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이선욱
그러니까, 가문 벌판이었다
저녁이면 한 무리의 염소들은 그늘로 떠났고
목동의 손만 홀로 남아 벌판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타자를 쳤다
타자를 쳤다
캄캄한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솔가지 타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사막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다 닳은 잉크처럼
어둠에 날리는 글씨와 함께
이따금씩 타점이 강하게 울렸으니
휘어지는 바람을 따라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달라지기도 했다
목동의 손은 가벼웠다
몸은 없고 손만 남았으므로
말없이 서술하는 시간은
활자판의 중심처럼 칸칸씩 이동할 뿐
꿈꾸듯 망설이는 타법은 아니었다
다만 슬픈 꿈의 오타만이
하얀 털뭉치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궁극의 어떤 형상 같았으나
궁극에는 자라지 못할 운명이었다
자판은 타법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면 무언의 잦은 행갈이였을까
어딘가 어둠은 글썽거렸고
그것은 타이핑한 글씨체였다
때로는 벌판을 도는 메아리처럼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땅금 갈라지듯
목동의 손뼈가 더없이 두드러졌다
사방으로 난 길은 없었으나
벌판의 한가운데였다
끊이지 않는
서술의 발소리처럼
손끝에는 굳은살이 피어났고
그렇게 타자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
어둠에 날리는 글씨들은 점점 더 흐려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낙타의 뼈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달아 같은 문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모가 닳은 자판 하나를 누르는 순간
무형의 뒤늦은 타점이 울렸다
무언가 손등에 떨어졌다
빗방울이었다
- 2009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이선옥 시인
- 1983년 대구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09년 <문학동네> 등단
- 시집 <탁, 탁, 탁>
《 심사평 》
- 이문재 시인
땅따먹기 놀이가 있었다. 지구에 도착해서 처음 며칠간을 신생아실에서 보낸 '도시의 아이들'에겐 낯설겠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보편적인 놀이였다. 룰은 단순하다. 평평한 바닥(주로 마당이었다)에 커다란 사각형을 그려놓고 두서넛이 함께 하는데, 한쪽 구석 꼭짓점에 엄지를 대고 중지를 힘껏 늘려(컴퍼스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자기 집을 만든 다음, 바둑알만한 사금파리 조각을 엄지와 검지로 튕겨 세 번 만에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게임이다. 귀가에 성공하면, 사금파리 조각이 나갔다 온 만큼 자기 땅이 넓어진다. 욕심을 부려서 너무 멀리 나가면 귀환이 힘들다(톨스토이도 이 놀이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너무 가깝게 튕기면 자기 땅이 늘어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패자가 된다(저런,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저 놀이가 어엿하게 살아 있었다. 모바일 게임이 있다는 것이다).
산더미 같은 신인상 투고작을 읽다가 문득 어릴 적 몰두했던 저 놀이가 떠올라, 잠깐 딴전을 피웠다. 딴전을 피울 만했던 것이, 데뷔하는 과정이 저 땅따먹기 놀이와 흡사했기 때문이다('땅따먹기'라는 놀이 이름은 영 시답지 않다). 신인상 공모에 투고하는 행위는 땅따먹기 놀이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마당에 그려놓은 커다란 사각형은 문학이라는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시사(詩史) 혹은 시인 공동체이기도 하다.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조르주 바타유) 시인 지망생들은 사각형의 한쪽 코너에 앉아 저마다 자기 집을 그린다. 누구나 다 자기의 체험과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공평하다. 문제는 사금파리 운영법인데, 너무 멀리 튕겼다간 다음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반대로 했다가는 자기 영토가 늘어나지 않는다.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사각형 밖으로 나가면 파울이다.
심사, 특히 신인상 심사를 할 때는 저 사각형을 원으로 바꾼다. 바꿀 뿐만 아니라 원의 크기도 가능한 한 확대한다. 참가자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의도보다는, 첫번째 시도에서 커다란 영토를 확보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가 큰 것이다. 첫번째 시도에서 프레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 아니, 프레임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신인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 있는 산더미를 뒤쪽으로 다 옮기고 나면(매번 그런 편이지만) 허탈하다. 맨 처음의 자기 집이 부실하거나, '남의 집'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너무 멀리 튕겨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투고작도 많았다.
최종심은 세 분으로 압축되었다. 셋에서 다시 둘로 좁히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둘 이상이 함께하는 심사는 시를 보는 눈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하지만 '합의를 끌어내지 않을 수 없다. 차이들은 통약 불가능한 지점까지 나아간다. 때로 '밋밋한 투고작'이 마지막까지 남는 이유가 저 차이들의 완강함 때문이다. 차이가 클수록 합의는 난감하다. 결국 삼분의 이가 차선이다. 심사위원 셋 중 둘이 천거하는 작품. 이번 신인상 심사가 그랬다. 두 분의 응모작을 놓고 심사위원 셋이 제법 오랫동안 저울질을 했다. 눈금이 한쪽으로 쉽게 기울어지지 않았다. 신인상이 아니고 신인 '작품상'이었다면 판단하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선택하라면 나는 이한라씨의 [그네의 경우]나 [존슨과 할머니]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인상이었다. 앞의 놀이에 비유하자면, 이한라씨의 시들은 영토가 넓지 않았고, 영토의 형태 또한 너무 뾰족했다. 시적 대상에 대한 해석이 참신하고, 언어에 대한 감수성도 수준급이었지만, 너무 예각적으로 보였다. 결정적으로, 시의 출발지점인 '자기 집'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신체적 상상력이나 언어와 이미지를 부리는 방식이 그렇게 많이 낯설지가 않았다. 습작기에는 역할 모델이 중요하다. 시가 없으면 시를 쓰지 못한다. 시인이 없으면 시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시/시인 공동체인 것이다. 하지만 역할모델이 사다리나 나룻배 그 이상이어선 곤란하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잊어버려야 한다.
이선욱씨를 시인 공동체의 새로운 멤버로 초청한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자기 집'이 단단해 보였고, 앞으로 자기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시는 이야기이다. 새로운 이야기. 그런데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시간'이다. 시의 성공은 독자를 시의 시간 속으로 얼마만큼 깊숙이 끌어들이냐에 달려 있다. 독자의 시간, 즉 일상적이고 사적이며 수동적인, 그래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독자들의 시간들을 절취해 시의 시간 속으로 흡인해야 한다. 독자의 현실적 시간을 끊어내야 한다. 이선욱씨의 [탁탁탁]은 독자의 시간에 괄호를 치고, 독자를 시의 시간 속으로 유인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시의 도입부를 "그러니까"라고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땅따먹기 놀이에서 자기 영토를 확보한다는 것은 '자기 시간' 그러니까 '시 고유의 시간'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시간은 물론 이야기다. 이선욱씨의 시간/이야기는 "몸은 없고 손만 남"은 상황(탁탁탁)이나 "슬픔은 정지"(오전의 물결)라는 의미를 발견하는 시력에서 나온다. 그 시력은 "진정으로 어긋나기 위해" "순응"라는 "나"(하모니카)의 시력이다. 시인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한다. 하지만 축하는 당분간이다. 길지 않은 축하가 끝나는 그 순간부터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혹독한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이다. 부디 '손목'의 힘으로만 자판을 두드리지 마시기를(이성복 시인의 산문 '장봉현 선생에게'를 꼭 읽어보시기를)
[침묵의 사원] 등을 투고하신 맹재범씨는 기본기가 탄탄했지만 '자기 집'에서 맴돌고 있어 아쉬웠다. "어떤 날엔 모든 사람이 슬펴 보인다"라는 문장을 "오늘은 모든 사람이 슬프다"라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두 문장의 차이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란다. 시적 대상과의 거리도 재검토했으면 한다. 센티멘털과 연민, 진술과 묘사의 차이에 대해서 좀더 고민한다면 의미와 표현에서 '표면장력'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색깔 없는 앵두] 등의 황혜경씨 역시 충분한 습작기를 통과해온 것으로 보였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 특히 어감과 리듬감각이 빼어났다. 그러나 어감과 리듬의 다채로운 전개만으로는 온전한 시가 되기 어렵다. '나는 이 시를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을 늘 붙들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물고기자리 키스] 외의 이라씨, [여름의 수문] 외의 남민영씨에게도 같은 주문을 하고 싶다.
땅따먹기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세 번 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룰이 아니다. 사각형 혹은 원이라는 프레임이 보다 중요하다. 아무도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저 프레임을 벗어나면 시가 아니다. 시쓰기와 땅따먹기 게임을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차원이다. 땅따먹기는 2D이고 시쓰기는 최소한 3D다. 또 있다. 땅따먹기에서 확보한 땅은 배타적인 '사유지'이지만 시/시인이 확보한 새로운 영토는 '공유지이다. 독자들이 저마다 땅따먹기를 할 수 있는, 땅을 넓힌 만큼 삶을 쇄신하는, 아무리 큰 땅을 소유해도 세금이 없는, 이름하여 우주적 인프라다. 그러니 당신도, 아니 당신이 시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