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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의 계맥을 전수한 월하스님은 종도의 화합과 종단의 안정,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
노천당 월하대종사(老天堂 月下大宗師, 1915~2003)는 현대 한국불교에 큰 가르침을 남긴 거목이다. 종도의 화합과 종단의 안정,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스님은 일제식민지 하에서 잘못된 불교정책으로 흐트러진 수행풍토를 바로잡는데 앞장섰다. ‘불법(佛法)에 대처승(帶妻僧) 없다’는 기치 아래 한국불교 전통인 독신수행의 청정수행가풍 회복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 불교계에 일어난 승단 정화의 주역이었다.
정화 이후엔 통도사에 머물면서 불보종찰인 통도사의 전통과 위상을 드높이는데 온 힘을 쏟았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정을 지닌 스님이기에 때로는 화창한 봄날같은 자애로움으로, 때로는 추상같은 엄격함으로 후학을 이끌었다.
월하스님은 늘상 “시줏물이나 사중돈을 쓸 때는 철공소의 시뻘건 쇳물을 마시는 걸로 알아라”고 후학을 경책했다. 스승을 기리는 제자들은 당신이 보여준 여러 면들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있다.
‘고집불통’은 당신의 강한 카리스마에서 나온 말이다. 한번 ‘안돼!’하면 당신의 그 말을 거두기 어려웠던 데서 나온 말이다. 월하스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 누구나 당신의 너른 품으로 안고 받아들였다. 직위고하를 따지지 않은 건 물론이다.
무당집 신당(神堂)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점안을 하는데 월하스님을 초청했다. 스님은 그곳에 갔다. 제자에게 ‘네가 점안해’했다. 스승의 말씀이라 거역하지 못하고 제자는 점안의식을 마쳤다. 그러고서도 제자는 속이 편치 않았다. 불지종가 통도사의 어른인 스님이 무당절에 가서 점안을 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스님, 이런데 오시면 안 됩니다”라는 제자의 볼멘소리에 스승의 말은 이러했다. “같은 말이라도 무당절이라 하지 말고 보살절이라고 해. 나 월하가 뭔데 이런 데 오면 안 되냐고. 부처님은 무당집에도, 들판에도, 산등성이에도 계시는데 아무 것도 아닌 이 월하가, 지가 뭐라고 여기는 되고 저기는 안 되고를 따질 수 있느냐고. 이 월하는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 어디든 가야된다고.”
언제해도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라.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 하고 내가 하는 일이면 누구보다 더 잘 하자. 스승이 일러준 말이다. 그래서인지 스승 월하스님은 통도사 자비원을 건립하는데 흔연히 거금을 내놓았다. 복지시설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을 때였다. 통도사 자비원은 1991년 어엿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26년 전의 일이다. 통도사 설법전도 당신의 멀리 보는 안목에서 이뤄졌다. 1993년 설법전이 완공됐다. 큰법당 옆에 그리 큰 건물을 짓는데 대해 여러 소리도 있었지만 스님의 혜안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 통도사의 큰 행사는 거의가 이 널따란 공간에서 치러지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TV를 보자. 영상포교의 불법홍포 기여를 진즉 깨달은 스님은 거금 1억여원을 내놓고 불교TV의 주식을 청약했다. 불교TV는 개국 20년이 넘는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또 어떤가. 2001년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전국의 어느 사찰도 따르기 어려운 건축양식에 전시작품과 소장품을 자랑한다. 서울포교당인 구룡사 건립도 빼놓을 수 없다. 손상좌가 천막법당에서 시작한 그 원력에 스님의 자상한 배려와 큰 마음씀으로 불사의 원만회향이 이뤄졌다.
근검절약은 말도 마라. 월하스님의 근검절약정신은 당신 평생수행의 밑바탕이었다. “중이 우째 자가용을 굴리며 다니고 그것도 비싼 차를…”. “아닙니다. 스님. 말사에 도난사고가 자주 일어납니다. 현장파악을 하려면 빨리 출동해야 합니다. 비포장에 험한 산길이라 작은 차로는 어렵습니다.” “그래? 시줏돈 사중돈 무서운 줄 알아야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명심만 하면 뭘해. 실천해야지.” 스님은 바깥출입을 할 때도 완행버스를 고집했다. 그런 스님에게 자가용, 그것도 큰 차에 비싼 차라니 언뜻 통할 리가 없었다.
스님을 모시고 따라나선 제자는 공양 때면 맛있는 음식 먹을 걸 기대하곤 했다. 그러나 제자의 이런 꿈은 늘상 깨지고 말았다. 스승이 가는 곳은 시골장터 허름한 칼국수집이었다. “스님, 칼국수가 그렇게 맛있습니까?” “칼국수를 맛으로 먹냐? 그냥 술술 잘 넘어가잖아.”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스님이 가신 곳은 짜장면집이었다. 제자들은 멀뚱멀뚱 스님을 쳐다보다가 기어이 한마디 했다. “스님, 짜장면에는 고기도 들어가는데요?” “그래? 그러면 그 고기는 밀쳐내고 먹으면 되지. 뭘 그리 가리고 따져?”
월하스님은 장터를 자주 찾았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처지의 좌판 할매들을 찾았다.
스님은 따라온 보살에게 눈짓을 했다. 보살은 암말 없이 할매들의 좌판에 얹힌 채소들을 몽땅 샀다. “값은 깎지 말고 달라는 대로 다 주라” 했다. 보살은 “몽땅 사주는데 에누리 없는 장사 어딨습니까”했다. 스님은 “길바닥에 나앉은 할매들 채소값을 깎으면 복을 감하는 일이야”했다. “스님, 이거 다 우짤라꼬예. 이래 많이 사십니까. 그래봐야 후원에 주면 우리 스님들 한끼 반찬도 못되잖아?”
통도사 강사와 주지를 역임한 상좌 홍법스님은 큰일을 할 나이인 49세에 이승을 떠났다. 통도사를 팔아서라도 홍법스님을 살려야 한다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도 허사로 돌아갔다. 제자를 앞세운 스승의 눈물은 쉬이 마르지 않았다.
월하스님 삶과 수행 자장율사 계맥 잇고 종단 발전 헌신 월하스님은 1915년 2월25일 충남 부여군 부여면 군수리에서 아버지 파평 윤공 수병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희중(喜重)이다. 1932년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해 이듬해 차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명근(明根). 1938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아 지녔다. 1942년 통도사에서 구하(九河)스님의 전법제자가 돼 월하(月下)라는 법호를 받았다. 1944년 철원 심원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1950년 통도사에서 회당(晦堂)율사에게 사분율 강의를 들은 후 자장율사로부터 전래된 계맥(戒脈)을 전수했다. 이로부터 1980년까지 통도사 전계화상으로 후학을 길러냈다. 그후 통도사 선원을 비롯해 건봉사, 정혜사,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를 마친 후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서 용맹정진 중 큰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다. 본명해월잠수중(本明解月潛水中) 무생멸처견유무(無生滅處見有無) 무심거래서동용(無心去來西童用) 무일영처현시행(無一影處顯示行) “본래 신령스런 달빛이 물속에 잠겨있다. 생사 없는 곳에 유무(有無)를 보아라. 마음을 비우고 오고 감을 자유롭게 하면 천국의 마음을 쓸 것이다. 그림자 없는 곳에서도 밝은 달은 항상 떠 있다.” 월하스님이 스승 구하스님에게 보낸 오도송을 보자, 스승은 제자의 오도송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이후 월하스님은 1954년부터 일기 시작한 승단정화운동에 나섰다. 효봉 동산 청담 금오스님과 함께 비구승 대표로 일제에 의해 망가진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에 앞장섰다. 1956년 통도사 주지로 취임해 벽안스님과 함께 정화의 후유증 극복에 힘을 다했다. 이로 인해 통도사는 여느 사찰과 다르게 비구·대처의 갈등을 원융정신으로 해소시켰다.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하고 1970년 통도사 조실에 추대됐다. 1975년 동국학원 이사장을 거쳐 1978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다.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도 역임했다. 1984년 통도사가 총림이 되자 영축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됐다. 1994년 개혁회의 의장을 맡은 스님은 이해 조계종 제9대 종정에 추대됐다. 2003년 12월4일(음력 11월11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입적했다. 세수 89세, 법랍 71년. 일물탈근진(一物脫根塵) 두두현법신(頭頭顯法身) 막론거여주(莫論去與住) 처처진오가(處處盡吾家)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가고 머무름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스님의 임종게다. 장례는 9일간의 종단장으로 모셨다. 2014년 문도회에서는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스님의 일대기를 <영축산에 달 뜨거든>이란 이름으로 펴냈다. |
도움말 : 성파스님(조계종 원로의원, 통도사 서운암), 현문스님(노천문도회장, 통도사 자장암), 수안스님(선화가, 통도사 자비원 창건주), 오심스님(울주 신광사 주지), 정우스님(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 자 료 : <영축산에 달 뜨거든>(노천문도회 간행, 윤청광 지음), 노천당 월하대종사 비문. |
[불교신문3289호/2017년4월12일]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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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물탈근진(一物脫根塵)
두두현법신(頭頭顯法身)
막론거여주(莫論去與住)
처처진오가(處處盡吾家)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가고 머무름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스님의 임종게
"언제해도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라.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 하고 내가 하는 일이면 누구보다 더 잘 하자."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씀... 뵙고 싶어집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