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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72회>
경순왕으로부터 병권을 인계받아 명실상부 신라의 주인이 된 고려. 고려의 승승장구에 비해 여전히 후계문제로 혼란에 빠진 견훤과 백제는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한편, 황도로 돌아온 왕건은 만세사건으로 야기된 신료들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유금필의 유배를 결심하는데...
씬 신라 황궁 임해전 외경
씬 동 임해전 안 연회장
아악소리가 흥겹게 이어지고 있다. 왕건과 경순왕이 자리를 함께 하였고 그 옆으로 각각 유금필, 복지겸과 더불어 경순왕 쪽에는 김유렴을 비롯한 신료들이 함께 해 있다.
경순왕 폐하께오서 이 몸의 청을 받아주시어 신라로 와 주시니 그 은혜가 참으로 크옵니다.
왕건 어인 말씀이십니까? 이 서라벌은 천년사직의 중심이올습니다. 신라국의 황제께서 고려국을 인정하시고 이처럼 청해주시니 오히려 은혜로 따진다면 이 사람이 더 큰 은혜를 입은 것 같습니다.
경순왕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신라가 그 힘을 잃고 고려에 의지해 살아온지 오래 되었사옵니다. 참으로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신라는 이제 고려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가기 힘겨운 나라가 되었사옵니다.
모두들 .................
경순왕 (목이 메이고 눈물이 글썽인다) 이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백제의 견훤왕에 의해 왕위에 올랐습니다마는 생각할수록 지금의 신세가 가련하고 참담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싸울 군사도 없거니와 서라벌 밖으로 나가면 이미 신라의 영토는 아무데도 없사옵니다.
모두들 ................. (비감하다)
경순왕 어쩌다가 신라의 열성조께서 이 사람에게 그 사직의 문을 닫으라 하시는지 참으로 한스럽고 가슴이 미어지옵니다.
김유렴 폐하.. (울먹이며)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지금 나라 형편이 어렵기는 하오나 어찌 사직의 문을 닫는다 하시옵니까?
경순왕 경은 현실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가? 다스릴 영토가 없고 다스릴 백성이 없는 황제가 어찌 한 나라의 군주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짐은 여기에 오신 고려의 황제께 고맙고 또 고마워 할 뿐일세. 고려가 없이 어찌 우리 신라가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폐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옵니다마는 그 은혜가 너무도 크시옵니다.
왕건 듣기가 심히 민망합니다. 그만 하시지요, 폐하. 오늘 모처럼 이렇게 만났으니 즐겁게 드십시다.
경순왕 예, 폐하.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술 마시며) 여기 이 분이 그 바로... 신장이라는 유금필 장군이신가 보옵니다.
유금필 예, 폐하. 유금필이옵니다.
경순왕 그 옆에는....
복지겸 장군 복지겸이라 하옵니다. 폐하를 뫼시는 내군장군이옵니다.
경순왕 아, 압니다. 그 옛날 궁예왕을 폐하고 지금의 폐하를 옹립하신 공신분들이 아니십니까?
왕건 하하하.. 그렇습니다. 오래 이렇게 늘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경순왕 (큰 한숨) 그 궁예왕은 우리 신라 황실의 한 사람입니다. 말년에 그토록 인심을 잃고 생을 마감하였다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안 되었사옵니다.
왕건 그러게 말입니다. 웅지가 크고 뜻이 깊었던 사람이었지요. 말년에 병이들어 그리 되었습니다.
경순왕 하지만 폐하께서 그 뒤를 이으시어 오늘날 삼한에서 제일 가는 강국이 되셨고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성군이 되시지 않았사옵니까?
왕건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김유렴 신이 오다가 백성들의 말을 들었사옵니다. 지난 날 백제의 왕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본 것 같았는데 폐하께서 오시는 것을 보니 마치 부모를 뵙는 것과 같았다고들 말하고 있었사옵니다. 성군이 아니시라면 어찌 이런 백성들의 말이 있었겠사옵니까?
왕건 이 사람은 그저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외다. 어느 것이 도리이고 어느 것이 인륜이며 천륜인지를 알고 그저 따를 뿐이외다. 과분한 칭찬은 듣기가 거북스럽소이다. 자, 한 잔 하십시다.
경순왕 술을 더 가져 오너라. 무희들은 무얼 하느냐? 고려의 폐하께 신명나는 춤을 추어 보이거라.
악공들 예, 폐하.
음악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무희들의 춤이 꽃처럼 화사하게 펼쳐진다. 보며 웃는 왕건의 표정에서......
씬 임해전 근처 전각
마의태자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멀리서 아악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다. 마의태자가 내관에게 묻는다.
마의태자 아직도 여흥이 계속되고 있다고...?
내관 예, 태자마마.
마의태자 한스러운 날이로구나. 지난번에는 백제의 왕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군사를 끌고 와 황궁을 어지럽히더니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 문을 열고 도적의 왕을 불러들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구나. (절규처럼) 오호, 신라여... 천년의 영화로 살아온 제국이여...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처럼 처량하게 되었는고....?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고...?
그렇게 소리치는 마의태자의 표정은 울분과 증오 그리고 참담한 절망으로 얼룩져 있다. 터질듯한 그의 소리에서 다시 디졸브....
씬 고려 황도 외경
씬 동 광평성 안
김행선을 비롯해서 최응, 왕규, 추언규, 왕식렴, 정윤 무, 최지몽, 박술희, 홍유, 염상, 왕충, 박수문, 박수경, 윤신달들이 모여 있다. 모두들 분위기가 무겁다.
무 지금 폐하와 유금필, 복지겸 장군들이 신라의 서라벌에 들어가 계십니다. 헌데 우리는 지금 그중 유금필 장군의 죄를 따지기 위해들 모여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찌들 생각하십니까?
최응 ............. (그저 담담하다)
염상 지금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서경에서 돌아온 왕총관의 말을 다시들 들었습니다. 생각해보기에 따라서는 유금필 장군에 관한 일은 분명 죄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무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럴 것도 같습니다. 아버님을 대신해서 하례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 죄가 될 수 있어요.
김행선 하오나 정윤마마.
무 말씀하시지요.
김행선 지금 폐하와 유금필 장군은 신라의 서라벌에 들어가 계시옵니다. 모든 잘잘못을 떠나서 국가의 외교 임무를 맡아 다른 나라에 가 있는 사람을 탄핵하고 죄를 물어 죄인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나라의 체면과도 관계가 되옵니다.
박술희 그렇소이다. 또한 유금필 장군께서 참으로 죄를 진 것인지 아닌지 확실한 것도 아니올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 무지하고 무식한 변방의 오랑캐들이 유금필 장군을 사모한 나머지 반갑다고 한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식렴 지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 겝니까, 박장군...? 폐하를 대신하여 만세를 받았소이다. 그것은 그 자체 하나로도 대역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오이다.
박술희 어찌하여 오랑캐들의 잘못을 가지고 금필 형님께 씌운다는 말이오? 도대체 왜들 이러시는 게요?
홍유 지금 왜들이라고 하셨습니까? 두 분이 의형제라는 것을 떠나서 신료의 본분에 대해 생각해 보시구려. 비단 평양에서의 일뿐이 아니올시다. 전투에 나갈 때마다 작은 공을 가지고 폐하의 용안을 흐리게 하고 장수들간의 군기를 저해시켰소이다. 유장군이 말씀이외다.
배현경 그건 사실이올시다. 비단 유장군의 독자적인 뜻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일이 그렇게 되었어요. 전장터나 전투 때마다 그저 유장군, 유장군 하니.... 이것이 되겠소이까?
박술희 장수들이 되어 가지고 그만한 일들에 시기를 한다면 이 나라의 앞날이 염려스럽소이다.
배현경 그것은 시기가 아니올시다. 잘못된 권신들의 권력과 아집을 막자고 하는 우국충정에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박수문 우리는 그 현장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죄를 논한다면 분명한 이유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하는 그 주인을 대신하여 인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박수경 소장도 그리 생각합니다.
윤신달 하지만 오랑캐들이 한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장군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까? 그 많은 전공을 생각해서라도 쉽게 죄안을 논하는 것은 생각해볼 일입니다.
추언규 그렇습니다. 죄는 무섭고 분명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전과도 함께 간추려 생각하는 것이 고금의 이치올시다.
왕규 그렇습니다. 죄와 공을 공정하게 저울에 달아 그 귀추를 따지는 것은 법 형평에 맞는 일입니다. 그렇게들 하시지요?
최지몽 조금 전에 시중어른께서 외교문제로 신라에 들어가 있는 분들을 바로 이런 때에 단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소생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돌아오신 뒤에 논의하시오소서.
김행선 병부령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최응 지금 이 문제를 지난날부터 계속해 듣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지난 공이 많고 또 인정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 주군을 없수히 여겼다면 대역죄가 분명합니다.
박술희 아니 이보시오, 병부령..?
최응 더군다나 신료들간에 정리를 깨고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또한 양식있고 책임있는 장수의 도리가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
최응 그러나 지금 나랏일로 멀리 가 계십니다. 마땅히 돌아온 이후에 죄를 논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받을 죄는 받아야지요.
그 단호한 말에 왕식렴도 홍유도 뻥해서 본다. 그러나 박술희는 벌떡 일어서며 탁자를 친다.
박술희 잘들 해보시구려. 이건 아주 모두 짜고들 하고 있는 것 같구먼. 모두 짜고서 금필 형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야. 생각들 해보시오.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씀이오? 금필 형님이 죄를 지었다면 그건 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운 죄밖에는 없습니다. 마음대로들 해 보시구려.
그렇게 박술희는 퇴장해 버린다. 모두들 다시 최응을 본다. 김행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또 묻는다.
김행선 이보시게 병부령... ? 박장군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게 무슨 그렇게 죽을 죄는 아니지 않는가? 아, 오랑캐들이 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왕식렴 오랑캐가 아니라 유금필 장군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허, 이렇게 원....
씬 신라 황궁 대전 외경 (밤)
군사들이 수직하고 있다.
경순왕 (E) 폐하...
왕건 (E) 말씀하시지요.
씬 동 대전 안
두 황제와 유금필, 복지겸, 김유렴, 신하1이 함께 해 있다. 깊은 침묵이 긴장과 더불어 이들 사이에 흐르고 있다.
왕건 말씀하십시오, 폐하.
경순왕 (한참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 낮에 연회장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제 이 신라는 그 운명이 다 되었사옵니다.
왕건 그만 하십시오. 듣기 민망합니다.
경순왕 아니올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허울뿐인 황제로서 고려국의 폐하를 만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옵니다. 정중하게 청을 하나 올리겠사옵니다.
왕건 말씀하십시오.
경순왕 어차피 운명이 다 된 사직이옵니다. 이 사직을 받아주시오소서.
모두들 ................? (충격)
왕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순왕 허울뿐인 나라가 아니옵니까? 그리고 허울뿐인 황제올습니다. 폐하께서 받아주시오소서.
왕건 힘을 내십시오, 폐하. 그래도 천년을 이어온 사직이 아닙니까? 그 말씀은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경순왕 의례적인 청이 아니옵니다. 사면초가의 나라이옵니다. 제발... 이 신라의 마지막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왕건 그것은 못합니다. 차마 할 짓이 아닙니다. 절대로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유금필 ........?
복지겸 .........?
경순왕 폐하... 제발 받아주시오소서. 이 신라를 받아주시오소서.
왕건 그것은 못합니다. 아니 됩니다. 그러나 신라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김유렴 (울며) 지금 신라에는 군대란 없사옵니다. 견훤왕이 무지막지하게 이 땅을 노리고 있고 우리는 막을 힘이 없사옵니다. 또한 때때로 북방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괴롭히기도 하옵니다. 신라는 이미 한계에 와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옵니다.
유금필 폐하, 신라의 사정이 이토록 어렵다면 이제부터 신라의 모든 국방의 일은 우리 고려가 책임지면 어떠하겠사옵니까?
복지겸 신라국에서 원한다면 그 또한 좋은 방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김유렴 그렇게 만이라도 해 주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고려의 군사들이 우리 신라를 지켜준다는데 무얼 더 걱정하겠사옵니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폐하?
경순왕 그거야 그렇네마는 염치도 없고 너무 황망하네 그려.
왕건 아니올습니다. 신라국에서 원한다면 곧 그리 하겠습니다. 백제나 오랑캐들의 침입은 안심을 하십시오. 우리가 다 막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군사적 요새마다 우리 고려군이 가서 다 맡아 해결할 것입니다.
경순왕 고맙사옵니다.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폐하...
왕건 우리는 이미 동맹국이며 또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망설이고 또 불평해 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신라의 일은 고려의 일입니다.
경순왕 고맙사옵니다.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폐하.
왕건 하하하, 드십시다. 어서 드십시다.
씬 마의태자의 처소
마의태자가 눈을 크게 뜨며 묻고 있다. 신료2, 3이 함께 해 있다.
마의태자 지금 뭐라고 하였소이까? 군권을 맡겨요..? 신라의 모든 군권을 고려에게 들어바쳤다는 말입니까?
신료2 예, 태자마마. 이미 그렇게 하기로 약조가 되었다 하옵니다. 더불어 내일 돌아가는 길에 상국 김유렴 공을 신라의 인질로 고려에 보낸다 하옵니다.
마의태자 인질이라고 하였소이까?
신료3 그렇다 하옵니다. 신라가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성격의 인질이옵니다.
마의태자 오오... 어이할꼬..? 군권을 넘겨준 것은 이미 우리가 고려의 보호국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주권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오. 게다가 인질까지 딸려보낸다는 말이오? 오오... 어쩌다가, 어쩌다가 내가 살아서 이 참담한 꼴을 보낸다는 말인가, 어쩌다가..?
해설 그렇다. 곧 마의태자로 불리우게 되는 이 태자의 이야기처럼 신라는 왕건과 만나면서 사실상의 국권을 포기하게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는 고려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인 도움을 받아왔다. 그리고 왕건은 그 참담한 공산전투의 패배를 겪어가면서까지 신라를 도왔다. 아니 그것은 도왔다기보다는 신라에 대한 지분을 보다 확고히 하였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지치고 힘이 없어진 경순왕의 청을 받아 서라벌을 방문하게 됨으로써 더욱 확실한 신라에 대한 지배권과 곧 다가올 통일에 대한 사전준비를 분명하게 대내외에 알리게 된 것이다.
씬 동 서라벌 남문 (낮)
왕건들이 돌아가고 있다. 경순왕이 함께 오다가 남문밖에 이르자 서로 인사를 한다. 신료들이 환송차 대기해 있다.
왕건 참으로 뜻깊은 며칠이었습니다.
경순왕 조심해 가시오소서. 우리 신라의 백성들은 폐하를 오래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왕건 고맙습니다. 곧 또 서로 뵐 것입니다. 자, 그럼...
경순왕 제가 고려와의 관계를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뜻으로 제 사촌아우인 김유렴 상국을 보내는 것이옵니다. 깊이 살펴주시오소서.
왕건 폐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함께 가서 우정을 돈독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가십시다 김공..
김유렴 예, 폐하. 허면 폐하 잘 계시오소서. 고려의 황도에 가 있겠사옵니다.
경순왕 그리 하게. 자, 어서 가시오소서.
왕건 허면....
그들은 그렇게 모두 말에 오른다. 묵례를 갖는다. 복지겸이 소리친다.
복지겸 폐하께서 돌아가신다. 기병들은 폐하를 뫼시어라.
유금필 .............
복지겸 어서 가시오소서, 폐하.
왕건 그리 합시다.
그들 그렇게 간다. 모두들 허리를 굽이고 예를 취한다. 그렇게 왕건들은 점차 멀어져 간다. 그때다, 대궐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뛰쳐나온다. 마의태자다. 실성한 것처럼 절규한다.
마의태자 저기 가고 있는 고려의 왕은 도적입니다. 우리 신라를 훔치러 온 도적입니다. 폐하, 속지 마시오소서. 신료들이여 속지 말지어다.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신라를 훔치러 온 도적이다. 도적이다....
경순왕 태자는 멈추지 못할까..? 태자를 끌고 가라. 무엇들 하느냐? 태자를 끌고 가라.
마의태자 도적이다.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도적이다...
왕건들이 가다가 보았다. 그리고 들었다. 왕건이 참담하게 돌아본다. 유금필이 조용히 말한다.
유금필 그냥 가시오소서, 폐하.
왕건 그리 하세.
그들 그렇게 그냥 간다. 마의태자의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마의태자 (E) 도적이다... 고려의 왕은 도적이다.
씬 길
어느 굽이진 길을 왕건들이 돌아서 오고 있다. 왕건은 긴 한숨을 쉰다.
왕건 신라 태자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네 그려. 천년일세 어느 나라도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천년을 버틴 나라는 없네. 어찌 한이 없겠는가? 신라의 일은 우리 모두 거울 삼아야 할 것일세.
모두들 예, 폐하.
복지겸 신라 황제는 나라를 들어바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왜 거절하셨사옵니까?
왕건 모든 것은 절차가 있고 때가 있는 것이요. 아직 그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천천히 순리로써 풀어가야지요.
유금필 백제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어찌 나올지 궁금하옵니다.
왕건 글쎄... 이미 다 알고 있겠지. 그럴 것이야.
그들 그렇게 간다.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견훤이 눈을 치켜 뜨며 최승우를 보고 있다.
견훤 허허, 뭐라...? 신라의 왕이 왕건 아우에게 군권을 통쨰로 맡겨버렸다?
최승우 그렇다 하옵니다, 폐하. 이미 신라의 각 요새마다 고려군이 이동중이라 하옵니다.
견훤 그렇게 되었구먼. 군권을 고려에게 넘겼다...? 이렇게 되면 이거 신라가 항복을 하였다는 것인데...
최승우 그렇게 보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견훤 재주는 곰이 부리고 그 이익은 엄한 자가 챙긴다고 하더니.. 이게 꼭 그 꼴이 되었네 그려. 아니 누가 시켜준 왕인가 말이야. 헌데 그 자가 뭐가 어쩌고 어째...? 왕건 아우에게 통째로 다 맡겨..?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야?
최승우 결국은 고려가 신라를 확실하게 넘겨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옵니다.
견훤 어이구... 어이구..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야, 이것이....?
최승우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신라가 돌아선 계기가 된 것 같사옵니다.
견훤 맞아.. 그것이 틀림없어. 그럼 어찌한다...? 당장 뭔가 전세를 바꿀만한 것도 없고... 나라 사정은 이 모양이고... 어이구... 이럴 때에 국내문제라도 안심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식들이라도 번듯하게 제몫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어. 어이구... 고려가 신라를 접수하고 있는데 이게 뭔 꼴인가..? 뻔히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이러고 있으니 이게 무엇이야. 어이구...
씬 동 궁안 일각
능환과 능애, 영순이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능환 좋지 않은 소식만 거듭되고 있소이다. 고려가 신라의 서라벌을 방문하였고 그 군권을 맡았다고 합니다.
능애 군권을 넘기다니... 그것은 나라를 넘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순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능환 허허, 보나마나 폐하께서 심기가 더욱 불편해 계시겠소이다.
능애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이 싸움은 결국 삼한 중에서 누가 먼저 신라를 얻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헌데 고려가 신라를 가져가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웃어가면서 말입니다.
능환 이리 되면 아니 되지요. 정말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할 일은 많은데 국내 문제는 산처럼 쌓여 있으니... 어허, 이것 참...
능애 방법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제 폐하와 태자마마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아주 갈라져 버렸습니다. 길이 보이지를 않아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뭔가 길을 찾아야 하는데....
씬 대궐 뜰
뜰 일각에서 박씨와 이상궁이 보고 있다. 뜰 저만큼에서 신검과 양검, 용검 그리고 애술, 신덕, 최필, 김총들이 격구를 하고 있다. 격구는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문 밖으로 내보내는 놀이이다. 와와 함성들이 터진다. 신검의 편과 애술의 편이 갈라져서 수십 명 씩 때를 지어 시합을 하고 있다. 공이 애술 쪽으로 가고 있다.
애술 얘들아, 공을 막아라... 우리가 벌써 여러 점 졌느니라. 막아라... 공을 막아라...
신검 무엇들 하는가? 애술 장군이 당황하고 있다. 어서 공을 몰아라...
양검 공을 몰아라...
용검 몰아라...
신검 밀고 들어가라... 밀고 들어가라... 하하하, 잘한다.... 밀고 들어가라..
때를 지어 흥겹게 놀이가 계속되고 있다. 애술 편이 절절매고 공은 계속해 구문 밖으로 나간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고 아쉬워하고 또 환호를 올리기도 한다. 계속해 놀이는 진행되고 있다. 열심히 뛰는 그들의 모습에서....
해설 격구. 당시 무신들이 무예를 익히는 방법으로써 즐겨했던 놀이이다. 원래는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폴로 경기가 당나라에 전래되어 격구로 불리면서 고구려와 신라에 전해졌으며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되었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다. 일명 타구라고도 하고 또는 포구라고도 불리우는데 오늘날의 골프 또는 하키와 같이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이다. 조선조 정조 때에 만들어진 무예 24반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용비어천가 제 44장에는 격구에 대한 노래와 기록이 나와있다. (자세한 기록은 관계기록 참조) 신검이 지금 이 격구에 몸을 풀며 가슴의 한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경기는 계속된다. 안타까워하는 애술과 최필, 김락들의 모습이 보이고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신검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함성 소리에서.....
씬 그 일각
박씨가 혀를 차며 보고 있다.
박씨 가슴에 한이 재처럼 쌓여 있을 터인데 저렇게 라도 풀지 않으면 어찌 하겠느냐?
이상궁 .............
박씨 신검 태자의 마음을 이 에미가 잘 아느니 안타깝구나. 부자간이 왜 저렇게 웬수처럼 되었다는 말인고...? 나이 사십이 넘어서 격구나 하면서 울분을 달래고 있다니... 너무도 아니 되었다. 너무도 아니 되었어...
이상궁 그러게 말이옵니다, 마마.
박씨들은 그렇게 지나쳐 간다. 격구는 계속된다.
씬 고비의 처소
고비와 금강, 최상궁이 함께 해 있다.
고비 호호호... 신검태자께서 장수들과 격구를 즐기신다고...?
최상궁 예, 마마.
고비 호호호... 이보시오, 태자. 이제 신검 태자도 할 일이 별로 없나 봅니다. 궁궐 안에서 격구라니요..?
금강 격구는 본래 장수들과 무인들이 즐기는 놀이이옵니다.
고비 하지만 오죽 할 일이 없으면 벌건 대낮에 저렇게 놀이로 시간을 보내겠습니까? 어떻습니까? 폐하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까?
금강 말씀이라니요, 어마마마?
고비 (눈치 보며) 그것 참, 말씀을 하실 듯 하실 듯 하면서 아니 하시니 이 에미도 참 답답합니다. 다음 보위 이야기 말입니다.
금강 어마마마, 제발 그 말씀 좀 조심하시오소서.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도 엄청난 일이옵니다. 쉽게 말씀을 주실 사안이 아니옵니다. 그저 기다려 볼 수 밖에요.
고비 기다려 보나마나 대답이 뻔한 일이 아닙니까?
금강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궁궐에는 사방에 귀가 있사옵니다. 제발, 어마마마....
고비 호호호... 이렇게 원... 아, 다 된 일을 뜸을 들이시니 해 본 말입니다. 보세요. 이제 신검 태자도 다 포기하고 저렇게 격구나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태자의 시대가 올 때입니다. 암요...
금강 그만 하시오소서. 그저 어마님은 가만히 계시오소서. 오히려 이것이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사옵니다.
고비 나라도 정신을 차려서 태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나는 압니다. 이 조정은 사방이 모두가 신검 태자 편입니다. 금강 태자도 그것을 잊으면 아니 됩니다. 저들이 지금은 저러고 있지만 언제 칼을 빼들지 모른다 이 말입니다.
금강 어마마마....
씬 동 대전
불빛 속에 홀로 견훤이 괴로워하고 있다. 이리저리 거닐며 중얼거린다.
견훤 허망하게 되었구나...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많은 세월이 가 버렸어. 얼마나 대단했던 신라였던가..? 그 신라가 고려에 넘어가고 있어. 고려에 말이야. (사이) 헌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왕건 아우가 신라를 삼키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이야. 나라가 안정이 되야 다시 고려를 치든 신라를 치든 할 것인데... 모든 것이 엉망이 아닌가? 허허, 이것 참....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는데... 절대로 이렇게 앉을 수는 없는데...
씬 고려 황도
도성 밖에서 김행선을 비롯한 신료들이 왕건 일행을 맞고 있다. 모두들 길게 좌우로 늘어서서 예를 취하고 있다.
김행선 어서 오시오소서, 폐하.
최응 어서 오시오소서. 먼길에 얼마나 노고가 크셨사옵니까?
왕건 하하하... 노고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주변 보며) 별일들은 없소이까?
무 예, 폐하.
유금필 하하하... 정윤 마마께서 계시고 시중어른께서 계시고 기라성같은 신료들이 있사옵니다. 별 일이 있겠사옵니까, 폐하?
왕건 허허허... 그렇기는 하이.
그러나 유금필의 농담에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다. 갑자기 유금필이 어색해 진다. 하나같이 표정들이 다른 것이다.
무 폐하,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그렇게 하지. 오늘은 날이 다 졌으니 내일들 조당에서 보기로 하십시다. 금필 아우도 내일 보세.
유금필 예, 폐하. 편히 쉬시오소서.
복지겸 폐하께서 드신다.. 내군들은 뫼시어라...
왕건 자, 들 내일 보십시다.
유금필은 박술희와 더불어 예를 취하고 다른 장수들도 그렇게 예를 취한다. 복지겸과 내군들, 시중과 최응, 최지몽들이 따라 들어간다. 서 있던 홍유와 배현경, 왕식렴들이 헛기침을 날리며 가버린다. 유금필이 의아해서 보는데 박술희가 한쪽으로 눈짓을 한다.
박술희 가십시다, 형님.
유금필 그렇게 하세. (가며) 헌데 왜들 저러는가? 표정들이 굳어있네 그려.
박술희 집에 가서 말씀드립지요. 가시지요.
씬 유금필 집 외경 (밤)
씬 동 집 사랑
박술희가 술을 마시며 말하고 있다.
박술희 문제는 평양에서 있었다 그런 말입니다. 형님께서 폐하를 대신하여 만세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조정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유금필 허허, 하지만 나는 어쩔 수가 없었네 그려.
박술희 압니다, 알아요.. 왜 모릅니까? 형님은 너무 잘나서 지금 모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참소를 받고 있다는 것이에요.
유금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박술희 지난번에 형님이 서경 천도설이 나왔을 때 대놓고 총관인 왕식렴 공의 이야기를 반박했습니다.
유금필 아, 그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 되는 것을 아니 된다고 해야지 어쩌란 말인가?
박술희 또 있습니다.
유금필 또 있어..?
박술희 전투에 나가서 물론 형님은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남보다 분명히 많은 공을 세웠어요. 헌데 폐하께오서 그 점을 유난히 드러내시니 다른 장수들이 함께 싸우고도 빛이 아니 납니다. 그러니 속이 상할 수 밖에요. 이건 저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터에서 다 죽어라고 싸웠는데 형님만 공을 가져간다 이런 얘기입니다.
유금필 (들으며 끄덕인다) 그럴만 하이. 듣고 보니 그래. 그 점은 내가 미쳐 챙기지를 못하였네. 허나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몰매를 맞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 않는가?
박술희 어쨌든 쌓인 것이 많아서 생긴 일이올시다. 내가 형님을 대신해서 소리도 치고 해 보았지만 일이 아주 어렵게 되었어요. 복잡해요.
유금필 허, 그랬구먼. 그랬어...
박술희 허허, 이런...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형님의 얘기올시다. 다른 사람 얘기하는 것 같이 말을 하고 계십니다 그려.
유금필 허허허...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을 말일세. 허허허... 술이나 들게. 자고로 충신이란 말일세. 폐하를 위하여 언제든 죽을 각오만 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야. 그 이상의 욕심도 권력도 바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 헌데 내가 그렇게 비췄다니 욕을 먹어도 싼 것이네. 술이나 드세.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는 이 고려 제국과 폐하를 위하여 언제든 어디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일세. 그 이상도 이하도 없네. 정말 없어. 더는 없어.
박술희 ....... 그러니까 답답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저들이 형님을 몰라주니 말입니다.
씬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최응과 왕건이 마주해 있다. 왕건이 꿈틀하며 눈을 뜬다.
왕건 뭐라...? 금필 아우에게 죄를 주라...? 신료들이 지금 그걸 청하고 있다는 말인가?
최응 예, 폐하.
왕건 내가 분명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최응 허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 일이 너무 커져버렸사옵니다.
왕건 무엇이 커지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도대체 금필 아우가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야? 신료들이 이래가지고서야 도대체 내가 무얼 믿고 일을 하겠는가? 죄없는 자를 벌을 주라 하니....
최응 공신들과 폐하의 아우님께서 청해온 일이옵니다.
왕건 공신들...? 내 아우...? 아주 실망이로구먼.. 저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파당을 갈라서 사람들을 시기하고 모함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모함이고 시기야.
최응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명분이 분명하옵니다. 폐하를 대신하여 만세와 하례를 받았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삼족을 멸할 수 있는 대죄에 속하옵니다.
왕건 무어라..? 최응이 너마저 그런 말을 지껄이는가? 유금필이는 내 의제야. 평생을 내 목숨과 함께 했어.
최응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왕건 그 때문이라..? 무엇이 그 때문이라는 것이야?
최응 사실 이번 사건의 내막은 그 죄가 폐하께 있사옵니다.
왕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응 언제부턴가 폐하께서는 유금필 장군을 다른 신료들보다도 더 챙기고 계셨사옵니다.
왕건 그럴 수밖에... 그는 내 의동생이야. 그리고 삼년산성에서 내 목숨을 구해 주었고 고창 전투에서도 다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어.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사심이 없어. 내가 어찌 더 안 챙기겠는가?
최응 폐하를 모시는 어느 신료들치고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헌데 좀 더 가깝고 정이 있고 또 보다 조금 낫다 하여 편을 갈라놓으시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사옵니까?
왕건 ..............?
최응 유금필 장군은 분명 죄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그 원인을 제공하셨사옵니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왕건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무거운 헛기침만 내리쉰다.
최응 아니 그렇사옵니까?
왕건 허허... 병부령이 아주 나를 다그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구먼. 생각해보니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그려. 그래도 그렇지....
최응 저들은 유금필 장군의 삭탈관직을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뭐, 뭐.. 뭐라..? 삭탈관직...? 벼슬을 떼라는 말인가?
최응 그러하옵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옵니다. 삭탈관직은 물론이거니와 유배를 보내시오소서.
왕건 (기가 막히다) 유배..?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유배를 보내?
최응 (미소) 유장군이 죄가 없다는 것은 실은 공신들과 신료들도 아옵니다.
왕건 그런데 유배라는 말인가?
최응 저들이 하나를 원할 때에 열을 보여주시오소서. 분명 효과가 클 것이옵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저들에게 충고를 해 주시고 말 없이 경고를 내리시는 것이옵니다. 다시는 신료들의 분란이 없도록 말이옵니다. 신의 말이 납득이 되시옵니까, 폐하?
왕건 (비로소 이해가 간다) 하나를 열로 주어라....?
최응 그러하옵니다. 분명 하나를 받아야하는데 열 개를 받아버리니 나머지 아홉은 무엇이겠사옵니까? 바로 빚이 되옵니다. 빚과 짐이 되는 것이옵니다, 폐하.
왕건 ..............(끄덕인다)
씬 왕식렴의 집 외경
씬 동 집 사랑
왕식렴과 홍유, 배현경들이 모여 있다.
배현경 지금쯤 폐하께 유금필 장군의 일이 보고되었을 것이외다.
홍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요.
배현경 허나 생각해보면 사실 죽을죄는 아니지 않소이까? 폐하께오서 너무 유장군을 편애하시는 데에서 나온 일이올시다.
왕식렴 소생도 그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올시다. 더 이상의 파벌이나 큰 죄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해서 신료들이 정신을 차리자 하는 것이올시다.
배현경 폐하께서도 고민이 많으실 겝니다. 그래도 의형제분들이십니다.
왕식렴 할 수 없지요. 황실을 위해서는 일부 신료들의 독단은 막아야 합니다. 이로써 경종을 울리자 하는 것이올시다.
홍유 하지만 폐하께서 어찌 나오실지 모를 일이지요. 쉽게 우리들의 말을 들어주시지는 않으실 겝니다.
왕식렴 벼슬을 떼라고 청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꾸중만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성공이올시다. 두고 보십시다.
씬 유금필의 집 사랑
유금필이 홀로 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다. 박술희는 보이지 않고 그렇게 길게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황궁 외경
씬 동 대전 복도
두 상궁이 내관들과 함께 서 있다.
왕건 (E) 두 분이 어쩐 일이십니까, 이 밤에...?
씬 동 대전 안
왕건이 두 황후를 보고 있다.
왕건 어쩐 일로들 오셨습니까?
오씨 신첩들이 듣기로 신료들이 유금필 장군을 죄를 주자고 한다 들었사옵니다. 사실이옵니까?
왕건 그렇소이다.
유씨 유장군은 오랫동안 폐하를 뫼셔온 형제분이시옵니다.
왕건 형제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오씨 유장군은 평소의 성품이 과묵하고 오로지 폐하를 위한 충성밖에 없는 분이신 줄 아옵니다. 그런 분을 벌하시려는 것입니까?
왕건 신료들이 원한다 합니다.
유씨 의형제분 중 한 분은 이미 전사를 하셨습니다. 두 분이 남으셨는데 그 중 한 분을 죄를 주신다면 앞으로 어찌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왕건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두 분은 더 이상 염려치 마오.
유씨 황실이 편안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했사옵니다. 그분은 폐하의 아우님이시옵니다. 한번 용서를 하시오소서.
왕건 황제도 황제의 아우도 나랏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오. 두 분의 뜻은 내 충분히 알겠소이다. 그리고 어여삐 받겠소이다. 내일 편전에서 조회가 열릴 것입니다. 그때 합당한 대답을 내릴 것이오.
오씨 폐하, 한번 더 생각하시오소서. 그런 충신을 벌하심은 아니 될 말이옵니다, 폐하.
왕건 어허, 이런... 내 그토록 이야기하지 않았소이까? 나는 황제로서 나랏법에 따란 한다고 말이오. 나랏법이오, 나랏법..... 금필 아우가 잘했든 못했든 간에 나랏법에 저촉이 되었으면 죄를 받아야지. 내일 편전에서 다 죄를 물을 것이오. 그리 아시오.
두 황후 폐하....
왕건 그만 하시구려. 돌아들 가세요.
두 황후 폐하....
왕건 내일이오. 내일 조회에서 다 말할 것이오, 내일....
씬 동 궐안 길 (낮)
신료들이 들고 있다. 김행선을 비롯하여 최응, 왕규, 추언규, 왕식렴, 배현경, 홍유, 염상, 윤신달, 왕충, 박수문, 박수경들이 보인다. 모두들의 표정이 어둡다.
씬 동 편전
신료들이 도열하여 기다리고 있다. 그 옥좌에 왕건이 앉아 있다.
왕건 경들은 들으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짐이 서라벌에서 돌아와 보니 조정에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었소이다. 짐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신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중요하다 하니 그 여죄를 아니 따져볼 수 없게 되었소이다. 이보시오, 시중..?
김행선 예, 폐하.
왕건 신료들이 소를 올린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논해보시오.
김행선 예, 폐하. 지난번 폐하께오서 서경에 가시었을 때에 여기 있는 유금필 장군이 폐하를 대신하여 오랑캐들의 만세를 받았다 하옵니다. 이를 서경총관 왕식렴 공이 제기하였고 신료들이 듣고 죄를 청하여 왔사옵니다.
왕건 황제를 대신하여 만세를 받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죄를 받음은 당연하지.
왕식렴들 ..................
유금필들 .................
왕건 법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오. 때로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지. 그리고 법이란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건 별 것이 아니야. 최소한의 도덕과 약속이라는 것이 법이야.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쓰는가가 말이야. 오늘 나는 유금필 장군을 벌하기로 하였소이다. 신료들이 자신들에 맞게 법을 쓰고자 원하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이까? 자, 의형대령, 신료들이 무얼 주장하는가? 다시 한번 말해보오.
추언규 예, 폐하. 신료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죄를 지은 유금필 장군을 삭탈관직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하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왕건 서경총관 식렴 아우는 들으라.
왕식렴 예, 폐하.
왕건 경도 삭탈관직을 원하는가?
왕식렴 예, 폐하. 죄안이 중대하여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왕건 홍유 장군도 그리 생각하오?
홍유 예, 폐하. 신하가 그 주인의 자리를 더럽혔다는 것은 큰 죄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삭탈관직하시오소서.
왕건 금필 아우는 들었는가?
유금필 예, 폐하.
왕건 어찌 생각하는가?
유금필 신하가 그 주인의 자리를 더렵혔다고 하옵니다.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영을 내려주시오소서.
왕건 다들 들으시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사사로이 유금필 장군은 내 의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에 있어 인정은 금물이라 나는 경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였소이다.
모두들 ...............
왕건 의형대의 관리들은 들으라.
모두들 예, 폐하.
왕건 대죄를 범한 장군 유금필을 삭탈관직 할 것이다. 더불어 유배를 명하니 섬 곡도로 보내어 그 죄를 갚도록 하라.
박술희 폐하.... 유배라 하셨사옵니까? 폐하.....
왕건 속히 시행하라. 저 죄인을 당장 끌어내어 유뱃길에 올리도록 하라.
신료들 .................. (당황한다)
유금필 ............... (눈을 감고 있다)
왕건 당장 끌어내지 않고 무얼 하는가? 죄인을 어서 끌어내라.
대노해서 손짓하는 왕건의 표정에서.....
<172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