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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으면 구미에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새 학기를 맞은 지 달포가 다되어가니 동 학년 선생님들께
인사라도 한번 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해마다 하는 연례행사이다.
선생님들이 아내에게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더러 묻는단다.
도대체 어떤 위인이기에 아내와 아들을 먼 곳에 두고
부산에서 혼자 유유자적하느냐는 궁금증일까.
자격지심에서인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그래도 깨끗한 정장 차림으로 이발 목욕까지 한 후
그 선생님들께 선을 보이러 구미로 올라갈 것이다.
제 아내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간식이라도 대접해야지.
대구에서 다니는 분들이 많아 저녁식사는 마다하신다고 했다.
올해 아내가 맡은 학년은 1학년이다.
2002년생, 갓 몽우리 진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
좀 일찍 결혼한 친구들에게는 그런 손자들도 있을 듯싶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흠........세월을 좀 되감기 해볼까.
내 1학년 시절은 참 암울하게도 시작되었다.
그해 5월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정치 사회적으로도 격변기였지만 우리 집안도 그러했다.
망부께서 전 재산을 사기를 당하신 것이다.
집과 논밭, 자그마한 산까지.
민주정부가 쿠데타로 군인들에게 정권을 찬탈 당하듯.
그 시절 시골의 그 재산이 돈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사기꾼에게 고스라니 다 날리고 방 한 칸도 없는 난감한 처지.
할머니 친구 분 댁 아래채에 이사를 한 며칠 후 입학식을 했다.
그래도 외손자라고 외할머니께서 등에 매는 란도셀 가방을 사주셨다.
면소재지 학교에선 반에서 두어 명 그런 가방을 가졌던 시절이다.
얼핏 보면 부잣집 아들 같은 차림이지만 쌀이 없어서
성당에서 나눠준 구제품 밀가루로 끓인 수제비를 먹고 학교엘 갔다.
그 학교엘 채 한 달도 못 다니고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께서 마산 시청에 임시직으로 취직을 하신 것이다.
시청 근처 셋방에서 위로 누나 둘과 나 그리고 넷째인 여동생을 임신해서
만삭이신 어머니.......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다.
월영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는 학교를 가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날이 바로 5월16일이었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니 1학년 여덟 살짜리도 하루 휴교를 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직공장에서 들리는
철거덕철거덕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 무렵 내가 처음 먹어본 자장면의 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시장 통 입구에 두 번째 집인가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 있었다.
내 또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화교학교에 다녔다.
그 애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말도 곧잘 했는데
자기 엄마와 하는 쏼라쏼라 중국말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같이 놀다가 점심때가 되니 내게도 자장면 한 그릇을 주는 게 아닌가.
까만 윤기 나는 춘장의 고소한 향기는 회가 동한다는 말 그대로였다.
촌놈인 나는 눈치만 보다가 젓가락으로 휘휘 섞어서 먹는 걸 따라했다.
아, 그 맛이란..........그 후 일요일만 되면 그 집 앞을 얼쩡거리던 나.
나는 지금도 그걸 못 잊어 가끔 점심을 자장면으로 때운다.
5․16군사혁명은 우리 집이 또 한 번 이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정부는 임시직 시청 직원에 대한 정리해고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주로 다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을 떠나며 자장면과 그 중국 소녀와 헤어지는 게 너무 슬퍼서 울었다.
내가 진주로 간다고 말을 하니 중국집 사람들도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미국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내가 너무 걸신들린 듯 먹으니 자기 몫을 좀 덜어주며 생긋 웃던 그 모습.
세월이 거의 반세기나 흘렀으니 이젠 만나도 서로 알아보질 못할 것이다.
본성동의 진주 큰집에서 1학년을 마치고 내가 1학년 입학을 했던
시골의 국민학교(초등학교)로 2학년 초에 다시 돌아왔다.
동네 사립 고등학교에 아버지께서 다시 교편을 잡게 되셨던 것이다.
작은 트럭에 조촐한 세간을 싣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 내 유년의 한 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진심으로 해주는 칭찬 한 마디.
그리고 음식으로 인해 마음 상한 것과 고마운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그 두 가지가 지금도 어제 일 같다.
다시 세월을 조금만 원위치 시키자.
그 자장면이 고마운 것이라면 그로부터 14년 후 훈련소에서의 양고기
한 덩이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서운했던 기억 속의 먹을거리이다.
1975년 논산훈련소 제29연대.
한 여름의 훈련소에 무슨 날인지 모르지만 양고기 국이 나왔다.
내 기억으로는 훈련소에서 맛본 단 한 번의 양고기였다.
줄을 잘 서야 된다는 게 군대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진짜 그랬다.
그런데 난 그날 줄을 잘못 선 것이다.
내 국그릇엔 양고기가 채 한 숟가락도 안 되는 초라한 양.
그런데 나와 친했던 S의 국그릇엔 제법 주먹 반만 한 것이 든 게 아닌가.
부러워서 흘끔거리는 날 못 본 척 그걸 볼이 미어지게 먹던 S.
혹시 반이라도 아니 그 반의반이라도..........하며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PX에서 내가 S에게 브라보콘을 사줬던 게 몇 개였던가.
숟가락 잃어버리고 울먹일 때 내가 조달해 준 은공은 또 어쩌고.
면도칼 빌려준 것과 담배 나눠 준 것만도 기하이냐 말이다.
생긴 건 말쑥하게 계집애 같이 잘 생긴 S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훈련소에서 헤어지며 보병병과였던 S와 또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대구 국군군의학교에서 후반기 위생병교육을 받고 동해안 최북단 부대에
배치되어 간 것이 그해 10월.
그 당시만 해도 전방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다.
그 부대에서 한 해 정도 지나 갓 상병 진급을 할 무렵 S를 다시 만난 것이다.
보병부대의 상황병과 그 부대 의무대에 파견근무를 간 위생병으로.
양고기 건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청 반가워하는 S를 끌어안았는데
S의 어깨너머 저 멀리 철책선 안 DMZ에 산양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어이 저거 산양 아니가?”
“어디? 아, 맞아. 폭풍지뢰를 밟아 다리가 셋 뿐인 넘도 한 마리 있는데....”
“야, 훈련소 양고기 생각나나?”
“어? 양고기……그럼 생각나지.........”
그러면서 S는 멋쩍게 웃었다.
알고는 있었구나........너도........그럼 됐어.
나 그때 정말 너한테 야속하고 서운했거든.
그렇지만 내가 너라도 똑같이 했을지 몰라........배고픈 청춘들이었으니까.
건봉산 수백 계단의 고진동 계곡 수려한 단풍을 배경으로 잘 생긴 얼굴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던 S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니 S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M16 소총 총구를 턱 아래에 받치고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소문으로는 상습적으로 상관에게 계간을 당한 모멸을 못 견딘 것이라고.
잘난 얼굴이 때로는 단명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군형법에서는 군인의 계간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군형법 제92조(추행) 계간 기타 추행을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어두운 그 시절에는 쉬쉬하며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으리라.
연고 있으면 좀 달라고 해서 야전구급낭에 있던 걸 모두 주었었는데
연고의 용도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진 얼굴이라더니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훈련소 양고기 건을 마음에서 다 지우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죽다니..........
자장면과 양고기 이야기를 중앙동의 내 친구에 이야기해줬더니
자기도 그저께 먹을거리 때문에 실수를 했노라고 했다.
양고기의 S처럼 나누지 못한 후회 같은 것.
주차장에 있으면 손님들이 가끔 씩 먹을거리를 준다고 한다.
그날은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을 채운 삼치 두 마리를 얻었단다.
오후에 관광버스 기사가 주고 간 것인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야간에만 주차하는 OO제강 버스가 있는데.......그 기사가 여러 가지로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데도 삼치 한 마릴 안 준거야……욕심 많은 내가.”
“음……그걸 본 모양이군, 그 사람이. 근데 너 답지 않네?”
“그렇제? 지금은 후회 된다.......정말.”
전철까지 들고 가는데 벌써 기진맥진.
근1m급 삼치 두 마리니 무게만 해도 묵직한 데다 얼음까지 채워졌으니
그런 중노동이 없었노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다보니 구이를 해먹을까 찌개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다른 사람 배려는 전혀 하질 못했다고.
“아직도 냉장고에 한 마리가 남아 있는데 저걸 어쩌지?”
“자르고 손질도 하고 얼렸어?”
“음. 그럼.”
“지금도 안 늦지. 내일 반만 갖다가 그 사람 줘라.”
“그럴까? 지금 줘도 될까?”
“안 될 리가 있나. 먹을 거 가지고 삐지면 오래 가니……빨리 풀어.”
주차장 펜스 따라 심어진 느티나무들이 꽃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펜스를 따라 군데군데 동백과 장미가 심어져 있다.
“어이, 저거 웬 장미냐?”
“꽃피면 폼 나겠지? 구청에서 화단을 새로 단장했어. 흙도 다르잖아.”
수선화 등은 다 뽑히고 이름 모를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봄이 오는 부두 길에 여전히 오가는 차량은 많은데 부두에
층층이 쌓였던 컨테이너는 눈에 띄게 줄었다.
경기가 그만큼 안 좋다는 증거이다.
불황이 오래 간다지만 그래도 계절이 오가듯 호시절이 또 올 것이다.
연일 외인들의 매수세로 후끈 달아오르는 주식시장이 그 전주곡일까.
그랬으면 좋으련만.......베어마켓 랠리치곤 상당한 상승폭이다.
슬슬 클럽도 좀 닦을 계절이다. 골프장 페어웨이엔 잔디도 좀 올랐을까.
올해는 딸아이에게 돈을 더 보내야하니 골프는 많이 줄여야 한다.
골프도 골프지만 지금부터라도 먹을 건 가능하면 나누며 살 일이다.
욕심 부리면 그 만큼 서운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
나 역시 그런 잘못을 더러 저질렀을 것이다, 기억을 못할 뿐이지.
늘 듣는 힘 빼라는 말은 그 욕심을 줄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구미에 올라가면 오랜만에 금오산 산행이나 한번 해야겠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듯 중국소녀의 추억도 낙동강 구비처럼 가물거리리라.
S의 어깨 너머 산등성이를 오르던 산양마냥 깔딱고개를 거쳐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에 올라 내 마음도 거기 걸어두고 와야겠다.
내 마음의 동심원이 미국까지……저승까지 퍼지라고.
자장면 고마웠다고.......지금은 마음 편하냐고 묻는 내 안부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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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쓴 글이라 시차가 좀 있습니다.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게도 엇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도 같고요. 먹을 걸로 삐지면 오래 간다는 말, 여러 사람한테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 주위에도...다른 건 인심이 정말 후한데, 밥공기는 절대 나눠먹지 않는 분도...있지요...^0^
치사하다 했다가 억하고 놀라기도 하며 읽었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게 늘 주변에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보면 그립고 새로운 느낌이 나는 글이네요. 아! 저는 탕수육 처음 먹고 천상의 음식인 줄 알았습니다. 훗날 돼지고기로 만들 것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ㅎㅎ
책 보낼 주소 부탁드립니다
책, 보내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