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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6일 이신정 전도사님 설교
말씀 제목: "규범의 바깥 : 남자나 여자나..."
본문: 갈라디아서 3 : 23-28
오랫동안 위장병에 시달렸다. 우연한 계기로 연락이 된 오랜 친구가 병을 키우지 말고 병원에 오라고 말했다. 병원에 가니 손 하나 댈 것 없이 친구가 알아서 다 해주었다. 병원을 나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첫 여성영화제 개막식에 갔다. 사람이 많아 한참 줄을 섰다. 그런데 한 무리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 주최자들이 반가워하면서 얼른 들여보내 주었다. 복잡한 생각이 분노와 함께 들었다.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는가? 여성이 하는 행사라면 인맥이나 학력 같은, 남자들이 해 왔던 방식을 다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사소한 일이지만 구조적인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병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줄 서있던 환자들은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하고 진료시간에 맞추어 왔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혜택을 받을 때는 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대 내가 줄 서는 입장이 되니까 화가 났다. 인간은 오로지 차별받을 때만 평등을 원한다고 한다. 특혜 속에 있을 때는 둔감하여 불평등한 구조라는 것을 인식조차 못한다. 누가 나에게 계속해서 밥을 차려주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계속해서 밥 차리는 입장이 되면 분노하게 된다.
밥을 차리는 문제와 앉아서 밥을 먹는 문제 사이에는 수많은 매개항들이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밥을 하고, 남자이기 때문에 밥을 받아 먹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고, 남자가 돈을 벌어 오니까, ‘이 밥 먹고 힘내서 돈 더 벌어와. 나는 열심히 밥 할게’ 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돈을 벌든 못 벌든,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중요한 일에 복무하는 동안 기꺼이 밥을 해줄게.’ 라고 할 수도 있다. 밥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밥의 의미는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안 먹으면 죽는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지만 누가 밥을 하느냐에 따라 밥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이청준은 <벌레 이야기>에서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피해자가 용서하기도 전에 먼저 하느님에게 용서받은 범인은 아무런 갈등 없이 평화를 찾았고, 고통 받던 피해자는 완전히 무력감에 젖어 자살을 한다. 이청준은 이런 비유를 한다. ‘돈 버느라 뼈 빠지게 일해서 너무나 피곤한데도 애써서 밥상을 차려놨더니 손 하나 까딱 않고 있다가 ‘오, 하느님 저에게 이 밥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자식을 보는 느낌이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서 바로 하느님으로 비약할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바로 하느님에게 용서받는 일에 대한 질문이다.
진지한 기록들과 글들에서 광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우리는 광주를 도식화 시키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광주는 수천수만 개의 사건이 될 수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오월애>를 만든 김태일 감독의 인터뷰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광주는 총과 밥에 대한 사건이었다.’ 광주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처벌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문도 감금도 죽음도 그러했다. 오히려 여자니까 더 극악무도하게 고문을 당한 기록도 많다. 김태일 감독은 ‘광주 사건은 총 없는 밥이 없었고, 밥 없는 총이 없었던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총을 든 사람도 목숨을 걸었고, 밥주걱을 든 사람도 목숨을 걸었다. 무엇이든 손에 든 순간 목숨을 걸겠다는 결단이 되어 있기 때문에 밥주걱이냐 총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든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는 문제는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위계, 규범, 상식, 고정관념들이 그 밥을 누구를 위해 지었느냐는 문제에서 이미 무너진 것이다. 평소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을 무시하던 시장 아주머니들도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밥을 짓는 순간, 밥의 의미는 무한대로 상승하는 것이다.
우리는 광주 항쟁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김영삼 정권 때 전두환, 노태우가 법정에 세워져 사형이 선고되었고, 추징금도 물게 되었는데 바로 다음 김대중 정권에서 사면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보상 절차가 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다. 그런데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은 다르다. 손해배상은 공무를 행하던 사람이 위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 그로 인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책임지고 배상을 하는 것이다. 손실보상이란 합법적인 행위를 했는데 생각지 않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을 때 미안하다고 보상을 하는 것이다. 광주 피해자에겐 보상으로 처리되었다. 거기서부터 어긋났다. 광주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광주에 대해서 잘 모르고, 광주 항쟁 참여자를 빨갱이나 폭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주어지기 시작했을 때 광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김태일 감독은 말한다. ‘돈이 들어오기 전에 광주는 하나였다. 보상이 시작되기 전에 광주는 분노도 슬픔도 상처도 울분도 하나였고, 그 열흘간의 기억에 대한 놀라운 자부심으로 하나였다. 보상이 시작되는 순간 순식간에 분열이 시작되었다.’ 도청을 가려놓고 공사하는 이유는 합의도 되기 전에 도청을 허물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청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보였지만, 실은 아시아문화전당 지어서 좀 잘 살아보자, 이런 목소리가 훨씬 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상을 받는 절차 속에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내가 이만큼 고통과 피해를 받았다.’고 증명을 해야 했다. 5.18 공식 자료가 속속들이 나오고, 참여자가 유공자로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누가 크냐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손에 무엇을 들었든, 너나없이 함께 사랑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 ‘누가 더 중요한 일을 했는가, 누가 더 많이 보상받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순식간에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불거지는 것이 여성과 밥의 문제이다. 김성용 신부가 성당 여성들에게 취사조를 조직하고 밥을 하게 했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사람은 여전히 얼굴을 안 보이고 뒤 돌아서 증언했다. 지금쯤은 얼굴을 보여도 되지 않을까? 그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처음 입을 열게 하기까지 ‘포기해야겠다. 못하겠다’는 좌절을 너무 많이 겪었다고 한다. 너무나 사람들이 협조를 안 하고, 한 마디도 안하고, 욕만 바가지로 했다고 한다. 이중삼중의 상처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졌고, 여전히 빨갱이들이라고 불려야 했다. 광주항쟁의 법적 절차가 끝났음에도 형사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잡아갔다. 사람들은 육체적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옆에서 대검으로 찔려죽던 친구가 늘 꿈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증언을 했는데 자기 좋은 데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상처에 상처가 덧대어졌던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입을 열기 어려웠다고 한다. 밥을 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겨우 밥만 했는데도 언제 계엄군이 자기 집에 쳐들어와서 잡아갈지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6차에 걸친 보상절차 속에서 김성용 신부는 계속 설득했다. ‘밥 한 사람도 보상받아야 한다. 너희들 피해가 너무 컸다. 그렇게 오래 고통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보상을 요구하는 순간, 욕을 먹었다고 한다. ‘여자들이 밥 했다고 돈 받냐?’ 남자나 여자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과 경계가 없었던 시간에서 퇴행하여 다시 급속도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밥과 돈은 서로 다른 세계의 기표이다. 만날 수 없는 의미가 억지로 접선을 하면서 분열이 시작되고 추악하고 괴로운 인간의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밥 이상의 의미를 갖던 밥이 밥 이하의 의미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처음 개미마을에 와서 너나없이 헌신으로 교회에 봉사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재정이 갑자기 풍부해져서 애쓴 만큼 수고비를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너는 매일 왔으니까 얼마, 너는 일주일에 한 번 왔으니까 얼마, 넌 와서 빈둥빈둥 논 거 다 아니까 얼마...’ 겉으로 드러나진 않겠지만 물적 보상이 시작되는 순간,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하던 일의 의미는 완전히 전락할 것이다. 헌신에 위계가 생겨서는 안 된다. 너나 없는 세계에서 누가 크냐의 세계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하다가 밤잠 줄여가면서 틈을 내어 한 시간 일하는 것, 매일 와서 등짐 지는 것, 그걸 어떻게 계량화 할 수 있는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작년에 겪은 사건이 그랬다. 헌신에 위계가 생기고 돈으로 보상될 때, 믿음의 공동체는 추락하게 되고 자발적 헌신은 억압으로 변할 것이며 끊임없이 감시받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위계, 차별적인 헌신, 구분되는 노동에 의해서 진리가 추구된다면, 그것은 이미 위계와 차별이라는 기존 법체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율법은 어쩌면 필요조건일지도 모른다. 시험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공부를 안 한다. 시험이 있어야 공부를 하고 마감이 있어야 작업을 끝낸다. 시험이나 마감은 인간의 한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시험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공부의 의미가 겨우 성적과 서열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나마 시험공부조차 제대로 못하는구나' 라는 한계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율법은 그런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주일을 지키기로 결심을 했는가?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이 생기면 예배는 뒷전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예배의 절대성에 대해서 결단하는 시점이 있다. 주일 예배를 지킨다, 주일을 성수한다라는 것으로 상징되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공동체나 조직에서든 회원은 의무와 규약을 지켜서 자격을 갖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무와 규율을 지킨다고 하기오스,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들, 거룩한 제자들이다. ‘계명을 지켜라’가 명령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이제 개인 교사 밑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계명을 지키고, 교회의 원칙들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인가, 이미 온 믿음에 대해서 공유하고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늘 질문의 여지가 있다. 올 초 공동체 규약을 만들기 위해 목사님과 많은 대화를 했지만 목사님과 나는 입장차이가 있기는 했다. 목사님은 ‘믿음의 공동체에 이런 규약들이 세부적으로 다 필요한가? 몰라서 못 지키나?’ 라는 것이었고, 나는 '어떤 자격심사나 공통점도 없이 그냥 모여든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기에 서로 차이가 있고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 기본적인 지침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여전히 그것은 겹쳐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으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길들여진 습속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시선에 갇혀있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그동안 가져왔던 기존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관성 속에 있다. 그것마저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고 감시하는 시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 이것 또 내가 말 잘못했나?’ ‘저 사람이 왜 날 저렇게 봐?’ 그런 상황은 늘 일어날 수 있고 언제나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광주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대로 생각했다. 돈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지는 사람들이 그 놀라운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어느 순간 한꺼번에 폭발하는 열정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나마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우와, 정말 이렇게 살아야 겠다.’며 책을 읽으면서 감동하고 막 결단했다가, ‘잠시 쉬어야지’하고 텔레비젼 개그 프로나 드라마를 보면 바로 옛사람으로 돌아가고 몰입했던 세계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 오늘 목사님 말씀, 정말 잘 들었어. 저렇게 살아야겠다.’했지만 돌아서서 집에 와 기존의 것들을 만나면 순식간에 옛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할 수밖에 없고, 율법은 끊임없이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바울이 철저한 유대인으로 살았을 때 유대인들의 아침 기도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 저를 여자로, 이방인으로, 종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기 삶의 의미와 행복을 확인하는 비루한 방식은 불행을 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면서, ‘그나마 나는 밥 먹고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기도와 똑같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적어도 쟤보단 낫지 않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 죄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차별과 구분과 편견을 없애려야 없앨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보상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존재들이 모였기 때문에 우리가 의존하고 기대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그 고백 속에서 우리는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구분과 경계와 성차와 편견을 없앨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에게 빚을 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며, 이 빚은 채무감이나 압박감이 아니라 거룩한 빚, 은혜이다. 죄가 크다는 것을 알아서 은혜가 깊다는 것을 알고, 은혜가 깊다는 것을 알아서 삶의 방향을 바꿀만한 힘을 얻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바로 그런 고백 속에서 ‘네가 밥 했냐? 네가 설교했냐? 당신이 뭐 했냐?’는 크기와 계량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네가 남자야, 네가 여자냐? 네가 뭐 했다고 앉아서 밥 먹냐? 나는 땀 흘렸는데?’ 이런 질문이 사라지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중요한 존재가 되라. 세상이 당신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무엇으로 불러주든, 어떤 대접을 하든, 당신은 중요한 존재이다.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내가 당신을 격려하고 힘을 주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이 굉장히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가 그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기 위해서 그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다는 데 있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동시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결단을 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교인들로부터 소중한 것을 많이 배웠다. 그래서 배움과 가르침이 어떻게 선순환인지 잘 알고 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하느님 나라를 믿는다는 것, 이미 도래해 있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 기존의 통제를 벗어나는 사건을 일으키고 아무리 소규모라도 기존의 법체계, 규범, 편견,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공간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세계를 지배하던 가치가 무너진다. 소설가 이승우는 <지상의 노래>에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전적으로 몸을 던져 헌신하는 과정은 그가 만든 결과물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한다. 결과물이라는 보상이 그 과정을 결코 훼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려는 사람이 드문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길 위에 있고 순간순간 믿음을 경험하기도 하고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감격하기도 하고, 여전히 다시 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너나없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