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톨로메이(Bernard Tolomei)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시에나(Siena)에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Bernardus Tolomei, 또는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를 흠모한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베르나르두스로 바꿀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인이 수도생활에 입문하는 것을 방해하였고,
결국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행정관이자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
신심이 매우 깊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거의 시력을 잃은 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하여 시력을 회복한 후에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은둔소로 피신하였다.
그는 1313년 두 명의 다른 시에나 출신 동료들과 함께
시에나 남쪽에 있는 아코나(Accona) 광야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암브로지오 디 니노 피콜로미니(Ambrogio di Nino Piccolomini)와
파트리치오 디 프란체스코 파트리치(Patrizio di Francesco Patrizi)가 그들이다.
그들은 초기 수도승들처럼 침묵과 단순한 생활로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들의 거룩한 생활이 알려져 제자들이 모이자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는 몬테 올리베토(Monte Oliveto)에 수도원을 세우고 1319년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그는 이때 자신의 수도명으로 베르나르두스를 정하였다.
그는 페스트에 걸린 형제들을 돌보다가 1348년 8월 20일 그 자신도 페스트로 선종할 때까지
수도회 형제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설립한 ‘베네딕토회 몬테 올리베토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는
관상 생활을 지향하지만, 시대와 환경의 요구에 따라 활동적인 사도직에도 참여하고 있다.
1634년(또는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그는
2009년 4월 26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와 함께 시에나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제1독서
판관 입타는 암몬족과 전투를 앞두고 주님께 맹세를 한다.
암몬족을 무찌르고 돌아갈 때 제일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약속이었다.
승리 후 돌아온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자신의 딸이었다.
입타는 고뇌 속에서도 주님과 한 약속을 지킨다.
입타의 딸도 아버지의 결정을 기꺼이 따른다.
복음
임금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핑계를 대며 가지 않는다.
임금은 그들을 제쳐 두고 다른 이들을 데려왔다.
구원의 초대가 온 인류에게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예복을 갖추어야 했다.
믿음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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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
"집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판관기의 말씀 11,29-39ㄱ>
그 무렵
29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길앗 미츠파로 건너갔다가,
길앗 미츠파를 떠나 암몬 자손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30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31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32 그러고 나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건너가 그들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33 그는 아로에르에서 민닛 어귀까지 그들의 성읍 스무 개를,
그리고 아벨 크라밈까지 쳐부수었다.
암몬 자손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큰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굴복하였다.
34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35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36 그러자 딸이 입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들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37 그러고 나서 딸은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십시오.
동무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이 몸을 두고 곡을 하렵니다.”
38 입타는 “가거라.” 하면서,
딸을 두 달 동안 떠나보냈다.
딸은 동무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자신을 두고 곡을 하였다.
39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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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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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세속에 찌든 예복을 벗어버리고>
저희 집에 있는 차 가운데서 유일한 승용차이자 제일 고급 승용차, 그래서 서로 타기 위해 경쟁이 심한 ‘비스토’가 요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며칠 전 무작정 상경했다가 죽을 고생을 다했던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귀가조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싶어 아이를 비스토에 태워 가까운 국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역까지 길어봐야 5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그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너무나 지독해서 차창을 있는 대로 다 열었습니다.
그래도 못 참겠어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차 트렁크에 방독면을 하나 준비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차에서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방향제를 뿌린다, 향수를 뿌린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잔치 참석자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헤어스타일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예복도 아니고, 추리닝차림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의 주인공들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형식이, 외모가, 옷, 이딴 것이 뭐 그리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잔치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 됩니다.
신랑신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혼인잔치를 총괄하는 임금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혼인잔치는 천국에서의 생활입니다.
종들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예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갖춰야 할 예의입니다.
예복은 하늘나라의 공연에 입장하기 위한 티켓입니다.
입장권 없이 연극을 관람할 수 없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하늘나라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예복은 무엇보다도 성령 안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쌓은 자선이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국 예복은 예수님 그분 자신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요즘 길을 가다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런데 그들의 복장을 보면, 쫙 달라붙는 것은 물론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장을 저 역시도 똑같이 하고 있지요.
이런 저를 보시고 자전거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민망하지 않습니까?
옷이 화려한 것은 둘째라고 쳐도 너무 달라붙어서 쑥쓰러우실 것 같아요.”
하긴 저 역시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할 때는 이러한 옷을 어떻게 입을까 싶었지요.
꼭 이런 옷을 입어야 자전거를 잘 타는 것도 아닐 텐데,
쑥스럽게 이런 옷을 왜 입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전거 선수도 아닌데 헬멧과 장갑을 끼는 것도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복장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을 보다보니
그렇지 못한 제 자신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편안한 옷과 야구 모자를 쓰고 타는 제가 더 민망해지더군요.
결국 저 역시 쫙 달라붙고 화려한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헬멧과 장갑도 구비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하며(그래야 운전자가 자전거 타는 사람을 쉽게 발견해서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 각종 안전을 위해서도 헬멧과 장갑은 필수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과 장비들은 바로 편안함과 안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비를 갖추어야 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비는 소위 사랑이라는 이름의 장비로,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하고
대신 남들이 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라는 장비가 왠지 약해 보이고, 민망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멀리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을 외치고 실천하는 사람, 어때요?
좀 약한 사람 같고, 바보 같아 보인다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 약해 보이고 민망하기도 한,
사랑의 장비 없이는 도저히 입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모든 이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혼인잔치에 오기는 했지만 예복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이라는 장비를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이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이기에 결국 쫓겨나고 말지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 등은 순간에 불과한 이 세상 안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갖추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한 답이 요구되는데도 이 답을 쓰기가 참 어렵지요?
- 인천교구 간석4동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부르심과 선택>
보좌신부로 있을 때 한 자매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을 따라한다는 말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 했기 때문에 물위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저의 판단 기준은 무조건 ‘겸손함’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참으로 겸손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저를 나무라고 가르칠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를 키울 정도의 스승이 못 되니 안 되겠다고 적당히 거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참으로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오랫동안 졸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청하자 저는
“제자는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면 제가 하는 기도들이 이러이러한데 이것을 일 년만 빠지지 않고 매일 하실 수 있다면 제자로 받아줄게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은 자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분은 더 이상 제자가 되겠다는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하다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신랑의 의복을 입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부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승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복을 갖출 수 없는 사람은
비록 받아들여졌더라도 아직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 즉 하느님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초대했던 그 백성은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아들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초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하느님은 공평하게 초대하신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교회 안에도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의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받았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맙니다.
이는 교회엔 나오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미사에 나온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결국 ‘부르심’은 다 받았지만
‘선택’된 이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들은 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지만
사실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그건 하느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또 사제가 되었다고 해서 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
사제가 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스승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야만 선택받은 자로 남게 됩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택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과연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다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부르셨다면 일부러 죄짓게 만드셨다는 뜻이기에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12사도에 당당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왜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는데 받아들여졌을까요?
이는 유다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해 한 몫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자신이 그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건들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현세적인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데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선택받지는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원하는 모든 사람은 다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다 선택받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의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잔칫상에까지 앉았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쫓겨나지 않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로마 유학중
* 안소근 수녀님의 묵상글 *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하는 임금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의‘초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받은 이들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두 번에 걸쳐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계속 손을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친교,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원한다면 그 초대에 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장사하러 간 사람들처럼 그 분의 손길을 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말이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너그러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우리를 위한 초대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구원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선물을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선택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글 *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별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본래의 참 나되어 살 때 성인입니다.
성인축일공통기도 시
초대송 후렴이 늘 늘어도 은혜롭습니다.
‘당신 성인들 안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주님께 어서 와 조배 드리세.’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주님의 믿음, 희망, 사랑, 평화, 지혜입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다음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노력하며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매일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새사람이 되어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고,
또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새사람의 성인이 되어 살 때
우리 안에 빛나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지혜가 빛이라면 무지의 어리석음은 어둠입니다.
새사람이 되어 살 때 분별의 지혜로 빛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판관기를 읽을 때 마다
열정은 충만했지만 분별의 지혜가 없었던 입타의 어리석음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과유불급,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적절한 분별의 지혜가 부족했던 입타입니다.
입타의 서원이 너무 경솔했고 지나쳤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일방적 자기 결정의 결과입니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서원인지요.
마치 주님과 거래하는 느낌도 듭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는데,
무지로 인한 과잉 서원으로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랑하는 외동딸을 바쳤으니
스스로 자초한 화입니다.
하여 승리로 기뻐해야 할 날이
비극의 슬픔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 역시 어리석기는 똑같습니다.
구원의 초대에 아랑곳없이 제 일에 바쁘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폭력적으로 반응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 받은 이들은 마땅치 않구나.”
주님의 탄식 같은 말씀,
이미 구원의 잔치에 초대 받은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됩니다.
그러나 세례로 구원의 잔치에 초대 받았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세례 자체가 구원의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결코 값싼 구원의 은총이 아닙니다.
은총에 맞갖은 치열한 수행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아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자,
바로 부르심의 은총에 합당한 삶이 없었던, 한 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부단히 우리를 분발케 오늘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은총에 맞갖게 부지런히 노력하며 새사람이 되어 사는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으로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구원의 미사 잔치에
믿음, 희망, 사랑의 예복을 입고 참여한 우리 모두를
새사람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시편 40,5)
아멘.
- 성베네딕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