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운 그 자리에 아이들을 / 김석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고마운 사람이 가끔 생각난다. 내 교직 생활에서 장성북중(장성백암중) 선생님들이 그렇다. 전남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학교다. 학생 60명, 교사 8명, 행정실 직원 3명이다. 3학급으로 아담한 학교다. 2010년 9월 처음 교장 발령을 받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예서체로 써진 청출어람(靑出於藍) 글씨가 눈에 띄었다. 서예가 학정 선생의 글씨다. 그는 교실 앞 화단 비석에 이름을 새긴 초대 이승호 교장 선생님 아들이다. 내게 서예를 가르쳐 주었던 일속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백양사 가는 길에 제자들과 함께 학교에 들러 글씨를 보고 결혼하기 전에 썼던 것이라고 내게 귀띔했다.
교사 대부분은 사십 대 후반과 오십 대 초반이다. 둘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 모두 광주서 출퇴근한다. 나는 교사가 되어 처음 중학교에 근무했지만 교직 생활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행정실 직원이 오후 네 시 반부터 문단속하러 복도에 왔다갔다 하는 것이 내게 낯설었다. 모두 집에 가고 텅 빈 교정을 살펴보니 은행과 단풍나무가 많다. 텃밭에 매화나무도 여러 그루가 있다. 전임 교장 선생님이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국어 선생님이며 도교육청에 근무할 때에 선배 장학사다.
부임하고 한 달쯤 지나서 무지개학교 공모 공문이 왔다. 그 내용을 보니 혁신학교 사업이다. 학교 문화를 바꾸고 학생 중심 교육을 실천한다는 데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이 사업이 우리 학교에 맞는지 고민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젊은 교장이 오자마자 일감부터 가져온다는 오해를 살까 염려됐다. 나는 학교 운영에 교사의 자발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교직원 스스로 하는 일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신청하자는 의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 모두가 사범대학 출신으로 잠재 능력이 많다. 교사가 되고 싶어 교원 양성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다. 대부분 첫 발령을 받았던 기분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리라고 다짐한다. 학생들에게 뭐든지 열심히 해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흘러 대부분 불꽃같은 열정은 사라지고 시계추처럼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하는 생활인이다. 잠자고 있는 그 능력과 열정을 조금만 끄집어낸다면 학생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교장실 창문 밖으로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학교 오가는 길에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나고 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물들 무렵이다. 친목회 날 학교 인근 식당에서 전교직원이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학교 생활과 아이들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연구부장이 학교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하고 싶은 데 예산이 없다고 했다. 나는 “무지개학교를 신청하면 어떻겠냐?”라고 했다. 다음 날 그녀는 교장실에 와서 무지개학교 신청을 진짜로 원하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하면서 모든 선생님이 동의해야 신청한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서 교무부장이 무지개학교 신청 건으로 직원 회의를 하자고 했다. 교직원 모임에서 여러 의견이 오갔다. 혁신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나왔다. 나는 되도록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의견을 들었다. 교장이 아니라 교직원의 한 사람으로 발언하려고 했다. 회의는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진행됐다. 그날 결론이 나지 않았다. 퇴근길 차도 막히니 다음에 또 논의하기로 했다. 나는 사업 취지나 의견을 이미 말했으니 다음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교직원들이 자유롭게 논의하라고 했다. 다만, 행정실 직원을 포함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신청하지 않겠다고 했다.
일주일이 지나서 연구부장은 무지개학교 신청에 모든 교직원이 찬성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두 사람이 반대해서 설득하는 데 시일이 걸렸다고 했다. 그 이후 논의해서 결정할 사항이 있으면 만장일치가 돼야 일을 시작했다. 서로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데 우여곡절이 거듭되고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일단 합의하면 진행이 순조롭고 빨랐다. 교직원 모두가 각자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소문이 도교육청까지 알려져 교육청 주관 행사에서 장학사가 우리 학교를 ’만장일치 학교‘라고 소개했다.
첫 행사로 ’지리산 둘레길 생태체험’을 실시했다. 2박 3일 동안 모든 선생님과 전교생이 함께 걸었다. 나이가 많은 사회와 체육 선생님이 사전 답사했다. 학생 대표와 선생님들이 모여 일정을 짰다. 계획을 세우면서 한 번 사전 답사로 안 되겠다고 주말에 다시 했다. 프로그램은 서어나무 숲 명상, 허브 체험, 황산대첩비 강연 등으로 구성했다. 학생들에게 빨리 빨리하는 습관보다 느리게 걸으면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처음에 학생들이 따가운 봄볕과 거친 바람을 받으면서 종일 걷는 데 부담을 느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 대부분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이 뿌듯하다고 했다.
그 이후 한라산 생태 체험학습, 국외 장보고 프로젝트, 교과 통합 수업 등 많은 혁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와 수업 대화‘다. 교사의 수업 전문성을 높이는 것은 혁신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도 중요하다. 그 당시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대부분 혁신 학교에서 수업 혁신 프로그램으로 ’배움의 공동체‘ 연수를 하고 있었다. 여러 번 논의와 현장 답사를 거쳐 우리는 서근원 교수가 소개한 '수업 분석 연구'를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서 교수를 초청해서 과학실에서 그 이론과 프로그램을 소개받았다. 그는 "제가 하는 작업은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 작업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저랑 함께 작업하시려면 다른 일을 접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설명을 들으면서 선생님들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선 일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우리끼리 한 번 더 상의한 뒤 연수를 할지 말지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선생님들이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첫 워크숍 연수를 이틀에 걸쳐 방장산 자연 휴양림에서 저녁 늦게까지 했다.
수업 분석 프로그램은 교사가 수업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분석해서 원인을 추론하는 것이다. 아이의 관점에서 수업을 해석하고 대안을 찾아낸다. 한 달에 두 번 금요일 4교시 이후부터 연수 시간이다. 선생님들은 돌아가면서 수업을 공개했다. 매번 공개할 때마다 수업 교사는 두 명의 아이를 지정했다. 수업을 참관하는 선생님들은 두 모둠으로 나누어서 각각 아이를 중심으로 수업을 관찰하여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 아이가 어떤 특성이 있는지 그것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수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한다.
수업 대화는 점심 먹고 오후 한 시 반부터 시작해서 보통 저녁 일곱 시가 넘어야 끝났다. 선생님들은 학생 행동을 이야기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업 대화를 마치면 선생님들은 보고서를 썼다. 수업 교사는 수업자의 처지에서, 참관 교사는 관찰자의 처지에서 아이를 중심으로 수업 대화를 통해서 발견하거나 깨달은 것을 정리한다. 모둠별로 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각 모둠에서 논의한 것을 정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고서 양이 늘어나고 질이 좋아졌다. 글에 선생님들의 진정성이 담겼다. 학교가 어떤 방향과 과정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모두가 함께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학교 변화를 꿈꾸는 다른 학교 선생님들도 읽었으면 하는 글이다. 그래서 책으로 나온 것이 ≪나를 비운 그 자리에 아이들≫이다.
수업 혁신 책이 출판되고 나서 학교가 유명해졌다. 수업을 보고 싶다고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학교가 연구와 연수 분위기로 바뀌었다. 선생님 모두가 그동안 잠자던 교육 열정을 다시 꺼낸 것이다. 장작에 불을 붙이기 어려운 것처럼 그들도 처음에 열정을 꺼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단 붙기만 하면 활활 타오르듯이 열정도 그랬다. 덕분에 여러 사람이 내게 칭찬을 많이 했다. 내가 아니라 교직원들이 받아야 할 말이다. 지금도 그 책을 보면 고마운 얼굴이 생각난다. 그중에 셋은 현재 교장이고 둘은 장학사, 한 분은 교감이다. 언제 생각해도 장성북중 선생님 모두 고맙다. 그들은 지금도 그 열정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첫댓글 자발성과 동료성, 상생이 무엇인지 실천한 글 속에 담겨있네요. 언제 생각해도 큰 보람일 것 같습니다. 같이 근무했던 분들은 리더를 잘 만났구요. 일생의 큰 행운으로 기억할 겁니다.
교장 선생님 고맙습니다.
혁신 학교라고 모든 교사가 한마음으로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교장 선생님의 리더십이 잠자는 열정을 깨운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성장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관리자와 교사들이 한마음으로 신바람나게 일하셨겠어요.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을 비롯하여 구성원 모두의 가슴에 잊지 못할 장성백암중이었겠네요.
교사의 숨은 열정을 깨운 원장님의 리더십이 빛나네요.
고맙습니다.
교사들을 존중하며 끌어 주시는 교장 선생님, 열정적으로 함께하시는 선생님들 모두 아름답네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부러워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혜와 열정으로 멋진 학교를 만드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