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대는 신라 절터 위에 세운 정자
경주 내남면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문천(남천)과 서면에서 흘러오는 대천을 모아 포항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형산강이 덕동과 보문에서 흘러오는 북천과 합류되는 지점의 산 언덕에 금장대가 있다.
경주시 석장동 산38-8번지 일원으로, 빼어난 경치로 신라와 조선시대 시인묵객이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며, 경주의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 즉 삼기팔괴(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이란 말이 생겨난 곳이다.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경치에 반하여 쉬었다 간다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 가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여, 금장대 아래의 예기청소(藝妓淸沼)는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장대는 경치만 빼어난 곳이 아니라, 여러 유적이 함께이 공존하는 곳으로. 금장대가 위치하는 구릉 전체는 옛 고분이 산재해 있으며,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1994년 발견)가 있으며, 부처님에 대한 동경으로 공덕을 쌓고자 했던 금장사지, 그리고 화랑의 수련터, 조선시대 건물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적이 작은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35년에는 당시 경주 보통 학교 교장이던 오사카 긴타로 씨가 금장대에 소풍을 갔다가 두 화랑이 서로 맹세하며 돌에 새긴 '임신서기석'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금장대는 임진왜란 때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서천 전투의 지휘 본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정자에서 바라본 시가지
그러나 언제쯤인가 금장대라는 건물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던 곳에 경주시가 새로이 신라시대 건축양식으로 복원을 하였다. 안압지의 건물을 토대로 건립하고, 단청은 신라시대의 유물을 탐구해 당시의 문양과 색을 재현하고 우리나라 유일한 단청으로 시공을 하여 154.07㎡의 정자로 금장대를 복원하였다.
이곳은 금장대가 복원되기 이전부터 '금장사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며, 1980년 이곳에서 사리공양석상이 발견되므로서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되었다.
또한 2012년 경주시가 금장대 복원을 위하여 발굴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 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3~4칸의 건물로 추정되는 기단규모 동서 10m, 남북 18m의 평면 장방형 석축이 발굴되어 금장대에는 신라때부터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신라때의 건물이 금장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유개대부완과 조선시대 자기류, 기와류가 출토되었으며, 1980년에 발견된 사리공양석상과 모양과 성격이 매우 유사한 공양석상 2기가 석상 고정을 위해 바닥에 두었던 철판 17점과 함께 출토되어 금장대 일대에 사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따라서 신라때에 세워진 사찰터에 후일에 금장대라는 정자가 세워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장대에서 출토된 사리공양석상(舍利供養石像)
1980대에 발견된 사리공양석
1980년대 금장대 부근에서 수습된 것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82㎝정도의 원기둥형으로 상부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여의두문과 화문으로 방곽을 두르고, 내부에 향로로 추정되는 공양구를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과 가릉빈가가 경의를 표하는 조각상이 있다.
중앙의 공양구와 공양단은 먼저 방형의 공양단위에 좌우로 작은 향로가 배치돼 있으며 중앙에는 그 보다 큰 향로가 세로로 길게 드리워진 천(탁의卓衣) 위에 놓여 있다. 부처님 앞에 항을 공양하는 의식으로 볼 수 있다
뒷면에는 앞면의 형태와 거의 동일하지만 가릉빈가의 자리에 꽃이 조각돼 있으며, 공양단에는 중앙에 향로 좌우에는 촛대가 배치돼 있고 특히 중앙의 향로 위로 구름무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렇게 사리를 운반하거나 공양하는 장면이 표현된 예는 지금까지 모두 5점이 확인되는데 당시의 사리공양 의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1년에 발견된 사리공양석
위의 2점은 2011년 금장대지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석상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석상 중 1기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사리공양석상과 유사한 구도와 기법이 적용되어 있었으며, 다른 1기는 상부가 결실되고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양각으로 거북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2기의 석상은 발굴조사 당시 장초석으로 재활용되고 있어 후대에 금장대를 조성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기존에 발견되어 겅주박물관에 소장된 공양석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인물이 새겨진 석상은 그릇이 놓인 탁자 주변에 가릉빈가와 천인 등이 배치된 모습이다.
그릇을 불사리기(佛舍利器)로 보아 부처님 사리에 공양하는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그릇을 향로로 생각할 때 향(香)공양을 하는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거북무늬석상은 구름 또는 물결 위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거북을 새긴 석상이다. 아쉽게도 머리 부분이 깨어졌으나 지금까지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석상이다.
이 석상들은 통일신라 때인 8~9세기 경 작품으로 추정하며, 목탑의 중심 기둥을 세웠던 받침대로 정하기도 하지만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현재 국내에 5개가 남아 있다는 사리공양조각은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정진대사 원오탑,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연곡사 동·서부도에 있으며 모두 향로로 판단된다.
따라서 금장대 출토 '사리공양석상(舍利供養石像)'은 사리를 공양하는 장면이 아니라 향을 공양하는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명칭도 '향공양석상(香供養石像)'으로 불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관련자료 : 금장대출토 사리공양석상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662>
금장대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은 1935년 당시 경주 보통 학교 교장이던 오사카 긴타로 씨가 금장대에 소풍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각석(刻石)으로, 두 명의 화랑이 서로가 약속한 것을 돌에 새긴 남긴 것이다.
“임신년 6월 14일에 두 사람이 같이 빌고 적으며 하늘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를 지키고 과실 이 없기를 비노라. 만약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하늘이 큰 벌을 내릴 것을 다짐한다. 또한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반드시 행할 것을 서약한다. 또 앞서 신미년(辛未年) 7월 22일에 크게 빌 었듯이 시(詩)·상서(尙書)·예기(禮記)·전(傳)을 차례로 배워 익힐 것을 맹서하되 3년 안에 다하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