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卦名 | 3卦 水雷屯卦[수뢰둔괘, ䷂ ☵ ☳ 坎上震下감상진하] |
- 소통의 인문학 주역 11강 수뢰둔괘水雷屯卦① | |
卦辭 (文王) | 屯은 元亨하고 利貞하니 勿用有攸往이요 利建侯하니라(p.432) |
彖傳 (孔子) | 1. 彖曰 屯은 剛柔 始交而難生하며(p.434) |
2. 動乎險中하니(p.435) | |
3. 大亨貞은(p.435) | |
4. 雷雨之動이 滿盈일새라(p.436) | |
5. 天造草昧에는 宜建侯요 而不寧이니라(p.437) | |
大象傳 (孔子) | 象曰 雲雷屯이니 君子以하여 經綸하나니라(p.439) |
- 소통의 인문학 주역 12강 수뢰둔괘水雷屯卦② | |
爻辭 (周公) | 1. 初爻: 初九는 磐桓이니 利居貞하며 利建侯하니라(p.440) |
小象: 1. 象曰 雖磐桓하나 志行正也며 2. 以貴下賤하니 大得民也로다 | |
2. 二爻: 六二는 屯如邅如하며 乘馬班如하니 匪寇면 婚媾리니 女子貞하여 不字라가 十年에야 乃字로다(p.444) | |
小象: 象曰 六二之難은 乘剛也요 十年乃字는 反常也라 | |
3. 三爻: 六三은 卽鹿无虞라 惟入于林中이니 君子幾하여 不如舍니 往하면 吝하리라(p.448) | |
小象1: 象曰 卽鹿无虞는 以從禽也요 君子舍之는 往하면 吝窮也라 | |
4. 四爻: 六四는 乘馬班如니 求婚媾하여 往하면 吉하여 无不利하리라(p.453) | |
小象: 象曰 求而往은 明也라 | |
5. 五爻: 九五는 屯其膏니 小貞이면 吉하고 大貞이면 凶하리라(p.456) | |
小象: 象曰 屯其膏는 施未光也라 | |
6. 上爻: 上六은 乘馬班如하여 泣血漣如로다(p.456) | |
小象: 象曰 泣血漣如어니 何可長也리오 |
9.爻辭효사-五爻오효
p.453 【經文】 =====
九五屯其膏小貞吉大貞凶
九五, 屯其膏, 小貞, 吉, 大貞, 凶.
九五는 屯其膏니 小貞이면 吉하고 大貞이면 凶하리라
[程傳]九五는 膏(기름 고)=恩澤은택을 베풀기 어려우니, 조금씩 바로잡으면 吉길하고 크게 바로잡으면 凶흉하다.
[本義]九五는 膏고=恩澤은택을 베풀기 어려우니, 작은 일에는 곧으면 吉하고 큰일에는 곧아도 凶하다.
p.453 【傳】 =====
五居尊得正而當屯時若有剛明之賢爲之輔則能濟屯矣以其无臣也故屯其膏人君之尊雖屯難之世於其名位非有損也唯其施爲有所不行德澤有所不下是屯其膏人君之屯也旣膏澤有所不下是威權不在己也威權去己而欲驟正之求凶之道魯昭公高貴鄕公之事是也故小貞則吉也小貞則漸正之也若盤庚周宣修德用賢復先王之政諸侯復朝謂以道馴致爲之不暴也又非恬然不爲若唐之僖昭也不爲則常屯以至於亡矣
五居尊得正而當屯時. 若有剛明之賢, 爲之輔, 則能濟屯矣, 以其无臣也, 故屯其膏. 人君之尊, 雖屯難之世, 於其名位, 非有損也, 唯其施爲有所不行, 德澤有所不下, 是屯其膏, 人君之屯也. 旣膏澤有所不下, 是威權不在己也. 威權去己而欲驟正之, 求凶之道, 魯昭公, 高貴鄕公之事是也. 故小貞則吉也, 小貞, 則漸正之也. 若盤庚, 周宣, 修德用賢, 復先王之政, 諸侯復朝, 謂以道馴致, 爲之不暴也. 又非恬然不爲, 若唐之僖昭也, 不爲, 則常屯以至於亡矣.
五居尊得正而當屯時하니 若有剛明之賢이 爲之輔면 則能濟屯矣로되 以其无臣也라 故로 屯其膏라 人君之尊은 雖屯難之世라도 於其名位엔 非有損也요 唯其施爲有所不行하고 德澤有所不下하니 是屯其膏니 人君之屯也라 旣膏澤有所不下면 是威權不在己也니 威權去己而欲驟正之는 求凶之道니 魯昭公, 高貴鄕公之事 是也라 故로 小貞則吉也니 小貞은 則漸正之也라 若盤庚, 周宣은 脩德用賢하여 復先王之政하여 諸侯復朝하니 謂以道馴致하여 爲之不暴也라 又非恬然不爲를 若唐之僖昭也니 不爲면 則常屯以至於亡矣리라
五爻는 尊貴존귀한 자리에 있고 바름을 얻었으면서 어려운 때를 만났다. 萬一 굳건하고 밝은 賢明한 者가 輔弼보필해 준다면 어려움을 救濟할 수 있을 것이지만 臣下가 없기 때문에 恩澤을 베풀기 어렵다. 임금이라는 尊貴존귀함은 비록 어려운 世上일지라도 그 名譽명예와 職位직위에 損害손해나는 것이 있지 않고, 오직 그 施行시행함이 行해지지지 않고 德이라는 恩澤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것으로 임금의 어려움이다. 이미 恩澤이 내려가지 못한 것이 있으면 威嚴위엄과 權威권위가 自身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威嚴과 權威가 自身에게서 떠났는데 빠르게 바로 잡으려고 하면 凶함을 求하는 길이니, 魯나라 昭公소공과 高貴鄕公고귀향공의 일[주 165]이 여기에 該當한다. 그러므로 조금씩 바로잡으면 吉하니, 조금씩 바로잡는다는 것은 漸次점차로 바로 잡는 것이다. 盤庚반경[주 166]과 周宣王주선왕[주 167]이 德을 닦고 賢明한 者를 登用하여 宣王선왕의 政事를 復舊복구하여 諸侯제후들이 다시 朝會조회하도록 한 것과 같으니, 道를 使用하여 길들이며 이르도록 하고 갑자기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唐나라의 僖宗희종과 昭宗소종처럼 便安편안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恒常항상 어려워서 亡하게 될 것이다.
165) 魯노나라 昭公소공과 高貴鄕公고귀향공의 일: 春秋時代 魯노나라 昭公소공은 權臣 季孫氏계손씨를 除去하려다가 도리어 力攻을 받아 國外로 逃亡갔고, 三國時代 魏위나라의 君主 曹髦조모는 權臣 司馬昭사마소를 除去하려다가 失敗하여 高貴鄕公으로 降等되었다. |
166) 盤庚반경: 殷은나라를 發展시킨 17代 王으로 都邑을 商나라의 始祖 成湯이 나라를 세울 때의 都邑地로 옮겨 發展의 契機를 삼았다. 盤庚 때부터 商상나라를 殷나라라고 불렀다. |
167) 周宣王주선왕: 周나라 11代 王으로 周나라를 發展시켰다. |
p.454 【小註】 =====
朱子曰伊川易解也失契勘說屯其膏云又非恬然不爲若唐之僖昭也這兩人全不同一人是要做事一人是不要做與小黄門啗果實度日呼田令孜爲阿父不知東漢時若一向盡引得忠賢布列在內不知如何只那時都无可立[주 168] 天下大勢如人衰老之極百病交作略有些變動便成大病
朱子曰, 伊川易解也, 失契勘, 說屯其膏云, 又非恬然不爲, 若唐之僖昭也. 這兩人全不同, 一人是要做事, 一人是不要做, 與小黄門啗果實度日, 呼田令孜爲阿父. 不知東漢時, 若一向盡引得忠賢布列在內, 不知如何. 只那時都无可立.[주 168] 天下大勢, 如人衰老之極, 百病交作, 略有些變動, 便成大病.
朱子주자가 말하였다. "伊川이천은 易역을 解釋해석하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區分구분하지 못해 恩澤을 베풀기 어렵다는 말을 說明함에 唐당나라의 僖宗희종과 昭宗소종처럼 恬然염연=便安편안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전혀 같지 않으니, 한 사람은 일을 하려고 하였고, 한 사람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 宦官환관 小黄門송황문과[주 169] 과일이나 먹고 지내면서 宦官 田令孜전령자를[주 170] 아버지라고 불렀다. 東漢時代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줄곧 忠臣과 賢人을 包含하여 配列한 것이라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 때에는 모두 내세울만한 사람은 없었다. 天下의 大勢대세는 사람이 極度극도로 老衰뇌쇠하여 온갖 病이 함께 생기는 것과 같아 조금만 變動변동이 있어도 바로 큰 病이 된다.
168) 『朱子語類주자어류』에는 이 句節이 “只那都無主可立지나도무주가립”으로 되어 있다. |
169) 小黄門소황문: 東漢時代동한시대의 宦官환관. |
170) 田令孜전령자: 唐나라의 宦官환관. |
* 契勘계감: 어음이나 수표 따위를 맞대어 보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림 |
○誠齋楊氏曰以剛明之主宜其撥亂反正有餘也然其膏猶屯者有君无臣故也六四近臣則弱六三近臣則又弱六二大臣則又弱惟一初九遠而在下賢而在下然則將欲有爲誰與有爲哉此所以屯其膏也
○誠齋楊氏曰, 以剛明之主, 宜其撥亂反正, 有餘也, 然其膏猶屯者, 有君无臣故也. 六四近臣則弱, 六三近臣則又弱, 六二大臣則又弱. 惟一初九遠而在下, 賢而在下. 然則將欲有爲, 誰與有爲哉. 此所以屯其膏也.
誠齋楊氏성재양씨가 말하였다. "굳세고 賢明한 임금은 當然당연히 어지러움을 없애고 바름으로 되돌리기에 充分충분하겠지만 그 惠澤이 오히려 어려운 것은 임금이 있고 臣下가 없기 때문이다. 六四가 가까운 臣下라면 虛弱허약하고, 六三이 가까운 臣下라면 또 虛弱허약하며, 六二가 大臣이라면 또 虛弱하다. 惟一하게 初九가 멀리 떨어져 아래에 있고 賢明한데 아래에 있다. 그렇다면 큰일을 하려고 하지만 누구와 하겠는가? 이것이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까닭이다.“
p.455 【本義】 =====
九五雖以陽剛中正居尊位然當屯之時陷於險中雖有六二正應而陰柔才弱不足以濟初九得民於下衆皆歸之九五坎體有膏潤而不得施爲屯其膏之象占者以處小事則守正猶可獲吉以處大事則雖正而不免於凶
九五雖以陽剛中正, 居尊位, 然當屯之時, 陷於險中, 雖有六二正應而陰柔才弱不足以濟, 初九得民於下, 衆皆歸之, 九五坎體, 有膏潤而不得施, 爲屯其膏之象. 占者以處小事, 則守正猶可獲吉, 以處大事, 則雖正而不免於凶.
九五雖以陽剛中正으로 居尊位나 然當屯之時하여 陷於險中하고 雖有六二正應이나 而陰柔才弱하여 不足以濟하며 初九得民於下하여 衆皆歸之하고 九五는 坎體로 有膏潤而不得施하니 爲屯其膏之象이라 占者以處小事면 則守正하여 猶可獲吉이어니와 以處大事면 則雖正而不免於凶이라
九五는 비록 陽의 굳세고 中正함으로 尊貴한 자리에 있지만 어려운 때를 만나 險한 가운데 빠져 있고, 비록 六二가 바르게 應하고 있지만 陰의 柔順함으로 材質이 弱하여 救濟구제하기에 不足하며, 初九는 아래에서 百姓들의 마음을 얻어 사람들이 그에게로 歸依하고, 九五는 坎卦(감괘, ☵)의 몸체로 恩澤이 있지만 施行할 수 없으니,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象이 된다. 占치는 者가 이것을 본받아 작은 일에 對處대처한다면 바름을 지켜 오히려 吉할 수 있지만 큰일에 對處한다면 비록 바를지라도 凶함을 免하지 못한다.
p.455 【小註】 =====
雲峯胡氏曰六爻唯二五言屯二在下而柔五剛而陷於柔皆非濟屯之才二曰屯如時之屯也五曰屯其膏五自屯之也可以施而不施是自屯其膏出納之吝謂之有司非大君之道也又曰學易者貴於觀時識變卦有二陽初陽在下而衆方歸之時之方來者也五陽在上而陷於險時之巳去者也時已去雖陽剛亦无如之何矣故凶
雲峯胡氏曰, 六爻唯二五言屯, 二在下而柔, 五剛而陷於柔, 皆非濟屯之才. 二曰屯如, 時之屯也, 五曰屯其膏, 五自屯之也. 可以施而不施, 是自屯其膏. 出納之吝, 謂之有司, 非大君之道也. 又曰, 學易者貴於觀時識變. 卦有二陽, 初陽在下而衆方歸之, 時之方來者也. 五陽在上而陷於險, 時之巳去者也. 時已去, 雖陽剛亦无如之何矣, 故凶.
雲峯胡氏운봉호씨가 말하였다. “여섯 爻에서 二爻와 五爻에서만 어렵다고 하였으니, 二爻는 下卦에 있고 柔弱하고, 五爻는 굳세지만 柔弱함에 빠져 모두 어려움을 救濟할 수 있는 材質이 아니다. 二爻에서 어렵다고 한 것은 時期가 어려운 것이고, 五爻에서 恩澤을 베풀기 어렵다는 것은 五爻가 스스로 어렵게 한 것이다. 베풀 수 있는데 베풀지 않은 것은 바로 스스로 그 恩澤을 어렵게 한 것이다. 出納출납의 부끄러움이 官吏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偉大한 임금의 道理가 아니다.” 또 말하였다. “易을 硏究연구하는 者들은 時期를 살피고 變化를 아는 것에 對해 貴하게 여긴다. 卦에 두 陽이 있으니, 初爻가 陽으로 아래에 있어 뭇 사람들이 歸依귀의하는 것은 時期가 到來도래하는 것이고, 五爻가 陽으로 위에 있어 險함에 빠진 것은 時期가 이미 떠나간 것이다. 時期가 이미 떠나가면 비록 陽의 굳셈일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凶하다.”
韓國大全
【송시열(宋時烈) 『역설(易說)』】 |
膏澤屯而不下於民, 有應故小吉, 無輔故大凶. 處坎之中爻, 故幽暗而不能光明. 無博施濟屯之德, 故小象言之. |
恩澤이 베풀어지기 어려워 百姓들에게 내려가지 않으나, 呼應함이 있기 때문에 작은 것에는 吉하고, 도와주는 것이 없으므로 큰 것에는 凶하다. 坎감의 가운데 爻에 있기 때문에 어두워 빛나고 밝을 수 없으며, 널리 베풀고 어려움을 救濟할 德이 없으므로 「小象傳」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
【김만영(金萬英) 「역상소결(易象小訣)」】 |
坎屬血, 膏者血之凝也. 故有膏之象. |
坎감은 피에 屬속하고, ‘기름[膏고]’은 피가 凝固응고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의 象이 있다. |
【이현석(李玄錫) 「역의규반(易義窺斑)」】 |
易中大小字, 多指陰陽而言. 小爲陰, 大爲陽, 此所謂小指二三四陰爻而言也, 大卽指五也. 蓋世方屯難, 人君雖有剛陽之才, 中正之德, 不能獨有所爲. 若使在下三陰, 憫焉思恤, 恊心共貞, 以正厥事, 則足以濟屯矣. 以蜀昭烈之英雄, 棲遑亂離, 觸處顚沛, 及諸葛亮龐統法正輩出而共事, 然後能辦三分之業. 此卽小貞之吉也, 謂自小者, 貞之也. 苟無在下之應, 而五也徒奮剛果, 獨運於上, 則力不從心, 事與計違, 其敗必矣. 以皇明崇禎皇帝之剛銳英烈, 勵志中興, 而臣無一二之同體, 乏股肱之助, 終爲亡國之主, 堪隕志士之淚, 此豈非大貞之凶也歟. |
『易역』 가운데 大와 小 글자는 大部分 陰과 陽을 가리켜 말하였다. 小는 陰이 되고 大는 陽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小는 陰인 二‧三‧四爻를 가리켜 말하고, 大는 곧 五爻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大體로 世上이 어려울 때, 임금이 비록 굳센 陽의 才能과 中正한 德이 있을지라도 홀로 큰일을 할 수 없다. 萬若 아래에 있는 세 個의 陰이 걱정하며 救恤구휼할 것을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함께 곧아서 그 일을 올바르게 한다면 어려움을 充分히 克服할 수 있다. 蜀촉나라 昭烈帝소열제[주 171]와 같은 英雄으로도 戰亂 속에서 안절부절하여 蜀촉나라가 엎어지고 자빠질[顚沛전패] 危機위기에 處했는데, 諸葛亮제갈량[주 172]‧龐統방통[주 173]‧法正법정[주 174]과 같은 무리들이 出現하여 일을 함께하고 나서야 三分天下의 大業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陰이 곧음의 吉함이니, 스스로 陰인 者가 곧게 한다는 말이다. 眞實로 아래의 呼應이 없는데, 五爻가 굳세고 果敢하게 設置면서 위에서 혼자서 運營한다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일과 計劃이 어긋나서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 皇明崇禎皇帝황명숭정황제[주 175]와 같은 굳세고 勇敢한 資質로서 中興의 뜻을 가다듬었으나 한 몸 같은 臣下가 한 두 名도 없고 믿을 만한 도움도 없어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는 임금이 되고 志士지사를 죽이는 눈물을 堪耐감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陽이 곧아도 凶한 것이 아니겠는가? |
171) 昭烈帝(소열제, 161~223): 三國時代 蜀漢촉한의 初代 皇帝(在位 221~223)인 劉備유비(生卒 161~223)이다. 涿郡탁군 出身. 字는 玄德현덕. 諡號시호 昭烈帝소열제. 前漢전한 景帝경제의 後裔후예로, 184年 関羽관우(關雲長관운장), 張飛장비와 義兄弟를 맺고 黃巾賊황건적 討伐토벌에 參加참가하였으며 以後 여러 豪族호족 사이를 轉轉전전하다가 208年 諸葛亮제갈량을 얻고, 孫權손권과 同盟동맹을 맺어 赤壁적벽 싸움에서 南下하는 曹操조조의 勢力을 擊退격퇴시켰다. 以後 荊州형주와 益州익주를 얻고 219年 漢中王이 되었으며, 2年 後 蜀촉을 세워 첫 皇帝가 되었으나 荊州형주와 関羽관우를 잃자, 그 怨讐원수를 갚으려고 大軍을 일으켜 吳오와 싸우다 夷陵이릉 戰鬪전투가 敗北패배로 끝나고, 白帝城백제성에서 諸葛亮제갈량에게 아들 劉禪유선을 付託부탁한 後 病死병사하였다. |
172) 諸葛亮(제갈량, 181∼234): 中國중국 三國時代 蜀漢촉한의 政治家정치가. 字는 孔明공명, 뛰어난 戰略家전략가로, 南陽남양 땅에 隱居은거하고 있었는데, 劉備유비의 三顧草廬삼고초려의 禮예에 感激감격하여 世上에 나와 그를 도와서 吳오나라와 聯合연합하여 曹操조조의 魏위나라를 大破대파하고 巴蜀파촉 땅을 얻어 蜀漢촉한을 세웠음. 劉備유비의 死後 後任 임금인 劉禪유선을 받들면서 南方남방의 蠻族만족을 平定하고, 魏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大戰대전 中 病死병사했음. 諡號시호는 忠武충무‧武侯무후. |
173) 龐統(방통, 179 ~ 214): 後漢 末期 襄陽양양 사람. 字는 士元사원이다. 諸葛亮제갈량과 함께 名聲이 높아 鳳雛봉추로 불렸다. 群工曹군공조로 官職에 나갔다. 劉備유비가 荊州형주를 얻었을 때 麾下휘하에서 謀士모사로 있었다. 耒陽令뇌양령이 되었지만 잘 다스리지 못해 免職되었다. 諸葛亮제갈량이 그의 재주를 認定해 治中從事치중종사에 拔擢발탁하고, 諸葛亮제갈량과 함께 軍事中郞將군사중랑장을 지냈다. 劉備유비가 蜀촉으로 들어오자 計策을 올려 劉璋유장의 部將부장을 斬首참수하고 成都성도를 攻擊해 陷落함락시켰다. 雒城낙성에서 包圍포위되어 싸우다가 敵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關內侯관내후라는 官爵관작을 追敍추서받았고, 諡號시호는 靖정이다. |
* 謀士모사: 일을 이루기 위하여 꾀를 내는 데에 能한 사람. * 追敍추서: 죽은 뒤에 官爵관작을 내리거나 品階품계를 높여 줌. |
174) 法正(법정, 176 ~ 220): 劉備유비의 部下 參謀이다. 字는 孝直효직이다. 原來 劉璋유장을 섬겼으나 張松장송과 함께 劉備유비를 끌어들여 益州익주를 차지하는 것을 도왔다. |
175) 崇禎帝(숭정제, 1611 ~ 1644, 在位 1628 ~ 1644) 明나라 17代 마지막 皇帝(廟號묘호는 毅宗의종, 莊烈愍帝장렬민제), 本名은 朱由檢주유검으로 光宗광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天啓帝(천계제, 1621 ~ 1627)의 아우이다. 李自成이자성이 北京(북경, 現 河北城)을 陷落함락할 때 自決하였다. |
* 諡號시호: 죽은 사람의 生前 功績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特別히 내리는 것을 諡號라고 한다. 그런데 諸侯나 領主 身分의 邊方 君主들은 諡號를 내릴 수 없고, 天子이자 皇帝만이 내릴 수 있었다. 該當 當事者가 生前에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功을 세웠느냐에 따라 글자를 選擇하여 下賜하사했다. 儒學者나 文人들의 境遇경우는 '文' 글자를 많이 쓰고, 武人의 境遇는 '武' 를 많이 쓴다. 儒學者 安珦안향과 李栗谷이율곡은 ‘文成’이란 諡號를 받았고, 李舜臣이순신은 ‘忠武’가 諡號였다. 諡號는 重複으로 내려지는 境遇가 많았는데 '文簡문간' 이란 諡號는 70名이 넘는다. 忠武란 諡號를 받은 者도 7名이나 된다. 아무튼 半島를 支配했던 어떤 諸侯든 그는 諡號를 내릴 資格이 없었고, 諸侯 自身은 天子로 부터 받을 資格은 있었다. |
* 廟號묘호: 廟號란 임금(天子)의 祠堂 이름이란 뜻이다. 따라서 正祖정조 等 임금이 살았을 때는 正祖정조라고 부르지 않았다. 當時의 사람들은 임금을 現在의 王이란 뜻으로 '今上금상(皇上황상)' 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금이 죽고 난 後에 廟號를 定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正祖' 란 廟號가 定해진다. 따라서 正祖 임금을 '正廟', 英廟영조임금을 '英廟' 라고 부른다. 臣下들은 임금이 큰일을 解決했거나 좋은 일을 無難히 處理하거나, 或은 慶事스러운 일이 있으면 4句구의 文章을 댓구로 만들어 大殿대전에서 지어 올렸다. 이 글귀는 차곡차곡 쌓이는데, 死後에 이것이 임금 時節을 象徵상징하는 말이 되고 廟號가 된다. |
* 諱휘: 요즘은 이런 單語를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옛 碑文이나 神道碑 等에는 가끔 볼 수가 있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諱한다(꺼린다)' 라고 한다. 諱는 곧 '避피한다, 꺼린다.'의 뜻인데, 죽은 사람의 이름은 나이에 關係관계없이 부르지 않았으므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諱’라고 했다. 古傳고전 儒學時代유학시대에는 孔子공자와 孟子맹자의 이름인 '丘구와 軻가'를 避피(諱휘)했고, 甚至於심지어 朱子주자의 이름인 ‘熹희‘를 避하고자 ’熹‘글자의 밑에 火를 없애거나 이름자를 ’喜‘나 ’憙‘를 쓴 사람도 있었다. 임금의 이름도 그 임금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使用하지 못하게 했다. 高麗고려 임금의 이름인 ’武‘를 못쓰게 되자 意味가 비슷한 虎호로 바꾸어 武班 代身에 虎班으로 바꿔 쓰게 하여, 只今지금도 武란 글자를 '虎班武호반무' 라고 한다. ‘堯요‘를 못쓰게 되자 堯임금을 ’高고‘임금으로 부른 때도 있었다. 어떤 固執不通고집불통의 詩人(唐나라 때 李賀이하)은 自身의 父親 이름에 ’進‘字가 들어가 있다고 進士試驗을 치지 않는 境遇도 있었다. |
或曰, 審如是, 則亂世濟時之功, 皆自下出, 而不係於君上歟. 曰, 非也. 此爻剛陽中正而居尊位, 卽賢哲之君也. 而運値艱厄之會, 政需扶持之力, 故在下者可以輔佐而成功也. 倘是才匪陽剛德乏中正, 而時又擾攘, 則雖有伊呂, 亦何所展其用乎. |
어떤 이가 물었다. “이와 같이 본다면 混亂혼란한 世上에서 時代를 救濟하는 功이 모두 아래에서 나와 임금과 無關하다는 것입니까?” 答하였다. “아닙니다. 굳센 陽이 中正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으니, 곧 賢明하고 明哲한 임금인데 國運이 어려운 때를 만나 政治上정치상 도와주는 勢力세력이 必要필요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者가 輔佐보좌하여 功業공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或如혹여 才能이 陽의 굳셈이 아니고 德이 中正하지 않은데 時代마저 混亂하면, 伊尹이윤과 呂尙여상이라도 어떻게 그 쓰임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
難者曰, 大字果指陽爻而言, 則初九何獨不該, 而獨曰指五乎. 曰初九在屯之時, 居震之體, 爲成卦之主, 而大得民焉, 自五爻言之, 則便是曹操劉裕之類也. 程傳之釋六二爻辭也, 指初爲寇, 易之取義如此. 彼其操裕軰, 方有問鼎之志, 安可望其共貞乎. 卦中三陰, 皆有從初之勢, 故聖人以小貞起義, 而發之於五爻之辭, 誠使荀彧郭嘉劉穆之謝晦輩盡心王室, 如王敦之溫嶠桓溫之謝安, 則雖以操裕之才, 亦安能成其簒奪之圖哉. 此所以小貞之吉, 歸重於三陰也. |
詰難힐난하는 者가 물었다. “大字가 果然과연 陽爻양효를 가리켜 말한다면, 初九초구가 어떻게 해서 惟獨유독 該當되지 않고 오직 五爻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까?” 答하였다. “初九가 어려운 때에 震卦(진괘, ☳)의 몸체에 있어 卦를 이루는 主人이 되었고 크게 百姓의 마음을 얻었으니, 五爻의 立場입장에서 말하자면, 曹操조조[주 176]‧劉裕유유[주 177]와 같은 무리에 該當해당합니다. 『程傳정전』에서 六二의 爻辭효사를 풀이할 때에 初爻를 가리켜 盜賊도적으로 여겼으니, 『易역』에서 뜻을 取취함이 이와 같습니다. 저 따위 曹操나 劉裕의 무리들이 帝位제위를 簒奪찬탈하려는 마음을 품었으니, 어찌 일을 함께 바르게 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卦 가운데 세 個의 陰이 모두 初爻를 따르는 形勢가 있기 때문에 聖人이 ‘작은 일에는 곧음[小貞소정]’으로 뜻을 일으키고 五爻의 爻辭효사에서 말했으니, 참으로 荀彧(순욱, 163 ~ 212年)[주 178]‧郭嘉곽가[주 179]‧劉穆之유목지[주 180]‧謝晦사회[주 181]와 같은 무리들이 王室왕실에 마음을 다하기를, 마치 王敦之왕돈지[주 182]‧溫嶠온교[주 183]‧桓溫之환온지[주 184]‧謝安사안[주 185]과 같이 했다면, 비록 曹操조조와 劉裕유유의 才能일지라도 어찌 簒奪찬탈의 陰謀음모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작은 일에는 곧으면 吉하다[小貞之貞].’을 세 陰爻음효에게 重責중책을 돌린 때문입니다.” |
176) 曹操(조조, 155~220): 字는 孟德맹덕이며, 沛國패국 初(초, 現현 安徽省안휘성 毫縣호현) 사람이다. 黃巾황건의 亂난, 董卓동탁의 亂난 等등의 討伐戰토벌전에 參加참가하였고, 建安 13年에 스스로 丞相승상이 되어 荊州형주를 攻略하였다. 그러나 劉備유비, 孫權손권의 聯合軍에게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크게 敗하였다. 나중에 魏王위왕이 되어 在任하다가, 66歲로 洛陽낙양에서 他界타계하였다. |
177) 劉裕(유유, 363~422): 中國 南朝남조 宋송의 第1代 皇帝(황제, 在位재이 420∼422). 東晉동진 末 南燕남연, 後秦후진을 滅亡멸망시켰고 豪足호족 彈壓탄압, 土斷政策(토단정책: 戶籍호적 改正개정)을 斷行했으며 恭帝공제의 禪位선위로 帝位에 올랐다. 武功뿐만 아니라 統治 手腕수완도 뛰어나 國力의 富强을 꾀하였다. |
178) 荀彧(순욱, 163~212): 字는 文若문약이다. 潁川郡영천군 潁陰縣영음현 出身출신으로 祖父조부인 荀淑순숙은 荀子순자의 11世孫세손으로 名聲명성이 높았으며 父親부친인 荀緄순곤과 叔父인 荀爽순상도 모두 名望명망이 높은 名門家명문가 出身출신이다. 어려서부터 皇帝황제를 輔佐보좌할 材木재목으로 여겨졌으며 가족과 함께 冀州기주로 移動이동하여 曹操조조의 麾下휘하에 들어가 그의 策士책사가 된다. |
179) 郭嘉(곽가, 170~207): 後漢후한 末期말기 穎川영천 陽翟양적 사람. 字는 奉孝봉효이다. 後漢 末 天下가 어지러울 때 旬彧순욱의 推薦추천으로 曹操조조에게 歸依귀의하여 섬겼다. 司空軍祭酒 사공군제주가 되어 曹操조조가 謀主모주로 많이 依支했고, 征伐정벌에 나설 때마다 뛰어난 計策을 자주 建議건의했다. 果斷性과단성이 있어 曹操의 큰 信任을 받았다. 曹操는 그를 두고 “오직 郭嘉곽가만이 나의 뜻을 잘 안다.(唯奉孝爲能知孤意)”고 말했다. 洧陽亭侯유양정후에 封봉해졌고, 諡號는 ‘貞정’이다. |
180) 劉穆之유목지; 南宋남송의 政治家. |
181) 謝晦(사회, 390~426): 南朝 宋나라 開國功臣개국공신이다. 字는 宣明선명이다. |
182) 王敦之(왕돈지, 266~324): 東晉동진 琅邪낭야 臨沂임기 사람. 字는 處仲처중이고, 王導왕도의 從兄종형이자 晉武帝진무제의 사위이다. 揚州刺史양주자사를 지냈다. 西晉이 亡하고 東晉이 들어설 무렵 東晉 政權을 支持한 德에 征南大將軍정남대장군과 荊州牧형주목에 올라 兵權병권을 掌握장악했다. |
* 刺史자사: 郡縣군현을 總括총괄하는 地方行政官지방행정관. |
183) 溫嶠온교: 晉진나라 때 左長史좌장사와 太尉태위를 지낸 사람. |
184) 桓溫(환온, 312~373): 東晉동진 譙國초국 龍亢용항 사람. 字는 元子원자이고, 桓彝환이의 아들이자 明帝명제의 사위이다. 駙馬都尉부마도위와 琅邪太守낭야태수를 지냈다. 穆帝목제 永和영화 初에 荊州刺史형주자사에 올랐다. |
185) 謝安(사안, 320~385): 東晉동진 中期중기 陳郡진군 陽夏양하 사람. 字는 安石안석이다. 젊어서부터 名望명망이 높았고, 行書행서를 잘 썼다. 처음에는 世上에 뜻이 없어 拔擢발탁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會稽회계에서 隱遁生活은둔생활을 하면서 王羲之왕희지와 許詢허순, 支遁지둔 等과 交遊교유하면서 自然의 風流를 즐기다가 마흔이 넘은 中年에 비로소 中央政界중앙정계에 投身투신하였다. |
難者又曰, 子之所論, 於文義亦通, 而第與程朱之旨有殊, 何哉. 曰, 非敢求異於先賢也, 只以易爻取義多端, 此亦不害於自爲一說也. 本義多異於程傳, 厥後諸儒之註易者, 又或與本義參差, 此豈故爲異論哉. 良由義理無窮故也. |
詰難힐난한 者가 또 물었다. “그대의 論議는 글의 뜻에도 通하지만 다만 程子정자와 朱子주자의 뜻과 差異차이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答하였다. “敢감히 先賢선현과 달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但只 『易』의 爻효로써 뜻을 取함이 여러 가지이니, 이것도 저절로 하나의 學說이 되는 데에는 妨害가 되지 않습니다. 『本義』가 『程傳』과 다르고, 그 뒤로 여러 學者들이 『易』에 註釋주석을 단 것이 또한 間或간혹 「本義」와 어긋나니, 이것이 어찌 일부러 異論이론을 만든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義理의리가 끝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익(李瀷) 『역경秩序(易經疾書)』】 |
膏者, 水之甘美也. 雲雷屯而未解, 至九五則已久矣. 於是而雨則其甘如膏, 故天下望之如渴, 謂之屯膏者, 憫之之辭. 凡旱乾之時, 亦豈無往往恵澤. 只是尃而不咸, 是謂施未光也. 如人主雖或有濟人下餐之恩, 小恵終妨大德, 每欲逐人而悅之, 未免屯膏之歸矣. |
기름[膏고]은 甘美감미로운 물이다. 구름(☵)과 우레(☳)가 어렵고 풀리지 않아 九五에 이르렀다면 이미 오래된 것이다. 이때에 비가 오게 되면 그 달기가 甘美감미로운 물 같기 때문에 天下의 사람들이 목마른 듯이 바라니 恩澤은택을 베풀기 어렵다고 함은 불쌍하게 여기는 말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어찌 때때로 恩澤이 없었겠는가. 다만 베풀지만 두루 하지 못할 뿐이니, 이것이 베풂이 빛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君主가 비록 때때로 사람을 救濟구제하여 飮食음식을 내리는 恩惠를 베푼다고 하더라도 작은 恩惠로 끝내 커다란 德을 妨害방해할 것이니, 每番매번 사람을 좇아가며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結果결과를 免면하지 못할 것이다. |
【유정원(柳正源) 『역해참고(易解參攷)』】 |
正義, 膏謂膏澤恩惠之類, 言九五旣居尊位, 當恢弘博施. 唯繫應在二, 而所施者偏狹, 是屯難其膏. 出納之吝, 謂之有司, 是小正爲吉. 若大[주 186]人不能恢弘博施, 是大正爲凶. |
『周易正義주역정의』에서 말하였다. "기름은 恩澤은택과 恩惠은혜와 같은 것이니, 九五가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 널리 베풀어야 함을 말한다. 오직 呼應호응이 二爻에 매여 베풂이 偏狹편협하니, 이것이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것이다. 出納출납에 吝嗇인색한 것을 ‘有司유사’라 하니, 이것이 작은 일에는 곧으면 吉하다는 것이다. 大人이 널리 베풀지 못한다면, 이것이 큰일에는 바르더라도 凶하다는 것이다.[주 187]“ |
186) 大: 경학자료집성DB와 影印本에 ‘人’으로 되어 있으나 『周易注疏』에 依據하여 바로잡았다. |
187) 『周易注疏‧屯卦』: 象曰, 屯其膏, 施未光也. 句節의 소, 正義曰, 屯其膏者, 膏謂膏澤恩惠之類, 言九五旣居尊位, 當恢弘博施. 唯繫應在二, 而所施者偏狹, 是屯難其膏. 小貞吉, 大貞凶者, 貞, 正也. 出納之吝, 謂之有司, 是小正爲吉. 若大人不能恢弘博施, 是大正爲凶. |
○案, 小貞吉, 陽之才也. 大貞凶, 陷於險也. |
내가 살펴보았다. 작은 일에는 곧으면 吉하다는 것은 陽의 材質재질이기 때문이다. 큰일에는 곧아도 凶하다는 것은 險험함에 빠졌기 때문이다. |
本義, 處大[至] 於凶. 『本義』에서 말하였다. "큰일에 對處대처한다면 … 凶함을“ |
案, 貞正之道, 小事大事, 无所不吉, 而當屯膏之世, 勢屈時去, 則雖以貞正而末如之何. 如孔明之才, 終不能興復漢室, 而五丈星落, 文山之忠, 終不能沮遏金虜, 而柴市血濺, 是亦爲大貞凶也. 然而君子不以吉凶動心, 唯鞠躬盡瘁, 殺身成仁, 則是乃貞正之道, 而亦可謂凶中之吉也. |
내가 살펴보았다. “올곧은 道는 작은 일에서든 큰일에서든 吉하지 않음이 없지만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世上에 勢力이 꺾이고 때가 떠나면 올곧을지라도 어쩔 수 없다. 예컨대 孔明공명의 재주로도 끝내 漢나라 王室을 復興부흥시킬 수 없어 五丈原오장원으로 별이 떨어졌고, 文山문산의 忠誠으로도 끝내 金금나라 오랑캐를 막아내지 못해 柴市시시에 피를 뿌렸으니, 이것이 또한 큰일에는 곧아도 凶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君子는 吉凶 때문에 마음을 動搖동요해서는 안 되고, 오직 몸 받쳐 病병이 날 만큼 盡力진력하고 自身을 犧牲희생하여 仁인 을 이루니, 이것이 바로 올곧은 道이고 또한 凶한 가운데 吉함이라 할 수 있다.” |
【김상악(金相岳) 『산천역설(山天易說)』】 |
九五, 當屯之時, 居坎之中, 雖有六二之應, 應而不交, 四上之比而交者反爲陷蔽, 惠澤不究于下. 故有屯其膏之象. 居尊處屯, 得位而失時, 故小貞則吉, 大貞則凶也. |
九五가 어려운 때에 坎卦감괘의 가운데 있어 비록 六二의 呼應은 있지만 呼應하더라도 交際하지 못하고, 四爻와 上爻가 가까워 交際하는 것이 도리어 빠지고 막힘이 되니, 恩澤이 아래로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象이 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어려운 때를 만나 地位를 얻었지만 때를 잃었기 때문에 작은 일에는 곧으면 吉하고 큰일에는 곧아도 凶하다. |
○膏如陰雨, 膏之之膏, 坎象也. 人君之膏澤, 猶天之雨澤, 而屯於上而不下, 則无澤物之功也, 此有屯膏之象. 故鼎九三曰, 雉膏不食, 五以中正位天位, 而取象如此者, 何也. 曰,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易之道也. 乾坤之後, 次之以屯, 以震初爻爲主, 而彖爻皆言建侯, 則坎之中子雖有居尊之勢, 何可陵節犯義妄欲有爲乎. 故曰屯其膏而大小之吉凶不同, 所以師之爲卦, 坎互震體. 而六五指二爲長子, 三爲弟子. 又有輿尸之戒, 其義可見也. |
○“恩澤은 陰散음산한 비와 같으니, ‘恩澤을 준다.’는 恩澤은 坎卦감괘의 象상이다. 임금의 恩澤은 하늘의 雨澤우택과 같은데, 위에서 막혀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면 萬物을 潤澤하게 하는 功爻가 없으니, 이것이 恩澤을 베풀기 어려운 象이 있다. 그러므로 鼎卦정괘의 九三에서 ‘꿩의 아름다운 고기를 먹지 못한다.’라 하였는데, 五爻는 中正으로 임금[天]의 자리에 處하여 象상을 取함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答하였다. “乾卦건괘가 坤卦곤괘와 定해지고, 높고 낮음으로 펼쳐지고, 貴賤이 자리하니 이것이 易의 道이다. 乾卦와 坤卦 뒤로 屯卦둔괘가 와서 震卦진괘의 初爻로 主體주체를 삼고는 彖辭단사와 爻辭효사에서 모두 임금을 建立한다고 말하니, 그렇다면 坎卦인 둘째 아들이 비록 높은데 處하는 勢力을 지녔으나 어찌 節槪를 侮辱모욕하고 義理를 犯범하여 함부로 큰일 하고자 하겠는가. 이 때문에 恩澤을 베풀기 어려워서 크고 작은 일에 吉하고 凶함이 같지 않다고 했으니, 師卦사괘에서는 坎卦감괘의 互卦호괘가 震體진체이므로 六五에서 二爻를 가리켜 맏아들로 삼고, 三爻를 가리켜 아우로 삼았다. 또 輿尸(여시: 여러 사람의 主張)의 警戒를 두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
******(‘2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