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황석두 루카 성인이 묻힌 삽티성지
<삽티성지>
부여 삽티성지(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90-14)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黃錫斗 1813∼1866)이 안장된 곳이다.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延豊 현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과거 보러 상경하여 주막에 묵던 중 한 박식한 천주교인을 만났다.
황석두는 그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 받았다.
그 천주교인은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을 주고 떠났고
황석두는 그와 헤어진 사흘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석두는 놀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하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지만 천주교 공부를 계속했다.
황석두는 그의 아내를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 들었고,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황석두의 고집이 이겨, 부친과 가족도 신자가 되었다.
<황석두 루카 성인>
1839년(헌종 憲宗 5년)에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 이후
황루카 일가는 삽티에서 30여리 떨어진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로
이주해 10여 년간 살았다.
산막(山幕)은 사냥꾼이나 약초 캐는 이들이 임시 주거로 사용하는
산 오두막을 일컬으니, 당연히 깊은 산골이다.
천방산 자락의 산막골은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 중 하나로,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부근 교우촌 가운데 가장 커서,
서천 지역 순교자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들이 57명에 이른다.
황루카 성인의 고향인 연풍은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으면
바로 충청도에 이르는 신앙의 교차로였으므로 산막골로 이주한 것이다.
1858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페롱 신부(Feron)가
산막골에 이르러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페롱 신부는 학식이 풍부하고 교리에 밝은 황석두를 한문 선생으로 채용하고
전교회장 일을 맡겼다.
"황석두는 내가 공소에 가서 성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따라다녔는데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이 선교사는 증언했다.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때 내포에서 탈출, 산동반도를 거쳐 본국으로 송환됐다.
1870년 인도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30년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1861년에는 조안노 신부(Joanno, Pierre Marie 1832∼1863)도
산막골에 파견되었다.
공주(公州)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조안노 신부는
불과 2년 후인 1863년 4월 13일 충청도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에서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황석두 성인은 조안노 신부 체제에서도 회장직을 맡았다.
페롱 신부가 1858~1865년에 보낸 서한들 가운데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6통,
조안노 신부가 1862년 11월 4일에 산막골에서 보낸 편지가 1통 남아있다.
황루카는 베르뇌 주교(Siméon-François Berneux 1814. 5. 14 ~ 1866. 3. 7.
한국 이름 장경일-張敬一. 병인박해 때 순교, 성인) 때도
회장으로서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의 기초 원고를 썼다.
또, 5대 교구장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18~1866
한국 이름 안돈이-安敦伊 병인박해 순교, 성인)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는 등 교회 서적 출판에도 공헌했다.
<압송당하는 황석두 루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6년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충청도 홍주(洪州)의 거더리 집(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 99)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당했다.
황 루카는 붙잡히지 않았으나 주교를 몇 십리나 쫓아가다가
그 역시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한양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국혼에 부정하다고 해서 서울에서 1백 Km 이상 떨어진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으로 옮겨져 3월 30일 참수되었다.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 장주기(張周基)가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으로 순교했다.
<성황당 고개>
순교자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아무렇게나 모래밭에 묻혔다.
이 중 황 루카의 시신은 그 조카이자 양자인 황천일 요한이 주선하여
황기원 안드레아 등 가족들이 거두어
현 홍산면 상천 2리에서 내산면 금지 2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삽티’에 안장하였다.
삽티는 황석두가 조카들과 친척들을 이주시켰던 교우촌이다.
산막골의 황석두 루카는 삽티를 가끔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황씨 조카들도 잡혀가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황 루카의 유해를 안장해 드린 사람들마저 순교하여
시신 안장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삽티성지 입구>
그러다가, 1964년 산림 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삽티의 ‘즘터’에서 십자가와 성모상이 들어있는 옹기를 발견했다.
삽티의 ‘삽’은 ‘사이’를 뜻하므로 삽티고개는 ‘사이의 고개’이고,
즘터는 점터의 사투리로 도자기를 굽는 가마터이니
이곳은 삽티 교우촌 신자들이 옹기를 굽던 곳으로 추정된다.
기록을 찾아보니, 전주 교구 정읍 신성리 공소에의 황 마르타가
1922년 4월 6일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는데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시복재판에서 증언하기를,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의 시신을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이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이장했는데(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 1차)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즘터’는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전교구 하부내포 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이 일대 8만 2500 평방미터(약 2만 5000평)를 매입하여
성지를 조성하고 있다.
<삽티성지 야외 성전 제단>
황석두 루카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식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대전교구 홈페이지, 가톨릭사전, 네이버지식백과 등 참조.>
<기도의 집 - 성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