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랑카랑한 쇳소리.
"이런 놈들이야 영감. 아픈 애 갈구지 말고 직접 보시지.
놀란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병실 문을 꽉 막고 스포츠 머리의 덩치 두 명이 버티고 섰다.
"누가 하 정수지?"
쓱 훑던 작은 사내가 나를 꼬나본다.
"당신이야 ? 얘기 좀 하지.
"뭬이 어드레? 간나아 새끼들, 뭣들이야. 너희?
젊은 시절의 가닥을 드러내는 장인을 아내 쪽으로 밀치며 나섰다.
"안 돼, 여보
장인을 뒤에서 껴안으며 악 쓰는 아내.
내 양팔을 끼며 끌고 나가는 사내들.
병원 마당
마당을 딛는 순간 명치에 강한 충격이 온다.
호흡이 콱 막힌 나는 꼬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양팔을 허리에 처억 하니 얹은 사내들.
"뻗기 전에 들어둬. 촌놈이 명동에서 푼수 떨다 매를 번거야,
깝죽대지 말라구. 알간? 얼씬도 말란 말이야.
일장훈시와 함께 구둣발이 날아든다.
축구공 차듯 마구잡이로 질러대는 발길질.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 아내의 악다구니 치는 소리가 까마득하니 들려온다.
"또 나섰다간 애새끼랑 마누라까지 싸잡아 당할 줄 알란 말이다. 이 촌놈아.
4인용 입원실을 우리 식구들이 독점해버렸다.
나, 상원이, 창배. 나머지 하나는 집 사람
.
"한 달은 있어야 된대요.
(신음)
"안 아픈 데가 없어.
“왜 안 그렇겠어요. 갈비뼈에 금이 갔대
얼굴이 부어 헛소리 하는 나. 눈이 붓도록 우는 아내.
(장인에게)
"무서워 집에선 못 자겠어요
"그럴만 허디.
기러케 해. 동수래 내 데리고 있을 께.
"파출소에선 한 번 나오더니 종 무소식이예요.
"안 올걸. 그 놈들, 아마 군바릴 거야. 순사 나부랭이는 와 봤자지.
“저희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상원이 끄덕인다.
“그 놈들 말은 어쩌면 공갈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갈등하는 표정의 나.
River Dance 리듬의 강렬한 탭 박자, 빠른 음악
괴한들의 살벌한 표정. 겁에 질린 아내.
사무실의 고 과장.
"대증주는 날마다 1환씩 뛰는 판입니다. 매물은 구경도 할 수 없구요.
입원실
"이제 그만 사자고 전화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네.
들어오는 장인.
"닷새 만에 명동을 갔더랬어.
주식들이 죄 미쳤어. 목매기 송아지마냥 날뛰는데
제일 심하게 뛰는 거이 대증주야.
"결국 처분시점 결정만 남은 셈이네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입원실
들어서던 고 과장. 몸통에까지 깁스를 한 나를 보자 입을 딱 벌린다.
"아니, 몸살정도 나신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변입니까 ?
"큰 변이지예, 그기 바로 대변 아입니꺼.
겨우 살만해졌는지 상원이가 의자를 내주며 흰 소리다.
“깡패 만났습니까?
“강도가 들었어요.
“어구... 저런, 이 정도이시기 다행입니다.
“시황은요?
“날개가 돋았습니다. 힘찬 장세예요.
이어가는 고 과장
“막바지일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할 때입니다. 고전적인 기법이 어떨까요?
소위 10%방식, 흐름에 변수가 10% 생길 때 파는 겁니다.
어깨에서 팔고 무릎에서 산다는 식이지요.
“요즘 상승 폭은요?
“열흘째 매일 1환씩 뛰 중입니다.
“그렇다면...
(장인을 흘낏 한다.)
" 상승세가 90전 밑으로 꺾일 때가 처분시점이겠네.
“또 다른 방법으론 장외거래도 있습니다.
거래소 밖에서 파는 건데
이런 장세라면 일주일 상승분쯤 웃돈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매물 품귀현상 때 동원되는 변칙이지요.
“그럼 20환쯤에도 팔 수 있다?
“오늘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요.
“장인 어른께선 어떻습니까?
난처한 표정의 장인.
“ 이런 경우, 누구도 장담은 못해. 기러니 뭐라 허기 어려워.
고 과장도 크게 주억인다.
“나둥 후회할 값이라두 당사자가 직접 덩하는 게 젤일 거야.
할 말 다했다는 듯 의자를 침대에서 멀찌감치 물린다
“좋습니다. 강도 놈들 때문에 오기가 나서라도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강도가 증권하고 무슨 상관...?
어리둥절한 고 과장. 장인은 말없이 빙긋 한다.
“그럼 상승폭이 90전 이하로 빠지는 첫날에 처분하겠습니다.
과장님께서 좀 신경써 주셔야겠습니다.
일단 던지고나니 난마처럼 뒤얽혔던 심사가 후련해진다.
대륙 증권 객장
증권사 시세판. 매일 1환씩 상승행진을 하던 대증주,
33환에서 드디어 멈춘다.
팔자 전표를 쓰는 장인. 확대되는 통장 52억 환.
신문 제목
폭락장세, 증권시장 붕괴, 00 증권 파산, 부도, 투자자 연쇄자살.
증권골목을 배경으로 달력이 거푸 넘어간다.
1963년 2월, 들끓던 증권시장 드디어 휴장.
신문 제목
‘살인적 인프레 년 30%
사진)
남산공원, 서울역의 남루한 실업자 군상.
목소리)
“제가 무슨! 다 어르신 작품이죠.
근데 존집에서 호의호식, 저하곤 아닌 거 같습니다.
농장 어떻습니까?
몸은 힘들겠지만 속은 편할 거 같은데.
“잘 생각해서.
요즘 누가 은행에 맡기간,
고조 땅에 묻어두는 게 제일이디.
“서교동이 요즘 뜨는 동네래요.
다 털면 이십만 평쯤 살 수 있답니다.
세차장,
희색이 만면해 택시를 정비하는 상원과 창배
“창배랑 상원이한테 세차장 넘긴 거, 썩 잘한 일이야.
“매까지 대신 맞은 친구들인데 그 정도 보답은 해야지요.
서교동 (채소밭이 펼쳐진 농촌)
“여기 서울 맞아요?”
택시에서 내린 아내가 어리둥절해 두리번거린다.
“그러엄, 차로 10분만 가면 Y 대학인데.
양화나루 길목의 한적한 들판 서교동.
사방이 푸른 채소밭인 드넓은 구릉지대는
서울의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이 길을 지나 한성으로 향하던 비숍 여사는
“가마 두 대가 마주 쳐도 서로 부딪치지 않을 만큼 넉넉한 길은 평원과도 같다.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도 눈부신 흰옷을 입고 있다.
들을 흐르는 하늘빛 물은 푸른 보석을 보는 느낌이다.”
라며 이곳 풍광에 반한 기록을 남겼다.
도시에서 복작대며 사람에 치여 살던 내 눈에 비친 서교동은
바로 낙원이었다.
7월 초
허름하지만 큰 농가마당으로 들어서는 이삿짐 트럭,
마당의 장인에게 조수석에 앉은 상원이가 꾸벅 한다.
집들이 날,
채소밭을 일구는 마을사람들, 시멘트 벽돌공장 주인, 강원연탄 사장,
세차장 식구들, 고 과장이 휴지, 세제 등을 들고 하나 둘씩 나타난다.
차일 아래 머릿수건을 쓴 집 사람.
가마솥 뚜껑에 부침개 지지는 아낙들과 바쁘게 돌아가며 수다를 떨고 있다.
음식 나르느라 바쁜 상원이와 창배 그리고 꼬맹이 동수
"동수야, 부침개 떨어졌다. 한 접시 담아 온나.
작은 손으로 쟁반에 부침개를 담는 동수. 지켜보던 창배
(접시를 낚아챈다.)
"저 아재 배꾸리 좀 봐라, 그걸로는 어림 없다.
솥뚜껑 가장자리에 수북한 부침개를 뭉턱 담는다.
"이래 놔야 덜 귀찮은 기라.
차일 그늘아래 차린 상에 둘러앉은 장인과 나, 손님들.
“어이, 창배, 여기 술 떨어져서. 날래 개져 오라우
“어이구, 장해라. 덕분에 목에 때 한번 자알 벗깁니다요.
“그럼. 요즘 이만큼 푸짐한 집들이 드물지이--.
(꺼윽, 트림)
"통 큰 분들은 역시 잘 되십디다. 여기가 원래 복터거든.
(술을 따르는 나)
"신참이 뭐 알겠습니까? 선배님들께서 잘 좀 도와주십시오.
거나해진 연탄공장 사장이 육자배기 한 자락을 신명나게 뽑는다.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장인,
부침개를 뒤집던 머릿수건 아낙, 가락을 타며 덩실댄다.
어울려 돌아가는 동네사람들.
대청에 큰 대자로 누운 장인, 아침부터 걸친 해장술로 불콰하다.
“저어, 장인어른
(게슴츠레 뜨고 본다)
“ .....?
“말입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고 식구들도 힘들었댔는데 가족끼리 여행이라도...
“여행? 도오티
(일어나 앉는다.)
"어구, 속 쓰려. 아무래도 어젠 좀 과했더랬어.
그래 어디 갈껀데?
“동해안이나 제주... ?
“강원도는 오가는 게 고생 길일텐데...?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럼 제주 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마당의 평상
지도를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나.
반기는 아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동수.
목소리)
텅 빈 느낌이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난 몇 달이 까마득한 옛날만 같다.
아무래도 머리를 식힐 시간인가 보다.
조랑말에 아이 태우고 시골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제주 서해안, 곽지.
갯냄새 풍기는 해변.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
바다로 들어가는 동수와 나,
모래사장에서 멀리 들어가도 허리 밖에 안 차는 얕은 바다 밑 모래가 곱다.
물 위로 내민 바위 옆에 일렁이는 해초.
바위에 앉아 소녀처럼 재잘대는 아내.
“여긴 천 년 전 뱃길이래. 우린 옛날 얘기 속에 와 있는 거야.”
“정말... 난 아직도 꿈 속 같아요.”
“조상님들은 여기 서서 무슨 생각 하셨을까?”
“바다 건너엔 뭔가 존 게 있지 않을까, 그런 거?”
“그거 개척 정신이네.”
“생각하면 우린 참 작아, 그치?”
“그래, 하지만 뭐든 작은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거야.”
모래사장에서 꿀럭이며 찬물이 솟는다.
제주의 자랑거리 용천수.
구멍에 팔을 슬쩍 넣어보는 동수,
팔뚝 채 쑥 들어간다.
섬뜩한 느낌에 놀라 화들짝 팔을 빼는 동수.
해질 무렵,
조개껍질을 한 아름 모은 동수의 입이 귀에 걸려있다.
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늘어져 눕는 나와 아내.
마당의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동수,
쪽 마루의 할아버지에게 대야를 안고 온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며 대견한 표정.
쪽 마루에서 장기판을 벌리는 조손.
방마다 열어 제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저녁바람을 맞는 피서객들,
피서지의 한가로움이 여관 마당을 떠돈다.
조손간의 대결을 구경하는 사내 .
동수의 졸이 입궁하는 순간이었다.
"허어, 어르신을 그렇게 심하게 모시면 쓰나.
삼선교 밑 거지왕초처럼 우락부락한 생김새,
그러나 막상 말 품세에는 사교성이 넘친다.
"허, 기기 참! 물러주는 바람에
(계면쩍게 웃는다.)
어드러케-- 한번 둬보시오.
"손자 분 장기 실력이 대단합니다.
다가앉은 사내, 청색 말을 집는다.
(홍색 말을 밀어주는 동수)
"어른이 홍을 잡으셔야죠.
"무슨, 도전자가 청을 잡아야지. 도련님.“
한쪽 눈을 찡긋 한다.
거푸 장군을 부르는 사내, 두 판을 내리 진 동수.
"동네 절에서 스님들께 한 수 배웠지.
입이 나와 시무룩하니 장기 쪽을 쓸어 담는 동수를 향해 웃는 사내.
‘어쩐지... 중 눔들 장기야 당할 장사가 없지.’
아스라한 눈길로 먼 바다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붙이는 왕초.
"며칠째 있으면서도 곽지 명물이라는 석양은 여직 못 봤습니다.
요맘때면 꼭 구름이 끼어서요. 오늘은 꼭 볼 거라고 식구들은 벌써 나가 있습니다.
같이 바람이나 쐬시죠.
(반색한다.)
"할아버지, 우리도 가요.
아직 대낮인데 벌써 자고, 에이 씨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에미를 냅다 흔든다.
소란 통에 나까지 눈을 부비며 따라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