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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장 4-12절, 시편 22편 1-8절, 마태복음서 12장 9-21
[첫 눈에 반하다]
작년부터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3년 성서일과에 따라 매일 성서를 조금씩 읽어가고 있고, 저는 일주일간 교우들이 읽으신 성서 내용 중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합니다.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목회 상황과 교회의 방향, 교인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주제를 정하고 또 그 주제에 맞추어 적당한 성서 본문을 찾는 방식이 있고, 매 주일 교회 전통에 따라 그 날에 주어져 있는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지금 저는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녹여서 매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 주 동안 교우들께서 읽으신 성경말씀 안에서 설교 본문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제약이 따르지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편으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서 주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설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가서는 제가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한 이후에 오늘 처음 설교 본문이 되었습니다. 아가서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여러 사랑 노래와 아름다운 언어로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랑 노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또는 첫눈에 반한 사람들끼리 상대의 외모와 매력에 대해 감탄하고, 서로를 애타게 부르고, 19금(禁) 이상의 실제적 또는 상징적 표현들이 노골적으로 등장합니다. 아가서에는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노래가 성경에 담겨 있다는 것에 놀라고 또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서로 만나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그의 짝을 만들어 주십니다. 동물들 곁에서도 외로움을 느꼈던 첫 사람은 하나님이 데리고 온 자신의 짝을 보고 감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이 사람의 탄성을 오늘날 오글거리는 언어로 다시 표현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나요! 내 사랑, 이제 당신 영혼은 내 영혼, 내 모든 것이 당신의 것! 잃어버렸던 내 영혼의 반쪽! 당신이 오목이라면 나는 볼록이, 당신이 볼트라면 나는 너트, 우리는 한 세트입니다."
자기가 찾던 단짝을 만나면 누구나 탄성을 지르기 마련입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세상도 달라 보이지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따라서 연인들이 자신들의 사랑 노래를 표현할 수 있도록 성경 안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천년간 불려 온 노래들 대부분의 주제는 연인간의 사랑입니다. 중국 고전 중에 <시경>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도 중국 고대 각 지역에서 불리던 온갖 사랑 노래들이 실려 있습니다. 축제를 맞이하여 선남선녀들이 강변으로 몰려 나왔는데, 거기에서 아리따운 여성이 멋진 남자를 발견하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머, 저 물가 푸른 대나무 옆, 저 멋진 남자 봤니? 조각미남이네. 깍은 듯 다듬은 듯, 쫀 듯, 간 듯, 어쩜 저렇게 훤칠할 수 있지. 자체 발광이다. 아우라가 느껴져. 한 번 슬쩍 봤는데 잊을 수가 없네. (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咺兮, 有匪君子, 終不可諼)
어머 저 물가 짙푸른 대나무 숲, 저 멋진 남자 봤니? 옷도 깔맞춤이야, 귀걸이도 멋지고, 걸음걸이도 귀티가 좔좔 흐르네. 영영 못 잊을 것 같아. (瞻彼淇奧, 綠竹靑靑, 有匪君子, 充耳琇瑩, 會弁如星, 瑟兮僩兮, 赫兮咺兮, 有匪君子, 終不可諼兮)
어머나, 저 물가 빽빽한 대나무 숲, 저 멋진 남자 봤니? 보석 같이 빛나, 온 몸에 다이아몬드, 사파이어를 두른 것 같아. 람보르기니를 타고 왔잖아, 어쩜 말도 저렇게 멋있고 재밌게 하지. 나 오늘밤 잠 못 이룰 것 같아." (瞻彼淇奧, 綠竹如簀, 有匪君子, 如金如錫, 如圭如璧, 寬兮綽兮, 倚重較兮, 善戲謔兮, 不爲虐兮) - 詩經 國風, 衛風 淇奧
J.Y.Park(박진영)가 작사 작곡을 하고 직접 부른 노래 중에 "어머님이 누구니?"(Who's your mama?)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중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널 어쩌면 좋니 너를 어쩌면, 널 어쩌면 널 어쩌면 좋니, 네가 왜 이렇게 좋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을 떼질 못하잖니,
어머님이 누구니, 도대체 어떻게 너를 이렇게 키우셨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가서의 한 구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왕비가 예순 명이요, 후궁이 여든 명이요, 궁녀도 수없이 많다마는, 나의 비둘기,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 어머니의 외동딸, 그를 낳은 어머니가 귀엽게 기른 딸, 아가씨들이 그를 보고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상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서 그 사람을 낳아주고 길러준 분에게까지 감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겠지요.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고 충만한 행복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세상에서 사랑 이야기는 영원한 주제이고 늘 반복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일상이고, 철학의 주제이고, 종교의 핵심 테마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사랑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합니다.
[사랑의 분석]
오늘 아가서를 보니 한 사람이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옛 수도인 디르사나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과 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서울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상대의 눈과 마주치면 사랑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자신을 보지 말아달라고 역설적으로 애원합니다. 왕비가 예순명, 여든 명의 후궁, 수없이 많은 궁녀를 거느린 왕도 부럽지 않습니다.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첫눈에 반한 것이고, 내가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상대를 본 순간 내 마음은 흔들렸고, 내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사람 생각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한번쯤은 이런 일을 겪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의 특징은 우선 수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무엇을 하기 전에 상대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선 상대의 멋진 외모에 끌립니다. 뚜렷하고 자로 잰 듯한 이목구비와 훤칠한 키, 8등신의 황금비율의 몸매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나 고개가 절로 돌아가고 눈이 휘둥그레지지요. 그러나 외모가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매력이 있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탁월한 연주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실력 있는 운동선수에게 빠져들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상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요?
플라톤의 <향연>(Symposion)이라는 책은 이 문제를 풀기위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조물주가 처음 지은 사람은 팔도 네 개, 다리도 네 개, 몸은 둥글둥글했습니다. 비탈을 내려갈 때에는 팔과 다리를 몸에 붙이고 빠르게 굴러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의 미움을 사서 반으로 쪼개지는 벌을 받았고, 그래서 이 둘은 평생 자신들의 짝을 찾다가 만나면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사람은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할 때 사랑의 감정이 든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상대가 내 부족한 것을 메꿔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모이든, 성격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결핍에 있고, 이것을 채워서 완성하려는 욕구로 인해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노랫말대로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궁녀가 있어도 무용지물인 것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 채우겠다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상관없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돈과 권력으로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일을 하겠지만, 사랑은 더 나은 자신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목적과 의도가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욕망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잘 채워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서로 채우려는 것이 다르고, 또 채우는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이런 사랑은 쉽게 금이 가고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되어 버리고, 배신이라는 깊은 상처의 흔적을 우리 마음에 남깁니다.
자신이 기준이 된 사랑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관심사, 자신의 욕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줄 사람을 잘 찾으려면 우선 자기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자기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자신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그런 판단 위에 나의 부족함을 메꿔줄 상대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평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 발전할 지도 잘 모르고, 또 상대에 대해서는 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귐의 시간을 가지면서 알아가긴 하는데,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만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를 키워주고 길러낸 사람들, 그가 자라온 모든 환경을 이해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단시간 안에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사람은 없는 것을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이며, 오지 않은 미래를 선취하여 모험하는 존재이며,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이런 우연적 요소들이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안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면서 사귐의 시간이 깊어지다 보면 이 사람에 대해서 알만큼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알만큼 알았다는 것은 과거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람은 주변의 환경이나 관계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거듭나고 다른 삶을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 자신과 상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사랑에 빠진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서 하는 사랑은 실로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또한 상당수의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상대에게 투사하거나 연애하는 그 시간과 분위기에 투사합니다. 즉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려왔던 사람의 모습을 상대에게 투영하거나, 지금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연애감정과 그 분위기에 도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투사는 언제나 현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첫 눈에 서로 반해 푹 빠져 버린 사랑도 몇 년을 가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였던 사랑,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그 사랑이 깨어지고 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사랑에 빠졌던 자의 탄식]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저자는 목놓아 울부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상대로 탄식하고 있지만, 하나님 이전에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올 때 이런 심정이 됩니다. 상대에게 푹 빠져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다 내어 주고 온갖 정열을 바쳤는데, 상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 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의 불꽃은 한순간에 재가 됩니다. 상대의 몸짓, 눈빛에는 냉기만 흐릅니다. 사랑은 미움와 분노로 변하고 인생은 갑자기 절망의 심연으로 내동냉이 쳐집니다.
그럴 때 우리가 느끼는 심정은 자신이 한 마리 벌레만도 못한 것 같고,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것처럼 수치심을 느끼며, 온갖 죄책감과 후회가 몰려옵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괴로움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은 이제 미적지근하고 냉랭한 사랑이 됩니다. 타협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꿈꾸었던 완벽한 사랑은 한낱 이상임을 깨닫고, 헤어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함께 사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하니까, 또 가정을 꾸리고 식구들에게 적당히 맞춰주면 험난한 세상에서 그나마 안전한 삶의 보금자리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냥 정으로 살아가거나, 때로 돈과 사회적 습관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그런데 우리는 바로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면서 또는 갈등과 불화를 겪으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사랑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사랑에 빠지지 말고, 사랑을 하라"라고 달았는데, 어쩌면 사랑에 푹 빠졌던 것이 실패로 돌아간 그 시점이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무르익은 그 시간이 된 것일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 본문에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어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영을 부어주셨는데, 그는 바로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에게 공의를 선포하면서 다투거나 외치거나 목청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의를 선포한다는데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는 다만 몸으로 실천할 뿐입니다. 정의가 이겼다고 말할 때까지 그는 묵묵하게 일을 하는데, 그 일의 성격은 이러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의 행위에서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야훼 하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는 종의 모습을 보았는데, 바로 예수님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내 것을 채우기 위한 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상대의 필요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놀랍게도 관심을 두는 대상은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상한 갈대 대신 강한 갈대에 관심을 두고, 꺼져 가는 등불보다는 밝게 빛나는 횃불을 좋아합니다. 상한 갈대는 별 볼일 없고, 꺼져 가는 등불은 소용없기 때문에 사실 상한 갈대는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은 꺼버립니다. 상한 갈대를 보살피거나 꺼져 가는 등불을 살리려다 자기만 손해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은 내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이니 더 멀리하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모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의 처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일렁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 욕구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감정의 일렁임이나 성적 욕구가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 사랑이 지니는 특성은 일반적 사랑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에게서 내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끌려갔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은 매우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꺼져 가는 불도 다시 살리겠다고 뛰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 줄 테니 너도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랑은 주고받기이고, 받았으니 주고, 주었으니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사랑은 달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주고 싶어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받고 되갚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저 사랑을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하고, 세상의 조건적 사랑, 주고 받기식의 상호호혜적 사랑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원칙적으로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저 자신을 드러내신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의 삶을 가득 채우려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 사랑 하는 존재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빠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내가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실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이방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19의 급격한 확산과 폭염 등으로 인해 활동이 줄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우리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리들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나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 차분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우리 삶에서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지도 차분히 생각해 보고, 이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을 실천해 보는 훈련으로 나아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다시 살려 보려는 노력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사랑 능력이 너무 적다면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의 그릇을 키우는 훈련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랑을 합시다. 말이나 혀가 아닌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진리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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