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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Dec. 598 (or Jan. 597) to March 597 B.C.E.:
기원전 598년 12월 (또는 597년 1월)부터 기원전 597년 3월까지:
”The seventh year: In the month Kislev the king of Akkad mustered his army and marched to Hattu. He encamped against the city of Judah and on the second day of the month Adar he captured the city (and) seized (its) king. A king of his own choice he appointed in the city (and) taking the vast tribute he brought it into Babylon.”68 "7년: 기슬레 월에 아카드 왕이 군대를 소집하여, 하투로 진군하였다. 그는 유다 성읍을 치러 진을 치고, 아달월 둘째 날에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읍의 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성읍에 자기가 선택한 왕을 세우고, 막대한 조공을 바빌론으로 가져 왔다."68 Nebuchadnezzar’s army left Babylon “in the month of Kislev,” which was the ninth month, and seized Jehoiachin “on the second day of the month Adar,” that is, the twelfth month.69 This means that even if the army left Babylon in the beginning of Kislev (which this year began on December 18, 598 B.C.E., Julian calendar), the interval between the day it left Babylon until the city was captured and its king (Jehoiachin) seized, on the second Adar (which corresponded to March 16, 597), was three months at the most.70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기슬레 월 곧 아홉째 달에 바빌론을 떠나, 아달 월 둘째 날 곧 열두째 달에 여호야긴을 점령하였다.69 이는 곧 기슬레 월이 시작되는 기원전 598년 12월 18일에 바빌론을 떠났다 하더라도, (쥴리우스력으로기원전 598년 11월 18일에 시작되었다) 군대가 바빌로니아를 떠난 날과,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두 번째 달인 아달 월(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해당)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힐 때까지, 그 간격은 길어야 석달이었다.70 As Jehoiachin ruled for “three months and ten days” (2 Chronicles 36:9), he evidently had been ruling for some days already when Nebuchadnezzar left Babylon in the month of Kislev! If the siege of Jerusalem described at Daniel 1:1f. referred to this siege during the reign of Jehoiachin, how could it be said that it took place during the reign of Jehoiakim (Daniel 1:1), that Nebuchadnezzar came up “against him” (2 Chronicles 36:6), and that “Jehovah gave into his hand Jehoiakim” (Daniel 1:2), when Jehoiakim was already dead when Nebuchadnezzar left Babylon? 여호야긴이 "삼개월 십일" 동안 다스렸기 때문에(역대하 36: 9), 느부갓네살이 기슬레 월에 바빌론을 떠날 때에도 이미 며칠 동안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니엘 1:1의 전반부가 예루살렘의 포위를 기술한다면 여호야긴 통치기에 일어난 이 포위 공격을 두고, 어찌 여호야김의 통치기간 중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 1:1), 느부갓네살이 바빌론을 떠났을 때, 이미 여호야김은 죽었는데,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치러' 왔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야김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quating the siege described at Daniel 1:1f. with the one that took place during the reign of Jehoiachin (2 Kings 24:10–12; 2 Chronicles 36:10) is clearly impossible. Daniel and the Chronicler at 2 Chronicles 36:6 both obviously describe an earlier siege and an earlier deportation, during the reign of Jehoiakim.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the “third year” of Daniel 1:1 means anything else but his third year of reign. There is no evidence at all, either in the book of Daniel, in the other books in the Bible or in the contemporary Neo-Babylonian historical texts, that regnal years were reckoned from a king’s vassalage, or from Nebuchadnezzar’s rise to world dominion. Such theories are nothing more than unfounded guesses, adopted only in an attempt to defend an erroneous application of the seventy years of servitude predicted by Jeremiah. 다니엘 1장 1절 전반부에서 기술된 포위 공격과 여호야긴 왕의 통치기간 중에 있어났던 일은 동일시할 수 없음에 분명하다(왕하 24:10–12; 역대하 36:10). 다니엘과 역대하 36장 6절의 기록자는 둘 다 여호야김의 통치 기간 동안에 있었던 포위 공격과 초기의 유배를 묘사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다니엘 1:1의 "삼년"이 그의 통치 삼년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다니엘서나, 다른 성경들에서, 또는 현대의 신바빌로니아 역사 기록들에서도 통치시기가 왕의 예속이나 느부갓네살의 세계 지배의 시기로부터 통치년이 계수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한 이론들은 근거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예레미야가 예언한 노역의 70년을 예루살렘 황폐기간으로 잘못된 적용을 주장하기 위한 시도로 채택되었을 뿐이다. |
The three years of training
삼년의 훈련
But what about the three years of training referred to in Daniel 1:5, 18, which seem to conflict with a natural reading of Daniel 1:1 and 2:1? Is there no simpler way to solve this seeming conflict than to suppose that the prophet in Daniel 1:1 reckoned Jehoiakim’s regnal years from the beginning of his vassalage to Babylon, and Nebuchadnezzar’s regnal years in Daniel 2:1 from the year of his rise to world dominion? Why should Daniel reckon the regnal years of these two kings in such a confusing, abnormal manner when he knew that his readers no doubt would misunderstand him? And why does he not reckon the regnal years in this peculiar way elsewhere in his book, for instance in 7:1, 8:1, 9:1, and 10:1, where he follows the customary method of reckoning regnal years? Before such strained explanations are adopted, should not a simpler and more natural solution be sought? 그러나 다니엘 1:5, 18에서 언급한 3년간의 훈련은 어떤가? 다니엘 1:1과 2:1의 자연스런 이해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다니엘 1:1에서 예언자가 여호야김이 바빌론에 예속되기 시작한 해부터 계수하였고, 다니엘 2:1에서 느부갓네살이 세계 지배를 장악한 해부터 통치 기간을 헤아렸다고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없을까? 다니엘은 왜 그의 독자들이 그의 기록을 오해하리라는 것을 틀림없이 알면서, 이 두 왕의 통치 기간을 그렇게 혼란스럽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계수해야 했는가? 그리고 그는 어찌하여 다니엘서의 다른 곳, 예를 들어 7:1, 8:1, 9:1, 10:1절에서와 같이 통치 년도를 계수하는 관습적인 방법으로 통치 년도를 계수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억지스러운 설명을 채택하기 전에 더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It has already been demonstrated in the appendix for chapter two (”Methods of reckoning regnal years”) that there is no real discrepancy between the third year of Jehoiakim in Daniel 1:1, and his fourth year in Jeremiah 25:1 and 46:2. When the existing accession and nonaccession year systems are taken into consideration, this difference of one year is easily understood.71 다니엘서의 여호야김 3년(1:1)과 예레미야서의 4년(25:1)이 실제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미 제2장 부록에서 증명되었다. 기존의 즉위 및 비즉위년 방식을 고려할 때, 이 1년의 차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71 This solution also has bearing upon the seeming conflict between the three years of training and Daniel 2:1. If Daniel 1:1 refers to Nebuchadnezzar’s accession year (in agreement with the Babylonian Chronicle), his “second year” at Daniel 2:1 may be regarded as the third year of the training of the Jewish captives. According to the Hebrew way of reckoning time periods, whereby fractions of time were reckoned as full units, this would make three years.72 The three years are not necessarily three full years. Dr. Young presents the following table:73 이런 방식의 해법은 또한 3년간의 훈련과 다니엘 2:1 사이에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것과의 모순을 해결해 준다. 다니엘 1:1이 느부갓네살의 즉위년(바빌로니아 연대기와 일치)을 가리킨다면, 다니엘 2:1에서의 그의 '이년'은 유대인 포로들을 훈련시킨 지 3년째로 볼 수 있다. 시간의 일부를 전체 단위로 계산한 히브리인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이것은 3년이 될 것이다.72 3년이 반드시 3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 박사는 다음 표를 제시한다:73 |
Years of training: 훈련 년수: | Nebuchadnezzar: 느부갓네살: | ||
First year 첫해 | Year of accession 즉위년 | ||
Second year 둘째 해 | First year 첫해 | ||
Third year 셋째 해 | Second year 둘째 해 |
Applying this simple and biblical method to the problem solves the seeming conflict without unfounded theories and strained explanations. Many modem Biblical scholars, who regard the book of Daniel as authentic, have adopted this simple solution. Gerhard F. Rasel, for one, says: 이 간단하고 성경적인 방법을 적용하면 근거 없는 이론과 억지스러운 설명 없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다니엘서를 정경으로 인정하는 많은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 간단한 해결책을 채택했다. 게르하르트 F. 라셀은 이렇게 말한다: It is no longer necessary to explain the difficulty between Dan. 2:1 and 1:1, 18 through textual emendation (H. Ewald, A. Kamphausen, J. D. Prince, K. Marti, and J. Jahn) or double reckoning (C. B. Michaelis, G. Behrmann). The practice of inclusive reckoning, together with the recognition of the Babylonian usage of the king’s accession year as not being counted, removes all difficulties.74 2:1과 1:1 사이의 어려움을 텍스트의 교정(H. 에발드, A. 캄프하우젠, J. D. 프린스, K. 마르티, 그리고 J. 얀)이나 이중 계산(C. B. 미켈리스, G. 버만)을 통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왕의 즉위 연도를 바빌로니아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계수하는 비즉위년 방식을 사용했다고 보면,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문제를 시원하게 제거한다.74 |
CHRONOLOGICAL TABLES COVERING THE SEVENTY YEARS
70년을 포함하는 연대표
The subsequent tables have been developed in order to facilitate an examination of the arguments set forth in this work. The Babylonian and Persian Nisan-to-Nisan regnal years and the Judean Tishri-to Tishri regnal years have been paralleled with our modem calendar. Also, the Babylonian accession years and the Judean nonaccession years have been duly considered. The guiding principle has been to take the biblical dates as they stand, if nothing else is indicated by the context. The tables intend to demonstrate how the different biblical dates may be brought into a natural harmony with each other, and also with the Babylonian chronicles. A few points require specia1 comments: 다음 표는 본 연구에서 제시된 주장을 쉽게 검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니산 월-니산 월로 이어지는 통치년 계수 방식과 유대의 티쉬리 월-티쉬리 월로 이어지는 통치년 계수 방식은 우리의 현대 달력과 병행을 이룬다. 또한, 바빌로니아 왕위 계승 연도와 유대의 비즉위년 방식이 정확하게 고려되었다. 그 나열의 기준은 다른 어떤 것이 문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성서의 날짜들을 있는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 도표들은 서로 다른 성경 연대가 어떻게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그리고 바빌로니아 연대기와도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몇 가지 점에 있어서 특별한 주석을 필요로 한다: |
A. Josiah’s death at Megiddo, summer 609 (2 Kings 23:29)
A. 므깃도에서의 요시아의 죽음, 기원전 609년 여름 (왕하 23:29)
As related in Chapter 5 above (section G-2), the city of Harran, the last Assyrian stronghold, was captured and plundered by Babylonian and Median forces, either late in 610 or early in 609 B.C.E. Ashur-uballit, the last Assyrian king, fled. In the summer of 609 a large Egyptian force headed by Pharaoh Necho marched up to the Euphrates to help Ashur-uballit recapture Harran. For some unknown reason, the Judean king Josiah tried to stop the Egyptian forces at Megiddo, but was defeated and mortally wounded.―2 Kings 23:29–30; 2 Chronicles 35:20–25. 앞서 제5장 (G-2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아시리아의 마지막 요새인 하란은 기원전 610년 말 또는 609년 초에 바빌로니아와 메데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인 아수르-우발릿은 도망쳤다. 기원전 609년 여름 파라오 느고가 이끄는 이집트 대군은 아슈르-우발릿 연합군이 하란을 탈환하는 것을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유브라데) 강으로 진군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대 왕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대에 대항했지만 패배했고 치명상을 입었다.ㅡ왕하 23:29-30; 역대하 35:20-25. At one time it was debated whether Josiah’s death took place in 609 or 608 B.C.E. 75 This question is now settled, since the Babylonian chronicle B.M. 22047 (first published by D. J. Wiseman, 1956) shows that the unsuccessful attempt to recapture Harran took place between Tammuz and Elul (c. July–September) in Nabopolassar’s seventeenth regnal year (609/08).76 As the Egyptian army needed almost a month to travel from Megiddo up to the Euphrates, the battle at Megiddo and Josiah’s death took place early in the summer of 609 B.C.E.77 한때, 요시야의 죽음이 기원전 609년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기원전 608년에 일어났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나, 이 문제는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2047 (D. J. 와이즈먼, 1956년 초판)이 하란을 탈환하려는 시도가 나보폴라사르 통치 17년(기원전 609/08년),탐무즈 월과 엘룰 월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해결되었다.76 이집트 군대가 므깃도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동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기 때문에, 기원전 609년 여름에 므깃도 전투와 요시야의 죽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7 As may be seen from the tables, this date is in good agreement with a Judean Tishri-to-Tishri reckoning of regnal years.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날짜는 유대인들의 티슈리 월-티슈리 월로 이어지는 통치년 방식과 잘 부합된다. |
B. Jehoahaz’ three months of reign and Jehoiakim’s succession
B. 여호아하스의 3달 통치와 여호야김의 계승
After the death of Josiah, the Jews made Jehoahaz the son of Josiah king in Jerusalem. (2 Chronicles 36:1) After only three months of reign, Pharaoh Necho, on his return from the Euphrates, removed Jehoahaz and put his brother Jehoiakim on the throne in Jerusalem. From then on Judah was a vassal to Egypt. As the failed Egyptian-Assyrian attempt to recapture Harran ended in Elul (August–September), and the Egyptian retreat from Harran to Jerusalem took almost a month, the removal of Jehoahaz and installation of Jehoiakim must have occurred in the next month, Tishri (September–October). 요시야가 죽은 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옹립했다. (역대하 36:1) 파라오 느고는 왕이 된 지 석달 만에 유프라테스 강에서 돌아오자,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그의 아우 여호야김을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앉혔다. 그때부터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었다. 이집트-아시리아 연합군의 하란 탈환 시도는 엘룰 월(8월-9월)에 끝났고, 하란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이집트 후퇴는 거의 한 달이 걸렸을 때,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여호야김을 옹립한 것은 다음 달인 티쉬리 월(9월-10월)이었을 것이다. According to the Judean nonaccession year system, Jehoiakim’s first regnal year, then, should be counted from Tishri 1, 609 B.C.E. Jehoahaz’ three months of reign were evidently included in Josiah’s reign of 31 years, instead of being counted as a separate regnal year. (Jehoiachin’s three months of reign, which ended on March 16, 597 B.C.E., was evidently treated in a similar way, being a part of Zedekiah’s first regnal year.) 유대의 비즉위년 방식에 따르면, 여호야김의 첫 번째 통치 연도는 기원전 609년 티쉬리 월 1일에 시작되었어야 한다. 여호아하스의 통치 석달은 요시야의 통치와 분리되어 계수된 것이 아니라, 요시아의 통치 기간인 31년에 포함되었음이 명백하다.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끝난 여호야긴의 통치 3개월은 시드기야의 첫 번째 통치년의 일부로 취급되었음이 명백하다.) |
C. Zedekiah’s first year, 598/97 B.C.E.
C. 시드기아 1년, 기원전 598/97년
As was shown in the first section of the Appendix for Chapter 5, “The ‘third year of Jehoiakim’ (Daniel 1:1–2),” the Babylonian chronicle B .M. 21946 dates Jehoiachin’s removal from the throne to the second Adar of Nebuchadnezzar’s seventh regnal year, corresponding to March 16, 597, Julian calendar, after which Zedekiah was appointed king. Following the nonaccession year system, Zedekiah’s first year, then, was reckoned from Tishri, 598, to Tishri, 597 B.C.E. Zedekiah’s first regnal year was the same as Jehoiachin’s first year of exile, which is seen from a comparison of Ezekiel 24:1–2 (the dates in Ezekiel are those of Jehoiachin’s exile) with 2 Kings 25:1. 5장 부록 첫번째 절, "여호야김 재위 3년"(단 1:1-2)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1946은 여호야긴이 왕위에서 물러난 것은 쥴리우스력으로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해당되는 느부갓네살 7년 아달월 2일이며, 그후 시드기야가 왕으로 즉위했다. 비즉위년 방식의 시드기야의 첫해는 기원전 598년 티쉬리 월에서 기원전 597년 티쉬리 월에 이르기까지이다, 시드기야의 첫 번째 통치 연도는 여호야긴의 유배된 첫해와 같은데, 에스겔 24:1-2(에스겔서에 나온 날짜는 여호야긴 유배에 대한 것임)을 왕하 25:1과 비교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This is quite natural, as Jehoiachin’s three months of reign began after Tishri 598. His first regnal year, therefore, would have been reckoned from Tishri 1, 598, had he not been removed from the throne. Now his three months had to be included in Zedekiah’s first regnal year. 기원전 598년 티쉬리 월 후에 여호야긴의 3개월 치세가 시작되었으므로,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왕위에서 제거되지 않았다면, 그의 첫 번째 통치 해는 기원전 598년 티쉬리 월 1일부터 계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통치 석달 기간은 시드기야의 첫 번째 통치년에 포함되었다. |
D. Hananiah’s “prophecy”, July–August 594 B.C.E. (Jeremiah 28:1)
D. 하나니아의 "예언", 기원전 594년 7-8월 (렘 28:1)
In Nebuchadnezzar’s tenth year a rebellion broke out in his army from the month of Kislev to the month of Tebet (c. November 595–January 594 B.C.E.), according to the Babylonian Chronicle B.M. 21946.78 If this rebellion caused the revolt plans among the Jewish exiles, which also spread to Judah as reflected in Jeremiah, chapters 27–29, these plans must have developed soon after the Babylonian rebellion. The “prophecy” of Hananiah, that the yoke of Babylon would be broken and the exiles brought back within two years, is dated to the fifth month of the fourth year of Zedekiah. (Jeremiah 28:1–4) This fifth month (Ab, corresponding to July– August), therefore, must have fallen in July–August, 594 B.C.E., a few months after Nebuchadnezzar had crushed the rebellion. A look at the table shows that the fifth month of Zedekiah’s fourth year actually fell in July–August, 594 B.C.E., thus indicating that the chronological system presented in the tables is correct.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1946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10년에 기슬레 월부터 테벳 월(기원전 595년 11월-기원전 594년 1월 경)까지 그의 군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유대 망명자들 사이에서도 반란 계획을 세우게 하였고, 예레미야 27-29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유다로 확산되었다. 이 반란 계획은 바빌로니아 내부의 반란 직후 전개된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냐가 바빌론의 멍에를 부수고 2 년 안에 유배된 자들을 돌려보낸다는 예언은 시드기야 사년 오월에 있었던 일이다. (예레미아 28:1-4) 그러므로 이 다섯째 달(7~8월에 해당되는 아브 월)은 느부갓네살이 반란을 진압한 지 몇 달 후인 기원전 594년 7-8월임에 틀림없다. 표를 보면, 시드기야의 사년 오월이 실제로 기원전 594년 7-8월 에 있었다. 따라서 표에 제시된 연대 체계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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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A. K. Grayson, op. cit., p. 102. The chronicle is in complete agreement with the description of this siege given in the Bible. (2 Kings 24:8–17; 2 Chronicles 36:9– 10.)
68 A. K. 그레이슨의 앞서 인용한 저서 102면. 이 연대기는 성경에 나오는 포위공격의 설명과 완전히 일치한다. (왕하 24:8–17; 역대하 36:9–10)
69 The Babylonians had a second Ululu (an intercalary month) in the seventh year of Nebuchadnezzar, thus making Kislev and Adar the tenth and thirteenth months respectively that year, although they were normally the ninth and twelfth calendar months . This fact does not affect the discussion above.
69 바빌로니아인들은 느부갓네살 칠년에 울룰루(윤달)월이 두번 있었으므로, 기슬레월과 아달월은 각각 열 번째와 열세 번째 달이 되었다. 그러나 보통은 그 달들은 아홉 번째와 열두 번째 달이었다. 이 사실은 위의 논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70 If the Babylonian army left Babylon some time after Jehoiachin had ascended the throne, the siege was of very short duration, two months at most and probably less, as the time the army needed to march from Babylon to Jerusalem has to be subtracted from the three months from Kislev to Adar. Such a march took at least one month. It is possible, however, that a part of the army had left Babylon earlier, as 2 Kings 24:10–11 indicates that Nebuchadnezzar arrived at Jerusalem some time after the siege had begun. The reason for the short duration of the siege was Jehoiachin’s surrender to Nebuchadnezzar on Adar 2 or March 16, 597 B.C.E., Julian calendar. (2 Kings 24:12) For an excellent discussion of this siege, see William H. Shea, “Nebuchadnezzar’s Chronicle and the Date of the Destruction of Lachish III,” in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No. 111 (1979), pp. 113f.
70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뒤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바빌로니아를 떠났다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진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기슬레월에서 아달월까지 3개월을 빼야 하기 때문에, 포위 공격 기간은 길어야 두 달, 어쩌면 더 짧을 것이다. 그러한 행군은 적어도 한 달이 걸렸다. 그러나 왕하 24:10-11에 지적되었듯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포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의 일부가 바빌론을 더 일찍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포위기간이가 짧은 이유는 기원전 597년 3월 16일 아달월 2일 또는 율리우스력으로 3월 16일에 여호야긴이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왕하 24:12) 이 포위공격에 대해 훌륭한 설명은 윌리엄 H. 쉐아의 저서 <네부카드네자르 연대기와 라키시 3세의 멸망 시기>를 참조하라. 팔레스타인 탐험 계간지 111호 (1979년) 113면 전반부.
71 A brilliant discussion of this problem may be found in the article by Professor Albertus Pieters, “The Third Year of Jehoiakim,” in From the Pyramids to Paul, a miscellany in honour of Dr. G. L. Robinson (New York: Thomas Nelson and Sons, 1935), pp. 180–193. Pieters concludes: “The ‘third year’ of Jehoiakim in Dan. 1:1 is the same as the ‘fourth year’ of Jehoiakim in Jer. 25:1 and 46:2, the former being reckoned according to the Babylonian and the latter according to the Palestinian method of computing the years of the king’s reign.”—Ibid., p. 181.
71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알베르투스 피에터스 교수가 쓴 <피라미드에서 폴까지>라는 저서의 "여호여김 재위 3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G. L. 로빈슨 박사(뉴욕: 토마스 넬슨과 아들, 1935), 180–193면. 피에테르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단 1:1의 여호야김 재위 3년은 예레미아 46:2의 여호야김 4년과 같다. 전자는 바빌로니아 방식을 사용하였고 후자는 왕의 통치 연도를 계산하는 팔레스타인의 방법에 따라 계수되었다."— 앞서 인용한 저서 181면.
72 This way of counting time periods is often termed “inclusive reckoning.” The best example is the period of Jesus’ death, from Friday afternoon to his resurrection on Sunday morning. Although, chronologically, this period was a little more than two nights and one day, Bible writers refer to it as “three days” (Matt. 27:63; Mark 10:34), even “three days and three nights.” (Matt. 12:40) The Watch Tower Society correctly applies it to mean “a portion of each of three days.”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1, p. 593) Another example is the period of the siege of Samaria, stated at 2 Kings 18:9–10 to have lasted from the seventh to the ninth year of Hoshea; yet the siege is said to have lasted for “three years.” For additional examples, see Edwin R. Thiel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new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3), p. 52, ftn. 12.
72 이러한 시간 계산 방법은 종종 "세는 계수법"이라고 불린다. 가장 좋은 예는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아침 부활까지의 예수의 죽음 기간이다. 비록 만으로 계산하면 이 기간이 하루를 조금 넘기지만, 성경 필자들은 그날을 "3일" (마 27:63; 막 10:34), 심지어 "밤낮 사흘" (마 12:40)로 언급한다. 워치타워 협회는 "3일 기간의 부분"이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적용한다. 왕하 18:9–10에 기록된 사마리아 의 포위공격은 호세아 제7년부터 제9년까지 였으나, 그 포위가 "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 많은 예를 살펴보려면 Edwin R. 티엘레의 저서 <히브리 왕들의 신비로운 숫자> 신개정판을 참조하라.(그랜드 래피즈: 존더반 출판사, 1983년), 52면, ftn. 12.
73 Edward J. Young, The Prophecy of Daniel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49), pp. 55–56; cf. pp. 267–70.
73 에드워드 J. 영, 다니엘의 예언 (그랜드 래피즈: Wm. B. Eerdmans 출판사, 1949년), 55–56면; cf. 267–70면.
74 Gerhard F. Hasel in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Vol. XV, No. 2, 1977, p. 167.
74 게르하르트 F. 하셀의 1977년 앤드루스 대학교 신학 연구 제15권 167면
75 Edwin R. Thiel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New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Michigan: The Zondervan Corporation, 1983), pp. 205–206.
75 에드윈 R. 티엘레의 저서, <히브리 왕들의 신비한 숫자들> 새 개정판(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Zondervan Corporation, 1983년), 205–206면.
76 D. J. Wiseman, Chronicles of Chaldean Kings (London: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61; first published in 1956), pp. 63–67. See also Hayim Tadmor’s article “Chronology of the Last Kings of Judah” in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Vol. XV (1956), p. 228.
76 D. J. 와이즈먼의 저서, <갈데아 왕 연대기> (런던: 대영박물관의 수탁자, 1961년; 1956년 초판), 63-67면. 하임 테드모어가 쓴 기사 <유다 마지막 왕의 연대기> 근동학 저널, 15권, 228면 참조.
77 A. Malamat, “The Twilight of Judah: In the Egyptian-Babylonian Maelstrom” in Supplements to Vetus Testamentum, Vol. XXVIII (Leiden: E. J. Brill, 1975), p. 125, ftn. 5.
77 A. 말라맛의 저서 <베투스 테스타멘툼> 부록으로 나온 "유다의 황혼: 이집트-바빌로니아 마엘스트롬" 28권 (라이덴: E. J. 브릴, 1975년), 125면 ftn. 5.
78 Wiseman, op, cit., p. 73. Cf. A. K. Grayson,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Locust Valley, New York: J. J. Augustin Publisher, 1975), p. 102.
78 앞서 인용한 와이즈먼의 저서 73면. Cf. A. K. 그레이슨의 저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연대기> (뉴욕 로커스트 밸리: J. J. 어거스틴 출판사, 1975년),1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