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 (일요일) 꼭 1년만에 동생과 함께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찿아 1950년 6.25.전쟁으로 산화하신
선친과 삼촌의 위폐가 모셔진 현충탑밑 지하동굴을 찾아 헌화 하고 묵념을 올린후 그들 영혼의 冥福
을 빌어 드렸다.그리고 故 박정희대통령 내외의 묘소를 찿았 나섰는 데. 거리가 꽤 먼 거리라 걸어가
는 도중에 忠魂堂을 방문하였고 내려오는 길에는 무명용사의 탑을 방문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며
명북을 빌었다.
해마다 현충일 전후로 이곳을 방문하는 일이 었지만 이번에는 비교적 많은 곳을 방문하여 일요일 마
다 하는 등산을 대신하기도 하여 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었으니 기분이 몹씨 좋았다. 돌아 오는 길에
전철역 2호선 신도림역 1번 출구에 내려 D- Cube City 의 현대백화점 지하 매장의 한식저잣거리에
서 간단한 식사와 함께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재즈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는 문화생활을 누렸으니
이 보다 더 즐겁고 여유있는 일요일의 일정은 없었다고..생각 됩니다.
국립 현충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수호장들의 모습이 먼저 나타나는 데...
현충문을 향하여...
현충탑을 정면에 바라보며 방명록에 사인을 마치고 ...걸어서 가는 데...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가 세겨진 이 곳, 鎭魂文에 눈쉬울이 뜨거워 지고..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들의 헌화가...
야당 인사들의 헌화는 눈 씻고 보아도 금년에 또한 볼 수 없었다..
선친의 이름이 세겨진 위페 앞에 헌화하는 박문한 동생..
현충탑 아래 지하 동굴속에 영현승천 석고상이 보인다..
제일학도의용군들의 묘지가..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학생들
이 자원하여 학생복을 입은체로 전투에 참가 하여 전사하였으니 이들은 군번도 없어 무명용사로 남
아 있을 뿐.. 이들의 호국 정신이 더욱 돋 보일 뿐이다..이은상 시인의 글귀가 세겨져 있다.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데...
이들은 지금도 아무 말이 없었다..
충혼당 명시석이 눈에 들어 오는 데..
충혼당 정문 계단을 오르면..
충혼당 안내문이...
충혼당 정면이 보인다..
여기도 특별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고..
이곳 아름다운 숲속에는 한적한 비원 같은 곳이 있다고..
군대 군대 유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가는 표지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찿아 가는 도중, 심한 갈증으로 간이점에서 음료수를 샀는 데,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라 초코랫트 등도 구입하여 간식용으로 대신하였다..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묘의 단정한 모습..
故 육영수 여사를 기리며 영전에 바친 시문의 글..
국립현충원 공작池..
대한독립군무명용사의 위령탑을 방문 하고 묵념을 올렸다..
동생 박문환 고교 후배 동문의 자화상..
오늘 같은 더운 날씨엔 느티나무의 그늘이 우리들을 시원한 오와시스로 인도한 기분..
보기만해도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느티나무...
국립현충원을 나오면서 나의 자화상을 남기다.
현대백화점 지하 식품부에서...
김밥의 진수라..
한식저잣거리의 벽계수 한식당...
작년 4월에 L/A 의 배기호 고교동기 방한시 대성산업의 김회장과 함께 저녁을 한 곳이다.
현대백화점 지하 분수대 옆에서 더위를 식히며...
오후 4시 부터 시작 되는 째즈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며..
오늘 하루을 즐겁게 보내었습니다..
John Field ... Nocturne
피아노 - 존 오코너
흔히 녹턴(Nocturne)하면 쉽게 쇼팽을 떠올리겠지만 피아노 소품으로서의
녹턴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존 필드'(John Field)》입니다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이다 보니 쇼팽이 녹턴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지만
녹턴의 창시자인 존 필드의 《존 필드'(John Field)》녹턴을 듣다보면 쇼팽의 녹턴을 능가하는
그만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습니다 존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알려진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렇듯 그도 10세 때 이미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웨일스의 왕자가 런던에서 주최한 콘서트에서 데뷔했습니다.
전곡 No.1 ~ No.18 연속듣기 Photo by 포근이
흔히 녹턴(Nocturne)하면 쉽게 쇼팽을 떠올리겠지만 피아노 소품으로서의 녹턴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존 필드'(John Field)》입니다.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이다 보니 쇼팽이 녹턴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지만 녹턴의 창시자인 존 필드의 《존 필드'(John Field)》녹턴을 듣다보면 쇼팽의 녹턴을 능가하는 그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존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알려진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렇듯 그도 10세 때 이미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웨일스의 왕자가 런던에서 주최한 콘서트에서 데뷔했습니다. 이듬해에 당시 피아노의 대가로 추앙받던 '클레멘티'(Muzio Clementi)에게 배우면서 17세때 자신의 첫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고 그 후 스승과 함께 유럽연주 여행을 떠납니다. 첫 기착지였던 파리에서 바흐의 푸가와 헨델의 작품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고 최초의 소나타집을 출판하게 됩니다. 이후 빈을 거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고 그 곳에서 그는 후진들도 양성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28세의 나이에 자기의 제자중 한명인 '아델라이데'를 부인으로 삼게 되어 그 후 10여년 동안 거기서 터전을 잡으며 오늘의 음악이 포함된 3개의 첫 소품집 녹턴을 발간합니다. 그 뒤 또다른 10년 동안 '판타지아'등 다른 야상곡과 소나타, 몇몇 실내악곡 등을 작곡했으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며 모스크바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존 필드 말년엔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종국에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모스크바 거리에선 '술취한 존'으로 불리며 조롱거리가 되고 말고, 그의 나이 55세에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숨을 거두게 됩니다. 19세기 초에는 음악회를 초저녁에 많이 했는데 당시 귀족들이나 상류층들은 이른 저녁에 식사를 하고 거실에 앉아 피아니스트의 생음악을 들으며 자유스럽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이 때 밤(저녁)에 할 연주용으로 만든 피아노곡이 녹턴(야상곡)입니다. 그런 이유로 분산코드(펼쳐진 화음)를 사용하여 밤의 은은함과 편안함을 대두시키고 아름다운 선율을 배열하여 편안한 감정을 누리게 하는 도구가 된 것 입니다. 필드는 이러한 감성적이고 자유로운 음악 형식인 녹턴을 카톨릭 교회의 기도 양식의 하나인 '밤의 기도'(Nocturne)에서 명칭을 땃다고 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필드가 녹턴을 탄생시키고 이후 그 이름, 개념 그리고 스타일면에서 거의 20년 후의 쇼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쇼팽은 빛나는 영감으로 녹턴을 대중적 사랑을 받는 양식으로 만듭니다. 쇼팽 외에도 리스트나 포레, 멘델스존 등 상당수 작곡가들이 녹턴의 자유로움을 추종했습니다. 쇼팽의 녹턴이 화려한 피아노의 기교가 음울하면서도 열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필드의 그것은 간결하면서도 밝은 느낌과 노래하는 듯 흐르는 선율이 무척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혹자들은 필드가 쓴 녹턴의 모티브를 '벨칸토 아리아'라고 묘사합니다. 비록 피아노 곡이지만 필드는 노래하듯이 이 소품들을 써내려갔던 것이죠. 오른손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쳐내려가면서 왼손으로는 부드러운 분산화음을 따라붙이는 서정적이고 꿈결같은 필드만의 노래들인 것입니다. (웹) |
첫댓글 의미있고 여유롭고 한가한거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리 ' 존 필드' 는 들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배경음악, 존 필드 녹턴들은 모두 제가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쇼팡의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음율과는
소박하고 단아한 음율이 시냇가에 잔잔히 물이 흘러가듯 편안함을 느낌니다.
18 곡 여유롭게 다
채송화 님.. 존 필드는 비록 피아노 곡이지만 노래하듯이 이 소품들을 써내려갔던 것이죠.감하심에 감사합니다..
오른손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쳐내려가면서 왼손으로는 부드러운 분산화음을 따라붙이는
서정적이고 꿈결같은 필드만의 노래들인 것 이라고 하지요.
올해도 어김 없이 아버님과 삼촌을 만나러 현충원에 가셨군요.
제 주위에는 순직한 친인척이 없어 님의 마음을 헤아릴수 없으나
아마도 매해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리라 생각 됩니다.
현충원의 곳곳을 의미 깊게 잘 보았습니다.
백화점 지하 식당가도 한번 가서 시식하고 싶네요.....ㅎㅎㅎ
고이미현 형님 그렇습니다. 그날이 비가오나촌을 꼭 뵈
바람이 불거나 해도 아버님과
워야 한다니까요..대전에도 현충원이 있지요.
현대백화점 지하 식당가에 가시어 째즈 피아노(오후2시에도 연주함)
음악을 들으며 식사하시는 것도 꽤 멋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옵니다.언제 서울에 오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연락해 주세요.점심은 저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의 전화는 010-3748-7711 박이환 입니다.
목원님 아버님과 삼촌이 현충원에 잠드셨군요. 원통하고 자랑스럽겠습니다. 625 때도 높은사람들 빽있는 사람들 자제는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병역을 기피하던지 일본으로 밀항했다는데 ... 고인들이 펀안히 잠드시길 빕니다. 무명용사 묘역사진에 한참 눈이 머물렀습니다. 요즈음 말로 민초들이지요. 낙동강 방어에 학도병들이 많은 목슴을 바쳐 인민군 공격을 지연 시켰다지요? 야당인사들 화환이 없다는 것은 경악할 일입니다. 자기들이 오늘 저렇게 무당 춤추듯 까불수 있는 것도 호국영령들의 희생으로 비롯한 것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요. 올리신 사진 보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가에서 님.. 그렇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6.25.때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거의 자원하다시피 하여 군에 가셨지요.그 전에는 방위대 장교로 후방 치안을 맞고 계셨는 데, 중공군의 침공으로북세력들이 또 다시 제2의 6.25를 저지를 것 같은 생각이 들곤
그야 말로 우리의 강산이 다시 적진에 의하여 남하 할 때 동네 청년들을 모아 유격대를 결성 적진의 깊숙한곳을 뚫고 들어가 적진을 교란 하는 업무를 맡았지요.이것은 불속에 뛰어든 불나방의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답니다.우리들도 나중에야 군에 장교 입대 하여 유격대원의 역활을 알게 되었지요..그래서 저는 이나라
한답니다.실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