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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시조의 근대화 모색
장성진(창원대 교수)
1. 근대화의 외적 여건
1) 근대문학 논의의 기본 관점
고시조는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공연의 레퍼토리로서, 가곡과 시조창의 다양한 음악 갈래에 적합하게 구성되고, 대중 친화적 주제를 확대하면서 외연을 넓혀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 의식이나 사상 지향 또는 표현 미학 등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지고, 소위 가객들의 노랫말로서 의의가 더욱 커졌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촌각을 다투면서 급변해 가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재등장하였다. 시조 근대성을 사회 전반의 거시적 쟁점 안에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문학사 연구에서 근대성 내지 근대화 담론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논쟁거리의 하나이다. 근대화가 먼저 진행되고, 또 하나의 준거로 제시되는 유럽과 사정이 다른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동아시아의 이웃 나라들에 비해서 근대화 논의가 계속되는 데는 한국이 처했던 문학외적 사정이 있다. 감정적으로는 서구나 일본 문학과 무관하게 한국문학의 근대화를 논의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한국문학의 근대화는 외세들이 일으킨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의 근대문학론에서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삼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18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15년간 내전을 겪었던 유신의 찬반 주체들이 근본적으로 같은 해결책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오래 세력을 장악했던 막부와 천황권 부활을 기치로 내건 번(蕃)의 대결이 진행되었지만 묘하게도 그 주도 계층의 타결 방향이 같았던 것이다. 1850년대 초반 미국의 통상 요구를 접하면서 페리호의 위력에 막부가 곧바로 친미 개화를 결정하였듯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걸고 막부와 대결하던 유신파도 유럽 제국과 맞붙어 보고 영국을 시찰하는 도중에 친유럽파로 전환함으로써 승자가 패자의 정책을 이어받는 상황이 된 셈이다. 이로 인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서구 세력에 대한 굴종이라기보다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다른 아시아 국가와 러시아에 대하여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월감을 심어주었으며, 문학 분야에서도 서구적 경향을 앞장서 수용하여 근대화의 과정으로 삼은 데 대하여 심리적 부담이 거의 없었다. 그에 비례하여 일본 전통의 문학을 변용하는 일도 발전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전통 렝카(連歌)가 몇 차례 변전하여 유행하던 것을 하이쿠(俳句)로 정착시켜 크게 유행시킨 것이라든지, 와카(和歌)를 여전히 중요하게 계승한 것이 그 예이다. 한마디로 일본문학의 근대화가 서구의 영향을 수용한 것이라는 데 대하여 저항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근대문학에 대한 규정은, 논의를 생략한 선언의 의미가 강하다. 사회주의 국가 건립 이후 체계화된 이론서에서 개인의 견해나 개별 영역에 대한 논의는 정해진 상위 지침 아래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학도 예외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예증하는 선도적 위치에 서 있었다. 규범적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후를 근대, 1919년 5.4운동 이후를 현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를 당대(當代)로 설정하고, 그 중 근대화의 내용을 “자산계급 계몽운동”으로 규정하였다. 전형적인 다민족, 다언어 문화를 바탕으로 전개되어 온 중국문학을 하나의 이념 전개 과정에 맞추어 재단한 것은 훗날 잠재적 논쟁거리를 남겨두기는 했지만, 논의의 대상과 주체를 극히 단순화시켰다. 그 결과 근대로 규정된 시기의 시가는 양식상 종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용으로는 청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데로 수렴되었다. 기존의 한시 양식에 남방 지역의 민요, 소위 산가(山歌)라는 것을 수용하여 새로운 양식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부분적 추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문학 담당자를 뜻하는 “자산계급 계몽가”들은 대개 서양과 일본 체험을 하였으며, 사회 제도와 사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서구화를 지향하되 그 구체적 모델을 일본으로 설정하였다. 당연히 청나라 조정과는 갈등을 겪었지만, 이를 오히려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로 몰고 가는 계기로 삼았으며, 청 조정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던 일본 및 서구의 경향을 수용하는 데는 저항이 없었다.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이 근대화 과정은 그 다음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일본과 중국에 비해서 한국은 근대화의 외적 환경에 대하여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든 서구와 일본의 영향을 축소시키려는 태도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 그것은 일본의 극단적 실용 노선이나 중국의 반청 반봉건 노선과 달리 서구와 그 앞잡이인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는 직접 침략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근대화를 논의할 때 이웃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환경은 바로 이것이다. 침탈자인 일본은 그들의 문화가 개화된 것이고 한국의 문화는 미개한 것이므로 한국문화가 일본화해야 하며, 그 추진 주체가 일본인이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며,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에 대하여 극단적 찬반론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니, 외세의 영향에 대하여 민감한 것은 차라리 당연한 자세이다. 근대문학 연구 초기 단계에서 제시되었던 서구의 영향론 이른바 이식문화론은 극복의 대상이자 동시에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학에 불변의 가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민족 의식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라는 간명한 규정을 극복하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찾는 일은 두 가지 작업과 연계된다. 하나는 전통 계승론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적 성취이다. 전근대의 작품과 다를수록 근대성은 설명하기 쉬운데 그만큼 전통성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진다. 현대적 감각과 율격의 비정형성을 강조할수록 예술적 성취를 내세우기는 쉬운데 그만큼 한국시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기는 어려워진다. 이 난감한 문제를 아우르면서 설명할 수 있는 장치로 곧잘 선택되는 것이 장르를 바탕으로 한 논의이다. 막연하게나마 “민요형”, “전통성”, “향토성” 같은 용어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적으면서 설명과 주장의 편의에 더욱 자주 활용되는 것이 시조이다.
2) 개화기 시가의 근대적 요건
19세기 말 근대적 언론 매체가 나오고, 여기에 시가 작품이 게재된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한글시가 게재되기 시작하였는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투고하여 하나의 양식을 이루어 갔으며, 이들 작품에 대하여 “개화가사”, “애국독립가류”, “가창가사” “신시” 등 몇몇 이름이 붙여졌다. 이는 4‧4조의 가사 형식을 수용하면서, 후렴구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애국 독립 사상을 강조하면서, 반복구를 자주 사용하여 노래부르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위의 여러 가지 명칭이 붙는 근거가 된 것이다. 뒤이어 신문과 잡지가 다양해지면서 전통 양식과 신흥 양식의 시가 작품이 게재되고, 그 변용이 모색되면서 개화기의 시가는 장르의 혼효상을 보여 주었다. 이시기의 매체는 발행 단체 또는 편집진의 성향에 따라 대상 독자, 시국관, 과제 등에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민중을 계몽한다는 목적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학을 즐겨 이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문학의 관습과 장르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물론 개화기 문학 장르가 재편된 원인을 발표 매체와의 관계에서만 구할 수는 없고, 독자와 작자의 위상 정립, 음악 특히 서양 음악의 수용 등 여러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발표 매체의 등장은 문학적 관습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유발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중요한 변화를 들면 이러하다. 첫째,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창작이다. 전대의 가집 편찬이 시가를 집대성하여 향수자에게 제시하는 방편이기는 하였으나, 이 경우 편찬자의 의도와 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원작자의 의도는 상당히 굴절되었다. 그러나 개화기의 신문은 작자와 독자를 동시적으로 연결시켜 주어, 문학 작품의 향수 방식이 작가의 창작과 편집진의 게재와 독자의 구독이라는 새로운 길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작자는 현재의 독자를 의식하면서 작품을 쓰고, 독자는 작자 또는 발간 단체를 의식하면서 읽게 되어 양자의 요구가 만나는 점에서 양식이 정립되었다. 개화기 시가 양식의 전통소와 변화소가 발표매체나 창작 주체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화되어, 새로운 장르를 지향해 가기도 하고 역으로 재래의 장르를 철저히 고착화해 간 사실도 여기에 큰 원인이 있다. 곧 새로운 외래의 사상과 생활 양식에 접근하게 하려는 쪽에서는 시가 창작에서도 변화소를 즐겨 찾아 쓰게 마련이었고, 반외세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재래의 시조와 가사에로 회귀하는 성향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었다. 둘째, 형식의 제한과 규격화가 이루어졌다. 전대의 시가는 음악의 변화, 사실적 경향의 증대 등으로 말미암아 시조가 정격에서 변격으로 파생해 가고, 가사가 장편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중 매체를 통하여 발표됨으로써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게 되었다. 신문에 발표되는 시는 지면의 한정과 잦은 간행 터울로 인해 규격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 신문은 후대로 가면서 시가 작품을 고정란에 매일 또는 수일 간격으로 수록하여 규격화를 촉진시켰다. 이렇게 형식적 측면에서 규격화가 진행됨으로써 개화기의 시가는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졌고, 이것이 한 장르 내부에서도 변별되는 하위 장르로 파생되었다. 셋째, 동시대적 관심을 결집시켰다. 개화기의 신문이 대중을 상대로 발달하고, 기서(寄書)나 투고, 응모 등을 통해 대중의 참여가 활발해져 공동의 관심사를 소재로 하여 집단 정서를 형성하였다. 독립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몇 종의 신문에만 1500편 이상의 작품이 실려서 우선 양적으로도 풍성한데, 문학에 대한 신문의 이러한 적극성을 여러 각도에서 해명할 수 있겠지만, 집단 정서의 측면에서 그 의의가 부각된다. 가령 독자층을 가장 폭넓게 설정하고 또 확보하였던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제국신문, 독립신문이 시를 게재하는 데 보다 적극적이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독자수의 급증 현상을 보이는 1907년 이후 시사평론이 거의 매일 가사 형식으로 게재되었던 점은 이러한 지향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집단의 정서가 강조되면서 그러한 집단정서를 담는 틀로서의 시가 양식화도 점차 뚜렷해졌다. 이와 같이 언론 매체에 발표됨으로써 나타난 변화는 결국 개화기 시가 장르의 재편이라는 데로 귀결된다. 개화기는 끊임없이 변화와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탈에 직면한 상황으로 인해 전통적인 것을 고수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 속에서 시대 문화를 형성시킨 때이다. 따라서 수동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일어난 변화도 곧장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잡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점이 개화기 문학 장르를 혼효와 갈등으로 몰아 간 듯하지만, 실은 장르 재편성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조는 장르의 견고성이 가장 강한 정형시로서, 다른 장르에 비하여 작은 변화라도 그만큼 주목할 가치가 있다.
2. 개화기 시조의 양식과 당대적 주제
1) 최초 게재 작품 <혈죽가>
개화기 시조가 시대적 양식으로서 대중 매체에 본격적으로 발표된 것은 국권 회복 운동기 중에서도 후기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아마튜어 여성 작가들이 지어서 투고한 작품 십여 편이 있어서 전환의 계기를 이룬다. 이들 작품은 시조의 근대화에 관계되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6년 7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사동에 사는 대구 여사(寺洞寓大丘女士)”라고 필자를 소개하면서 <혈죽가(血竹歌)> 세 수가 실렸는데, 이것은 근대적 매체에 발표된 최초의 창작 시조이다. 대구 출신의 여사가 지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니, 투고자가 자기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기록은 편집진이 제공한 정보이다. 뒤이어 1906년 8월 13일자 제국신문에 기서 형태로 <혈쥭가 십절(十絶)> 제하에 시조 작품 10 수가 실렸으며, 1907년 2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모충가곡(慕忠歌曲)> 제하에 1 수가 실렸다. 전자는 “명누”, “의당” 등 필명이 명기된 여학도 10 명의 작품 각 1 수씩인데, 그 중 여덟 수는 평시조이고 두 수는 장시조이다. 이들 작품은 5개월 이상 지난 1907년 7월 2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시됴>라는 장르명과 <혈쥭가 열슈>라는 작품명, “계동(癸童)의 동요(童謠)”라는 작자명을 갖추어 재수록되었다. 이때는 대한매일신보에 산문 <시사평론>란이 고정되면서, <잡보>란에 민요형 가사가 전후 25 편 게재되던 시기로, 시가 장르의 전형을 모색하던 때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두 번의 시도로 끝나고 대한매일신보나 여타의 매체에 시조가 연속적으로 실리지는 않았다. 창작되고 나서 반년 가까이 지난 때에 다시 게재된 사실과, 민요형 가사가 연속 게재되는 사이에 들어 있는 사실을 두고 보면 이들 노래가 당시에 폭넓게 향수되었으며, 그 방식이 가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열 사람의 작자명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작자명 없이 통틀어 “계동”이라는 간지의 순차만 기록되어서, 구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혈죽가>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서 고시조를 답습한 평범한 작품에 자나지 않으며, 근대시적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그와 반대로 근대 시조의 효시로서 한국시문학사상 획기적 의의를 가진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단정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작품내외적 특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 의의를 따져보는 기준은 앞서 언급한 개화기 시가 전반의 변화 즉 독자 지향, 형식적 제약, 시대 의식 등이 될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여기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하여 강제로 고문정치를 시행하기에 이르자, 이전까지 사회 운동은 노선간의 차이를 어느 정도 정리하였다. 이른바 급진개화파는 일제의 침략이 명확해지자 여태까지의 일본 친화적 태도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위정척사파는 대한제국 황실이 무력한 터에 더이상 황제에게 상소나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뒤이어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식층에서는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언론 활동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은 의병 전쟁, 학교 교육과 더불어 3대 활동의 하나였다. 국권 상실의 정신적 혼란 속에서 충격적 이슈를 제공한 사건이 민영환의 자결이었다. 그의 순국은 늑약 직후에 즉시 일어났다는 점 외에도 그가 왕실의 외척으로서 약관 때부터 정치와 외교의 중심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점, 40대 중반에 생을 마친 점, 간명하고도 강렬한 유서를 남긴 점 등이 엄청난 전파력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언론 매체에는 각계각층의 애도문, 제문 등이 이어졌고, 그의 유서인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警告二千萬同胞)”류의 문장들이 계속 발표되었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의 자결도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영환 순국을 소재로 한 한시, 가사 등 시문학 작품이 다수 발표되어 정서적으로 민중들을 격동시켰다. 심지어 신문의 광고 난에도 추도시가 자주 게재되었으니, 투고자들이 경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창작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열기는 이듬해 여름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민충정을 소재로 한 기사와 문학이 그의 자결 당시보다 더욱 폭발적으로 나타난 계기는 이듬해에 소위 “혈죽”이 발견되고, 이에 대하여 국민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일이었다. 첫 기록은 1906년 7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 <녹죽자생(綠竹自生)>이며, 대중적 이해의 계기는 7월 7일자 순한글지 만세보의 <하운기봉(夏雲奇峰)> 기사이다. 제보자가 소문을 듣고 직접 가서 많은 사람과 확인했다고 하면서, 민충정공이 계시던 방 옆 마루에서 대나무 네 줄기가 솟아났다는 사실과 함께 대나무에 대한 자세한 소개, 관람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반응과 행동, 대나무가 민충정공의 화신이라는 확신 등을 역설하였으며, 기자도 사실을 기록하고 국가정신을 부식하자고 첨언을 하였다. 혈죽의 신이함에 목격자들의 ‘소문’이 더해져 전파의 자발성을 증폭시킨 것이다. 뒤이어 한시가 계속 발표되고, 가사도 몇 편 실렸다. 시조는 상대적으로 늦게 발표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에 두 종류의 <혈죽가>가 게재되었는데, 여기에서 시조의 근대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대구여사의 작품이다.
협실에 솟은 대는 충정공의 혈적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중에 푸른 뜻은 지금에 위국충심을 진각 세계.
세 수 중 첫 번째 작품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종장 마지막 음보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개화기 시조의 한 특징으로서 고시조와도 다르며 현대시도와도 다른 형식적 요소이다. 이러한 종장 처리가 이때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고시조에서 종장은 당연히 4음보로 창작되었지만, 일부 가집에는 시조창을 위해서 끝 음보를 생략한 채 기록하였다. 시조시를 가곡창으로 부를 때는 원래대로 부르지만, 시조창으로 부를 때는 종장의 끝 음보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고시조의 경우는 분명하게 종장이 4음보로 창작된 것을 일부 자료집에 수록할 때 끝 음보를 생략한 것이고, 이 작품에서는 처음부터 끝 음보 없이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있던 것이 생략된 것이 아니라 3음보 그 자체로서 원작품이다. 이렇게 시조를 음악적으로 시조창으로만 부르도록 창작하였다는 것은 음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전문가들의 창곡인 가곡창보다 대중화된 시조창이 더 성행했으며, 특히 대중매체에 수록되는 작품은 당연히 대중적인 시조창으로 불리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끝 음보를 생략하여 시조창을 유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조의 새로운 양식이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 목적으로 활용한 형식이 아니라, 적어도 1910년대의 시조에서도 지속된 양식적 특징이다. 내용은 협실에 솟은 대나무가 곧 민충정의 핏방울이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방 안에서 푸르게 자라나니, 그것은 지금 세계를 향해 위국충심을 깨우친다고 하여 계몽의 취지를 드러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적 주제와 계몽적 의도를 시 속에서 묘사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작자가 화자로 나서서 자기의 의지를 드러내거나 독자에게 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나무라는 실체의 묘사를 통해 주제를 보여준다는 점이 중세 시조의 전형에서 한걸음 나아간 모습이다.
충정공 곧은 절개 포은선생 위이로다 석교에 솟은 대도 선죽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중에 난 대야 일러 무엇.
세 번째 작품이다. 포은의 대나무는 밖에서 자랐지만 민충정의 대나무는 실내에서 자라므로 충정공이 포은선생보다 더 절의가 높다고 하였다. 이미 전형성을 확보한 포은을 충정공에게 일치시킴으로써 대상의 가치를 확보하고, 다시 충정공과 혈죽을 일치시킴으로써 가치의 영속성을 내보였다. 종장 끝 음보가 이 작품에서는 생략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무엇”만으로는 문장이 종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리오?”라는 접사가 생략된 것이 자명하므로, 아직 이 단계에서 종장의 3음보화가 정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특징이 더 확대된 작품은 1906년 8월 14일 제국신문에 게재된 연작 시조 10 수이다. <여학도 애국가(女學徒愛國歌)>라는 제목 아래 게재 경위를 설명하고, 다시 <혈죽가 십절(十絶)>이라는 제목 아래 시조를 게재하였다. 이 중 평시조가 8수이고 장시조가 2수이다. 기서 취지를 밝히는 서문에서, “우리도 옛적의 썩어지고 음란한 노래는 부르지 말기 위하여 혈죽가 십절을 지어보내오니 귀신문에 기재하여 일반 동포로 하여금 이같은 노래를 불러 충절의 만일이라도 효칙케 하심을 바라오.”라고 하여, 시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여기서 “옛적의 썩어지고 음란한 노래”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고시조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한 말인 듯하다. 특히 조선조 말기에 사설시조를 포함하여 오락성 짙은 시조와 잡가를 비판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열 사람이 기명으로 쓴 열 편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쓴 연시조와는 다르고, 따라서 작품 사이에 주제 이외의 일관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발견되는 경향성은 오히려 한 시대의 지향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남천에 덮인 구름 일월성총 가렸으나 충정공 푸른 대에 소슬 청풍 둘러치면 아마도 삼쳔리강토에 운권 청천. 명누
첫 번째로 게재된 작품이다. 대상 지향이 강하면서도 시조의 구조를 활용하여 주제를 명쾌하게 드러내었다. 공간 개념만으로 주제를 표출한 것이다. 초장은 하늘을 묘사하였으니, 구름이 해와 달과 별무리를 가렸다는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다. 중장은 제한된 공간인 충정공의 대에 청풍을 둘러친다고 하였으니, 자연으로나 인공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종장은 삼천리 강토에 구름이 걷힘으로써 하늘이 맑아진다고 하였다. 초장의 하늘과 중장의 집을 거쳐 종장의 땅으로 대상을 옮기지만 그것이 초장의 하늘과 다시 만남으로써 세계가 완성된다는 인식이다. 고시조의 근간이 되는 유교적 세계관보다 오히려 고대의 주술적 세계관에 가깝다. 이는 유학자들의 사유와 달리 일반인의 사고를 중시한 면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주술적 원리를 활용한 것은 아니고, 대상을 강조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려는 과정에서 확보한 성과이다.
점점이 흘린 피는 문명의 꽃이 피고 창창히 솟은 대는 충애의 싹이로다 아마도 이 싹과 이 꽃은 불소불락 보암
이 작품도 역시 객관적 상관물의 묘사로만 이루어졌다. 초장은 민충정공의 자결로 흘린 피를 문명의 꽃으로, 중장은 그곳에서 솟아난 대를 충애의 싹으로 은유하였다. 종장은 이 싹과 꽃이 없어지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희망을 읊었다. 화자는 관찰자에 머무르고 그 모습을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싹과 꽃의 속성인 번식을 통해서 마침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파될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시조의 구조에 매우 충실한 작품이다.
가엾다 십여 세를 헛되이 지냈더니 민충정공 혈죽가를 눈물 섞어 불러보니 아무리 소소 여생인들 맘 다르랴. 수각
열 수 중 마지막에 기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종장에 동사의 어미까지 기록되어서 생략형이 아니라 아예 3음보로 창작한 의도가 보인다. 물론 이런 경우가 일반화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정형으로 인식되어 간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민충정공의 혈죽을 노래부름으로써, 다시 말해 썩어지고 음란한 노래가 아닌 새로운 노래를 부름으로써 헛된 세월을 보내던 자신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같아진다는 확신을 통해 계몽적 태도를 잘 드러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