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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울 마음의 성전
사무엘하 7:1-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9주일이다. 무더위와 장마에 주님의 평화가 같이 하시길 바란다.
내일은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이다. 그렇다고 간담이 서늘한 ‘호러’ 설교를 할 자신은 없다. 어느새 방학과 휴가철을 맞았다. 여러분의 가정과 생활에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성경에서 시원한 말씀 한 구절을 찾아 전한다. 잠언에 있는 말씀이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 25:13).
한여름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인생, 잠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1)
본문을 보면 다윗 왕국이 안정을 얻었다. 다윗 왕이 주변 원수들과 분란을 정리한 후 안정을 찾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통일왕국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에 새 도읍을 정하였으며, 정치적인 평화를 얻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왕의 궁궐을 짓고 나니, 그제야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난 것이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2).
다윗 왕은 측근인 선지자 나단에게 속마음을 꺼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저렇게 초라한 성막 안에 둔 채, 나만 이렇게 편안히 살아도 될까? 하나님 은혜로 내 왕국이 든든히 섰는데 뭔가 하나님을 위해 보답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나를 은혜로 불러 주셨다. 그 은혜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존재로 살아간다. 종종 내 자신의 일에 분주하다 보면,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도, 문득 ‘내가 이렇게 분별없이 살아도 될까’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 있는 사람, 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고민은 다윗 시대만이 아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숱한 복구의 과제를 앞두고 먼저 성전을 지을 계획부터 세운다. 귀환 포로의 지도자 에스라의 경우, 그들이 국가재건을 위해 우선 착수한 것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먼저 주변 나라 이방인들의 훼방을 받았다. 심지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마리아인들도 방해하였다. 무려 18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 바사 왕 다리오의 후원으로 마침내 완공을 보았다.
귀환한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처음 기초를 놓았을 때, 에스라는 이 광경을 실감나게 적고 있다.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스 3:12).
백성이 흘린 눈물과 외친 함성은 성전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특별한가를 느끼게 한다.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는 거룩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성전을 가리켜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만민을 품어주시고, 연약한 자와 고난받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신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서 나타났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보이는 성전은 재건했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을 아직 완공하지 못한 것이다. 건물로서 성전은 회복했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인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역사적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신앙개혁은 바로 보이는 건물로서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타락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회복하는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전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다.
2)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허물과 죄, 인간적 연약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은 얼마나 작고, 보잘 것없는 백성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부르심으로 그들은 선민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자의식이 생겼다. 하나님은 구원의 표식으로 출애굽 직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과 성막을 주셨다.
율법과 함께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든, 가나안에서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재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역사는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과 제사제도, 하나님을 날을 지키는 절기와 예배, 이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졌다. 성막은 나무와 천과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동이 가능한 임시적인 가건물이었다.
다윗의 생각은 진실하였다. 임금인 나는 왕궁에 살고 있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궤는 성막에 있다. 목동 신세에서 왕으로 출세한 다윗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위대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다윗의 비전을 전해 들은 선지자 나단은 하나님께 다윗의 뜻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부터 성전 건축의 의향을 들었던 나단에게 말씀하신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 아니다. 화려하게 꾸민 성전이 아니다. 내가 언제 궁궐 같은 백향목 집을 원했더냐?’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지극한 마음을 칭찬하신다. 양을 돌보던 목자인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다윗을 위대하게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고 한 다윗을 위해 오히려 다윗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의 올바른 삶이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미가의 말씀을 상기하라.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건물이 없는 것이 교회의 약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것이 약점이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을 들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땅의 고난을 택하셨다.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서가 증거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닌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지 못한 채, 권위적인 표상이 된 건축물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오히려 성전을 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을 통해 다시 새로운 성전,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워지지 않고 자신의 전통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약점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시대의 추세에 따라 흔들려 전통을 소홀히 여기면 또한 약점이 될 수 있다.
교회의 네 가지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네 가지 진리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Una)이다. 둘째, 교회는 거룩하다(Sancta). 셋째,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Catholica) 곳이다. 넷째, 교회는 사도적(Apostolica)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하나의 교회는 교리와 전통, 심지어 이해관계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다. 너무 많은 세속적인 풍토와 물질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교회 안에 계급이 존재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존재한다. 사도적 전통과 희생을 상실하였다.
이 네 가지 기둥은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주요한 대들보인데 이것이 흔들리면서 교회의 정체성이 의심을 받고,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전이 그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다. 이것은 위기이다.
교회는 성전의 네 가지 기둥을 보수하고, 회복해야 한다. 사실 보이는 모습의 교회만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 2:22)가 된 우리 자신의 삶도 회복해야 할 네 가지 기둥이 있다.
3)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나, 오늘 우리 자신이나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처럼 얼마나 보잘 것없는 공동체인가? 그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오래 전, 감리교본부에 있을 때 미국 북일리노이 연회 행사에 초대받은 일이 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 은퇴 목사님 댁을 방문하였다. 시카고 인근에서 십자가 수집가로 유명한 알프레드 패틴 목사였다. 고맙게도 그 교회 한인 부목사님이 중간에 다리를 놓았다.
그 댁 지하에 전시 중인 십자가를 보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큰 감동을 받았다. 원로 목사님은 자신이 은퇴한 교회를 구경 시켜주었는데 그 이름이 ‘베이커스 메모리얼 교회’였다. 정말 대단한 규모의 예배당이었다. 돌로 세워진 교회는 규모도 규모이지만 내부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모든 성물과 가구가 최고급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 예배당의 대지, 건물, 인테리어, 가구, 심지어 부엌의 포크까지 단 한 사람이 봉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지역의 어느 부자가 자원한 일이라고 하였다. 부자는 평생 그 지역에서 빵 가게를 경영했다. 그레서 교회 이름도 빵을 만드는 사람을 기념하는 교회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부자의 이름이 예배당 어느 곳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다윗의 마음이 그 부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부자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지녔기에 그런 헌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속마음을 진실함을 보시고,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그의 성실함을 보시고 약속하셨다. 다윗이 먼저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신다. 약속하신 그 집이 바로 다윗 왕조이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
결국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은 후계자 솔로몬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건축물로서 예배당뿐 아니라,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에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주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점에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신다.
세상에 보이는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틴 루터나, 장 칼뱅, 존 웨슬리 등 교회의 개혁자들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색동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우리 교회는 외적인 예배당이 아닌, 본래 교회의 본질에 맞도록 존재하는가? 지극하신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교회, 사랑의 일치와 마음으로 하나된 공동체, 가난하거나 부자 혹은 장점이 많거나 약점투성이거나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체, 그리고 헌신과 봉사로 밑돌을 놓은 사도적 전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의 집인 성전 중심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부정과 불의한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과 말씀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과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사람의 이름이 기념되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의 성전은 물질적 능력과 규모로 평가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 겸비함, 약점과 아픔과 눈물을 가진 그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신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해 바로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강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