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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
달빛세탁소
최외득
세라는 생각이 많았다. 남자가 여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상상을 이끌게 했다. 세라는 옷장에서 치마를 꺼냈다. 바지보다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치마가 남자에게 긴장감을 덜 주리라 믿는 것은, 조금은 소심한 그에 대한 배려였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세라, 자르르해지는 느낌이 일었다.
- 세라공주, 지금 무슨 상황?
- 지금 바디맵시 코디 하는 중.
- 오늘 스타일은?
- 청순가련형으로.
- 나약하지 않을까?
- 굵은 줄기에 달린 꽃보다 가는 줄기에 달린 큰 꽃에 더 눈이 끌리거든.
- 가는 줄기? 큰 꽃?
- 구름꽃. ㅋㅋㅋ.
- 난 바람이야. ㅋㅋㅋ.
- 그래! 날 불어 봐.
- 아니, 안 불 거야. 네가 하늘에 떠 있게 받쳐줄 거야.
- 설레네.
- 긴장해야지. 바람이 없으면 떨어지니까.
“딸, 뭐 하아니?”
엄마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우박처럼 느껴졌다.
“왜?”
“좀 있다 백화점 갈 건데, 같이 갈래?”
“나 약속 있어.”
“그래. 아쉽….”
- 지금 엄마가 불러.
- 나세라, 사랑해.
- 에헤라 디야 좋구나. 송민규 그대 입술에 쪽쪽쪽쪽.
세라는 카톡방을 닫았다. 세라가 거실로 나가자 엄마는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향이 그녀의 세포를 자극했다. 세라는 커피머신에서 커피 한 잔 뽑아서 엄마 앞에 앉았다. 엄마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버전이 다르네. 넘 후진한 거 아니니?”
“후진한 거라니, 착한 버전.”
“착한 것에는 두 얼굴이야.”
“착하다는 것, 바보라는 그 공식은 생각에서 빼세요.”
“그럼 악한 얼굴을 감춘 건가.”
“글쎄.”
“그렇구나. 너 누구의 코털을 건드리려고… 자중하셔, 딸.”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세요.”
“널 믿으라는 건가. 아니면 간섭하지 말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당연히 딸을 믿어야겠지.”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던지는 거야.”
“그게 쉽지가 않잖아.”
“진지해야지. 한낱 욕정꺼리에 불사르는 그런 가벼움은 안 되는 거야. 난 지금도 정성을 다하는 심정으로 아빠를 사랑해.”
“그래서 두 분이 젊어지나 봐. 밖에 나가면 엄마를 내 언니로 보는 이유가 있었네.”
“여자가 제일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젠 줄 아니. 사랑할 사람을 찾았을 때, 아기를 가졌을 때,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남자에게 소유 당하면서 그 남자를 완전히 소유할 때.”
“아빠랑 엄마는 너무 다른데도 잘 사는 거 보면 자식 눈에도 참 신기하게 보여.”
“아빠가 총각 때 어땠는지 알아?”
“알지. 진짜로 숙맥 그 자체였다며. 그런 숙맥도 없었다며.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어.”
“내가 아직 안 한 얘기도 있는데. 차마 자식 앞에서 하기는 그래서. 하하하….”
“뭔데. 급 궁금해지네.”
“에이, 그래도 너 한테 하기는 좀….”
“괜찮아. 나도 2년 있으면 30이야. 그리고 우리 집에서 비밀이 있나? 다 오픈 하면서.”
“진짜 변하지 않는 게 사람 천성이야. 나 아니었으면 네 아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총각 귀신이 될 게 뻔했어.”
“안 한 얘기가 뭐야?”
“아이참, 내가 괜히 얘기 해서는….”
“어느 정도 다 예측이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고백하셔.”
세라는 식탁에 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턱을 꽃받침처럼 감쌌다. 그녀는 엄마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 붙어있었다.
“그래, 하자. 해 줄게. 무슨 죄지은 것도 아니고….”
“헤헤헤….”
“네 아빠랑 결혼했을 때, 줄곧 책만 파던 사람이 여자를 알아야지. 맨날 내가 주도하기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내가 네 아빠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빠져있는지 몰라. 운명이라는 것 외 달리 말할게 없어.”
“딴 데로 새지 말고 어서 본론으로 가셔.”
“신기한 건 내가 뭐라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내가 하는 대로 다 따라주고 믿어주는 거야. 참 고맙고, 이 사람이 진짜 진국이구나, 느꼈어. 사람 진국, 그런 진국이 없지.”
“어허, 자꾸 샌다.”
“끝까지 들어 봐. 뭔 이야기를 해도 서론을 좀 깔아놓고 들어가야지.”
“오케이, 알았어, 알았어.”
“그때가 80년대, 막 비디오가 나왔던 시대였거든. 직장에서도 동료들끼리 빨간 테이프를 돌려보고 그랬던 시절이지. 나도 동료가 빌려준 테이프를 집으로 가져와서 봤는데,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다가 자꾸 보니까 신기하기도 했어. 뭐 저런 세상이 다 있나 하고. 더 웃긴 건 네 아빠야. 그것에 푹 빠져서 정신줄을 놓는 거지. 아쉽지만 테이프는 주인에게 돌려줘야 했고, 그렇게 빨간 테이프를 모르던 평소처럼 돌아갔지.”
“아빠가 그 테이프… 그 영화를 본 후에 어땠어?”
“남자들이 그런 것에 잘 빠진다더니, 그날 남자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여자는 별로였어.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못했어.”
“그럼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다음이지. 내가 네 아빠한테 말했지. 세운상가에 가면 빨간 테이프 파는 데가 있다더라, 당신이 그곳에 가서 하나 구해오라고, 우리가 소원해질 때 그거라도 보면서 기분 내자고 했더니, 미쳤냐고 하면서 여자가 넘 밝히면 못 쓴다고 하더라. 여자가 너무 밝힌다는 말에 나도 공감이 되고 해서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세운상가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자꾸 호기심이 발동하더라고. 그래서 회사 퇴근하고 한 번 그곳에 가봤지. 처음엔 내가 미친 거 같고 남들이 자꾸 날 쳐다보는 거 같고 해서 그냥 주위만 빙빙 돌았지. 그러다가 청년들이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호객행위 하는 걸 보고 직감으로 알았지. 쟤네들이구나 하고. 내가 호객꾼에게 다가가서 그것 있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이 더 당황하더라고. 그러더니 나를 조그마한 점포 안으로 데리고 가서는, 여자 손님이라서 특별히 아끼는 물건으로 준다면서 벽 쪽에 천막천으로 덮어놓은 곳으로 손을 깊숙이 넣더니 테이프 하나를 꺼내서 주더라고.”
“이야! 김소영 여사 대단하다, 대단해. 난 절대 그런 짓 못할 거야.”
“사실 네 아빠에게는 여태까지 비밀로 했지. 내가 아는 사람한테서 얻어온 줄 알고 있어. 차마 내가 거기까지 가서 구해왔다고 말 못 하겠더라고.”
“그 테이프 아직도 있어?”
“그게 언젠데 있겠어. 한동안 보관하다가 네가 크면서 치웠지. 가끔 여성잡지에서 보면 자녀들이 부모 몰래 그런 걸 찾아내서 본다는 기사가 있길래. 네가 볼까 봐 겁났지.”
“역시 묘한 집안이야. 김소영 여사 못지않게 나기영 씨도 여태 살아남은 게 대단하셔.”
“이런! 까불기는….”
“두 분이 천생연분이시네.”
“아무튼 그 비디오테이프 때문에 네 아빠가 나한테 많이 시달렸지 뭐. 하하하….
세라는 이상하게 엄마의 말을 듣는 동안 아까처럼 자르르한 느낌이 오곤 했다. 엄마가 딸 앞에서 자기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에 대해 정말이지 고마웠다. 사실 부모가 자식에게 쉽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걸 세라도 잘 안다. 남편에게 헌신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면서도 남녀관계에 당돌한 면이 있다는 게 엄마의 매력이었다.
세라는 엄마만 닮은 게 아니었다. 절반은 아빠의 성품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세라는 치마를 살짝 걷어서 허벅지까지 올려보았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5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엄마 정도면 많은 남자들이 넘 봤을 텐데. 안 그랬어?”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파리들이 안 끼어. 얌전한 사람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난 얌전한 스타일인데.”
“하이고, 얌전하다고! 부뚜막에 올라가고 싶어?”
세라는 엄마 말에 미소만 지었다.
“엄마는 말이지 멋지게 바람피우고 싶다면 같이 사는 남자에게 바람피워라 이거지. 남편을 남자로 보지 않고 집안에 가장으로, 아이들 아빠로만 보니까 자꾸만 남녀 간의 애정이 식어지는 거야. 외간 놈만 남자로 보이고, 그 놈들을 쫓아다니는 짓은 천박한 거지.”
“남편을 변함없이 남자로 여겨라 뭐 이런 건가.”
“하여튼, 난 그렇게 생각한다고. 너도 시집가면 남편하고 살지 말고 남자랑 평생 살라고! 내가 유일하게 너에게 물려줄 경험으로 얻은 유산이야.”
세라는 엄마의 확고한 부부 사랑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말했어. 엄마 만난 게 아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고 복이라고.”
“저번에 네가 나한테 말해줬잖아.”
“그랬나.”
“두 분이 그렇게 열혈 청춘이었는데, 자식이 나 하나라서 아쉽지 않아?”
“하나라도 잘 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 같아서 그게 아쉽지. 결혼하고 나니 별로 가진 게 있어야지. 집 장만하겠다고, 재산이 있어야 자식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킨다며 아등바등하다가 몇 년이 후딱 지나가고, 뭐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안 그래도 너에게 동생을 선물하지 못 해서 늘 미안하게 생각해.”
자식 이야기 뒤에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라는 그 사연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라는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연 속에는 세라의 아픔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세라는 누굴 만날 건데?”
“민규 씨가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어.”
“그랬구나. 편하게 치마 입은 거보니, 너의 마음이 많이 기울었구나.”
“글쎄, 정말 그럴까.”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눈을 반쯤 감으라고 했어.”
“모르겠어. 눈을 크게 떠도 하나만 보이고. 눈을 감아도 하나만 보이는 거 같아.”
“젊은이가 부럽네.”
“엄마도 늙은이 아니네요.”
“늙은이는 아니지만 청량한 원천수도 아니네. 정수시킨 수돗물 정도지.”
“요즘 같으면 나도 맑은 느낌이 아니야. 20대 후반은 너무 고통스러운 시기야.”
“그렇겠지. 세상이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해. 일하라고 사람을 만든 거 같아. 완전히 사회적 노예야, 노예.”
“요새 연구 실적이 안 올라서 죽겠어. 아이디어도 한계가 있어.”
“친구들한테 새로 나온 폰 디자인 울 딸이 개발한 거라고 자랑했지.”
”참, 엄마두.“
“그래도 여자는 몸 자체가 수비형이니까 항상 신중해야 해.”
“헉! 수비형… 웃기다.”
“넌 몇 시에 나가는데.”
“저녁 약속이니까 아직 시간이 많아.”
“그런데 벌써 옷을 차려입은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게… 왜 그랬을까.”
“나는 백화점에 가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와야겠다.”
엄마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세라가 말했다.
“김 여사 아직 빵빵하네. 힙이 살아있어.”
“엄마 놀리지 마.”
세라는 엄마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중년의 아줌마인데도 불구하고 세련된 짧은 머리와 관능적인 외모만 보아도 남자를 후릴 것 같은데, 오직 남편밖에 모르고 그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볼 때 정말이지 감탄할 정도이다.
세라는 자신이 맑은 물이라면… 생각했다. 기뻐하거나 감흥이 일 때 여지없이 자기 몸에서 솟아나오는 맑은 그것, 피부가 맑아서, 머릿결이 맑아서, 마음이 맑아서, 그에게로 스며들고 싶은 그것이 사랑일까 하고….
아직 송민규가 세라에게 그의 속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송민규라면 세라의 눈에서는 매력 있는 남자였다. 지적이면서도 뭔가 조금은 어눌하고 부족한 듯한 것이 묘한 매력 덩어리였다. 세라는 아빠 같은 모습이 그에게 있다고 믿는다. 세라는 아직 송민규에게 키스정도까지만 허락했다. 송민규가 한두 번 그녀의 몸을 요구했지만 그를 잘 설득해서 아직 깊은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런 세라가 요즘, 천년의 야생을 지닌 정글 속에서 햇살을 마음껏 받는 여자로 성숙해지고 싶었다. 세라는 어깨동갑인 나무들이 서로 기대고 사는 아련한 기억 속에 그 숲을 좋아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신으로 즐기면서 살겠다는 선배들이 간혹 있었다. 즐긴다는 게 뭘까.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의 성취일까. 유흥일까. 프리섹스일까. 가족이 간섭일까. 가사가 노동일까. 사람이 성장해 간다는 것, 가정이 가꾸어져가는 그 과정에 정말로 희생만 있을까. 그런 것이 희생이라면 이 세상에 희생 아닌 게 어디 있고, 행복을 어디서 찾을까. 부모에게 있어 자식 그 자체가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라는 그 행복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엄마처럼 자기 남편에게 모든 정성을 다해주며 자신의 행복을 다 가지는 그런 아내가 어찌 보면 영리한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빠가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걸리는 해외 출장이다.
“세라야, 엄마 나간다. 너도 재미있게 데이트 잘하고….”
“저, 늦을지도 몰라요. 잘 다녀오세요.”
“많이 늦으면 전화 해.”
“알았어요.”
세라가 물이 잔뜩 오른 나무 같다.
*
하늘빛에 눈이 시리다. 송민규 집으로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몇 년 전에 시에서 새롭게 단장한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세라는 그전부터 나무에 어린 영혼이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세라는 숲길을 걷고 싶어서 도착하기 몇 정거장 전에 시내버스에서 내렸다. 숲 옆에는 작은 천이 흐른다. 그곳에 가을이 채색되고 있었다. 풍경만 봐도 이렇게 마음을 들추는데, 동하는 남녀의 정이 야한 탐닉일까. 가을은 절정과 쓸쓸함이 공존하였다. 세라에게 그는 어떤 사람으로 여백을 채워갈까.
송민규는 세라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대학교 동기생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는 그가 그저 친한 동기이면서 오빠 정도였다. 2학년 학기가 끝나자 그가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입영 전날 세라도 동기들 틈에서 이별 아닌 이별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녀는 그 뒤로 한 번도 대학교에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작년 가을에 두 사람이 우연히 회사 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세라는 아침에 샤워하고 나서 입었던 속옷을, 집을 나서기 전에 다시 갈아입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옷이지만 오늘따라 속옷이 제일 신경 쓰였다. 이른바 여자가 결혼하려면 바람이 나야 한다더니, 그녀가 봄이 아닌 이 가을에 바람이 나려나 보다.
천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많이 보였다. 오리가족과 백로도 보였다. 세라는 오리를 보면서 오리 새끼는 길러 놓으면 물로 가고 꿩 새끼는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백로의 속살이 검은색이라더니 백로의 다리가 정말로 검은색이었다. 오리새끼는 자식? 백로는 야누스?
나무는 그 어떠한 환경에 있던지 부조화를 조화롭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시골에서 보면 흔한 풍경이 도시에서는 자연 풍경마저 창의적으로 느껴졌다.
남녀 간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결과라 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못질을 더 잘 한다는 의외의 결과에 놀랐다. 하지만 남성은 어두운 곳에서는 정확도가 여성보다 더 높다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천적으로 여자는 밝은 곳을 좋아하고 남자는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숲길이 끝나는 곳에 송민규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 초입에 있는 ‘달빛세탁소’가 세라의 눈에 들어왔다. 가게 이름이 시적인 표현에 그녀의 마음이 끌렸다.
예로부터 달빛이 부정을 정화하는 능력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달빛도 원래는 햇빛인데, 왜 같은 빛을 가지고 다른 영적 존재로 여겨질까.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듯 달빛 아래서는 평범한 사물도 신비롭게 하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한 달, 두 달 이어나가는 달력의 달이 저 달을 가리키는 걸까. 성숙한 여자에게 달은 소중한 현실이지만 반대로 매월 손가락 꼽을 필요가 없는 남자에게 달은 어떤 의미일까. 세라가 8동 7004호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왔어?”
문이 열렸다.
“좀 늦었네? 하긴 요리가 다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해.”
“숲길이 좋아서 저 아래서부터 걸어왔어.”
세라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총각 혼자 사는 집인데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았네.”
“손님 오니까 신경 좀 썼지.”
세라는 거실을 둘러보고서 주방 쪽으로 갔다.
“냄새 좋은데.”
“자기를 위해 실력발휘 해보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요리하기 좋아하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다던데?”
“생존의 본능 아닐까. 지금은 사냥이 필요 없는 시대다 보니까….”
“셰프님, 오늘의 요리가 뭔가요?”
“까르보나라.”
“까르보나라?”
“세라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음! 생각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데. 기대 만땅. 내가 도울 일은 없어?”
“공주님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세라는 식탁의자에 앉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송민규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여기, 단지 입구에 세탁소 이름이 멋지더라?”
“달빛세탁소?”
“시적이지 않아?”
“세탁소 주인 정말로 친절하셔. 그분 얼굴에서 행복이 막 뚝뚝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야.”
“왜 달빛세탁소일까?”
“아마도 하얀 옷이 달빛을 받으면 더욱 하얗게 보이잖아. 그래서 아닐까?”
“달빛을 세탁한다는 건 아닐까.”
“달빛이 깨끗한데 세탁할 이유가 있나. 달빛으로 세탁하는 거지.”
“아하! 민규 씨도 시인이네. 달빛에 휘날리는 하얀 옷이 유령일까 천사일까?”
“두 개 다지. 사람의 옷은 유령. 달의 옷은 천사. 그래서 달의 옷을 입으면 천사.”
“그러면 달빛세탁소는 천사 옷을 만드는 곳이네.”
“그런가!”
송민규는 다부지게 보이는 몸집에 키가 182cm였다. 세라가 말하길 한국남자 평균 얼굴이 되려면 안경을 끼어야 하는데, 민규 씨는 안경을 끼지 않았으니 내가 후하게 인심 써서 미남으로 인정해주는 거다, 라며 놀리곤 했었다.
세라는 요리에 열중하는 송민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남자가 나만이 소유하는 내 남자일까. 세라는 치마를 살짝 위로 끌어올려 보았다. 그 행동이 송민규의 눈에 들켰다. 그 바람에 세라는 살짝 당황하였고,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얼떨결에 그에게 물었다.
“오빠, 나 긴치마 입었는데 어때?”
“응, 예쁘긴 한데. 멋진 다리를 가려서 엉큼한 수컷이 아쉽네.”
“남자 집에 오면서 노출이 심한 건 부끄러운 일 같아서.”
세라는 자신의 말이 웃겼다. 그러면 왜 바지를 입지 않았지, 라고 그가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송민규가 말했다.
“진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보여주는 사람과 보는 사람 중 누가 더 부끄러워할 거 같니?
“그야 보여주는 사람이겠지.”
“아니지. 보여주는 사람보다 쳐다보는 사람이 더 부끄럽지 않을까.”
“그것도 그럴법하긴 한데, 글쎄….”
“자, 요리가 다 됐으니 손 씻고 와.”
세라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세라는 송민규가 식탁에 음식을 차리는 시간을 주기 위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세라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집안에 전등은 꺼지고 식탁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잔잔하게 음악이 흘렀다.
“The bangles의 Eternal flame이야. 어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제목도 좋고, 가사도 마음에 와닿고….”
송민규는 식탁의자를 내주며 세라에게 앉게 했다.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더니 세라가 물었다.
“식탁에 웬 바나나우유야.”
“그 바나나우유 나에게 집어줄래.”
세라가 바나나우유를 집어 올리려고 하자 병이 반 잘려져 있었다. 그 속에 반지가 있었다. 순간 세라의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그가 세라 앞에서 한쪽무릎을 꿇고서 말했다.
“오늘이 너를 만난 10월 22일이야. 딱 1년이지.”
“그걸 기억하고 있구나. 난 날짜까지 기억 못 했는데….”
“매일 같은 공간에서 너랑 함께 호흡하며 살고 싶어. 나랑 같이 살아 줄래?”
세라의 눈시울이 젖었다.
“민규 씨….”
세라는 송민규가 설마 자기를 집으로 초대해서 프러포즈를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녀는 속으로 부끄러웠다. 남자들이 그러듯이 그도 젊은 남자의 열정을 표출하려고… 아니 그녀도 은근히 마음에 준비하지 않았든가… 세라는 부끄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에게서 순박한 진심이 보여서 좋았다. 그 어떤 장소보다 자기의 보금자리로 불러서 프러포즈해준 것이 고마웠다.
“민규 씨, 나 부족한 게 많은데….”
“처음부터 알곡이 되어있는 게 아니잖아. 살면서 알곡이 되어가는 거지.”
송민규가 세라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두 사람은 포옹 뒤에 깊은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에 그녀의 눈물이 젖어 들었다. Eternal flame의 노래가 반복해서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세라의 감정이 다소 진정되고 나서 두 사람은 식탁에서 같이 식사했다.
식탁 위에 촛불이 로맨틱한 분기를 만들었다. 투명한 잔에 샴페인의 기포들이 불빛을 받아서 반짝거리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식탁 가운데 두 개의 촛불과 가장자리에 다섯 개의 촛불이 나란히 있었다.
“가운데 촛불은 청색과 홍색이 우리 두 사람을 뜻하는 것 같은데, 저기 다섯 개의 작은 촛불은….
“미래에 우리 식구들이지. 저 정도는 돼야겠지.”
“뭐야, 다섯 명!”
세라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활짝 핀 미소가 계속 이어졌다.
“다섯 명이면 나 무지 힘들겠다.”
“인구절벽이라잖아. 우리라도 노력해야지.”
세라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만찬이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세라는 송민규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안겨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품이 편안하고 아늑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두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무르익어갔다.
*
세라가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엄마가 안방에서 나왔다.
“늦었네.”
“민규 씨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어.”
세라가 엄마를 껴안았다.
“얘, 왜 이러니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엄마 민규 씨가 나한테 프러포즈 했어.”
“그럼 기뻐야지. 왜 울어.”
“기뻐서 그러겠지.”
“그러겠지는 또 뭐야.”
“몰라. 자꾸 눈물이 나와.”
“엄마, 나 가을 타나 봐.”
“여자가 무슨… 가을은 남자가 타는 거지.”
“그러게… 그런데 가슴이 애틋하고, 그 속에서 자꾸만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 것 같아.”
“프러포즈 받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냐,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그래 얼른 샤워해. 진정하고….”
세라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샤워하다 말고 가슴 한가운데 희미하게 나 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난 상처라서 지금은 많이 엷어져 있었다. 내 몸을 민규 씨가 보게 되면 그의 반응이 어떨까. 이게 무슨 흉터이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할까….
세라는 안다. 이 흉터는 동생의 목숨과 맞바꾼 거라는 걸. 동생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세라는 세 살이었다. 세라가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뒤따라오며 말했다.
“세라야, 돌아오는 주말에 나랑 같이 여행갈까.”
“그다음 날 아빠가 오시잖아.”
“그래. 여행 갔다 오면서 바로 공항으로 아빠 마중 가면 돼지.”
세라는 가정을 꾸리게 될 부품 꿈에 일주일이 하루 같이 지나갔다. 송민규와 데이트하는 시간이 짧게 느껴져서 헤어질 땐 긴 이별을 하는 사람처럼 아쉬움의 애교를 부리곤 했다.
주말에 모녀가 엄마의 엄마들이 살았던 그 숲을 찾았다. 아름드리나무로 바뀌고 풍경이 변하기도 했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곳. 세라의 마음이 나무들과 금세 동화되었다. 엄마가 길을 걸으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어른이 되었어도 중요한 일이 있으면 혼자 잘 찾아오던 곳이야. 내가 어릴 때 외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고 이 숲길을 걷는 걸 좋아 하셨지. 집에서 내가 안 보이면 엄마는, 너한테는 외할머니지, 내가 숲에 있다는 걸 잘 알고서 바로 이리로 찾으러 왔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자애가 숲속에서 놀면 괴물이 잡아간다고 했지. 난 그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어. 나도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너도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세라의 머릿속에서 번개같이 스치는 게 있었다. 세라가 동생 이야기를 듣게 된 곳이 바로 이 숲길이었구나. 외할머니 옆에 이모가 함께 있었다고만 생각날 뿐, 그곳이 어딘지는 몰랐었는데…. 그때 세라가 네 살이나 다섯 살쯤이었을까. 어린 것이 커서 기억 못 하리라 생각했는지, 두 사람이 별 신경 쓰지 않고 나눈 대화였지만, 그 말들이 돌판에 새겨진 성구처럼 세라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 세라는 부모님이 맞벌이하는 처지로 인해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세라가 세 살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한눈파는 사이 세라 혼자서 집에서 먼 곳까지 나왔다. 아마도 이 숲으로 연결된 길인지도 모른다. 그때 마침 세라의 엄마가 주말이고 해서 이곳으로 오다 어느 여자의 손에 이끌려가는 아이를 보았다. 엄마는 직감적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필사적으로 쫓으며 세라의 이름을 부르자 여자는 세라를 안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자를 따라잡아서 세라의 손을 잡았다. 여자와 엄마가 몸싸움하던 중 세라가 밀려서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언덕 아래 서 있는 나무에 부러진 가지가 솟아나 있었다. 가까운 이웃 사람의 도움으로 세라의 가슴에 깊이 박힌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야 했다. 세라는 가슴에 나뭇가지가 박힌 채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대수술 끝에 세라의 목숨은 건졌지만, 그 일로 인해 엄마 배 속에 있던 아기는 유산되고 말았다. 그 후로 엄마는 아기를 갖지 못했다. 세라를 유괴하려 했던 여자 또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세라는 어른들에게 동생 이야기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세라에게 동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세라의 몸에 난 상처를 볼 때면 네가 많이 아팠지, 라며 손으로 쓰다듬곤 한 것이 전부였다.
세라는 엄마와 숲길을 나란히 걸었다. 그때 세라는 달빛세탁소가 떠올랐다.
“엄마, 이 숲에 달빛이 비치면 어떨까.”
“그야 멋지겠지.”
“아냐, 낮 동안 나무에 쌓인 먼지를 달빛이 씻어주는 거야. 그래서 아침마다 싱그러운 잎들을 볼 수 있는 거야.”
“너 지금 철학가 같다, 얘.”
“왜 엄마랑 내가 이 숲을 좋아할까!”
“아마도 이 숲이 엄마 마음 같아서가 아닐까. 여기서 하룻밤 지내고 나면 내가 숲이 된 것처럼 아주 머리가 맑고 마음이 풍요로워지거든.”
모녀는 오후에 공항으로 갔다. 세라는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아빠를 보자 뛰어갔다. 세라가 아빠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젖었다. 한 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아빠가 한 손으로 세라의 등을 안으며 어리둥절해 했다.
“말만한 계집애가 왜 이래. 설마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서는 아니겠지. 무슨 일 있어?”
세라는 말없이 아빠의 목덜미를 그녀의 팔로 감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빠, 나 가을 타나 봐.”
최외득 / 월간 《신춘문예》(시), 《문학저널》(소설), 《순수문학》(평론) 으로 등단. 시집 『껍질을 가진 나무는 얼지 않는다』, 『반듯한 보도블록』, 『행복한 하루 살기』가 있고 제15회 영랑문학상, 제2회 무궁화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