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장
정동식
우리가 흔히 시장이라고 하면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시장, 대구에서는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이 먼저 떠오른다. 조선의 3 대장에 전주장, 안성장과 더불어 대구장이 들어있다니 우리 지역 시장의 규모나 상권이 예전에도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물류와 물류가 만나며, 사람과 물류가 만나는 곳이므로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이 점은 도시에 있는 시장이나 시골에 있는 시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도시의 시장과 시골 5 일장의 감회는 어떻게 다를까?
도심 시장의 이미지는 대처大處에 있어서인지 아케이드를 갖춘 현대화된 시설과 정찰제를 바탕으로 규격화된 공간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누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곳이며 필요한 물건을 사는 개념에 더 많은 비중이 쏠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시골장의 대명사인 5 일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러 가는 곳은 아닌 것 같다. 농어민의 생활과 문화복합체의 역할을 하며 장의 중심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장터는 땅과 바다를 일구는 농어민이 주인이다. 할머니는 자식처럼 아끼는 봄나물을 보따리에 이고 나와 좌판을 깐다. 할머니들의 산과 밭, 그리고 나무에서 발산하는 푸른 이야기들을 함께 가지고 오는 것 같다.
할매들이 풀어놓은 보따리 하나하나에는 싱그런 자연이 스며있고 할미의 사랑과 열정이 묻어 있다. 산골 할머니는 두릅이나 취나물을 팔러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과 정을 나누기 위해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어떤 노부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손녀에게 용돈을 주려고 이른 아침에 경운기를 몰고 와 난장을 펴고, 또 다른 어르신은 먹고살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농한기에 소일거리로 나오시기도 한단다.
그러나 난장에 전을 펴는 사람 모두가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자식 배를 곯리지 않으려고, 다른 이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새벽이슬을 맞으며 나오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장터를 찾는 농어민 중에는 세상과 만나 소통하고 사람이 보고 싶어 나오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도심에 있는 시장과 5 일장은 이렇게 같은 듯 서로 다르다.
매일 열리는 도회지 시장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통의 폭이 제한적이다. 상인과 고객의 구분이 뚜렷하다. 팔러 나온 사람은 정착해 있고 사려는 사람은 혼자 또는 몇몇 지인들과 쇼핑을 즐기고, 그 공간에서 커피도 마시고 식사를 한다. 그래서 시장에서 만나는 불특정 사람들과 자연스레 소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시골장에서는 약속 없이도 이웃 마을 사람들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웃고 수다를 떨며 열린 관계가 형성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왜 5 일장을 찾을까? 물건을 팔고 사는 이유 말고도 장터에 가는 다른 연유가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다.
시장에는 장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지역 상인도 있고, 날 때부터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여러 장을 번갈아 오가며 계절에 맞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돌림도 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운동 삼아 나와 차비만 벌면 된다는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두커니 혼자 집에 있느니 조촐하게 호박 세 덩이, 찹쌀 네댓 되를 가져 나오는 할머니도 계신다. 이렇게 몇 가지 안 되는 작물을 들고 장에 나오는 것은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삶의 일부이며 행복이다.
다른 이는 장에 나와 사람들 얘기도 듣고, 바람 쐬려고 나오시는 분들도 의외로 적지 않다. 볼 장은 간단히 보겠지만 대개 이런 분들은 시장의 터줏대감이나 지인을 만나야 장에 오는 참맛을 느끼시는 분들이다. 사람이 좋아 장터에서 정담을 주고받으며 살맛을 느끼러 오는 것이리라.
이에 반해 물건을 사러 나오는 사람들은 결이 조금 다르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농기구나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 위해서이며, 다른 지역에서 장터를 찾는 사람은 산지에서 싱싱한 농수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들과 여행이나 나들이 삼아 오일장을 즐긴다. 거기다가 식도락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이런 매력 때문에 도심에 살면서 일부러 인근 5 일장을 순회하는 사람도 늘어난다고 한다.
나는 소싯적에 아버지를 따라 5 일장에 간 추억은 없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시장을 찾았다. 세상에 지쳐 의욕을 잃고 사는 재미가 없어졌을 때. 인생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거나, 나침반이 망가져 안갯속을 더듬거릴 때. 그리고 아프거나 큰 병의 고비를 넘기며 재출발의 의지를 불태울 때. 그럴 때는 어김없이 5 일장을 들러 해답을 찾으려 했다. 이럴 때 시골장을 찾으면 신기하리만치 안개가 걷히고 완전치유가 이루어졌다.
시장은 희망과 절망의 분기점에서 찢어진 돛을 다시 정비하여 저 넓은 바다로 거침없이 나가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시골 장터의 이런 신묘한 힘은 어디서 나올까? 시장의 어떤 모습이 나의 약한 마음을 불꽃처럼 살아나게 했을까? 아마 시장이 주는 긍정적 에너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지역 어느 장터를 가더라도 터줏대감처럼 장을 지키며 억척스럽게 강한 생활력을 지닌 할머니들이 계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용기가 있고 위기에 더 강하다는 제주 여성, 60만 번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화문석 하나를 거뜬히 만들고, 어디에 시집가더라도 잘 산다는 강화 처녀들은 강인함의 표상이다. 이런 할머니들이 꽃 각시 시절부터 50~60년간 덤도 많이 주시며 지역의 장을 아름답게 지키고 계신다.
반세기를 지역의 장터에서 보내며 인정 많기로 소문난 이분들에게서 인생 허투루 살아서 안 되겠다는 의지를 배우게 된다.
혹시 여러분은 장터 투어를 하는 동안 오체투지 하듯 시장바닥을 온몸으로 다니시는 행상인을 보신 적이 있는가? 그러다가 애절한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가까이 들리면 우리는 한쪽으로 길을 비키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울컥 목이 멘다.
잠시라도 삶의 끈을 놓으려 한 과거의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고삐를 조이게 된다. 열심히 사시는 그분들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흔하지는 않지만 3대를 이어오며 가업을 대물림하시는 분들도 대단하시다.
고령에서 3대째 대장간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불을 지펴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충북 괴산장에서 3대째 철물점을 하는 백 씨 할머니는 ‘밑지고도 팔면 그 고객은 나중에 우리 단골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계신다. 전통을 이어가는 분들의 성실성과 뚝심은 한 번의 실패에 휘청거리는 뭇사람들의 약한 의지력을 질타하는 것 같다.
이에 못지않은 장터의 화려한 조연이 있다. 바로 ‘장돌뱅이 명인의 넉살 좋은 입담’이다. 그들은 장터를 찾는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웃기고 설득력 있는 멘트 한방으로 순식간에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홀린다.
“둘이 먹다가 한 명 죽어도 책임 못 져요.”.”
“뱃속에 들어간 것은 무조건 공짜!”
“맛없으면 돈 안 받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이 왔어요.”
“자~ 1근 사면 덤으로 1근 더 줍니다.”
“오늘 새벽! 동해 배에서 막 내린 싱싱한 생선이 한 마리 만원!!”
장돌뱅이 명인의 허풍과 큰소리는 듣는 재미가 있고 귀가 솔깃하다. 얻어먹기만 하고 그냥 가려니 뒤통수가 가렵다. 그래서 그냥은 못 간다. 정은 주고받는 것이라 맛만 보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자니 발병이 날 것만 같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장은 그렇게 돈이 돌고 흥이 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장터에서 나오는 신묘한 힘의 원천은 앞에서 언급한 네 부류의 사람들에서 나온다. 그들은 모두 열정의 아이콘이다. 이토록 알맹이가 단단한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들 내면의 삶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지금까지 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죽을 이유가 없어. 포기는 사치일 뿐야.’라고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들의 내공은 마침내 ‘사지 멀쩡한 너! 이대로 시들고 말거야?'라고 우리를 채근하며 스스로 날도록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시장은 있었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다가 본격적으로 장시가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라고 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는 대부분 5 일장이었으며 주변의 다섯 개 지역을 하나로 묶어, 날짜를 달리 하여 시장을 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니 시장과 5 일장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요즘 5 일장의 일부 쇠락과 시설의 현대화, 상설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도심의 시장도 덤을 주는 분들이 늘어나며 5 일장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두 개념의 궁극적 차이점은 많이 좁혀지는 듯하다.
봄의 정원이 4월에 피는 꽃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즈음이면 도시의 은퇴한 베이비 부머들과 눈치 빠른 조선의 여인들이 산지에서 제철 음식을 맛보려고 5 일장을 방문하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
나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웅어회를 맛보기 위해 유채꽃 핀 남지 5일장을 찾아 나선다. 회귀성 웅어는 산란을 위해 3월에서 5월까지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오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제철이다. 육질은 전어와 비슷한데 뼈가 연하고 고소하여 식감이 좋다.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웅어회는 초장과 제피를 곁들여 먹으면 별미 중 별미다.
나는 5월이 오기 전에 삶의 활력소를 찾으러 2, 7장인 남지장에 들리려 한다.
더 지체하면 웅어뼈가 단단해져서 먹기 어렵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벌써 남지 5 일장에 머물고 있다.
(2023.4.20)
첫댓글 시장의 맛과 멋을 듬뿍 담은 글입니다. 삶의 현장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시장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글을 만들었습니다. 조금 글을 줄여서 깔끔하게 정리 해보세요.시골 5일장의 서정적 분위기를 조금 더 강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