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홍 교주를 죽이다
위소보의 동작이 신행(神行)이라고 할 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변(百變)이라는 두 글자는 그의 천성과 비슷하여 위소보가 거의 터득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의 고수는 아니지만 당금 무림에서 뺑 소니치는 데는 첫번째나 두 번째 가는 고수였다. 홍 교주는 연신 노호를 터뜨리며 연달아 삼 장을 쏟아냈다. 위소보는 이 장을 피할 수 있었으나 세 번째의 장력은 끝내 피하지 못하고 펑, 하니 등을 얻어맞고 곤두박질치면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홍 교주는 중상을 입은 나머지 장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위소보는 보의가 있 어서 몸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뒷덜미가 바짝 조여들었다. 이미 홍 교주의 두 손에 잡히고 만 것이다. 위소보는 심장이 목구멍으 로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는 다급한 김에 고개를 숙이고 홍 교주의 사타구니 아래로 빠져나가 려고 했다. 이것은 홍 교주가 과거 그에게 가르친 구명삼초 가운데 일 초였다. 그 일 초를 귀비기우(貴妃騎牛)라고 했는지 아니면 서시기양 (西施騎羊)이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는 벼락같이 사타구니 아래로 기어나가 몸을 훌쩍 날려 홍 교주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이 일 초도 그는 결코 익숙하게 연마한 상태는 아니었다. 설사 익숙하 게 연마한 상태라고 해도 홍 교주와 같은 대고수에게 사용해서는 결코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홍 교주는 신룡교의 네 고수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이었고, 또 부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당황하고 어지러워 중상을 입은 몸이었다. 어깻죽지에 박힌 안 령도는 어小비를 자르고 깊이 파고들었고, 아랫배에는 한 자루 판관필 이 박혀 있었다. 그런 상태로 수백 장이나 급히 달렸고 내공이 거의 소 모된 상태였다. 두 손으로 위소보를 움켜잡았을 때 이미 손에 힘이 없 는 것을 느꼈고 위소보가 떨치자 그만 손을 놓쳐 위소보는 그의 목에 올라탄 것이었다. 위소보는 그의 어깻죽지에 올라타자 몸이 떨어질까 봐 자연히 손을 뻗 쳐 그의 머리를 얼싸안았는데 두 손의 중지가 자연스럽게 홍 교주의 눈 꺼풀 위에 닿았다. 홍 교주의 뇌리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 자기가 이 한 수를 가르쳤다는 생각이었다. 적의 목덜미에 올라타는 그 순간 적의 눈알을 뽑으라고 가르쳤는데 놀랍게도 자기와 같은 호걸이 끝내는 한 장난꾸러기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장난꾸러기가 쓰는 초식이 바로 자기가 가르친 것임을 상기하니 진정 인과응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평생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와 같은 인과응보를 받는 것도 억울 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길게 탄식을 내쉬며 두 손을 아래로 내 렸다. 그가 한 가닥 끌어올린 숨을 뿜어 내자 그는 더 견딜 수가 없어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위소보는 그가 무슨 무서운 수법을 펼치는 줄로 알고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홍 교주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부인, 전아, 전아! 그대....그대는 이리 다가오시오.]
홍 부인은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갔으나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홍 교주는 말했다.
[그대의 뱃속에....든 애는 도대체....도대체 누구의 애새끼냐?]
홍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알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곁눈질로 위소보를 한 번 바라보고 얼굴을 붉게 물 들였다. 홍 교주는 놀라고 분노하여 호통쳤다.
[설마....설마 저 꼬마가....]
홍 부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야말로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 교주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저 꼬마를 죽이고 말겠다.]
그는 몸을 날려 위소보에게 덮쳐들었다. 홍 교주는 온 얼굴이 피투성이 인데다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두 손에서 선혈 을 뚝뚝 떨어뜨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혼비백산해서 몸을 날려 다시 홍 부인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 어나가 그녀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홍 부인은 두 팔을 벌리고 정면에 서 홍 교주를 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는 한평생 위풍을 떨쳤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홍 교주는 몸을 허공에 떠올렸다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고 내공이 종적도 없이 사라져 쿵, 하니 홍 부인 옆에 떨어졌다. 그는 한맺힌 어 조로 말했다.
[나는 교주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야....들 어야 한다. 어째서.... 어째서.... 모두.... 나를 배반하느냐? 너희 들.... 너희들은 모두 틀렸다. 오로지.... 오로지 나만 옳다. 나는 너 희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죽이고.... 나 혼자만 영원한 선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수명은 하늘....하늘.... 하늘....]
하늘처럼 길다는 한 마디를 끝내 내뱉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 대로 숨지고 말았다. 두 눈은 부릅뜬 상태였다. 위소보는 몇 걸음 도망친 후에야 몸을 돌렸다. 홍 교주는 쓰러져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어 걸음 다가가 언제라도 뺑소니칠 자세를 취 하며 물었다.
[그는 죽었소?]
홍 부인은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말했다.
[죽었어요.]
위소보는 다시 두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는....그는 어째서 눈을 감지 못하는 거죠?]
별안간 철썩, 소리와 더불어 위소보는 심하게 따귀를 한 대 얻어 맞았 고, 곧이어 오른쪽 귀를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바로 건녕 공주였다. 공 주는 다시 위소보의 엉덩이를 한 번 걷어차더니 욕을 했다.
[이 후레자식, 그가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네가 그의 마누라를 훔쳤기 때문이야! 너....너는 어쩌다가 저런 흉악한 여자와 배가 맞았지?]
홍 부인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건녕 공주의 따귀를 후려쳤다. 공주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공주의 오른손은 여전히 위소보의 귀를 잡 아당기고 있어 그녀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지자 위소보는 귀가 아파서 그녀의 몸 위에 엎어져 버렸다. 홍 부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말을 할 때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너를 죽이고 말테다.]
공주는 대노해서 몸을 일으키며 홍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홍 부인이 왼 발을 걸자 공주는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공주는 세 번이나 몸을 일으켜 싸우려 들었으나 계속 곤두박질쳤다. 끝 내 그녀는 자신의 무공이 상대방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음을 알고 주저 앉아서 울부짖으며 욕을 했다. 그러나 감히 홍 부인을 욕하지 못하고 위소보에게 욕을 퍼부었다.
[후레자식, 죽일 놈의 태감 같으니. 짐승, 짐승 같으니. 고약한 소계 자!]
위소보는 귀를 만져 보았다. 손에 피가 묻어 났다. 귓불이 공주가 잡아 당기는 바람에 크게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홍 부인은 나직이 위소보에 게 말했다.
[나는 홍 교주의 부인이었어요. 내가 그를 매장해도 좋지요?]
그 음성은 매우 부드러워 위소보에게 간절히 허락을 바라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말했다.
[좋소이다. 마땅히 묻어 줘야지요.]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한 자루의 판관필을 들어 홍 부인과 함께 모래 바닥에 구덩이를 팠다. 방이와 목검병이 다가와 도왔다. 그들 네 사람 은 홍 교주의 시체를 매장했다. 홍 부인은 끓어엎드리더니 큰절을 한 번 한 후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시집을 오도록 강요했지만....혼례를 올린 후 나는 한 번도 진심으로 그대를 대한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주르륵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멍하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눈물을 닦더니 위소보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나요, 아니면 중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요?]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말했다. [이곳에는 절대로 머무를 수 없소. 홍 교주와 육 선생 등의 악귀가 나 에게 목숨을 달라고 할 것이니 야단이 아니오? 하지만 중원으로 돌아가 면 소황제는 나를 잡아다 목을 자르려고 할 것이오. 가장 좋기로는.... 가장 좋기로는 아주 조용한 곳을 찾아 숨는 것이오.]
별안간 그는 한 곳을 머리에 떠올리고 기뻐하며 말했다. [있소. 우리 통흘도로 갑시다. 그곳에는 악귀도 없고 소황제도 나를 찾 을 수 없을 것이오.]
홍 부인은 물었다.
[통흘도는 어디 있나요?]
위소보는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의 조그만 섬을 가리키는 것이오. 나는 그곳을 통흘도라고 부른답 니다.]
홍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좋다면 그리 가도록 하세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녀는 위소보에게 매우 고분고분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갑시다, 가. 모두들 함께 갑시다.]
그는 공주를 부축하고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배에 오릅시다.]
공주는 손을 휘둘러 다시 뺨을 후려치려고 했으나 위소보는 고개를 옆 으로 돌려 피했다. 공주는 노해 외쳤다.
[나는 안 가겠어.] [이 섬에는 많은 악귀들이 있소. 머리가 없는 귀신, 다리가 잘린 귀신, 대포에 맞아 창자가 흘러나온 귀신, 전문적으로 여자의 큰 배만 더듬는 손 여러 개 달린 귀신....]
공주는 그 말에 무척 겁이 나서 발을 굴렀다.
[그대와 같이 전문적으로 터무니없이 주둥이만 놀리는 귀신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왼발을 쳐들어 위소보의 엉덩이를 힘껏 찼다. 위소보는 악, 하고 펄쩍 뛰었다. 홍 부인이 천천히 다가가자 공주는 몇 걸음 물러섰다. 홍 부인이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가 다시 위 공자를 한 번 때리면 나는 그대를 열 번 때 릴 것이고, 그대가 그에게 한 번 발길질을 하면 나는 그대에게 발길질 을 열 번 할 거예요....]
공주는 그만 화가 나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대는 그와 어떠한 사이길래 그를 감싸고 도는 거예요? 그대는....그 대의 지아비가 죽고 나니까 남의 지아비를 빼앗으려는 거예요?]
방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대의 지아비도 죽지 않았나요?]
공주는 극도로 노해서 욕을 했다.
[이 못난 계집애, 너의 지아비도 죽었다.]
홍 부인은 공주에게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감히 한번만 무례한 말을 한다면 나는 그대 혼자 이 섬에서 지 내도록 할 것이며, 한 사람도 그대를 벗삼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알아 서 해요.]
공주는 자기 혼자 이 섬에서 머물면 그 많은 창자를 드러낸 귀신, 손 많은 귀신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평생 귀여움을 받 으며 자랐고, 턱으로 사람을 부린 몸이었으나 이때는 금지옥엽의 오만 을 부릴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고약한 계집애가 오늘은 적수를 만나게 되었구나. 이제부터 그녀를 제압할 사람이 있으니 걸핏하면 손으로 때리는 일은 하지 않겠지.) 그는 잡아당겨서 찢어진 자기의 귀를 손으로 만져보니 여전히 매우 아 팠다. 홍 부인은 방이에게 말했다.
[방 소저, 그대는 가서 사공들에게 배를 띄울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방이는 말했다.
[예.]
그녀는 다시 말했다.
[부인께선 어째서 속하에 대하여 이토록 깍듯하십니까? 감당할 수가 없 습니다.]
홍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매로 칭하도록 하고 다시 부인이니 속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대는 나를 전 언니라고 부르고 나는 그대를 이 누이라고 부 르도록 해요. 그 독약의 해약은 배에 오른 후 그대에게 복용시켜 드리 겠으며 다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방이와 목검병은 모두 기뻐했다. 일행이 배 위에 오르자 사공들은 돛을 올려 배를 서쪽으로 몰았다. 위 소보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매우 의기 양양해졌다. 홍 부인은 해약을 꺼내 방이에게 먹이고 다시 배 위에 있던 무쇠상자를 열더니 위소보의 비수와 함사사영이라는 암기, 은표 등을 꺼내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리고 증유 등이 가졌던 무기도 되돌려주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나 역시 그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소?]
부인은 기뻐서 말했다.
[좋아요. 서로 나이를 따져 봐요. 누가 많고 누가 적은지 알아봐야겠어 요.]
사람들은 생년월일을 말하게 되었는데 물론 홍 부인 소전이 나이가 제 일 많았다. 그 다음이 방이였으며, 그 다음이 공주였다. 증유와 목검병 은 위소보와 동갑이었는데 증유는 삼 개월 일찍 난 셈이었고, 목검병은 그보다 며칠 늦게 태어난 셈이었다. 소전과 방이 등 네 여인들은 언니니 누이니 매우 다정하게 불렀다. 다 만 공주만 옆에서 노기를 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전이 말했다.
[그녀는 공주 전하이니 우리들 평민과 자매가 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 이군. 모두들 그녀를 공주 전하라고 부르도록 하세.]
공주는 냉랭히 말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어요.]
그녀들은 한 패거리가 되었는데 자기는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양심도 없는 죽일 태감 소계자는 그녀들 네 사람을 자기보다 더 감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울적해진 공주는 참을 수 없어 소리내어 울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어 조로 천천히 말했다.
[됐소.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울지 마시오....]
공주는 대뜸 위소보의 따귀를 때리려고 하다가 갑자기 소전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후려친 일 장을 갑자기 멈출 수 없었고 부득이 중도 에서 방향을 바꾸어 퍽, 하고 자기의 가슴을 때리고 아, 하고 외쳤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공주는 더욱 화가 나고 서러워서 위소보의 품에 머리를 박고 크게 소 리내어 울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됐소. 모두 싸우지들 말아요. 우리 신나게 노름이나 하도록 합시다. 내가 전주가 되지.]
그러나 홍 교주의 철상자를 아무리 뒤져 봐도 위소보의 주사위는 찾아 낼 수 없었다. 아마도 육고헌이 그의 몸을 수색할 때 그 두 알의 주사 위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 다. 소전은 웃으며 말했다.
[나무로 두 알의 주사위를 깎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나무는 너무나 가벼워서 맛이 나지 않을 것이오.]
증유가 손을 품속에서 꺼내더니 주먹을 쥐고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맞혀 보세요.]
위소보는 말했다. [동전이 몇 개인지 알아맞히라는 것이오? 그것도 좋겠지. 어찌 되었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증유는 미소를 지었다.
[몇 알인지 알아맞혀 보세요.]
위소보는 웃었다.
[두 알?]
증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하얀 손바닥 위에는 놀랍게도 두 알의 주사위가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아, 하고 큰소리를 질렀으 며 펄쩍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난 것이오? 어디서 난 것이오?]
증유는 나직이 웃으며 주사위를 탁자 위에 놓았다. 위소보는 냉큼 집어들어 한 번 던지고 다시 한 번 던지는데 그 재미가 무궁무진했다. 그는 두 알의 주사위 무게가 때에 따라서 가볍고 무거운 것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수은을 넣어 만든 가짜 주사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증유는 언제나 수줍음을 잘 타고 얌전한데 어 째서 이와 같은 가짜 주사위를 만들어 남의 돈을 따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마음속으 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왼손을 뒤로 돌려 그녀의 허리 를 껴안고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웃었다.
[정말 고맙소, 유 누나. 그대가 내 주사위를 줄곧 몸에 지니고 있었으 니 천만다행이오.]
증유는 온 얼굴이 새빨개져서 선실 밖으로 달아났다. 원래 그날 위소보 가 왕옥파 제자들과 주사위를 던져 노름을 하였을 때 목숨을 걸었지만 나중에 사람들을 모조리 석방하였고, 증유는 떠날 때 군영 안에서 그에 게 두 알의 주사위를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었다. 위소보는 이미 그 일을 깜박 잊고 있었으나 증유는 줄곧 품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사위는 구했지만 여자들은 도박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위소보 를 상대로 그저 재미로 놀았으나 거는 돈이 너무 적었고, 이기고 지는 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밥 한 끼를 먹을 시간을 놀았지만 여자 들은 아직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흔히 양주의 기녀원이나 도박장, 궁중 또는 군영 등에서 마구잡이로 판돈을 걸고 노름판을 벌이던 때와 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위소보는 그만 흥미가 싹 가시는 것을 느끼고 소리쳤다.
[때려치웁시다. 그대들은 하나같이 노름할 줄도 모르는군.]
그러나 금후 통흘도로 피난하여 지내게 될 때 다섯 명의 미녀가 있어서 자기를 모시고 있다지만 노름을 할 수도 없고 볼 연극도 없다는 데 생 각이 미치자 답답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 안에서 수천 수만 냥의 금이나 은이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금과 은은 그야말로 흙, 모래, 자갈들과 마찬가지였고, 돈을 모으는 것 도 흙, 모래, 자갈을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쌍아의 생사 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고, 아가 또한 어디 있는지 수시로 걱정 이 되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홍미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우리 통흘도로 가지 맙시다.]
소전은 말했다.
[그럼 어디로 가겠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우리 모두 요동으로 갑시다. 거기서 큰 보물을 끌어내도록 합시다.]
소전은 말했다.
[탈없이 조용한 섬에서 태평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엄청난 보물을 파내서 무엇에 써요?]
위소보는 말했다.
[금은보화가 어째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오?]
방이는 말했다.
[오랑캐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보내 도처에서 그대를 잡으려 할거예요. 그러니 우리들은 숨어서 피하는 것이 좋겠어요. 일이 년 지난 후 그대 가 요동으로 가고 싶다면 그때 다시 우리 모두 함께 가도 늦지 않을 거 예요.]
위소보는 증유와 목검병에게 물었다.
[그대들 두 사람의 의견은 어떠시오?]
목검병은 말했다.
[나는 사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증유는 말했다.
[그대가 만약 답답하다고 생각한다면 섬에서 그저 몇 달만 피해 있기로 해요.]
그러나 위소보가 여전히 불쾌한 빛을 띠고 있자 다시 말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대를 상대로 주사위 노름을 하도록 해요. 지면 벌 로 손바닥을 맞기로 해요, 어때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손바닥을 때린다고 무슨 재미가 있어?) 그런데 부끄러운 빛을 띄우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무척 귀여워 그는 마 음이 설레는 것을 느겼다.
[좋소, 좋아. 내 그대들의 말을 들으리다.]
방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미소지었다.
[과거 저는 그대에게 너무나 잘못했어요. 나는 찬을 만들어 그대 술상 을 봐드리겠어요. 내가 그대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받아주세요.]
위소보는 더욱 기뻐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방이는 뒤쪽으로 찬을 만들러 갔다. 방이의 음식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이와 같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음 식은 배 안의 재료들이 완전하지 못했으나 먹는 사람들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위소보는 외쳤다.
[우리 주먹내기를 합시다.]
목검병과 증유, 그리고 공주 세 사람은 시권(猜拳:주먹내기)을 할 줄 몰라 위소보는 그녀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가양호(哥孃好), 오경괴수(五 經魁首), 사계평안(四季平安)이 라고 외치며 주먹을 내밀었다. 공주는 처음에 답답하게 여기고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주먹내 기를 하고 몇 잔의 술을 마시자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오후에 통흘도에 도달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주둔했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중군장(中軍帳)을 삼았던 집도 여전히 서 있었다. 위소보라는 대장수가 늠름하게 지휘하던 광경 은 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방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날 바로 이곳에서 그대는 날 속여 배에 오르도록 만들었으며 하마터 면 내가 나찰국에서 목숨을 잃게 만들 뻔하지 않았소?]
방이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사과했잖아요. 설마 나에게 큰절을 하라는 것은 아니겠죠?]
위소보는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마음을 굳게 가진다면 훌륭한 보답이 있듯이 내가 천신만고 고생을 하긴 했으나 오늘 끝내 진정으로 함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목검병이 뒤에서 외쳤다.
[그대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들으면 안되는 얘긴 가요?]
방이는 웃었다.
[그이는 그대의 얼굴에다 조그만 자라 한 마리를 새기겠대요.]
소전은 말했다.
[우리 너무 서둘러 장난칠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일부터 하는 것이 중 요해요.]
그녀는 즉시 사공들에게 배 안의 모든 양식과 기구들을 모조리 섬으로 옮기도록 하고 다시 배 위의 돛배와 삿대, 밧줄, 키를 뜯어내어 섬으로 옮기고 벼랑의 동굴 안에 넣어 두었다. 이제 사공들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칠 염려는 없었다. 위소보는 칭찬의 말을 했다.
[전 누나는 역시 세심하시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바다 저쪽에서 꽝, 하는 소리가 들 렸다. 대포소리인 것 같았다. 여섯 사람은 깜짝 놀라 큰 바다 쪽을 바 라보았다. 바다 위에는 하얀 안개가 가득 덮여 있었는데 안개 속에서 두 척의 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꽝, 꽝, 하는 음향이 두 번 들렸는데 아니나다를까 배 위에서 대포를 쏘고 있었다. 위소보는 외쳤다.
[야단났다. 소황제가 사람을 시켜 나를 잡으러 왔소.]
증유가 말했다.
[우리 빨리 배 위로 올라가 도망가요.]
소전은 말했다.
[돛대와 키가 언덕에 있으니 지금 설치하기는 너무 늦었어요. 숨어서 기회를 보아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요.]
여섯 사람 가운데 공주 외에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두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왔던 터라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소전은 다 시 말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끝내는 관병에게 들키고 말 거예요. 그러니 우리 저쪽 벼랑 위 동굴로 들어가도록 해요. 관병이 하나하나 벼랑 위로 올 라와 공격을 해 온다면 우리가 하나하나 죽여서 그들이 우리들에게 달 려들지 못하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맞았소. 이것이야말로 한 용사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옹기 그릇 안 에서 자라를 잡는 것처럼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는 격이지.]
소전은 미소지었다.
[맞았어요!]
공주는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위소보는 눈을 흘겼다.
[뭐가 우습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대는 숙어를 잘 사용하여 듣는 사람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군요.]
위소보는 공주를 한 번 더 흘겨 주었다. 여섯 사람은 동굴로 들어갔다. 소전은 칼올 휘둘러 나뭇가지들을 잘라 서 동굴 앞에 쌓아 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바깥쪽을 살폈다. 두 척의 배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곧장 통흘도 로 들어왔다. 뒤의 배는 아직도 대포를 쏴대고 있있고, 포탄은 앞쪽 배 의 주위에 떨어지면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곤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뒤쪽의 배가 앞쪽의 배를 향해 대포를 쏴대고 있군.]
소전은 말했다.
[두 척의 배는 서로 싸우고 있어요.]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그럼 저 배들은 우리를 잡으러 온 게 아니군?]
소전은 말했다. [그렇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들이 섬으로 와 사공들을 만나게 되어 물 으면 즉시 알아차릴 것이고, 반드시 이곳을 수색할 거예요. 설사 우리 가 서둘러 사공들을 죽인다 해도 시체들을 묻을 여유가 없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앞의 배는 어째서 대포를 쏴서 반격을 하지 않을까? 정말 재미가 없구 먼. 네가 한 방 쏘고 내가 한 방 쏘아 두 척의 배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했으면 좋겠다.]
앞쪽의 배는 비교적 작았다. 돛은 잔뜩 바람을 안고 무척 빠르게 달려 왔다. 갑자기 대포소리가 나면서 돛대가 부러지고 돛대에 불이 붙기 시 작했다. 위소보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앞쪽의 배는 대뜸 기울어졌고 선채가 맴을 돌았다. 곧이어 배 위에서 소정(小艇)을 내리더니 십여 명이 소정 위로 뛰어내려 노를 젓기 시작 했다. 섬과는 이미 가까워진 상태였고 뒤의 배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는 데 물이 얕아 언덕에 댈 수가 없었다. 그 배에서도 소정을 내려놓았는 데 다섯 척이나 되었다. 앞의 한 척은 도망을 치고 뒤의 다섯 척은 뒤쫓았다. 얼마 후 앞의 소 정에 타고 있는 열 명의 여인들이 모래바닥 위로 뛰어올라 주위의 형세 를 살폈다. 누군가 소리 높여 외쳤다.
[모두 저쪽 벼랑으로 갑시다.]
위소보는 그 목소리가 사부 진근남의 음성 같다고 생각했다. 십여 명 이 산 언덕을 따라 벼랑 위로 올라오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손에 장검 을 들고 벼랑가에 서서 지휘를 하는데 바로 진근남이었다. 위소보는 너 무 기뻐서 동굴에서 달려 나가며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
진근남은 몸을 돌려 바라보더니 위소보를 발견하고 놀람과 기쁨에 얽혀 외쳤다.
[소보,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느냐?]
위소보는 나는 듯 달려가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십여 명의 사람들 가운 데 한 명의 소저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아가였다. 그는 크게 외쳤다.
[아가!]
그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등뒤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 다. 바로 정극상이었다. 아가를 만났으니 정극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당 연했다. 위소보는 미친 듯 크게 기뻐하다가 꼴도 보기 싫은 그 녀석을 만나자 기분을 잡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외쳤다.
[상공!]
다른 한 사람이 또 외쳤다.
[위 향주!]
그는 그저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 멍하니 아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 자기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만 손이 뻗쳐 와서 그의 왼손을 잡아 위소보는 흠칫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수려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띄 우고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쌍아가 아닌가? 위소보는 얼마나 기뻤던지 대뜸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쌍아. 보고 싶어 죽을 뻔했다.]
너무나 기뻐서 그는 아가마저도 잊고 말았다. 진근남은 외쳤다.
[풍형, 그리고 풍 형제. 우리는 이 통로를 지키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하고 저마다 무기를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벼랑 위로 오르는 좁은 길을 지켰다. 한 사람은 풍석범이었고, 한 사람 은 풍제중이었다. 위소보는 갑자기 친숙한 사람들을 만나자 다음과 같 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쌍아는 말했다.
[풍 나으리께서는 저를 데리고 곳곳으로 그대를 찾았는데 마침 진 총타 주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소문을 듣 고서....그래서....]
쌍아는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기쁨에 겨워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이때 다섯 척의 소정을 타고 온 추격병들이 모조리 모래 바닥 위로 올 라왔는데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니 모두 청나라의 군사들로서 칠팔십 명 은 될 것 같았다. 앞장을 선 사람은 손에 긴 칼을 들고 있었고, 체구가 우람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얼굴을 잘 볼 수는 없었으나 청나라 군사들 을 지휘하여 대오를 짓도록 하고 있었다. 청나라 군병들은 장군이 영을 내리자 등에서 기다란 활을 내리더니 전 통에서 활을 꺼내 시위에 먹이고 벼랑 위를 겨냥했다. 진근남은 외쳤 다.
[모두들 엎드리시오!]
위소보는 사부가 분부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청나라 군사 가 활을 들 때 벌써 암석 뒤에 몸을 숨겼다. 이때 그 장군이 외쳤다.
[쏴라!]
대뜸 쉭, 쉭, 하며 화살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벼랑 위는 무척 높아 밑에서 위로 쏘는 화살은 기운이 다해 벼랑 위까지 날아오지도 못했고 날아오는 것이 있어도 힘이 없었다. 풍석범과 풍제중은 한 사람은 장검 을 들고 한 사람은 칼을 들고 맞은편에서 오는 화살들을 쳐냈다. 풍석 범은 외쳤다.
[시랑, 이 뻔뻔스러운 매국노야. 용기가 있다면 위로 올라와 일 대 일 로 목숨을 걸고 싸우자!]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래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시랑이었구나. 군사를 거느리 고 싸우는 데는 역시 저 사람이 가장 뛰어나다.) 이때 시랑이 외쳤다.
[사내라면 네가 내려오너라! 일 대 일로 싸운다 해도 노부는 너를 두려 워하지 않는다.]
풍석범은 말했다.
[좋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진근남은 말했다.
[풍형,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저 사람은 비열하고 몰염치하 니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소.]
풍석범은 한 걸음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너는 일 대 일로 싸우자면서 뭣하려고 다섯 척의 소정을....제기랄 여 섯 척이로군. 우리들의 소정마저도 훔쳐갔구나. 이 고약한 매국노야! 네가 소정을 내보내 사람을 데려오는 것은 많은 수로 이기려는 것이 아 니냐?]
시랑은 웃었다.
[진 군사, 풍 대장, 그대 두 분의 무공이 뛰어나 이 시 아무개는 언제 나 탄복해 왔소. 시세의 흐름을 아는 자만이 준걸이라 하지 않았소? 그 러니 역시 정 공자를 데리고 모두 투항하도록 하시오. 황상께선 반드시 그대 두 사람을 높은 벼슬에 봉할 것이오.]
시랑은 과거 정성공 휘하의 대장수로 주전빈(周全斌), 감휘(甘煇), 마 신(馬信), 유국헌(劉國軒) 등 네 사람과 함께 오호장(五虎將)으로 일컬 어졌다. 진근남은 군사였다. 풍석범은 무공이 고강했으나 군사를 거느 리고 싸우는 데는 재능이 없어서 정성공의 위사대장 노릇을 했다. 시랑, 진근남, 풍석범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해왔 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환난을 같이 겪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시랑은 진근남과 풍석범에 대해서 여전히 과거의 칭호를 사용해서 부르는 것이 었다. 벼랑 위와 아래쪽은 일고여덟 장의 간격이 있어 시랑은 멀리 서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벼랑 위까지 똑똑히 들렸다. 정극상은 안색이 변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풍 사부, 그대....그대는 투항해서는 안 됩니다.]
풍석범은 말했다.
[공자, 안심하시오. 풍모가 한가닥 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진근남은 풍석범이 음흉하고 간사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자기를 해치려고 했으며 정극상을 보호하여 연평군 왕세자를 삼으려고 했던 사실을 상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말하는 것이 늠름한 것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말했다.
[풍형, 그대와 나는 오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벌 이게 되었으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둘째 공자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것 이오.]
풍석범은 말했다.
[군사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정극상은 말했다.
[진 군사께서 이번에 나를 보호하느라고 공을 세웠으니 대만에 들어가 면 나는 부왕에게 여쭈어 반드시 크게 상을 내리도록 하겠소이다.]
진근남은 말했다.
[속하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벼랑가로 다가가 적의 상황을 살폈다. 위소보는 웃었다. [정 공자, 크게 상을 내릴 필요는 없소. 그대가 배은망덕하게 나의 사 부님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고맙겠소.]
정극상은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사저, 우리 정 공자를 잡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바칩시다.]
아가는 퇴, 했다. [입만 벙긋하면 못된 소리만 나오더라. 그대는 어째서 그를 놀리는 거 예요?] [놀려 준다고 해서 죽지 않소. 죽는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
아가는 퇴, 하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위소보는 쌍 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함께 있게 되었지?] [진 총타주는 풍 나으리와 저를 데리고 바다로 나와 그대를 찾았어요. 나는 그대가 통흘도로 왔으리라 생각하고 진 총타주에게 이야기해 이곳 으로 와 보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도중에 공교롭게도 청나라 군사가 대포를 장치한 배를 타고 정 공자를 쫓아가서 그의 배를 격침하려 하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를 배 위로 구해 올렸고 이 곳까지 도망치게 된 것이에요. 정말 천지신명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끝 내 여기에서 그대를 만났군요.]
그러더니 다시 눈가를 붉혔다. 위소보는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다독 거리며 말했다.
[착한 쌍아, 이 며칠 동안 나는 하루도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 었소.]
이 말은 결코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다. 아가와 쌍아에 대하여 그는 매일같이 열 번은 생각하지 않아도 여덟 번은 생각했다. 쌍아를 걱정하 는 횟수가 좀더 많았다. 진근남은 외쳤다.
[여러 형제들, 오랑캐의 구원병이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한차례 적을 공격합시다. 다시 여섯 척의 소정이 오랑캐 군사들을 싣고 들이닥치면 상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오.]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대답을 했다. 이번에 섬에 온 십여 명 가운데는 진근남, 풍석범, 풍제중, 아가, 쌍아 외에도 천지회의 회원 팔 명이 있 었고, 정극상의 위사 세 사람이 끼어 있었다. 진근남은 말했다.
[정 공자, 아가 소저, 그리고 소보와 쌍아, 당신들 네 사람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내려갑시다.]
그는 장검을 휘두르며 앞장을 서서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풍석범과 풍 제중, 나머지 열한 명은 일제히 달려 내려가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 은 청나라 군사들을 향해 질풍같이 내달았다. 청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활을 쏘았으나 그 화살들은 모조리 진근남과 풍석범, 풍제중 세 사람이 휘두르는 무기에 떨어졌다. 배를 타고 바다에서 싸웠을 때 시랑이 타고 있는 것은 커다란 전선으 로 포화가 무서워서 진근남 등은 그저 피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까이서 격전을 벌이자 청나라 군사들 가운데 시랑 한 사람을 제 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공이 평범하니 진근남, 풍석범, 풍제중 세 고수를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 천지회의 형제들과 정 공자의 위사들 은 무공이 뛰어난 편이었다. 십오 명이 돌격해 들어가자 청나라 군사들 은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사저, 쌍아, 우리들 역시 내려가서 한차례 공격을 합시다.]
아가와 쌍아는 동시에 대답했다. 정극상은 말했다.
[나도 가겠소!]
위소보가 비수를 손에 뽑아 들고 벼랑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쌍아 와 아가가 차례로 달려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정극상은 몇 걸음 달려가 다가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나는 천금지체인데 어찌 부하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랴?)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가, 그대는 가지 마시오!]
아가는 대답하지 않고 위소보의 등뒤를 바싹 쫓아갔다. 위소보의 무공은 평범했으나 몸에 네 가지 보물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 한 고비를 쉽게 넘겼다. 그 네 가지 보물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보물 은 비수.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 적의 무기가 반드시 잘려져 나간다. 두 번째 보물은 몸을 보호하고 있는 보의. 칼과 창이 꿰뚫지 못한다. 세 번째의 보물은 도망치는 재간. 그 누구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고 네 번째 보물은 쌍아가 곁에 있어서 청병이 좀처럼 대적하기 어 렵다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보물을 가지고 고수와 상대를 한다면 지 겠으나 청나라 관병들을 상대하는 데는 여유가 있었다. 삽시간에 그는 몇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는데 진정 위풍이 늠름하고 살기등등했 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적진속으로 일곱 번 들어갔다가 일곱 번 나 왔는데 그 또한 이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역시 위소보가....)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가 마구 찍고 치자 청나라 관병들은 사 방으로 도망쳤다. 진근남은 홀로 시랑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는데 일시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풍석범과 풍제중은 청나라 군사들을 마치 수 박 쪼개듯 죽이고 있었고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팔십여 명이 나 되는 청나라 군사들 가운데 오륙십 명이나 살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다투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수군들은 자맥질에 뛰어나 재 빨리 커다란 전선 쪽으로 혜엄쳐 갔다. 천지회 형제들은 두 사람이 죽 었고, 한 사람이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시랑을 겹겹이 에워쌌다. 시랑은 칼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진근남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시 랑은 포위되어 있는 몸이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위 소보는 외쳤다.
[시 장군, 그대가 칼을 버리고 투항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개고기로 만든 젓갈이 될 것이오!]
시랑은 정신을 가다듬고 싸움에 응했으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도 않았다. 한참 격렬하게 싸우고 있을 때 진근남이 길게 휘파람을 내 불더니 연속해서 세 번 검을 찔러 냈고, 세 번째 검을 찔렀을 때 검은 이미 시랑의 강철칼에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진근남은 손목을 떨치며 급히 두 번의 원을 그리자 시랑은 아, 하는 소 리를 내었고, 그 순간 강철칼이 그의 손에서 날아갔다. 진근남은 검의 끝을 잽싸게 휘둘러 그의 목을 겨누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할말이 있는가!]
시랑은 말했다.
[이겼으면 나를 죽일 일이지 무슨 할말이 있다는 것이냐?]
진근남은 말했다.
[지금도 너는 호걸이라고 뽐내는가? 주인을 배반하고 친구를 팔았는데 도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시랑은 갑자기 몸을 뒤로 제치더니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때구르르 굴 렀다. 그와 같이 몸을 던져 뒹굴자 목을 겨누었던 검의 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순간 두 발로 진근남의 다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진근남은 장검을 세로로 세워서 막았다. 시랑의 두 발이 만약 진근남의 다리를 걷어차려면 자기의 두 발목이 먼저 검날에 잘려야 할 판이었다. 위급한 가운데 그는 왼손으로 땅바닥을 집고 두 발을 모아 위쪽을 향하 여 차는 듯했다. 그 순간 훌쩍 뒤로 재주를 넘어 물러나려고 몸을 바로 세웠을 때 진근남의 검 끝은 다시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랑은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물었다.
[군사, 국성야는 나에게 어떻게 대했소?]
이 한 마디의 질문은 진근남에게는 뜻밖이었다. 정성공과 시랑 사이의 은원관계가 진근남의 뇌리에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국성야는 확실히 그대에게 잘못했소. 그러나 국성야의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오.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참아야지 무 슨 방법이 있겠소?]
시랑은 말했다.
[내가 악비를 흉내내어 억울하게 죽으란 말이오?]
진근남은 날카롭게 외쳤다. [악비를 본받지는 못할지언정 진희(秦檜)를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오. 사내대장부가 어찌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개돼지만도 못한 매국노 노릇 을 한단 말이오?]
시랑은 말했다. [나의 부모 형제와 처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국성야는 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단 말이오? 그가 나의 전가족을 죽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죽여 가족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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