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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1
11월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과오, 흑역사를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몇몇 나름 유명 인사들의 자서전들이 여기저기 굴러 다니길래, 그 중 몇권을 주워들었습니다. ‘한번 읽어나 보고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책들을 손에 들었다가, 정말이지 크게 후회했습니다.
개인적인 결론은? 시간 낭비, 스트레스 지수 급상승, 지구온난화 뿐이었습니다.
기적같은 성공 스토리, 끝도 없는 자기 미화, 해도 해도 너무한 셀프 광고와 속이 훤히 들야다 보이는 미담, 어이없는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책들을 손에서 놓으며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어떤 분은 백번 생각해도 자서전 쓰실 분이 아니라, 매일 가슴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부끄러워 해야 할분인데, 자서전 안에는 스스로를 구국의 일념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한 위인이자 의인으로 포장하고 있는 걸 보고서는, 분노를 넘어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누가 유혹하더라도, 자서전만큼은 쓰지 말아야겠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자신의 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서의 자서전 관련해서, 집필의 전권을 작가에게 부여하고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공담이나 미담만 쓰지 말고, 실패담이나 흑역사들도 가감없이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서전 출간을 자신의 사후(死後)에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깊이 고민해보지 않아도 딱 답이 나오는군요. 끝도 없는 자기 미화와 신격화 타령의 다른 자서전보다는,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이야 말로 거짓이나 과정이 하나도 없는 책이라는 것이. 이런 면에서 복음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절대로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미담으로만 포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마굿간 탄생, 유다인들로부터 받았던 수모,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세번 배반과 같은 흑역사, 사도들의 미성숙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만 봐도 복음서는 참되며 진리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솔직함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바로 겸손의 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과오, 흑역사를 애써 감추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처럼 스스로를 과다포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결국 겸손의 덕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선물이요 축복임을 알수 있습니다.
잉태부터 시작해서 출산과 양육, 그리고 출가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겸손의 삶을 유지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했기에 강한 확신을 지니시고,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10절) 유한하고 나약한 한 인간에 절대자 하느님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성경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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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있다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
어떤 신부님이 자기 교구의 교인 한 명이 특별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신부는 과거에 신학교 시절에 저지른 어떤 죄로 항상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정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젊은 날에 죄지은 일로 늘 마음이 괴로운데,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하느님 앞에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기도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가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가 물론 기도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제가 옛날에 어떤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신자가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잊어버리셨답니다. 신부님.”
죄책감은 다른 이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그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탓으로 판단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먼저 이웃을 판단하게 만드는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이웃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용서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설혹 용서가 된다고 해도 미워할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라는 주제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해달라고 하면 매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이 용서의 힘임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늘의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온 종은 비록 힘이 들지라도 돌아와서 주인의 식사시중까지 들어야합니다. 그런 다음 먹고 마시게 되어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그런 모든 분부를 다 수행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주인의 몫이지 종의 몫이 아닙니다. 종이 잘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뽑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도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임을 믿는다면 순종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이유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임을 알게 하기에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신이 은총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웃을 판단할 수 없어집니다. 믿음이 생기면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면 용서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아니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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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7,7-10 :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9절)고 하신다. 그저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고 가르쳐주고 계신다. 한 마디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 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때로 웃어른의 정당한 지시에 대하여 머리 숙여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는가 하면, 심하게는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평생을 그 자녀들만을 위해서 염려하시며 애태우시는 부모님들의 간곡한 권고까지도 겸손되이 받아들이기를 외면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어느 조그마한 권력이나 지위에 앉게 되면 더더욱 수하 사람이나 타인이 마치 자기 생각, 자기 원의, 자기 취미만을 채워주기 위해 있어주어야 하는 양 뒤흔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파괴적인 욕정을 멀리 하도록 만드시려는 뜻이었다.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또한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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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의인들, 주님께서 명하신 바를 충실히 실천하는 의인들이 이 땅에서는 시련으로 단련을 받지만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단언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의인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노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선택받은 제자들, 곧 새 계약의 의인이 될 이들에게, 주인의 명을 다 실천한 뒤 이렇게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마치 종 부리듯 부리시는 분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신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루카 22,2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제자들을 종 부리듯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의인을 “종”이라고 부르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대가를 바랄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남을 섬기는 겸손한 종처럼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대단히 잘 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굳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 아니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지고서도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뽑아 당신 일을 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종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 아들의 목숨마저 내어 주시는 주인을 모시고 있기에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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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겸손하게 섬겨라.>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이 말씀은,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낮춤’과 ‘섬김’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하느님(예수님)은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시는 분이라고 오해하기가 쉬운데, 하느님(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6,30-31) 신앙생활은 강제노동도 아니고 중노동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사제가 사제로서 하는 일들과 수도자가 수도자로서 하는 일들도 결코 강제노동이 아니고 중노동도 아닙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기쁜 일’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중노동이라고 생각하든지 가벼운 노동이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어떻든 의무적으로 해야 할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생활에 사랑과 기쁨이 있을 수가 없고, 사랑과 기쁨 없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기 싫은 기도와 묵상을, 또는 하기 싫은 성경 공부를 억지로 하면, 그것은 분명히 체력적으로도 힘든 일이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입니다. 그 일 자체가 힘든 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기 싫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사랑과 기쁨으로 하는 기도와 묵상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깊이 빠져드는 일이고, 전혀 힘들지 않은 일입니다. 성경 공부도 기도와 묵상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하면, 더 큰 사랑과 더 큰 기쁨을 얻게 되고, 그래서 힘든 줄도 모르고 하게 됩니다. 힘이 들기는커녕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기쁨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쁨이 없는데, 억지로 기뻐할 수 있는가? 자기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지부터 묵상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고, 기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 기쁨’은 기뻐하려고 노력할 때 찾아옵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없는 사랑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사랑이 생깁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신앙인의 영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세속의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또 목자이신 예수님은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크게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기쁨은(루카 15,5-7)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고마움’이 포함되어 있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벌이는 잔치는(루카 15,23-24) 기쁨의 잔치이기도 하고, 고마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이 고마움은 부모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입니다.) 부모가 충실한 자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녀에게서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 충실함이 고맙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왜 고마워할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에 대한 하느님과 예수님의 심정도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라는 말씀은,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자기가 한 일을 생색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대가를 요구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쓸모없는 종이다.”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너희가 하는 일은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다.”라는 뜻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낮춤’과 ‘섬김’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느님께 말씀드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들은, 또는 신앙생활은 주인에게 매여 있는 종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훌륭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만 낮추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한 일을 생색내고 싶어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느님께 대가를 요구하고 싶어 하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 입술로만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겉모습만 보고서, 또 그 말만 듣고서 “저 사람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의 위선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낮춤이 낮춤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겸손이 겸손인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보이지 않는 속마음이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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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언뜻 보면 주인이 퍽 야속해 보입니다. 고된 일을 하고 돌아온 종을 따스하게 맞아들여 밥부터 먹이기는커녕, 다시 주인의 시중을 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이렇게 덧붙이지요.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오늘 복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 어떤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지요.
만일, 하느님의 일을 얼마만큼 했다고 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한다면 참된 종의 자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오늘 복음처럼 응답해야 합니다.
“저희는 ……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할 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 마음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끝없이 매달리며, 묵묵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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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당신의 종으로 비유하며 “종”으로서 해야 할 일과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못하고 자유가 없이 매여 “종”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군주독제의 노예로 속박되어 살아가는 비천하고 뒤틀린 질곡의 삶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 10)
그렇다면 “종”이란 누구인가? “종”(δουλοσ, slave)은 주인에게 속하여, 그의 아래에서 섬기는 이입니다. 곧 고대 이집트나 로마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배 아래에 매여 있는 이들로,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 이들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적으로 노예제도가 행해졌습니다. 그들은 주로 외국인들이었는데, 전쟁포로나 노예 상인들에 의해 넘겨진 자들이거나 일반관습에 따라 생겨난 히브리인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였고 모세와 함께 해방되었지만 또 다시 바빌론의 유배를 당한 뒤에 다시 되찾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불충함으로써 또 다시 전락하였고,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된 고통과 죽음의 종살이는 율법으로 더 강화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노예상태를 풀어주기 위해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를 <이사야서>에서는 네 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로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종’일뿐만 아니라 기꺼이 ‘인간의 종’도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의 “주님”이 되어 주셨고, 우리는 ‘해방된 종’, 곧 ‘자유인으로서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하느님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소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실, <탈출기>에 따르면, “종”들은 일곱 째 해에 희년을 맞아 자유를 얻게 되는데, “그가 ‘나는 주인과 내 아내와 내 아내의 아들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몸으로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선언하면, 주인은 그를 하느님께 데리고 가서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세우고,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습니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그의 종이 됩니다.”(탈출 21, 5-6)
이러한 ‘자유인’으로서의 “종”은 일반 하인과는 달리 주인의 집에 머무르는 식구가 되어, 주인의 일을 하며 주인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혹 잘못이라도 하게 되면 하인들처럼 자신이 잘못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책임을 대신 지게 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종”은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서 따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주님의 종”이 된 이들입니다. 그 표시로 세례로 귀에 구멍을 뚫은 이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인장으로 날인된 이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장을 받은 이들을 바오로 사도는 “의로움의 종”(로마 6, 19)이라 부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체가 몸에 속해 있듯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도 바로 이 일, 주님을 섬기는 일을 다 하게 하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다 하게 하소서!
다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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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치유에 관한 강연과 글로 도움을 주셨던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하버드대 교수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신부님은 뭔지 모를 스트레스로 시달리다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겪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다시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돌아가 강의를 하였지만,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고민 끝에 다시 낮아지기 위해 지적 장애인들의 라르쉬 공동체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심장마비로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전까지 라르쉬 공동체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했던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라르쉬 공동체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신부님을 본 한 사람이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버드대 교수 헨리 나우웬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되물었습니다.
“하버드가 뭔데요?”
그 말에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충격을 받았고, 그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늘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하버드 교수인 것이나 업적에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헨리 나우웬일 뿐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우울증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영적 일기를 준비하면서 은혜로웠던 것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을 통하여 “겸손의 영성이 주는 축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저희에게 겸손하게 고백하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누면서 겸손해지는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이든지 반드시 보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신비스럽습니다. 나누고 겸손하게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는 더 큰 영광을 드리게 되고, 저희에게는 큰 은총을 맞이하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사랑하는 고운님들!
겸손만이 진리입니다. 겸손은 고운님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 두레박에게 겸손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나약함이나 무력함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 같은 것, 지나가는 그림자 그의 날들입니다. 다윗은 시편 144편 4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란 한낱 숨결과도 같은 것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제 고운님들도 저 두레박과 함께 이러한 겸손함으로 더욱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자명하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가 쌓이면 성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쓸모없는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이에게는 반드시 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보답으로 고운님의 삶과 생명이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지치셨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림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성령의 열매를 충만한 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나누며 겸손하게 또 나누고 감사하며 살면서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고, 고운님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복된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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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3)
♧♧ 시편 60편 7절….
"당신의 사랑받는 이들이 구원되도록 당신의 오른팔로 도우시고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 당신(주님)의 사랑받는 이...
5절의 ‘당신(주님) 백성’과 같은 말로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하시어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당신이 택한 백성으로 삼으신 선민 이스라엘과 다윗 임금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윗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삼으신 하느님의 사랑, 또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이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부르실 때, 보여주신 첫 사랑, 곧 우리 생애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에 근거한 구원의 호소만큼 힘 있는 호소는 없을 것입니다.
* 당신의 오른팔로 도우시고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오늘 팔’은 대개 ‘능력’과 ‘권세’, ‘힘’을 상징합니다.(창세기 48장 14절. 욥기 40장 14절. 시편 45편 5절. 참조) 다윗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에돔 및 다른 이방 민족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을 사용하여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60편 8절….
"하느님께서 당신 성소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기뻐하며 스켐을 나누고 수콧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 당신 성소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기뻐하며...
이 구절은...하느님의 약속이 당신의 성소(거룩하심)를 두고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변화되지 않으며(열왕기 상권 8장 56절. 참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로마서 4장 21절. 참조) 다음으로 ‘나는 기뻐하며...’라는 말에서 ‘나’는 하느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나 이제 흔연히 일어나...’라는 말로서 하느님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스켐을 나누고...
이스라엘 조상 야곱은 일찍이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하느님께 제단을 쌓았었다.(창세기 33장 18-19절. 참조) 한편 하느님께서 스켐을 ‘나누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스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으로 인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여호수아기 17장 7절, 21장 21절. 참조)
* 수콧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수콧(창세기 33장 17절. 참조)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기 ㅈ너에 최초로 머물렀던 장소인 ‘수콧(탈출기 12장 37절. 민수기 33장 5절. 참조)’ 과는 구별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가드 지파에 상속되었습니다.(여호수아기 13장 27절. 참조)
다음으로 ‘측랑하리라...’라는 말은 ‘나누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즉 이는 수콧 그곳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편 이상에서 ‘스켐’은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대표하는 것으로, ‘수콧’은 요르단 강 동쪽 땅을 대표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같은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과 달리 현재 이스라엘이 에돔 족속에게 패배하여 약속의 땅 일부라도 잃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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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에게는 갑곶 성지 전담 신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지에 있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해야 하며, 성지 개발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본래의 일이지만 이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또 다른 일들도 꽤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강의도 하고, 평화방송 일도 합니다. 사람들의 청을 받아 성지에서 아니면 외부에 나가 특강을 합니다.
여기에 써야 하는 글도 산더미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쓰담쓰담’이라는 후원회원들에게 보내드리는 묵상집도 매달 발행하고 있기에 쉬지 않고 글도 써야 합니다.
또한, 종교 잡지 칼럼도 매달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지 않은 일입니다. 어느 날, 묵상하다가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누구는 자신의 취미활동도 즐기면서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성과보수를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동료 신부들로부터 때로는 ‘나댄다.’라는 소리까지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커다란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이런 울림이 들리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복종해야 하는 종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종에게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일을 시키며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회사의 책임자인데 여러분 밑의 직원이 출근해서 일한다고 사장이 직원에게 눈물 흘리면서 감사를 표시하겠습니까? 사장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딱 한 가지 일만 시키지 않으십니다. 딱 한 가지의 일만 해놓고 자기 할 일 다 했다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복종해야 하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라고 하시지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입으로 인간의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이런저런 덕행을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아무런 은총을 입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온갖 덕을 다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는 순간,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며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복종해야 할 종입니다. 많은 일이 내게만 많이 주어진다고 불평불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더 많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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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한 나}
짐이 많아서 이사 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내게 필요한 물건만 빼고 가져가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거는 어때?”라고 묻는데,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물건인 것이다.
그래서 가져갔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가져가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
새로 이사한 집에 내 한 몸만 있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일까?”
이 글은 제 체험이 아니라, 김언 시인의 ‘집과 짐’이라는 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실 저 역시 짐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곧바로 대답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아서 겁이 납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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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하면서 테니스장을 지나곤 합니다. 테니스 치는 걸 구경하면서 점수를 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점수는 상대방의 빈틈을 공략하면서 얻었습니다. 실력이 비슷하지만, 전략에 따라서 승패가 정해졌습니다. 상대방이 앞으로 다가오면 상대방의 뒤로 공을 보냈습니다. 상대방이 왼쪽에 있으면 상대방의 오른쪽으로 공을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운동은 직접 경기를 하지 않지만, 선수들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선수들의 전략과 전술을 지휘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유능한 감독은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합니다. 유능한 감독은 선수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유능한 감독은 선수들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줍니다. 한국에 왔던 히딩크 감독이 그랬습니다. 베트남에서 활약하는 박항서 감독이 그렇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함께 사셨던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사도로 만드셨을까요? 서로 시기하고, 질투했던 제자였습니다. 두려움에 스승님을 떠나 도망쳤던 제자였습니다. 스승님을 배반했던 제자였습니다. 물고기나 잡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제자였습니다. 그런 나약한 제자들이 박해를 이겨냈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놀라운 설교로 감동을 주었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예수님의 지도력은 ‘섬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안다고 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이리 떼로부터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의 권위와 위선을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편하게 산다고 질책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지도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구유로 오신 건 겸손입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먼저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업적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은 넓고 깊은 바다로 모입니다. 바다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한 바람은 사람의 옷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따듯한 햇빛은 사람이 스스로 옷을 벗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의 지도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믿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했어도 끝까지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믿음을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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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충복忠僕>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오늘 복음은 짧지만 여운은 강렬합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주인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날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다음 주석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를 단순히 겸손한 표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표현이 제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들어 맞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반드시 의지하셔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제자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할 것 없이, 누가 알아 주든 말든 보아 주든 말든 상관없이, 주님의 종으로서 주어진 섬김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마땅하고 당연한 의무입니다. 주인을 원망할 것도 주인에 서운해 하거나 실망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인의 처분에 달렸을 뿐 마치 채권자처럼 주인께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제 분수를 아는 지혜로운 종입니다.
주인의 반응이나 처분에 관계 없이 기쁘게, 평화로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님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주어진 임무를 깨어,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실한 주님의 종, 주님의 충복의 모습입니다. 충복忠僕, 충견忠犬, 충신忠臣, 참 기분 좋은 말마디입니다. 다음 주인이자 주님이신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얼마나 멋지고 믿음직스럽고 매력적인 종인지요! 참으로 꾸밈없고 담백한, 겸손보다 한층 깊고 아름다운 진실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고백인지요. 일체의 칭찬도 보상도 바라는 것이 없는 참 순수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주님의 충복으로서의 임무 수행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이요 평화요 보상일 것입니다. 영성으로 말하면 최고의 영성입니다. 참 크고 깊고 고요하고 한결같은 여여한 삶, 산같은 영성입니다.
바로 이런 이가 제1독서 지혜서가 말하는 의인입니다. 쑥맥같이 어리석어 보이나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 대우大愚같으나 역설적으로 대지大智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충복이 되어 주님을 항구히 충심忠心으로 섬길 때 치유되는 영혼의 상처요 하느님 모상의 회복입니다. 주님의 충복들을 통해서 지혜서의 다음 말씀을 그대로 실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이들 의인들이, 주님의 충복들이 누리는 내적평화와 불사의 희망은 그대로 주인이신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이야말로 그대로 주님의 충복의 모습입니다. 일체의 요구없이 주님의 종으로서 주어진 섬김의 직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하여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영성을 ‘섬김과 종의 영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영어를 봐도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이 같습니다.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섬기는 종이 말그대로 주님의 충복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수도승들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습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충복이 되어 정주와 수도자다운 생활, 순종 서원을 통해 평생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분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구절도 감동적입니다.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참으로 죽기까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주님의 충복같은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 분도수도승들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우크라이나 출신인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역시 주님의 충복으로서 최선을 다해 사시다가 43세로 순교한 성인입니다. 부모는 그가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는데 주님을 그를 뛰어난 성인, 주님의 충복으로 만드셨습니다. 새삼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훌륭한 충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 몸소 섬김과 종의 영성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충복이 되어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섬기며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충복이 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 다음 화답송 시편처럼 항구한 주님 찬미의 삶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시편34,2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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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보시기에는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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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해 줍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주인은 종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종은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니 밭을 일구고 양을 돌보다 해가 지자 지쳐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상을 차리고 식탁 시중을 들라고 명해도 별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각자 신분에 맞는 역할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 질서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종으로 부리며 실컷 밭일, 들일을 시키고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당신 시중을 들라고 몰아세우는 분이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은 제게 그렇게 몰인정한 폭군이 아니십니다. 감당키 어려울 만치 지치고 바빴다면 대개 그건 하느님 뜻보다 사람의 과욕이 낳은 실책이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루카 17,7)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요한 5,17)다고 예수님께서 밝히셨듯이, 그분은 창조계의 생성과 성장, 소멸을 관장하시고 자연의 순환을 돌보시느라 수고하십니다. 게다가 목자이신 그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시편 121,4)고 양떼인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종인 주제에 간 크게도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더 섬겨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닐까요? 재산, 지위, 승진, 건강, 합격, 행복 등등 온갖 것을 내 밥상 위에 놓아달라고 요구하며, 이미 지치신 그분이 쉬시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마치 세속의 주인이 종을 부리듯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섬김과 봉사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요...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걸 다 해주시고 나서,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오늘 복음은 세상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주인은 이래도 되고 종은 그래야 한다고요.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역할이 뒤바뀐 것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하시고는 '우연'과 '행운'이라는 단어 뒤로 겸손히 몸을 감추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며 공덕을 모조리 우리에게 돌리시고는 사라져 버리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들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지혜 2,8)
세상은 "통치, 지배, 다스림"이라는 말씀을 세속적 권력 행사로 이해하고 실제로 행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지요. 의인의 "지배와 통치"는 종으로서의 섬김입니다. 지혜와 사랑을 다해 하느님 모상인 형제를 돌보는 봉사와 헌신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의인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종들의 종으로서 그들을 섬기신다는 뜻입니다.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모습이지요.
이 말씀들에 비추어 하느님과 우리 관계를 돌아봅시다. 때로는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사랑을 갈구하시고, 죄인인 우리는 주인께 보다 강력하고 완벽한 도움을 강요합니다. 또 때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꼭 맞는 걸 주시고도 우리가 만족하는지 눈치를 살피는 종처럼 노심초사하시고, 우리는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맡겨주신 일이 버겁다고 댓발 나온 입으로 강짜를 부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랑으로 일치하고 있다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주종 관계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섬기는지, 누가 누구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지 이미 하나가 된 이들 안에서는 구분이 모호하니까요. 그러니 서로에게 해야 할 일, 사랑을 한껏 베풀며 다투어 행복한 종의 자리를 지킵시다. 힘껏 사랑하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합시다. 이 말 안에는 "당신을 나 자신보다 더,더,더 사랑합니다"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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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 받음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자신이 세운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죽음이 기다리는 예수살렘으로 가고 있는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 했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 칭하면서 당신 뒤로 물러날 것을 명하셨다.(마태 16,23)
베드로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올리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함께 죽어야 하더라도 결코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마태 26,35)라고 거창하게 맹세까지 했다.
그는 그렇게 거창하게 맹세까지 했지만 스스로를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체험해야만 했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복음사가들은 베드로의 잘못을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감싸지 않았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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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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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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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바라지 마라>
"분부 받은대로 다하고 나서"
고맙다는 말,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가
없을 때 서운할 때가 있죠.
할 일을 다하고 지쳐 들어왔는데 또 시킵니다.
주체성을 지니면 서운하지도
시킴을 당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기꺼이 하고 댓가를 바라지 않을때
영혼이 맑은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인지요.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자식이 하는 말
'엄마가 해준 게 뭐있어?'
하는 자식의 목소리가 예수님께 투정하는
철없는 나의 소리는 아닌지......
"무엇을 해줬다는 생각 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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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 10)
가장 행복한 시간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주님의 일은
사랑의 관계이며
사랑의 봉사입니다.
주님의 일은
또한 용서를 통한
봉사입니다.
용서의 진정한
체험 없이는
봉사 또한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다시금 우리의
본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섬김과 봉사가
우리의 참된
본분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합니다.
사랑에 충실한
우리가 되길
바라십니다.
사랑은 주인과
종을 하나가
되게합니다.
모든 순간에
주님께서 안 계신
순간은 없었습니다.
사랑과 봉사의
본분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방식이
섬김과 봉사임을
배우는 위령성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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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맑은 개울물은 우리의 마음까지 맑게 하며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자기 자신을 언제나 똑바로 보게 하는 것은 겸손한 십자가였습니다.
소중한 모든 것들은 겸손을 바탕으로 다시 보게 되는 소중한 만남입니다. 겸손과 봉사는 소중한 우리들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일상생활 자체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성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람직한 관계로 이끄십니다. 바람직한 관계는 바람직한 만남입니다. 바람직한 만남은 겸손한 관계로 차원을 넓혀갑니다.
이 위령성월이 지나친 이익과 안락만을 쫓는 현세적 삶에서 벗어나 영원한 가치를 향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과 봉사보다 더 큰 영원한 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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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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