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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1910.4.6.~1978.3.25.)는 1910년 4월 전남 광산군 송정리에서 이성륜(李成倫)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선생의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다 11살인 1920년 4월에 송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이 늦은 것은 신학문을 꺼린 부친의 영향도 있었지만, 송정공립보통학교가 그해에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3개 면마다 보통학교 하나씩을 설립한다는 ‘3면 1교’ 정책을 표방하면서 설립되었다. 한국인들의 학교 설립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경채는 1923년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1924년 졸업하고 광주고보에 진학하였다. 광주고보는 1920년 5월 광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1922년 관립으로 전환되었다.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1백 명 모집에 3백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고등보통학교가 부족한 데다 어느 때보다 향학열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뒤 1925년부터는 광주고보는 도지방비를 보조받는 공립으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광주에는 광주농업학교(1910), 전남도립사범학교(1923), 광주여고보(1923) 등의 중등학교와 일본인 광주중학교(1923)가 있었다. 이렇듯 한국인·일본인 중등교육기관이 같은 지역에 존재한 경우는 광주를 비롯하여 서울·대구·부산·평양·신의주 등 6곳뿐이었다. 때문에 1920년대 광주에서는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인 교사가 대다수인 식민교육과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학생들은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인 동맹휴학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였다. 때론 학교들 간의 연대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경채가 입학하고 얼마 뒤 일어난 동맹휴학에 학교가 어수선하였다. 1923년 일본인 선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여 광주고보 역사상 처음으로 1~3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하였지만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경채가 경험했던 1924년 두 번째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가 하면 처벌이 강화되는 등 장기간 지속되었다. 광주 사회에 내재된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갈등이 학교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띠기도 했다.
1924년 동맹휴학은 그해 6월경 개최된 광주고보와 광주 내 일본 선발팀 간 야구시합에서 비롯되었다. 시합 도중 일본인 의사가 광주고보 선수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고, 이에 격분한 광주고보 선수들이 그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 광주고보 교장은 사건을 수습하기는커녕 경찰에 조사를 의뢰하였고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무책임한 교장의 처사에 분개한 전교생 400여 명이 항의하자, 교장은 이들 모두에게 무기정학을 선언했다. 이에 학생들은 교장 사퇴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학부형들은 전남 학부형대회를 개최하며 무기정학 처분을 취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학교 측에서 별다른 태도변화가 없자 학부형회는 일반 시민들의 엄정한 비판에 호소하자며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일제 경찰이 이를 원천 봉쇄하면서 좌절되었다. 동맹휴학은 3개월이 지난 9월경 수습되었으나 주도 학생 4명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4년 동맹휴학은 일제 식민지 교육 현실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뒤 1928년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1학년이었던 이경채는 식민지 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싹틔우게 되었다.
이경채는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한국인 교사에게 민족교육을 받아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청년, 사상단체의 각종 강연회 등을 통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1927년 여름, 이경채는 4학년 재학 당시 동리 친구인 박병하(朴邴夏)・윤해병(尹海炳)과 동교생 양태성(梁泰成)・유병후(柳秉厚)・김무삼(金武三)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비밀모임이었다. 이경채는 몇몇 친우들과의 독서회를 통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1928년 4월경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원지(原紙)·줄판·인주 등을 몰래 빼내와 박병하와 더불어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하였다. 문서에는 동등한 인간으로 계급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천황은 신성(神聖)으로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였다. 일본의 대정 데모크라시 당시에도 천황제 비판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경죄로 엄하게 처벌 받던 때였다. 또한, 그는 일제의 횡포도 무산계급의 신 사회를 건설하면 파괴된다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에 들어서 그의 민족주의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지만 단서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이경채 등이 문서를 인쇄한 등사판이나 남은 문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앤 뒤였다. 송정리 경찰관 주재소는 광주경찰서와 연합하여 송정청년회 간부들의 집을 수색하는가 하면 광주 사회운동가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압송하였다. 또한 광주경찰서는 형사대를 총출동시켜 광주소년동맹위원 김판암·김만년과 광주고보 김재천 등을 연행하였다. 일제 경찰은 이들에 갖은 협박과 고문을 가하여 취조한 뒤에 한길상(韓吉祥)·장순기(張順基)·국채진(鞠埰鎭)·지창수(池昌洙)·강해석(姜海錫)·장석천(張錫天)·이상근(李湘根)·양영일(梁永日)·조칠성(曹七星)·박승남(朴承南)·이성태(李成泰)·박병하 등 12명을 출판법 위반죄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그 뒤 1928년 5월경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은 장석천·장순기·국채진·이상근·양영일·이성태 등은 석방하고 나머지 6명은 예심에 넘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병하만 피체되었고 일제 경찰은 이경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경채는 윤해병과 함께 피체되었다.
‘불온 문서’와 관련하여 이경채가 피체되자 학교 측은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권고 퇴학을 시켰다. 이런 부당한 결정에 광주고보 4·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학교 측에 이경채의 퇴학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마침 학교에서 열리고 있던 학부형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에는 이경채의 퇴학 철회를 비롯하여 물리・화학 교실 신축 문제, 학교 경비의 투명한 집행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학부형회는 사건을 관망하는 입장에서 이경채가 무죄 방면 후에 복교 조치하라는 항의서를 학교 측에 제출하기로 결의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문제는 학교 측이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대표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2~5학년 300여 명은 학교 측의 황당한 처사에 분개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이경채의 무죄 방면 시 복교를 주장하는 한편 교우회의 자치 활동 보장, 교장의 기만적 행동 반성, 무자격 선생 사직, 일본인 교사의 양심적 반성 촉구, 무도장 신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11명의 근신 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였다. 이경채의 퇴학 조치가 교내 문제로, 식민지 교육 비판 등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학생들이 교장의 사퇴까지 거론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강경한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학교장은 ‘교기(校紀)를 정정(正定)’하기 위해 단호한 처분을 내린 것이라 강변했지만, 퇴학생 보호자들은 학교 측의 호출에 불응하며 맞섰다. 이어 광주고보 동맹휴학은 광주농업학교로 번져갔고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까지 포함한 맹휴 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는 동맹휴교가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벗어나 식민지 교육 체제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한 것이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여 결속을 다졌으며 학교장에게는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더욱이 맹휴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경찰 취조 시의 답변 요령까지 열거된 실행 요목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들이 작성한 격문은 단순한 교육 현실에 대한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전체가 일제의 압제 하에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식민지 노예 교육은 ‘민족적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난하였다. 동맹휴학의 승리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의 길이요, 소생의 원천이라며 동맹휴학을 민족해방운동이라 여겼다. 일제는 이러한 맹휴 중앙본부의 조직적이고 철저한 항일 의식을 억누르기 위해 지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에 불복,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경채의 퇴학 처분으로 일어난 동맹휴학은 학생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으로 이어져 “교우회 자치,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교육에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 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들이 살포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였다.
한편, 이경채 등은 무려 50여 일 동안 예심 중에 있다가 1928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강해석·한길상·지창수·조칠성·박승남 등은 면소되었지만, 이경채·박병하·윤해병은 기소되었다. 이경채는 그해 10월 열린 광주지방법원 공판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6월, 박병하는 징역 1년, 윤해병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이경채는 개성소년형무소에 투옥되어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였다.
이경채가 출옥한 지 10여일 후에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직접 학생 시위에는 참여치 못하였으나 비밀회의에 참석하여 사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관련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상황에서 이경채도 그해 11월 말 광주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행동에 많은 제한을 받아야만 했다.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검정고시를 거쳐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야간) 법률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출옥 후 광주고보에 재입학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그리고 일제 경찰로부터 늘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서 일본 유학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와세다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가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사건 규명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규탄하는 등 이에 적극 호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와세다대학은 자유분방하고 특권 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람 같은 곳이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학풍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세다대학을 선호하였다.
이경채는 낮에는 신문배달과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양태성(梁泰成)·윤창하(尹敞夏)와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펴고 있던 유동후(柳東厚)·문두재(文斗載)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의하곤 하였다. 양태성은 이경채와 독서회 활동을 같이하기도 했는데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윤창하는 1928년 6월,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맞서 일으킨 광주고보 맹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기소유예로 풀려난 인물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학우회도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재일본 한인 유학생운동은 각 학교별 한인 유학생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일본 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이봉창이 일왕 히로이토(裕仁)가 관병식장(觀兵式場)에서 사쿠라다몽(櫻田門) 밖의 경시청 청사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제의 상징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경비선을 뚫고 저격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중국 신문에서는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봉창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8일 순국했지만, 이경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사건 이후 일본인 유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이경채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 이경채는 이전의 사회주의 방식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瀨) 경부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경채가 이를 견뎌냈고 일제 경찰들은 임시정부와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제 경찰은 그를 풀어주기는커녕 다른 경찰서로 이송시켜 구류하는 소위 ‘다라이 마와시(たらい回し)’, 조리돌리기를 시켰다. 일제 경찰은 이경채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고 석방을 계속해서 미룬 것이다. 이경채는 이런 생활을 6개월이나 한 뒤에야 풀려났다.
이경채는 일본에서의 신변 위험 및 유학생들 간 좌우 대립이 심해지자 와세다대학 전문부 2학년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광주고보도 졸업을 몇 개월 남겨두고 피체되어 학교를 끝마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경채는 처음에는 나가사키항을 통해 상해로 밀항하고자 했으나 감시가 너무 심해 고베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행스럽게 일본 상선의 고급선원 오가와의 도움을 받아 침대 밑에 숨어 무사히 상해로 망명했다. 때는 1933년 4월이었다.
이경채가 상해로 망명한 시기는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폭살한 다음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채는 비록 임시정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1933년 6월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경 상해지역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사립이었지만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그 산하단체인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완전한 시민육성과 신민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경채가 도착했을 당시의 인성학교는 윤봉길의거로 인해 프랑스 조계 공훈국(公薰局)의 한인 집회 금지로 강제 휴교된 상태였다. 선우혁(鮮于爀) 교장은 상해에 남아 다시금 학교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우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로 어느 누구보다도 인성학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 여러 번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가 처음이었다.
인성학교는 1년 넘게 휴교하였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남녀 아동을 합쳐 6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학교가 개교하기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교사는 이경채를 비롯하여 선우혁 교장, 안창손(安昶孫)과 중국인 등 4명뿐이었다. 생활비는 매월 7, 8원 정도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만큼은 뜨거웠다. 이경채는 교재 편찬에 매달렸고, 선우혁·안창손 등과 매일 밤늦도록 다음날 교재를 토의하는가 하면 한글 신 철자법(당시 미 보급)을 만들어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성학교 제19회 졸업식을 맞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선우혁이 중국 및 서양인들로부터 동냥하시다시피 하면서 인성학교의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해 한인 사회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일본총영사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인성학교는 힘을 잃어 1935년 폐교되고 말았다. 결국 이경채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경채는 1년여 동안의 인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옮겨갔다. 이때 이중환(李中煥)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4년 동안 머물던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박찬익(朴贊翊)·엄항섭(嚴恒燮) 등은 가흥으로, 김철·조소앙·송병조·김철승은 항주로 피신해 임시정부 판공처를 개설했으며, 김두봉 등은 남경으로 피신하였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창호는 프랑스 경찰에 피체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넘겨졌다.
항주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재건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경채는 전남 함평 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 김철(金澈)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간여하게 되었다. 이경채는 이창세(李昌世)와 함께 중국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를 담당하였다. 이경채가 개성형무소 복역 당시 문선(文選) 조판 교정 기술을 습득하였던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진광≫은 4·6배판 활판본으로 격월간 발행되었는데 부수는 국문본이 약 500부, 중국어본이 약 1,000부였다. 지면 쪽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20~50쪽 안팎이었다. 국문본은 구미교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일제의 폭정을 선전하기 위해, 중국어본은 한국독립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중국식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발행되었다. 발행 비용은 미주 대한인국민회 회원 김형순(金衡珣)의 재정적 지원과 중국 국민당 절강성 당부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의 협찬으로 충당하였다.
송병조(宋秉祚, 1877~1942) 목사가 주관하고, 총 편집은 조소앙이 담당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김두봉(金枓奉)·김상일(金相一) 부처, 김사집(金思集), 박경수(朴敬洙) 부처, 이경채 등이 간여하였고 신익희(申翼熙) 등이 오갔다. 이때의 인연으로 신익희는 이경채가 결혼할 당시 주례를 섰다.
하지만 1935년 8월 항주의 일본영사관이 중국인 밀정을 통해 ≪진광≫ 기관지를 출판하던 비밀장소를 알아내자 중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다. 1927년 4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내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국민당은 가급적이면 일본군과의 마찰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으로부터의 재원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부득이하게 송병조 목사의 제의로 ≪진광≫ 발간을 잠시 중단하고 전원 임시 분산하되 훗날 다시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했던 이경채는 다시 1935년 8월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로 돌아온 이경채는 중국 노 혁명가인 장고산(張孤山)의 소개로 1935년 10월 일본연구소에 들어갔다. 일본연구소는 겉으로는 민간 연구소였으나 실제는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직할로 장백리(蔣百里)가 주관하였다. 장백리는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사관학교를 거친 군사학 이론가로서, 장개석의 군사고문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육군대학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장백리가 이경채의 이름을 이일휘(李一輝)로 고쳐 주었다. 항일전에 한 번 이름을 크게 빛내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이경채는 임시정부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임시정부는 그 후에도 일본군을 피해 가흥·진강·장사·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중경에 본거지를 마련할 때까지 유랑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경채는 숙명적으로 적대국인 일본과 싸워야 하는 중국 국민당과 함께하는 것이 한국 독립의 첩경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일본연구소는 일본·미국·영국·프랑스 유학생 12명(일본사관 출신 2명), 민간학자 6명, 기타 4명 등 모두 22명으로 구성되었고, 정치·경제·군사·사회 등 분야도 광범위했다. 이경채는 일어가 능숙하다하여 문구를 교정․교열하거나 자료를 분류,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얼마 뒤 일본연구소가 전략적으로 해체되자 같이 근무하던 전직오(全職吳)와 더불어 중국 제3로군 초비(剿匪) 북로군 사령관 진성(陳誠) 장군 부대에 예속되었다. 진성은 국민당 정부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대만으로 건너간 뒤에는 국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 뒤 이경채는 1936년 9월 장백리의 특별 주선으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3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중앙육군군관학교는 1924년 1월 광주에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 후신이다. 황포군관학교는 1927년 북벌이 진행되면서 1928년 3월 남경에 중앙육군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흡수되었다. 한인들도 황포군관학교 본교에서 1925년 7월 3기부터 22기까지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참여하거나, 공산주의운동 및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인들이 다시 중앙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윤봉길 의거 이후이다. 1933년 봄, 김구 등의 노력으로 장개석의 허락을 받아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들이 입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탐지한 이후부터 한인들의 군관학교 입교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1935년 10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일제와의 국제적 분쟁을 우려한 국민당 정부가 재학 중인 한인들의 퇴직 명령을 내리면서 한인들의 입교는 중단되었다.
이렇듯 한인들의 입교가 봉쇄된 이후에 이경채가 중앙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 뒤 일본군이 중국 내륙으로 점차 침략해 들어오면서 중국·일본 관계는 악화되었다. 마침내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가 남경에서 사천성의 동량(銅梁)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7월 7일 일본군이 조작한 노구교사건에 의해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곧바로 장개석 군사위원장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최일선에 해당되는 동부 중국에 5개 전구를 구성하였다. 이에 이경채가 속한 진성 장군의 상해방면군 적총사령부(敵總司令部)(제15집단군)는 제3전구(사령관 풍옥상)에 편제되어 남경·상해·강소성·절강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상해에 상륙하여 공격을 시작하면서 전쟁은 화북지역에서 화남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경채는 1937년 10월 중국 육군 제11사(사단장 柳際明 중장)에 임시 배속되었고, 상해 근처 가정현(嘉定縣) 외강 부근에서 전개된 중일전쟁에서 최고의 전쟁으로 기록된 크리크 작전에 참전하였다. 11사단은 일본 육전대와 이중 삼중 상호 포위 작전을 전개하였지만, 격전 6일 만에 사단병력 약 1만 명 중 사단장 이하 이경채 등 2백 명 정도만 탈출, 생환하였다.
1938년 1월 이경채는 15집단군사령부로 복귀하여 줄곧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이경채는 더 이상 중국군에 머물 이유가 없었고 판단하였다. 그는 중국군 중령으로 근무하던 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1월 고국을 떠난 지 19년 만에 귀국, 1978년 눈을 감았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경채 [李景采] - 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