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36
마의태자가 머물렀던 군자리 마을
우리는 2024년 12월 3일부터 참 힘든 일을 겪고 있다. 21세기에 겪었던 최대 충격이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총을 겨눈 친위(親衛) 쿠데타 계엄령 사건이다. 아직 사건은 진행 중이고, 그 충격이 그대로 남았는데, 벌써 대통령 선거 출마 이야기가 나온다. 참 슬픈 현실이다.
이런 슬픈 현실은 춘천시 동산면 군자리에도 남아 있다. 바로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 이야기이다. 마의태자가 군자리에 잠시 쉬었다 갔다고 해서 군자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 모래재[산마루 고개, 여기서 ‘모래’, ‘몰’은 산을 뜻하는 옛말이다]로 불리는 고갯마루는 종자현(宗子峴), 또는 종자리고개라 한다. 종자(宗子)는 종가의 맏아들이니 마의태자를 일컫는 말이고, 현(峴)은 그가 왔던 고갯마루이다. 그러고 보니, 군자리 지명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될 때부터 불렀던 참 오랜 땅이름이다.
신라 경순왕은 나라가 쇠약해져 가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놀기만 하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패해 임금과 왕비와 대신들이 모두 농락을 당했다. 경순왕은 대책을 세울 수 없어 고려 왕건에게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천년을 이어온 나라를 넘겼다. 전쟁의 현장에서 나라의 주권을 넘겼으니, 신라의 백성에게 경순왕은 총칼을 겨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의태자는 경순왕을 향해 외쳤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느니, 오직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입니다. 어찌 일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입니까.”(삼국사기)
경순왕은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구차하게 백성을 죽일 수 없다고 변명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고통을 그는 저버렸다. 하지만,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서 인제 갑둔리에서 구국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는 춘천 군자리, 홍천 공작산, 인제 갑둔리, 설악산 한계산성 등에서 끝까지 불의에 항거하였다.
춘천 군자리 또는 종자리가 생긴 유래이다. 군자리(君子里)도 임금의 아들을 뜻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군자곡, 종자동, 군들, 종자현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가 남긴 지명이다.
마의태자는 군자리에서 잠시 머물면서 구국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방이 트여 요새는 아니었다. 마의태자는 그를 따르는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참 고된 일정이었다. 그는 은행나무 지팡이를 짚었는데, 양평 용문사에 이르러 땅에 꽂았다. 그리고 홍천 공작산 지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작산에서는 궁궐을 짓고 몇 년을 머물렀다. 그러나 땅이 좁아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었다. 홍천군 동면 노천리 일대에 지왕동, 궁뜰, 양마(養馬)터 등의 지명을 남겼다. 마의태자는 다시 홍천에서 나와 두촌면 군네미[군넘이]를 지나서 인제군 남면 갑둔리 일대에서 터를 잡았다.
갑둔리 일대에서는 왕으로 추대된다. 김부대왕(金富大王)이었다.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개골산에서 마의(麻衣, 삼베옷)를 입고 지내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부대왕은 갑둔리를 기점으로 양구와 인제 일대에서 군량미를 조달하며 망한 신라를 찾고자 구국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운명은 마의태자를 돕지 않았다. 구국운동은 믿었던 맹 장군이 죽으면서 실패로 끝났단다. 그 활동이 오층석탑, 수구네미, 토끼봉 등 곳곳에 지명과 설화로 남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미나리전을 좋아하고, 단오 때는 수리취떡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청춘남녀에게 숨겨 놓은 취떡을 찾으면 남자는 학업을 잘하고, 여자는 길쌈을 잘한다는 단오 이야기도 전한다. 김부대왕이 돌아가신 후 마을에서는 대왕각(大王閣)을 짓고 그곳에서 매년 김부대왕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대왕각 제사는 1994년 군작전 지역으로 마을 사람이 모두 떠나갈 때까지 이어졌다. 그 후 마의태자 후손들이 제사를 이어 지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학자와 문인들은 마의태자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 글은 일제강점기 때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다.
군자리에는 오늘도 마의태자가 지나간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전승된다. 망국 신라를 통해, 우리는 백성을 속이든가 버리면 나라가 망하고 슬픈 현실이 온다는 교훈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