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창으로 본 세상 읽기
노혜숙 수필집《조르바의 춤》을 중심으로 -
최원현
nulsa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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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수필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체험이 독자와 교감할 수 있을 때다. 그러나 교감이란 쉬운 게 아니어서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많은 수필이 생산되는 데도 좋은 수필이라고 평가 받는 게 드문 것도 그만큼 작가와 독자의 그런 교감에 이르는 조건을 충족한 수필이 드물다는 말이다.
교감(交感)이란 최면술을 쓰는 사람이 상대편에게 최면을 걸어 의식을 지배하는 것처럼 서로 접촉하여 하나처럼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것은 동의-동감-공감-감동이 통합된 형태다. 남의 이야기이되 내 이야기가 되는 상태다. 수필에서 이 교감이 중요한 것은 일상의 체험들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독자를 찾는 것이요 독자는 이미 자기도 알고 겪은 체험임에도 그게 식상하지 않게 자신의 추억, 그리움, 아픔의 샘을 자극하여 작가인 양 동화되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젊은이들이 날아야 할 공간, 창조적 상상력과 그 지성의 영역으로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을 예로 든다. 게의 집게발처럼 생긴 세 개의 팩맨(pac-man)을 보고 있으면 그 사이로 있지도 않은 하얀 삼각형의 윤곽선이 보이고, 같은 종이의 흰 바탕색인데도 가상공간의 삼각형은 한층 더 희게 떠오른다. 물리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 도형이지만 그 가상의 삼각형이 바로 젊은이들이 높이 날아야 할 공간, 창조적 상상력과 그 지성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수필 또한 카니자 삼각형처럼 세 개의 팩맨을 통해 독자가 가상의 삼각형인 공감의 장을 보게 해 주어야 한다. 곧 수필의 주제, 제재, 구성의 3요소가 서정(情), 서사(事), 설리(理)의 또 다른 3요소와 만나면서 의미화 내지 형상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 앞에서 선견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삶을 뒤돌아보며 반성케도 하고 사유를 통하여 인간의 정을 품거나 나누게도 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어느 문학보다 더욱 인간적인 문학이요, 가장 삶의 문학일 것이다. 특히 자기 체험을 근간으로 진솔하게 그 체험을 조명하여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수필은 카니자 삼각형이 품고있는 수많은 의미있는 삼각형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문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노혜숙의 수필집《조르바의 춤》은 일상을 팩맨이란 삶의 창으로 내다보며 그걸 소통(疏通)으로 풀어내는 아름다운 세상읽기가 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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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숙 수필의 특징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라는 창으로 본 소통이다. 대개의 수필이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선형적 작업인데 비하여 현재의 일상 자체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며 진지하게 작가의 생각을 그것도 아주 자연스레 독자에게 전달하려 한다.
유리 다호에 뜨거운 물을 찰랑하게 붓는다. 씨앗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있던 감국甘菊이 활짝 꽃으로 피어난다. 가히 꽃의 부활이다. 차는 입으로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마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생이 찻물을 따른다. 투박한 잔에 푸르고 노란 빛이 감도는 찻물을 칠 홉쯤 채운다. 은은한 감국향이 먼저 코끝에 스민다. 잔이 참하게 건너온다. 왼손에 가만히 받쳐 들고 한 모금 마신다. 잔은 고박하나 차는 지극히 섬섬하다. 입 안 가득 향기가 도드라진다. 맛은 어찌나 담박한지. 더는 바라지 않으며 더는 생각에 잠기지 않는 극도의 순간이다. - 감국 향기처럼 중
그런데 그는 ‘감국처럼 한 점 고운 빛이나 향기를 세상에 보태고 돌아가는 꽃의 삶을 꿈꾼다면 욕심일까’라고 끝을 맺어버린다.
감국 차를 보면서 그는 감국 차의 고운 빛과 향기를 꿈꾼다. 결국 현재의 상태에서 그가 보여주는 현상은 감국 차의 빛과 향기인데 그 빛과 향기는 작가와 독자가 같은 생각으로 이루어 내는 가상의 삼각형 속 의미 곧 바람이다. 그런가 하면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새치름하다. 갈피갈피 섬세한 감성의 결을 헤집는다. 해독할 수 없는 바람 문자의 이 막막함이라니. 개심. 그래, 마음을 열지 않은 까닭이구나. 내 마음 하나 헤아릴 줄 모르면서 어찌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 조용히 걸음을 돌려 산에서 내려온다. -개심사 중
그는 마음을 열지 않아 바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해 바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자신을 질책한다. 지금의 나는 현재의 상태다. 그 현재에서 노혜숙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본다. 그 문제가 바로 내가 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다.
그런데 그에게 수필 <내 남자를 팝니다>에선 현재라는 것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수십 년 같은 방을 쓰다보면 집안 한 곳에 놓여있는 물건처럼 익숙하고 편해져서 가끔 있는지 없는지 잊고 살기도 해. 요즘 하는 말로 ‘방짝’이라고 해야 하나. - 내 남자를 팝니다 중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제 같은 오늘, 과거 같은 현재라 착각한다. 그 착각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변화 없는 삶에 대해 권태로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혜숙은 오랜 동안 집안 한 곳에 놓여있는 물건처럼 익숙하고 편한 상태 소위 ‘방짝’이란 표현을 통해 현재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재라는 창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보는 세상은 평범한 것 같으나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것, 일상적인 것 같으나 결코 평이롭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같이하다 보니 그것들이 ‘방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방짝’이야말로 노혜숙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 남자를 팝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부대낌 한 모습일 뿐 ‘방짝’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삶은 그렇게 푸득거리고 뒤틀리는 것 같으나 어느 땐가 보면 죄다 제자리로 와있다. 그런데 노혜숙은 그런 뒤틀림 푸득거림의 순간을 문학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눈에 보이는 것들은 껄끄러움이 아니라 반지르르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런 것들이 되어버린다. 흐르는 물처럼 순리로운 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며 그것은 고운 빛과 향기로 모나지 않은 평안함으로 마음을 여는 것으로 독자의 마음을 연다. 팩맨이 이루는 카이자 삼각형은 그렇게 독자마다에게 새로운 의미와 감동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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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노혜숙 수필의 특징은 관찰자적 입장으로 본 소통의 창, 3인칭 관찰자적 입장의 객관적 고찰을 통해 마치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다.
1인칭 문장이 일반적인 것이 수필문장이기에 남의 얘기를 들려주듯 하는 3인칭적 문장은 자칫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거부감을 갖게 할 위험을 갖는다.
그런데 노혜숙은 이 단순한 법칙을 실험적 수필로 변형시킨다. 자기 집이 아닌 것처럼 집을 짓는다. 그리고 작업이 끝난 뒤에야 살짝 자기 집인 것처럼 내색만 한다. 그것이 내 것이라면 말하기가 곤란한 것들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하여 자연스럽게 말해 버린다. 같은 내용이라도 소설로는 자신의 책임을 면할 수 있지만 수필로는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데 노혜숙은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하고는 결국 작가 자신의 생각을 겨쳤다는 것을 독자도 알고 있으리라는 의도적인 계산속에 수필을 빚어낸다. 그리고는 작가가 거쳐야 할 성찰을 슬쩍 독자에게 넘겨버리고는 그것을 즐긴다.
그날 밤 그녀가 코브라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춤을 출 때 비로소 그 사람을 많이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어디에 저런 끼가 숨어있었지? 하는 짓이 귀엽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라는 말투였다. - 달밤의 이사도라 중
그녀는 여전히 관찰자다. 그의 생각 대신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상황을 전한다. 그런 속에서 작가는 ‘아이처럼 웃고 떠들고 뛰어 놀았다.’ ‘단순한 몰입’으로 그는 작가가 아닌 또 하나의 제3자가 바라보는 제3자가 된다. 그래서 그는 <꼽추네 겨울>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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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숙은 얄밉도록 수필의 맛을 즐기며 수필을 빚어낸다. 힘들어 하지도 않으면서 펼쳐놓는 것 같은 그의 얘기들에 독자는 아무 반감도 저항도 없이 물이 든다. 그냥 동화(同化)다. 딱이 대단한 말재간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도 이야기에 빨려들게 하는 말재간꾼처럼 노혜숙의 수필은 흡독력(吸讀力)이 있다. 그래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같이 가자고 엄포를 놓는 것도 아닌데도 빠져나가질 못한다. 노혜숙의 수필 중 <다북쑥> <북두갈고리 손>이 바로 그런 류다. 지면관계상 그의 작품들을 세심히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표제작인 <조르바의 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수필을 잘 갈무리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불현 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흘러간 곳이 선재도였다. 차안에 흐르는 여인의 야성적 고음에 한 영화 속 남자를 떠올린다. 희랍인 조르바, 야인의 춤사위에서 느껴지던 자유와 희열을 맛보며 작가는 그렇게 춤을 추고 싶어 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친구의 송별회에서 기회가 주어진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온몸에 흥건히 땀에 젖으며 춤에 빠진다. 그리고 해방감을 맛본다. 완고한 자의식을 깨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순간이었다. 비에 젖은 섬에서 그는 조르바가 바다로 나가는 걸 본다. 아니다. 바야흐로 한 판 춤을 위한 작가의 나섬이다.
노혜숙은 글쓰기란 ‘내 안의 어둠을 긍정하고 성찰하는 빗금 공간’이고, ‘그 안에서 균열된 욕망과 무저갱의 허기를 추스르며 자기다움을 굳게 다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 안의 욕망과 허기를 풀어내는 몸짓‘이어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쓴다고 했다.
노혜숙의 빗금공간인 수필들은 그래서 쉽게 읽혀지면서 그와 동화되고 그를 좋아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가 펼쳐내는 언어적 코드들에 독자가 쉽게 빠져든다는 말이다. 소통의 창으로 본 세상 읽기인 수필들, 그의 다음 작품집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또 얼마나 어떤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자못 기대가 된다.
최원현 essaykorea.net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당선 등단. 수필문우회원. 한국수필가협회·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등 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