문에 내가 비밀리 다녀왔으니 선생님 내가 이런, 이런 잘 못을 했습니다. 고해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이 못난 것을 붙잡고 골방에서 제가 이 이야기를 들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 뒷산에 그 무덤이 있고 그 비석을 제가 보고 왔습니다. 아, 그분이 여기 묻혔구나. 그런데 그분은 비석을 쓰자니 고향도 모르고 생년월일도 모르고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선생님 전기에 나와 있어요. 사진관 부인 댁, 옛날 자기 남편이 군수되기 전에 사진관을 하셨던가 보지요. 그러니까 사진관 부인 댁 그 말밖에 우리가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도 듣고 여러분도 들었겠지만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부모 형제 일가친척고향 남편 자식을 다 버리고 혈혈단신 예수님을 찾아왔지요. 그러나 그 지도자는 이 현필 선생이십니다. 그러면 서리내에서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소위 말하면 일체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신 어머님이신데 그분이 음악을 전공하셨던가 보지요. 찬양도 하시고 피아노도 잘 치시고 여기 도암면 현실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 오셔서 선교하셨어요. 마을 사람들 찬송 가르치시고 또 주일예배도 인도하시고 그렇게 지내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론 가정에 계실 때에도 서로 이해가 안 되가지고 매를 맞았다는 거지 그때가 순교입니다. 전혀 이해를 못한 남편이 힘으로 항복을 시키려고 방에다 가둬놓고 얼마나 구타해 때렸어도 고개를 딱 숙이고 말 한자리 대꾸하지 않고 매를 맞고 그 일을 오래하시다 나오셨기 때문에 육이오가 끝났지요.
그 때 같이 계셨던 사진관 어머니 이발소 어머니 비문을 보니까 이름을 알겠는데 김순예 자매 그때 세분이 육이오가 끝났기 때문에 광주에 이 선생님이 계신단 말씀을 듣고 걸어 가셨지요. 그길 다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홈실, 광주 무등산을 거쳐서 광주 갈 양으로 소라니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인민군이 후퇴하다가 거기에서 집결하고 있던 것을 몰라보고 딱 들어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민군도 자기들이 살 양으로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전부 살피는 것이거든요. 보따리를 까보고 보따리를 까보니까 수상한 사람이거든요. 성경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우리 원수들이다. 잡아라. 묶어라. 사지를 틀어라. 세 사람이 묶여서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짐에서 성경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우리의 원수다. 이 사람들을 직결 처벌하라. 그래서 이 사람들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짐작하건대 총살은 못해요. 왜? 국군이 쫒아오니까 총알을 아껴서 죽창으로 세분을 찔러서 살해한 거지요. 군인들 인민군들이 그렇게 무참히 순교를 당하신 것이 구전이지요. 우리가 들어서 아는 것이니까 그 확실한 사건은 전기에 나와 있어요. 그러면 평소생활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아 사진관부인이 이런 모습으로 거기서 순교를 당하셨다. 그 남편한테 그 무제한으로 매를 맞고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 몇 달 근 일 년 이년 그렇게 매를 맞고 웃음으로 그를 대하고 떠났던 그러신 분이니까 거기서 순교를 당할 때도 그렇게 축복을 하시며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시며 순교 하셨겠다. 그건 짐작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확실한 것은 우리가 모릅니다.
그리고 순교하신 무덤이 세 분 계시더만요. 아까 가보니까 순교 박정화의 묘라. 이분이 소위 말하면 이발소 부인이란 말씀입니다. 이발소 어머니 그때 나이가 30대고 20 조금 넘으셨지요. 아주 젊은 부인들이지요. 쪽만 안 쪘으면 처녀와 같이 젊은 분이셨는데 그분도 사진관 댁과 똑같이 이 선생님의 감화를 받아가지고 출가하신 분이시지요. 그 어머니 일이야 전기에도 조금 나와 있지만 더 확실한 구전이 있다고요. 세분을 다 똑같이 대나무 꼬챙이로 살해를 했는데 쪼끔 급소를 안 맞아서 안상했던지 이발소 어머니는 딱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본 사람이 목격하기를 창자가 배 밖으로 나왔답니다. 창자를 정신이 왔으니까 자기 손으로 이렇게 잡고 딱 배를 움키고 기어간단 말입니다. 안 죽었으니까 지혜가 있잖아요? 거기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농촌 집이라는 것이 울타리는 없지요. 마당 겸 울타리 거기 솔잎을 긁어가지고 놓은데 밤중이니까 그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이 모진 생명이 안 죽으니까 숨었단 말입니다. 그 이튿날 시체 셋을 확인하러 와서 보니 하나가 없다. 놀래가지고 그 사이에 살아가지고 국군한테 고발해버리면 자기들이 죽거든요. 자기들이 살 소위 말하면 지혜지요. 이 사람이 어디 갔나? 피 자국을 따라가 보니 그 산골짜기에서 집으로 들어가 거기서 피가 끊어졌단 말이지요. 총을 들이대면서 여기 어제 밤에 사람이 숨지 않았느냐? 내놓아라. 그럼 주인은 모르지요. 절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는 모르오. 거짓말 마라. 죽인다. 총 놓는다. 그러니까 가만히 이발소 어머니가 상황을 보니까 내가 만일 이 이입을 열지 아니하면 이 무죄한 주인들이 죽겠다 싶어서 ‘나 여기 있소.’ 하고 기어 나왔단 말입니다. ‘나 여기 숨었소. 그 사람들은 모르요.’ 그 주인들이 해꼬지 당하니까 자기가 푹 뛰어나왔단 말입니다. 가자. 이년 그래 끌고 갔단 말입니다. 그래 두 분이 죽은 무덤 시체가 따로 있고 여기 집사님이 보니까 그분은 따로 딴 데서 죽고 있단 말입니다. 두 번 살해를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죽음을 당하신 거지요. 순교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