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년 만에 찾은 절(寺)
구름(김병우)
봄 햇살이 화사한 오전 앞산 달빗골 자락에 있는 절 마당에 들어섰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왔더니 숨이 턱까지 찼다. 절 입구 바위에 새겨진 석가여래입상을 향하여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요사채(寮舍寨) 뒤 가파른 절벽과 대웅전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건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스님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
“저 스님 아닌데요.”
“네∼?”
사십 년 전 '기원사'에서 공양주와 상면하고 나눈 대화였다. 꼴에 머리는 빡빡 밀었고 통바지에 흰 고무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초라한 행색이 공양주의 눈에는 영락없는 탁발승으로 비쳤을 것이다. 산을 오르느라 배가 고프다며 밥 좀 얻어먹을 수 있느냐는 말에 공양주는 찬밥 덩어리와 나물 반찬을 한 상 차렸다. 워낙 작은 암자라 공양소가 따로 없었다. 어중간한 시간에 와서 밥이 이것뿐이라고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가짜 중으로 인하여 조용한 암자는 소란을 떨었다. 절밥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겠지만 가난한 시절이니 그것도 감지덕지 꿀맛이었다. 게 눈 감추듯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야 건너편 법당이 눈에 들어왔다.
법당에서 부처님 전에 삼배를 건성건성 하고 좁은 법당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주지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왔다고 했더니 ‘요놈 봐라!’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으셨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란다. 예나 지금이나 절간의 차 인심은 후했다. 찻잔을 마주한 스님이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절밥 먹을 인연은 아닐세.” 알 듯 말 듯 말끝을 흐렸다. 밥에 차까지 얻어먹었으니 자초지종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째 고시 공부를 한답시고 죽을 고생을 했는데 올해도 또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는 얘기.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죽을 것 같아서 바람 쐬러 대구 고모님 집에 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실직고 했다. 스님은 내 관상을 보니 다행히 궁상(窮相)은 아니고 나라 녹은 먹겠다고 했다. 큰 벼슬자리는 힘들겠고 중간 정도로 끝까지 가겠다는 알쏭달쏭한 말도 남겼다. 세월이 지나서 되돌아보니 그 스님의 말이 신기하게 맞는 것 같다
사십 년 전 우거진 숲을 헤치며 덤불 가시에 찔려가면서 오르던 좁은 오솔길이 지금은 온통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변했다. 다행히 절간이나 법당은 옛 모습 그대로라 위안으로 삼았다. 마침 내가 법당에 들어설 때가 주지 스님이 점심 예불을 올리는 시간이었다. 스님의 염불과 목탁소리에 맞추어 108배를 하면서 사십 년 전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도심에서 나고 자란 내가 초등학교 방학 때면 늘 가는 곳이 있었다. 대구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월배에 고모님이 한 분 계셨는데 유독 정이 많으셨다. 나는 마당 넓은 그 촌집에서 가을걷이며 길흉사 치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고모 딸 전통혼례식을 마당에서 천막을 치고 했었고, 고모부 돌아가셨을 때 장례도 그 마당에서 치렀다. 그런 내가 청년이 되어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고모는 맨발로 달려 나왔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서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도 이눔의 자슥을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급기야 밀짚모자에 감춰진 까까머리를 발견하고는 “이 눔의 자슥이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다더니 중이 되어왔네” 안타까운 마음에 어쩌지 못하시고 이 눔의 자슥만을 되뇌셨다. 산속 생활에 이발할 곳도 없고 긴 머리칼이 귀찮기만 하던 차에 찾아온 친구가 면도칼로 밀어서 그렇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고모 눈에는 영락없는 까까중이었다. 초라한 행색에 기가 막혀 놀란 가슴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모는 나에 대한 충격을 가라앉히고 하다만 밭일을 마저하고 올 테니 집에서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밭으로 나가셨다. 대낮에 촌집에서 이십 대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이 낮잠 말고는 없었다. 따분함을 달래고자 집 앞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 무작정 산 쪽으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산 아래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짙은 보라색의 도라지 둔락지가 소보록하게 나를 반겼다.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8부 능선에 있는 절까지 가보기로 작심했다. 인적이 끊긴 한적한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적막감만 감돌았다. 혈기왕성한 나이이니 당연히 겁도 없었으리라. 맨발의 고무신은 땀으로 미끈거려 불편했으나 이 또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절을 향하여 올라가다가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발아래에는 온통 구름으로 자욱하였다. 그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내가 마치 신선이 된 것처럼 신비스러웠다. 70년대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공기 질이 훨씬 좋았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무심한 세월은 제 자리에 있어 주지를 않는다. 사십 년 전 내 앞길을 예견했었던 주지 스님과 선뜻 공양 보시한 보살님, 정 많았던 고모님 역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 또한 언젠가는 그들 뒤를 따라갈 테지. 머리까지 삭발하고 비장한 각오를 다졌던 젊은 날의 그 꿈들은 과연 이루었는가? 반문해 본다.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었던 지난 삶이 일장춘몽 같아서 쓴웃음이 나온다.
사십 년 전 빚진 밥값을 부처님 전에 108배로 답례를 한 탓일까. 법당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19.7.17)
* 공양주: 절에서 밥 짓는 일을 하는 사람
* 보살: 여자 신도를 대접해 부르는 말
* 성불: 사람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애잔하게 느껴지면서도 재미나게 풀어쓴 이야기가 지겹지 않아 좋았습니다.
사십년만에 찾은 법당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는 구름의 이야기를 부담없이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벌써 40년전 고시 공부를 한다고 중아닌 중이되어 우연히 찾아간 원기사 오늘 그 감회가 글 속에 묻어 납니다. 그때 혈기왕성하고 꿈많던 청년이 느꼈던 사찰의 풍경과 초로가 되어 다시찾은 절에서 느낀바를 함께 음미해 봅니다. 사십년 만에 찾은 절이란 명제로 재미있는 스토리로 전개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 순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잠깐 만난 인연들, 그 인연이 담긴 작은 산사를 40년 만에 찾을 수 있었던 인연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 그런 인연 덕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 선업을 쌓아 가는 여생이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40년 만에 찾은 절, 정말 감회가 새로우셨겠습니다. 나와 인연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던 나만의 역사의 장소는 세월이 흘어도 꼭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이지요. 꿈은 많고 컸지만 잡히지는 않고 답답하실 때, 원기사의 그 스님의 말씀이 많이 위로가 되었을 듯 합니다. 때맞추어 선친의 49제 예불로 108배를 하셨다니 정말 뜻깊은 산행이 되었습니다. 강산을 4번이나 바꾼 세월을 오르내리며 원기사와 얽힌 구름님의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구름님의 상기된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원기사에 있으시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때론 길이 보이지 않는 젊은 시절의 방황조차 지금 생각하면 아름답고 그리워지는 듯합니다. 그 시절의 힘듦이 오늘 날의 구름님을 있게하신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40년만에 원기사 추억의 회포를 풀고 구름같은 발걸음으로 내려오셨다니 감회가 새로웠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상록수필 창작반 모임에서 40여 년전 중아닌 중모습으로 찾아간 곳에서 주지스님과 대화장면이 지금 그려집니다. 도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나라의 녹을 먹고 살겠다라고 앞날을 예언해주신 스님, 관상에 씌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힘들게 고생하셨다고 하셨는데 저가 보기에도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가도 선생님 언세를 대면 믿지 않을 만큼 동안이십니다. 그리고 항상 환한모습도 힘든 날을 보내지 않으신 분인줄 알았습니다. 내가 살아온 고생은 거의 모두가 비슷하게 살아온 모습이란 옛 성현의 말씀에 위로가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구름님이 원기사와 그런 깊은 인연이 있었군요. 오랜 세월 아련한 기억속에만 있던 사찰을 방문하여, 그시절을 회고하며 그 옛날 빚을 청산하는 맘으로 108배까지 올렸으니 그 기분이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잊지 못할 장소,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을 수필반의 산행길에서 갈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인연인 듯 싶습니다. 한 편의 수필 속에 좋은 기억을 담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40여년전 뜻하지 않게 찾았던 원기사를 초로의 노인이되에 옛날을 회상하신 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왠지 무심한 세월의 야속함이 묻어나는 군요. 특히 선친의 49제날 원기사를 찾아 108배를 올렸어니 아주 뜻 깊은 산행이 었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