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하고 얼마 안됐을 때니까 벌써 이십사오년전의 일이네요.
그날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무슨 조사업무로 혼자 시내 출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조사업무는 예상보다 빨리 끝냈는데 그렇다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긴 싫어 시내를 어슬렁거리다
서울 프레스센타에 걸려있는 윌리엄터너 전시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윌리엄터너에 대해 잘 알지
도 못하고 그림에 그다지 식견이 있는 쪽도 아니었지만 그림 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 시간보내기
에는 안성마춤일거 같았습니다.
관람권을 구입하고 전시실로 들어갔더니 대작은 별로 없고 거의 소품위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
었는데 평일 낮시간대여서 관람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낮은 조명속에 첫작품 앞에 서면서부터 작품
속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액자안에 있는 작품은 손바닥만한 크기였고 작품설명에 고무판
위에 불투명 수채화라고 써있는 풍경화였는데 실제풍경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작은 크기에 그려진 풍경이 그렇게도 생생하게 표현될수 있다는게 신기해서 들여다
보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풍경속에 흐르는 빛의 미묘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전체.. 풍경전부가 빛의 흐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낀 순간 충격으로 온 몸이 굳어지
고 말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유화로 그린 대작 몇점을 빼면 거의가 고무판위에 불투명수채로
그린 아주 작은 소품들 그리고 동판화들이었는데 단색의 판화작품에서도 빛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졌습
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느지도 모르고 작품들에 빠져있었던지...
관람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또하나의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건물, 차량, 사람,
가로수등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무게가 사라져버린채 빛의 흐름으로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날 사무실에는 퇴근시간이 다되서 들어가 늦게 들어온거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윌리엄터너의 충격적인 경험도 기억 저편에 누워 있었는데 예술의 전당에서 영국근대
회화전이 열린다는 것을 보고 그중에 윌리엄터너의 작품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꼭 가서 다시보아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저런일로 미루다 설악에 갔다오고 추석세고 하다보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시기간이 9월말까지로 알고 있다가 마지막날 가보니 9월26일까지였던걸 보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산거북이님의 카페에서 바람돌이님의 사진이야기를 보다 김아타라는 작가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작가에게 작품이란 어떤 의미일까?
또 감상하는 우리에게는 그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첫댓글 그 짧았던 미술시간에도 불구하고 터너의 난파선은 무척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 중의 하나였지요.
그림에 관심가지면서 바다와 일출과 배를 그린 터너의 그림들들 보면 이 분이 인상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격정적인 그림을 그린 분의 심성은 오히려 고요한 바다같은 장인이지 싶은 생각도.....
난파선 은 아마 터너의 후기작품에 속할겁니다. 윌리엄터너가 후기로 갈수록
난파선, 불타는노을 같은 격정적, 낭만적경향의 그림을 많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터너의 작품들 대개가 아마 이 시기의 그림인듯 합니다.
그러나 초중기의 그림을 보면 산거북이님 말씀처럼 고요하고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많았는데.. 제가 그날 보고 감탄했던 것이 거의 그런 그림들이었습니다.
터너의 그림작업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파도치는 바다의 느낌을 얻으려고
실제로 태풍(?)이 부는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돗대에 몸을 묶고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