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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동경(瞳暻)
한 설 야
1
오빠, 나는 여게 왔나이다. 여게 와서 S학교에서 다시 잡게 되었나이다. 여게는 너르고 너른 만주 뜰 북쪽 끝이로소이다. 신문으로 보고 풍편에 들은 것도 수없이 많건만 늘 남의 일같이 귓등으로 들어 넘기던 만주도 가없는 북쪽들 한구석이로소이다. 가도가도 끝 모르는 북반구의 대륙이 제 맘대로 넓게넓게 펼쳐진 벌판에는 남에도 북에도 조선의 사람은 수없이 많이 널려 있나이다. 그 가운데는 쫓겨 온 사람도 있으리다. 밀려난 사람도 있으리다. 피와 같은 불평을 품고 온 사람도 눈물 어린 욕심과 힘을 끌어안고 온 사람도 물론 많으리다. 나는 그네가 그립나이다. 그네를 사랑하나이다. 아니 사랑한다기보다 나는 그네들 무리 가운데 몸소 들어선 새사람임을 절절히 느끼나이다. 나는 그네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외다. 그 사람들을 통하여 나를 생각하고 그네들을 통하여 나의 불행과 행복과 또는 나의 힘과 할 일을 꿈도 꾸고 맹세도 하나이다. 나는 뜻하지 아니하고 그네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맘을 부르짖나이다. 복이라면 이것이 나의 크나큰 복일 것 같나이다. 나는 외롭지 않나이다. 내 곁에 그 큰 무리가 있고 내 스스로 그네 가운데 나의 새 의식과 희망과 맘을 뿌리고 심으거던¹ 무엇이 그리 외로우리까. 맘이 놓이나이다. 너그러운 맘이 나를 힘차게 하고 일 맛이 나게 하나이다.
나는 고국을 떠날 때에 울었나이다. 유랑의 숨은 걸음을 생각하고 울었나이다. 외롭고 외로운 나를 생각하고 또 울었나이다. 너르고 너른 벌판에 지향 없이 튀어나올 알몸의 나를 생각하고 설운 눈물이 마를 사이 없었나이다. 아, 그러나 살면 고향이요 지나면 정이 붙나이다. 나는 요사이 도리어 만주벌이 그리워서 끝도 가도 모르는 이 바닥에 서서 새 ‘삶’을 기뻐하나이다. 과연 만주벌이 그립소이다. 이 벌에 막연하여 펼쳐진, 보도 듣도 못한 서백리아(西伯利亞)²도 그리워지나이다. 얼음판이 하늘에 닿고 눈뜰이 북극에 뻗친 동토대(凍土帶) 저편까지 그리워지나이다. 옛날도 옛날 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도 사람의 종자를 그리기에 해가 지거나 밤이 오거나 맘 놓고 잠들지 못하는 오로라의 밑 백야(白夜)의 누리³도 그리워지나이다. 사람을 그리기에 그 너른 들 흰 밤〔白夜〕의 말 없는 넓은 맘이 얼마나 오래 지쳤겠나이까. 만주의 지처버리〔濕地〕⁴도 서백리아의 눈 뜰도 밤이나 낮이나 저물도록 사람을 고대하고 있나이다. 사람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나이다. 더 많은 사람의 무리 더 큰 사람의 힘을 바라고 바라기에 그지없는 것 같나이다. 더 많은 사람 더 큰 힘을 기다리는 이
벌판, 나는 뼈에 사무치도록 이곳에 애착을 느끼나이다. 끝끝내 사람의 무리는 이 넓은 광야(曠野)의 밤에 안기고야 말았나이다.
2
오빠! 나의 과거 4년 동안의 생활은 죄악이었나이다. 애써 배우고 들어서 세상의 물정도 웬만치 가리게 되고 이른바 한몫의 사람이 되리만큼 되어서부터 나의 생활은 죄악이었나이다. 남이야 어떻게 보든 또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작자들의 봄이야 어쨌든 나의 양심이 허락지 않은 애나는⁵ 죄악의 생활이었나이다. 하고 진실고지로⁶ 고백하나이다. 이런 삶을 찾고 죄를 지으려고 배우고 들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는 어찌하여 그 같은 생활 그릇된 사랑에 몸과 맘을 바쳤으리까. 그러면서도 나는 오빠에게는 이 사실을 감추었었나이다. 오빠는 이래 5년 동안이나 철창 아래에서 그 신산을 맛보시고 나는 쓰린 죄의 살림을 하였나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리만치 외롭게 세상을 멀리한 오빠에게 나는 죄악의 비밀을 싸고돌았나이다.
큰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나신 오빠가 정치범이라는 죄명 아래에 얽히고 얽히어 상해로부터 붙잡혀 온 이후 1년 만에야 겨우 감옥에서 오빠를 면회하였을 때에는 나는 아직도 천진하였나이다. 오빠를 보고 진심으로 느꼈나이다. 6년의 형기를 마치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오빠. 한시라도 속히 끌고 나오고 싶은 오빠를 철창 건너에서 바라보며 나는 오직 울 줄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티끌 없는 처녀 였나이다. 그때에 오빠는 이렇게 말하셨지요.
“너도 중학 졸업이 멀지 않았으니 사람다운 일을 하여라.”
이렇게 말하셨다기보다 힘 있게 외치실 때에 나는 오빠를 자세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그 말하는 이는 나의 오빠와 같지 않았나이다. 나는 기실 그때까지도 정과 혈육의 오빠를 알았을 뿐이고 사람으로의 오빠를, 지사로서의 오빠를 몰랐나이다.
그리하여 그때에 비로소 새 오빠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과연 처음으로 본 오빠였나이다. 아니 처음 대한 ‘사람’이었나이다.
“어린애가 어머니를 따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책임이 따라야 한다.”
하시고 또 한참 나를 보시더니
“진정 어머니를 사랑하거든 어머니를 복되게 할 책임을 지어라.”
나는 더욱 놀랐나이다. 의미는 그때에 분명 잡지 못했을망정 그 말이 머리에 아리아리⁷ 스며듦을 깨달았나이다. 그 무서운 감옥의 벽을 흔드는 듯이 힘찬 소리에 나는 소름이 끼쳤나이다. 그러나 나는 그 책임은커녕 과거 4년 동안 오빠가 일러주신바 그 ‘어머니’를 잊고 등졌었나이다. 과연 괴롭나이다. 지금이야 그 하시던 말을 다 잡아낸 것 같사오나 지난 생활을 생각하매 다시금 괴로
워서 못 견디겠나이다. 때때로 부끄러운 쓰린 웃음이 양심을 스침을 금할 수 없나이다. 아! 조선의 오빠여! 조선의 동생을 두지 못한 것을 꿈결에서나마 얼마나 아파하였나이까.
“무슨 일에든 성실하여라.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게 아니다. ……너도 사람이거든 더욱 조선의 종자이거든 남보다 갑절 가는 성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시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시던 것도 지금까지 기억하나이다. 그 말이 지금껏 귀에 쟁쟁하나이다. 누가 이런 말을 내게 일러주오리까. 사람마다 이런 말을 부르짖고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불행한 가운데도 복된 사람이었으리다만……
또 어느 때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나이다.
“내 걱정은 말아라. 더 큰 근심을 잊지 마라. 내 하고파 하는 일이면 죽어도 괜찮다. 네 일을 잊지 마라.”
이때를 나는 더욱 잘 기억하나이다. 나는 그때 오빠 앞에 서는 것이 무한히 괴로웠나이다. 나를 위하여 그만한 힘찬 소리를 일찍 건네던 이 없건만 나는 그 말이 괴로웠나이다. 그때는 벌써 지금부터 말하려는 죄악의 엄⁸이 다 돋은 때였나이다. 아픔의 씨가 오빠를 대하는 때마다 짜긋짜긋 양심을 쑤시었나이다.
3
그리 하여
“너는 장차 무얼 하련?”
하고 물으실 때 나는 그 대답이 실로 괴로웠나이다. 실로 무엇을 하리라는 나 스스로의 주견과 줏대가 서지 못하였던 것이외다.
학교를 마치면 으레 떼놓은 당상인 교원의 직업을 맡아가지고도 그것이 참말 내 일이며 힘써야 할 바인지를 자각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만치 신념과 주장이 미약하였던 것이외다. 그같이 때 따라 간곡히 부탁하셨건만……
“무엇이든지 나쁠 것은 없다. 교원 노릇을 한다니 그것이 썩 고상한 책임이 아니냐. 네 성력과 책임관이 굳으면 그것이 훌륭한 보람을 내고야 말 것이다. 정 안 되면 땅이라도 파야지.”
이렇게 일러줄 때에 나는 나의 은근한 행복을 생각하고 남의 속사정을 모르는 오빠라고 한껏 무언지 모를 허영의 웃음을 웃었나이다. 자랑이라도 하고픈 기색을 막을 만한 아무 반성의 힘이 없었나이다.
그리하여 그저 공순히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나이다. 그때 나의 맘은 아직까지도 모르시리다. 그 공순한 머리 밑에 숨은 비밀은 몰랐을 것이외다. 그 비밀과 죄를 조금도 뜻하시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되어라고 일러주시던 오빠의 지극하신 정성을 생각하오매 지금 다시금 눈물이 흐르나이다. 나는 허위와 죄에 살아왔나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나이다. 죄를 깨달은 때와 같이 괴롭고도 유쾌한 때는 없을 것이로소이다.
오빠! 나는 오빠가 감옥에 들어가신 후 3년 만에 ×라는 일본 사람과 결혼하였나이다. 그는 우리 도 × × 과장으로 도청에 근무하는 고등관 중의 가장 젊은 사람이었고 또 대학 출신이요, 인물 고운 청년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직 미혼 중이었나이다.
내가 고보 4년급에 있을 때에 나에게 약혼을 청한 사람이 둘인가 있었나이다. 두 사람 다 일본에 유학하는 사람으로 남에게 빠질 것이 없는 터였으나 그중 한 사람은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거절해버리셨고 나머지 사람은 아버지뿐 아니라 나도 거절은 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리하여 피차 이상을 주고받은 적도 몇 번이 있었나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꽃다운 내 청춘에 비치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일거일동을 남달리 유심히 보았나이다.
“가문도 괜찮고 살림도 그만하면…….”
아버지도 이만큼 동의를 표하셨나이다. 나는 그 말이 밉게 들리지 않았나이다. 가문이라는 데에도 그럴듯한 호감을 가졌었고 재산이라는 것도 싫을 것 없는 조건으로 생각하였나이다. 일본 유학이란 것도 한 큰 영예와 같았고 그리 흔치 않은 대학생이라는 것도 꽤 큰 복록의 전제와 같았었나이다. 그리하여 동무들이 그 말을 내면
“누가 그래? 응…… 난 몰라. 금시초문이야. 대관절 그가 어떤 양반인데?”
하고 웃어버렸나이다. 그러나 그 웃음은 나의 부인의 말을 한 번 살짝 뒤집어 애오라지 시인의 뜻을 반듯⁹ 비춰주는 간드러진 애교였었나이다.
“연애는 자유인데 감추면 무얼 하니? 앤 불철저하구나. 세상이 다 아는 걸 가지고.”
하고 동무들이 다시 채치게¹⁰ 되면
“얘도…… 참말이다. 누가 그러디?”
하고 미울 것 없는 히야가시¹¹를 오히려 달게 받을 만하였나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 판에 새통스럽게¹² Y를 알게 되었나이다. 그가 어느 때인가 한번 학교에 온 일이 있었나이다. 그때에 비로소 그를 알게 되었나이다. 갓 빨아놓은 비단결같이 새하얀 청년 신사 Y는 인사할 때부터 나에게 괴상한 인상을 주었나이다. 여선생은 나 하나뿐이 아니었으나 유독히 나에게 공순한 태도를 보이고 구면과 같이 다정스럽게 무엇을 묻기도 하고 생각하다가 또 유심히 쳐다보며 방글방글 또 물어보곤 하였나이다. 필요가 있어 묻는다니보다 묻기 위하여 생각하고 생각하다가는 묻곤 하는 것 같았나이다. 그것을 의식한 때에 나는 일종 호기심을 금할 수 없었나이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가 더 오래 있어주고 더 많이 물어주었으면 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그가 돌아갈 때에 내게 보낸 그 공순한 시선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나이다.
4
“꼭 일본식이야. 하릴없는 일본 여자야. 왜짚신에 왜옷을 입으면 천연할걸.”
하던 여러 사람의 말을 그때에 다시 생각하고, 짓궂이 생각하고 나는 속으로 웃었나이다. 그 후부터는 거울을 대하여 더욱 유심히 내 얼굴을 보았나이다. 7부 3부로 갈라 넘긴 머리라든가 뒤채가 삐죽하게 내밀고 곰실곰실 들어 얹힌 머리 맵시가 ‘에돗꼬〔江戶子〕’¹³식이라고 나는 기뻐하였나이다. 그리고 쌍까풀이 검스레한 눈이며 연주 찍은 입술이 일본 여자와 방사한 것을 자만하였나이다.
또는 글씨까지도 일본식이라던 누구의 칭찬을 생각하고는 자로 일본 편지투 쓰기를 연습하기도 하고 또 많이 읽어도 보았나이다. 심심하면 학교에서도 변체이로하(變體イロハ) 같은 것을 써서 일본 선생까지 놀란 일도 있었나이다.
한데 그 후 마침 도청사관이 우리 집 앞에 새로 일어나게 되어 그와 나는 길에서나마 만날 기회가 많았었고 또 의식적으로 만날 기회를 짓는 일도 없잖아 있었나이다. 나는 동경 사투리 같은 것을 얻어들으면 자꾸자꾸 되풀이해가며 제멋대로 될 때까지 외워가지고는 긴요히 쓸 준비를 하였나이다. 말하자면 내가 손수 내 맘을 들추고 들뜨게 한 것이었나이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갈 때마다 시 계를 쳐다보며 조마거렸나이다.
“지금 가면 알맞을까? 그러다가.”
하는 생각이 났었나이다. 그리하여 돌아오던 길에 Y를 못 만나게 되면 별일 없이 우리 집 앞을 왔다 갔다 거닐었나이다. 이리하여 만난 일도 물론 있었나이다.
“오아소비니 이 랏샤이 (놀러 오세요).”
하고 한번은 Y가 모자를 벗어 들고 은근히 인사하였나이다. 나는 오래 기다리던 말이나 들은 듯이 기뻐하였나이다. 그리고 내 뜻이 바로 그에게 옮아간 것 같은 맹랑한 생각조차 일어났나이다. 피차 갑갑한 터에 그는 나의 뜻을 어느새 감수하고 또 제 숨은 뜻을 그대로 파묻어두기에 너무 안타까워서 이런 말이라도 하는 겐가 공상하였나이다. 나는 이런 직감을 가지고
“하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따(네 고맙습니다).”
하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답례하고는 그만 얼굴이 화끈해져서 머리를 숙여버렸나이다. 그 이상 더 할 말을 아무리 해도 생각해낼 수 없음을 나는 퍽도 안타까워하였나이다. 1초, 2초 지나가는 타임은 실로 나의 가슴을 졸이는 듯하였나이다.
“방와 이쯔모 히마데스가라(밤은 늘 노니 까요).”
그도 잘 여물지 못한 소리를 이렇게 남기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하고 가버렸나이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의 뒷모양을 흘깃 보았나이다. 웬일인지 또 얼굴이 화끈하였나이다. 그러면서 내 한 말과 행동이 과연 부끄러운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였나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부족한 생각이 났었나이다. 내게 스스로 불만을 가졌었나이다. 그만치 나는 행동으로나 말로서 불만이나 부족이 없이 하고팠던 것이었나이다. 처녀의 끝없는 동경 이라 하올는지 내가 그만치 욕심 사나웠던 것만은 사실이외다. 연애에는 국경이 없다 한 말에 대하여 나의 욕심은 고개를 끄떡였나이다.
이리하여 나는 몇 번인가 그를 방문하였나이다. 하나 그는 나의 기대와 별다른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나이다. 대우가 버성기거나¹⁴ 무슨 이국인으로의 넘기 어려운 까다로운 금〔線〕이 보이지 않았나이다.
“나이지징 솟구리 데스네 (꼭 일본 사람 같아요).”
하고 그가 어투추게¹⁵ 되면 나는 무언지 모르게 기쁘고 만족하였고 또는 그 말속에서 별별 암시를 다 캐내려 하였나이다.
5
그리하여 자만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나이다.
“곤나 이나까니와 아다시 놈꼬니나루요나 히도와이나이와(이런 시골에는 내 남편 될 만한 사람이 없어).”
하고 배부른 흥정이 나가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전부터 말이 있어오던 그 청년도 소실의 자식이라는 것을 구실로 거절해버렸나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러냐고 놀라시더니 약혼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증명을 해옵세.”
하고 종내 응치 않았었나이다. 했더니 그 청년은 의외에 살갑게 별 말썽도 끼치지 않고 아주 발을 끊어버렸나이다. 물론 나를 말할 가치 없는 여자라고 침묵으로 물러간 것이 틀리지 않을 줄 아나이다. 불철저한 여성이요, 맘이 약한 여자라고 속으로 웃고 돌아설 성격임을 나는 잘 아나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나이다. 오직 Y를 자로 찾아다니고 세상을 별로 꺼리지 않게 된 것이 나의 철저한 점이요, 사랑의 큰 증거라고 제 멋에 좋아라 만족하였나이다. 자만까지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탓으로 해서 세상의 소문을 속하게 또는 나쁘게 하였나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쉬쉬 문제가 일어난 모양이고 도청 안에도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나이다. 그러더니 어찌 된 셈인지 Y는 곧 W도로 전근이 되어버렸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사와 거리의 변동임에 나는 그대로 잊어버릴 수는 없었나이다. 청춘애사의 그릇된 한 페이지로 돌릴 수는 없었나이다. 나는 곧 구의 뒤를 쫓아가서 서울 어느 요릿집에서 결혼피로연을 하여버렸나이다. 그날 밤에는 한 쌍의 빛다른 부부를 중 에 두고 일선융화론이 굉장하였나이다.
나는 그로부터 서투른 일본 사람의 살림살이 숭내에 골몰하였나이다. 조선제일본부인의 수구는 실제 해보지 않으면 반도 모를 것 입니다. 솟까랍고¹⁶ 비차하기로 유명한 것이었나이다. 너울너울한 일본 옷을 주섬주섬 겹겹으로 입고 나면 활개를 한번 들썩해도 넘줄이 걸리는 것 같고 다리를 한번 삐쭉해도 넓적다리가 선선할 지경이었나이다. 어쨌든 까다로운 입성이었나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재미와 같았나이다. 머리를 가르는 법하고 허리에 다지는 방식이 다 그럼직하고 고무창 왜짚신을 잘잘 끌며 발끝을 모으고 앙기발질¹⁷을 하는 것이 모두 재미스러웠나이다. 한데 뒷깃을 목뒤에 헤끈 제끼고 목덜미까지 분되 이를 내어¹⁸ 드러내놓기 때문에 조금만 하면 추위가 솔솔 기어들어 감기 든 적이 있었나이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그놈의 살림을 배웠나이다. 배워서 얻은 바가 무엇이오리까. 허위와 가식 이 남겨준 받자는¹⁹ 죄뿐이었나이다. 내 맘을 못쓰게 하고 내 몸을 버리게 한 큰 죄업일 뿐이로소이다. 아까운 청춘을 나는 이리하여 그곳에 파묻고 왔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오니 아무도 원망은 하지 않나이다.
이러한 가운데의 나의 생활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오며 따라 그 닥칠 결과도 대강은 짐작하시오리다. 한 말로 그치면 이때는 나의 개성과 인격을 파묻은 암흑시대였나이다. 내가 스스로 이러하였거든 그가 나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나이다. 나는 나의 인격과 가치와 조선(祖先)에게 받은 의기와 피를 더럽혔나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기에만 전심하였나이다. 하므로 사람으로의 아무 가치 인정을 받을 길이 없었나이다. 진정한 사람이거나 참된 삶이 오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외다. 이러므로 사랑이란 장난도 하루 이틀, 스위트 홈이란 것도 불과 며 칠이었나이다.
6
1년도 다 못 되어서 그의 생각과 대우는 날로날로 평범해지고 등한해졌나이다. 무슨 골난 일이 있으면 그저 멸시의 눈길을 한 번 툭 던지고 나가버리기도 하고 무슨 꾸중을 하려다가도 그까짓 것에 하듯이 슬쩍 돌아앉은 일이 종종하였나이다. 이것이 내게는 괴로움이 되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버림을 받으면 하고 근심이 숭숭거렸나이다. 나는 될 대로 약자가 다 되어버렸나이다. 그는 이죽대도 삑 소리 못 칠 만큼 의기가 죽어진 나를 유린할 대로 유린하였나이다. 나를 일본 하녀만도 오히려 못 여기는 듯하였나이다. 내게 할 말을 하녀에게 돌리는 일이 많았나이다. 긴치 않은 일에도
“그걸 몰나에.”
하고는 하녀와 상의 하곤 하였나이다. 그리고는 시퍼 러등등해서²⁰ 책자나 신문을 들여다볼 뿐이었나이다. 나는 그만 무안해져서 더 말 못하고 찌꺼기를 바라는 강아지 모양으로 그의 기색이 풀리기만 기다렸나이다.
손님 대접이 좀 틀린다든가 차 권하는 법이 좀 서투르다든가 말수작이 조금만 군둔해도²¹
“시 요가나이 온나다네 (할 수 없는 계집이다).”
하고는 이어 자기의 면목을 깎는다느니, 일본 사람의 체면을 더럽히느니, 큰 수치니, 길다맣게²²2 느러배즈며²³ 강표한²⁴ 이맛살을 찡그리곤 하였나이다. 심하면 천치라고까지 흘겨보았나이다. 함으로 사람의 맘이란 모를 것이었나이다. 맘의 변함이란 더욱이 알 수 없었나이다. 조선 사람에게 한하여 더욱 절대한 우월감과 지배관을 가진 그는 나를 거지반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하였나이다. 나는 옛 자의 단꿈을 생각하고 차차 심하여가는 멸시를 생각하매 또한 모든 조선의 무리의 앞길조차 캄캄해지는 듯하였나이다. 그러나 약자이던 나는 그의 지위를 생각하고 또는 나의 명예를 생각하고 그에게 곱삭곱삭 순종하여왔나이다. 욕하고 멸시해도 공순과 무던함으로써 그를 눅이려 하였나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이상의 양처이거니 하였던 것이외다. 일본 여자는 조선 여자보다 훨씬 지아비에게 공순하고 부드럽다는 것이 그때의 나의 관찰이었나이다. 일본 아낙은 지아비에게 절대 복종하고 종과 같이 따르는 것이라고 그것이 아름답고 뻑뻑한²⁵ 일이라고 어디서 얻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이다.
이리하여 나는 짧지 않은 그동안 나의 인격과 개성을 죽여가며 살았나이다. 당당히 할 말도 참는 것이 부덕(婦德)이려니 모름지기 해야 할 바도 지아비의 명령이라야 하고 주저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봐야 역시 아무 효과가 없었나이다.
그나 그뿐입니까, 그의 태도는 점점 더 심하여졌나이다. 돈 가진 놈이 남의 것을 빨아먹는 꾀가 점점 늘어가듯이 그의 엎누르고 업세녀기는²⁶ 분수도 자꾸 늘어갔나이다. 나 하나만을 욕하고 무시함으로 족하지 못한 듯이
“너의 아버지는 노름꾼이라지. 그런 바르지 못한 피를 받았으니 무엇이 변변하랴. 종자가 나빠.”
하고 깎아 말할 때 나는 문뜩 분하였나이다. 전이라고 아주 분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이때처럼 분한 때는 없었나이다. 그러나 한편 그 어린애 같은 수작이 밉살스럽고 탑지²⁷해서
“부모의 말은 왜 하셔요. 이러나저러나 날더러 말할 일이지요. 그런 쩨쩨한 참견은 마셔요. 남자가.”
하고 골려주었더니 대단히 분했던 모양이어요. 별별 궁퉁²⁸을 다 쓰더니 제 김에 달아나서 용굴때질²⁹을 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였나이다.
7
“네 형 놈은 부정선인³⁰이 아니냐. 더러운 징역꾼이 아니냐. 나를 속였지. 못된 년놈들.”
하고 그는 그 표독한 꼴때³¹를 내며 물어뜯을 듯이 뽀로통해지더이다. 나는 문득 그의 속통 얇고 짧은 것을 깨달았나이다. 그만한 말에 그같이 홍달아나는³² 왜냄비 같은 그 맘을 내 편에서 도리어 업세녀기게 되었나이다. 역시 칼이나 총이나 재어서 싸움판에나 내세울 인간이요, 인격과 도량과 동정으로 남을 대하고 후릴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때까지 공연한 순종을 했다고 후회도 하고 웃기도 하였나이다.
“내 형이 징역을 해도 그것은 높은 명예예요. 사람마다 못하는 거룩한 일을 했어요. 2천만이 옳게 생각하는 일이면 아마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2천만? 그까짓 야만들이 무얼 해.”
이렇게 말하고 난 후로는 음험한 속통이 탱탱 곪아나서 걸핏하면 조선인은 야만이다, 동물과 같은 학대를 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하고 욕질이었나이다.
임시정부니 민족주의니 해가지고 주제넘게 덜렁대지만 그것은 다 어림없는 장난이다. 어림없이 덤비다가는 그 많았던 바람도 없이 쓰러져버릴 것이다. 야만인이란 할 수 없다. 학대하고 절대 지배를 하지 않으면 그 못된 근성이 없어질 날이 없다. 그 근성을 빼내어야 동화도 가능한 것이다. 하고 제 김에 성이지요.
이리하여 우리 집을 욕하던 그는 민족 전체에 그 주둥이를 돌렸나이다. 주제넘는 짓을 하고 말 안 듣는 무리는 죽여버려야 한다. 또 네게도 불온한 빛이 보이면 군국정신에 비춰 가차하지 않는다고 옥베르기³³ 일쑤였나이다. 온 민족을 멸시하는 그가 나 한 사람을 탐탁히 알 리는 물론 없나이다. 연애는 국경 이 없다 하였으나 이러고서야 연애가 제아무리 굳세다 하여도 일본 사람의 국경을 넘어낼 것 같지 않더이다. 똥집까지 되지 못한 우월감이 차 있으니 그를 어쩌는 장수가 있습니까.
나는 알았나이다. 총과 칼이 세력 있는 시대에는 어디를 물론하고 강한 자가 문명인이요, 약한 자가 야만인인 것을 나는 알았나이다. 제가 바라던 자유를 남에게서 빼앗고 제가 사랑하던 민족 사상을 남의 민족에게서 죽이려 하는 심사가 과연 문화인의 심사이오며 정당한 생각일까요. 칼과 총이 만일 필요하다면 못된 자를 꺾고 베기 위하여 하는 말일 것이로소이다.
오빠! 조선인뿐 아니라 제삼자로 보아서도 극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오늘날 국부의 인간들은 그르다고 부정하고 잡아 가두고 때리고 죄주고 하나이다. 이날이 언제나 끝날까요. 그러나 약하다고 옳은 일이 옳지 않을 수 없는 것이매 우리는 모름지기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로소이다.
이스카롯트³⁴의 반역이 기독을 죽이고 기독교의 세계적 발전을 이루었다더니 그런 사실(史實)을 비춰 생각하매 Y가 내게 준 바 공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조선 사람은 너나없이 모진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배우고 깨달은 바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로소이다. 다 같이 커다란 불행을 지고 있거든 누가 이것을 저어나가지 않고 복됨을 얻사오리까. 나도 평범한 가정에 들어갔으면 오늘날도 없을 것이요, 오늘날의 이 생각 이 생활도 없을 것이로소이다. 널리 살펴보면 우리 중의 어느 누구가 나만한 고초와 불행을 안 받사오리까. 그러나 온 우리 무리에게 미치는 불행의 물결이니 온 우리 무리가 물리치는 외에 아무 딴 도리가 없을까 하나이다.
서백리아 눈바람은 차차 차지나이다. 철창 속 추운 겨울을 또 어찌 보내오리까. 오빠여! 나는 오빠를 생각하며 그리고 이 글월을 닦나이다.³⁵ 비록 오빠가 철창 아래에 매인 몸이라 하더라도 어디서든지 이 뜻과 맘이 서로서로 통하고야 말 것 같은 기쁨과 기대로 나는 밤을 새어가며 이 글을 쓰나이다.
8
오빠! 기삐하소서. 나는 지난여름에 아주 그를 떠났나이다. 그리하여 자유를 얻고 인격을 찾았나이다.
지난 초여름 어느 날 S해수욕장으로 가느라고 우리는 기차에 올랐나이다. 나는 웬일인지 머리가 수그러들더이다. 기차 안에는 별로 잘난 체하는 여자도 싸우깜자러 빤빤한 남자도 많았나이다. 그러나 다 맘에 들지 않더이다. 그중에도 일본 유학생들의 까부는 말성³⁷이 독판³⁸을 막더이다. 하도 일본말 조선말 상반이 야단이어서 흘끔 그편을 보았나이다. 나는 놀랐나이다.
그 가운데에는 전에 약혼을 청하던 그 청년도 있었나이다. 하나 그는 별로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았더니 공교롭게 나와 시선이 마주치었나이다. 얼굴이 일시에 붉어지며 피차에 눈을 돌려버렸나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생각에 머리를 돌렸나이다. 무엇 때문에 그를 버리고 이를 쫓았으랴? 그것은 분명 허영이었나이다. 나는 Y의 학식을 부러워하고 그의 인물을 탐내고 그의 명예와 지위를 생각하였나이다. 그러고는 조선 사람을 업신여기고 내 남편 될 작자는 없다고 자만하였나이다. 이러던 내가 그 멸시와 박대를 폭 뒤집어쓰게 되니 한스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였나이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고라.”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곁을 보니 Y는 시퍼렇게 되어가지고 왜 얼른 도지사 부인과 고관들 부인네 있는 데를 보지 않고 얼빠진 천치 모양으로 그 꼴이냐고 호통질이었나이다.
“괜찮습니다.”
나는 반동적으로 악이 났었나이다. 인제 무서울 것은 조금도 없었나이다. 해서 딱 잡아떼고 새침하니 시치미를 뗐었나이다. 그는 전 도지사(조선인) 때에는 그 부인을 찾아가란 적은 한 번도 없었나이다. 도지사쯤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 아낙을 데리고 산다고 늘 비웃었나이다. 하던 게 이번(일본인 지사)에는 내 교제가 민첩하지 못하여 지사 부인에게도 눈에 났다고 하며 심하면 나 때문에 평판이 나빠지고 질리는 일이 많다고 트집을 거나이다. 하나 나는 그런 관료배의 밑에서 알랑거리는 간사한 여자들을 찾아가서 맘 없는 수작을 붙이기가 싫었고 또 그네들이 나를 우스운 조선인으로 미는데 구태여 그리할 필요도 없었나이다.
9
그리했더니 그는 톡톡히 골이 치밀었던 모양이어요. 제 체면이 있어 큰 소리는 못치고 무틀무틀한 소리를 주어쳐도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있었나이다.
“요보와 시요가네, 야반노다네와 아구마데모 야반다네(요보는 할 수 없다. 야만의 종자는 끝까지 야만이야).”
하며 제 성을 저로서 감당치 못하는 양이 우스꽝스러웠나이다. 나는 그때에 이미 새 각오가 있었나이다. 나는 그를 가엾게 보았나이다. ‘네가 야만이다’ 하고 톡 쏘고 싶었나이다. 나의 굳은 각오는 그의 모든 것을 물리쳤나이다.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나이다. 제 종으로 나를 부리다가 또 그년들에게 아첨을 시키고 마침내는 모든 일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고야 말 그 심사를 나는 몹시 미워하였나이다. 이로부터 나의 맘은 순간에 급전직하하였나이다. 그날 밤에 나는 그를 떠나버렸나이다.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나이다. 스스로 자유를 찾은 것 같아 한껏 시원하였나이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경험을 지나왔기에 아직까지도 조선의 온 사람은 한 글로 큰 부자유에 늘려 있음을 나는 잊지 못하였나이다. 힘과 맘을 갖추고 맘과 이상을 함께하여 일어나야만 할 것을 알았나이다. 또 그런 시기에 맛다달닌³⁹ 것을 깨달았나이다.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았나이다.
나는 생각한 바 있어 이곳 온 후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었나이다. 고국을 떠남이 어찌 섧지 않사오며 형제를 여읨이 어찌 애달프지 않으리까만 그러나 나는 우리의 앞길이 훤히 동이 터옴을 의식하며 이곳에 왔나이다. 나 밖에 나와 같은 사람인들 얼마나 많사오리까. 울며불며 그 고국을 떠난 무리나 그리고 그리며 남쪽을 바라는 무린들 얼마나 많사오리까. 그러나 이곳 있는 사람같이 진
정으로 고국을 사랑하고 그리는 이를 나는 보지 못하였나이다. 예 있는 사람은 너른 벌판에서 어느 때라 없이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 무리들처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이를 나는 보지 못하였나이다. 맘과 맘이 뭉치어서 떨어질세라 하는 의절한 정을 나는 기쁘게 보나이다.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아틈다운 기분이 농후하나이다.
나는 참으로 이 조선의 아들과 딸들을 사랑하나이다. 사랑할수록 사랑할수록 더욱 사랑스러워지나이다. 날로 요것들이 커가고, 늘어가고, 나아가고, 힘차가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눈앞이 환해짐을 깨닫나이다. 그럴수록 나도 힘이 오고 피 뛰나이다. 나는 이 어린 조선의 맘의 엄들을 키우며 오빠를 통하여 고국에 이 글월을 드리나이다.
-끝-
2016년 7월 7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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