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라 이모 / 박지수
이모의 이름은 이미화입니다. 글라라는 천주교의 세례명으로 받았다. 이모는 1994년에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때부터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광주에는 지방에서 살고 있는 지체장애학생들이 광주은혜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꿈동산’ 그룹 홈이 있었다. 이모는 그룹 홈에 들어와서 지체장애학생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그해 나도 은혜학교에 다니려고 그룹 홈에 들어갔다. 나는 이모에게 양치질하는 방법과 옷을 갈아입는 것을 배웠다. 이모는 나를 욕조에 넣어놓고 명진이 목욕을 먼저 해 주고 나도 목욕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나와 명진이는 자기 전에 이모가 우유를 아이스크림에 부어주어서 마셨다. 이모가 나를 이모의 책상에 앉혀주니 내 수학숙제를 하였다. 그리고 주말에는 학교에 일찍 가니 이모와 나도 일어나서 미사를 보고 이모가 만두를 쪄주어서 선배들과 아침식사로 먹었다. 학교 공부를 하고 홈에 오면 아버지가 나를 데리려오는데 이모가 광주 송정리에 데려다주라고 말을 하여 함께 갔다. 나와 친구들의 엄마들이 학교 급식당번을 하고 수업을 마치고 엄마와 함께 그룹 홈에 왔다. 엄마와 선배들과 어울려서 저녁식사를 하고 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 겨울방학 하기 전에 엄마가 그룹 홈에 왔는데 아파트의 공기가 따뜻하게 좋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 그리고 선배들과 나도 어울려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엄마와 나도 하룻밤을 보냈다. 이듬해에 이모가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 시장구경을 시켜주었다. 이모의 보약을 복용한 덕분에 신호가 오면 대변을 쉽게 보았다. 이모가 나에게 신발도 선물 해 주었다. 그리고 탕수육도 시켜주어서 맛있게 실컷 먹었다. 이모가 나와 장현이 그리고 영훈이를 미용실에 데려가서 이발을 하였다. 내가 몸살이 났을 때 이모가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었다. 그 해 이모는 수녀가 되려고 수녀원에 들어갔었다. 수녀가 되는 과정은 외국으로 파송도 나가고 기도원 및 성지순례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전국에 있는 그룹 홈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실습도 하였다.
1997년 7월 28일 19시에 이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하였다. 엄마가 이모에게 내 건강문제로 보모와 싸워서 나를 데려 왔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모도 그룹 홈에서 지낼 때 시설에서 생활하였던 보모와 싸웠다고 하였다. 그 해 11월 9일에 이모가 휴가를 받아서 부모님과 나를 위로해 주려고 케이크를 사 가지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이모가 나와 동생을 일로초등학교에 데려가서 이야기를 하면서 놀아주었다. 저녁에는 가족이 목포에 있었던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돈가스를 먹었다. 이듬해 가을에 이모가 휴가를 받아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동생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 가족이 갈비식당에 가서 갈비를 먹고 일로에 있는 회산연꽃방죽에 바람을 쐬러 가서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와 동생이 사진을 찍고 행복하게 보냈다.
2000년에 이모가 정식 수녀가 되는 행사가 있어서 엄마가 이모의 거주지인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꽃을 택배로 보냈다. 수녀가 된 후 이모가 나에게 안부편지를 보내주었다.
2004년에 휴가를 받은 이모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부모님과 이모 그리고 나도 백련장어식당에 가서 장어를 먹고 이모가 나를 일로초등학교에 데려가서 내 표정을 보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구나 하는 말을 하였다. 사촌여동생인 수현이도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왔다. 부모님과 이모 그리고 나와 수현이가 회산연꽃방죽에 바람을 쐬러갔다. 이모와 나 그리고 수현이 세 사람이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하면서 바람을 쐬었다. 2013년에 휴가를 받은 이모가 케이크를 사 가지고 2009년생인 슬기를 데려와서 내 생일은 지났지만 케이크와 통닭(치킨)을 먹었다.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와 슬기도 회산연꽃방죽에 바람을 쐬러갔다. 이모가 엄마와 나에게 슬기의 생모는 슬기를 임신하였는데 맥주 때문에 고비가 있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슬기를 낳았다고 하였다. 평상에 앉아서 이모에게 2012년 3월 10일 광주에 있는 지체장애인의 자립센터에 가니 그룹 홈에서 함께 지냈던 강지선 언니를 무척 반갑게 만났다고 하였다. 이모가 엄마와 나에게 나중에 이모하고 지선언니 그리고 나와 슬기도 행복하게 함께 지내자고 하였다. 내가 이모에게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엄마가 매주 광주에 있는 꽃꽂이학원에 다녔다고 하고 나도 조기유학을 하였을 때 뿌듯하였다고 말을 하였다.
이듬해 동생이 나에게 서울에서 자립 하고 싶은지 물어봐 서울에서 자립하면서 성인 뇌변병장애인들의 야학에 배우러 다녀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에게 자립을 하고 싶다고 하니 몸이 약하고 언어장애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고 하여 내가 우울증에 걸려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이모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울고 있다고 하였다. 이모가 우리 집에 와서 가족이 경복궁식당에 가서 오리훈제를 먹고 이모가 부모님과 나에게 재우오빠가 폐렴에 걸려 이길 수 없어 사망하기 전에 누워서 잠을 못 자고 앉아서 잤다고 하였다.
이모가 나에게 혹시 보모를 만나고 싶은지 물어보니 내가 이모에게 나와 장현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그룹 홈에서 지냈지만 보모가 나와 장현이가 실수를 하면 꼬집었다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보모의 양 딸도 안타깝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듬해 1월 30일 8시에 엄마가 아버지에게 두통이 심하게 오니 삼성서울병원에 검사를 하러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엄마가 이모에게 전화를 하여 나를 봐달라고 하니 데리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를 이모가 관리하는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그룹 홈에 데려다주어 이모와 무척 반갑게 만나 하룻밤을 보냈다. 이모가 슬기의 생모에게 문제가 생겨 울었다. 부모님이 그룹 홈에 와서 가족이 매운탕으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모가 아이들은 시골에서 성장하는 것이 행복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엄마가 이모에게 아이들은 도시에 자라면서 문화혜택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재작년 9월 2일 동생이 결혼을 하였을 때 이모가 꼬마 여자 두 명을 데리고 예식장에 와서 무척 반갑게 만나고 내가 꼬마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나는 5월 가정의 달과 생일 그리고 연휴와 연말에 안부메일을 보냈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글라라 이모’를 표현하였다.
첫댓글 길어요. 이모와 덜 관련이 있는 것은 없애야 해요. 그리고 시간 순서대로 쓰게 되면 나열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어디 가서 뭘 먹은 얘기를 반복하게 되는 거지요. 먼저 이모를 소개하고, 박지수 씨를 어떻게 대했으며 가족과는 어떻게 지냈는지를 나눠서 얘기해 보세요.
"무척 반갑게 만나다"를 세 번이나 쓰고 있어요. "이듬해 동생이 나에게 서울에서 자립 하고 싶은지 물어봐 서울에서 자립하면서 성인 뇌변병장애인들의 야학에 배우러 다녀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에게 자립을 하고 싶다고 하니"에서 '자립하다'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