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 1주년을 맞은 24일, 유럽 등 서방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렸다. 한마디로 '여론전'이다. 우크라이나에게는 시들해지는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고, 비록 돈과 무기 등 실질적인 지원은 아닐지라도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는 이벤트다.
지난 1년간 넘칠 정도로 '악마'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러시아는 명분보다 실리를 찾아가는 모양새다.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비서방, '글로벌 남부'(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가 그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중국. 때마침 중국이 전쟁 1주년에 맞춰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 위기의 정치적 해결에 관한 중국 입장'을 내놨다. '중국 주도의 평화 정착 방안'(이하 중국 평화안)이다. 중국은 앞으로 이 궤도를 따라 점차 행동 강도를 높여갈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러시아(www.buyrussia21.com)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1주년 기획 시리즈를 '분쟁 해결을 위해 중국이 움직인다'로 시작한다. 너무나 뻔한(?) 서방 외신의 시각이 아니라, 전쟁의 직접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우크라이나 언론의 시각으로 전체 흐름을 살핀다. 서방 외신보다는 더욱 분명한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자칫 편향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린다/편집자 주.
중국 외무부,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을 위한 12개 항의 입장문 발표/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 중국의 평화 정착 방안에 담긴 속내는?
중국이 사전에 고지한 대로 개전 1주년(24일)에 맞춰 우크라이나 평화 정착 방안을 내놨다. 독일 뮌헨에서 최근(17~19일) 열린 국제안보회의에서 중국의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조만간 중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 문서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중국의 첫번째 공식 입장이라는 점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의 의지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또 왕이 위원의 행보를 되짚어 보면, 그가 사전에 준비한 시나리오에 따라 한 발자국씩 움직여 왔음을 알 수 있다. 뮌헨 포럼 참석→평화 정착을 위한 중국 입장문 발표 예고→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회담및 입장문 개요 설명→모스크바 방문→입장문 발표 순서로 진행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4일 "중국은 12개 항으로 된 우크라이나 평화 정착 계획을 발표했다"며 "이 문서의 본질은 포연(砲煙)과 전쟁을 중단하고, 조건없이 키예프(키이우)와 모스크바 간의 직접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요구 조건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서방이 대(對)러시아 제재조치를 해제하고, (불에 기름을 붓는) 대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는 은밀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12개 항으로 된 중국의 평화정착 방안/현지 매체 영상 캡처
△각국의 주권및 영토 존중 △냉전적 사고 폐기 △군사적 충돌 중단 △평화협상 개시 △인도주의적 위기 제거 △민간인 보호 △원전 안전 확보 △핵무기 사용 금지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 보장 △일방적 제재 해제 △글로벌 공급망 유지 △전후 복구 추진 등 12개 항을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우크라이나가 보는 중국 평화안의 핵심은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협상을 시작하며, 대러 재제 조치를 해제하라는 것이다. 입장문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문맥상 서방의 대 우크라 무기 지원 중단도 은밀하게 포함돼 있다고 해석했다.
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빠진 게 러시아군의 철수다.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보편적인 조항들을 빼면, 중국의 평화안은 러시아 편향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서방이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위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당연히 러시아는 지지를,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중국과 의견을 같이 한다"며 "분쟁 해결에 기여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분쟁 해결의 장애물로 우크라이나가 푸틴 대통령과의 협상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러시아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이라며 "러시아는 정치적, 외교적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는데 (문을) 열어 놓고 있다"고 밝혔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가 추구하는 목표로 △서방의 대우크라 무기 공급 중단 △적대 행위 중단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 △(러시아가 합병한) 새로운 영토에 대한 현실 인식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및 비나치화 △우크라이나발 모든 안보 위협 제거 △러시아어 사용 인구 및 소수 민족 대표의 권리 보장 등을 들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특수 군사작전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목표 그대로다. 평화협상의 개시, 혹은 평화협정의 전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중국의 평화 입장문 발표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의 정치 외교적 목적을 거듭 확인한 셈이다.
푸틴 대통령을 예방한 왕이 중국 정치국 위원/사진출처:크렘린.ru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우크라이나와 서방측은 중국의 평화안에 매우 비판적이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중국의 평화안을 거부할 경우, 베이징의 다음 수순이다. 스트라나.ua는 "중국은 추가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러시아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지금까지는 중국이 중립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중국이 굳이 입장문을 발표한 것은,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모스크바와 키예프, 혹은 워싱턴이 아닌 제 3자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 중에는 전쟁에서 미국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고 있는 유럽도 포함된다고 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날 "독일과 프랑스 정상들이 지난 1월 파리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대화를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은 우크라이나와의 방위 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키예프가 모스크바와 협상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인센티브로 활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협상 중재자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스트라나.ua는 진단했다. 다만, 키예프는 중국의 제안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중국의 평화안에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 또 시진핑 국가주석과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다.
숄츠 독일 총리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
스트라나.ua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이 우크라이나 권력 내부의 다른 인사들보다 부드러웠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다" "중국과 협력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중국의 제안에 러시아군의 철수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같은 계획은 우크라이나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건 나중에 덧붙인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중국의 다음 수순은 뭘까?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선 CNN 방송 등 미국 언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도대로 러시아와 무기 판매 계약을 맺는 것이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레드 라인' 운운하며 사전 견제에 나선 이유다.
또다른 가능성은 러-우크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다. '글로벌 사우스(남부)'를 포함해 많은 국가들이 이미 중국에 중재자 역할을 요구해 왔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4월 초 중국 방문을 추진하는 것도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중국 외교부/현지 매체 영상 캡처
유럽의 3대 강국인 독일과 프랑스, 영국이 우크라이나와의 방위 협정 체결을 고리로 우크라이나가 평화협상에 나서도록 독려하고, 중국이 중간에서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면? 휴전이든, 평화협정이든, 또는 한국식 종전 시나리오든 아니든, 우크라이나 땅에서 포연이 멈추는 건 의외로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오늘이라도 대화의 창이 열릴 수 있다"는 소신 발언을 거듭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오늘(24일)의 주요 이슈
- 중국이 러시아에 대한 드론및 탄약 제공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미 CNN 방송이 24일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중국이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 러시아간에 가격 등에 대해 협상 중"이라며 "중국 지도부는 '드론과 탄약을 제공해 달라'는 러시아의 요청을 놓고 최근 수개월간 논의했으며, 요청을 들어주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전했다.
앞서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중국의 방산 제조업체들이 러시아에 100대의 '자살 공격용 드론'을 판매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인도 날짜는 4월로 예정돼 있다"고 보도했다.
미 WSJ도 소식통을 인용, '중국이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한다면, 드론외에도 대포와 다른 무기가 포함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이 지원을 고려중인 무기로 122㎜와 152㎜ 포탄및 탄약"이라고 밝혔다.
- 주요 7개국(G7) 정상은 개전 1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의지를 밝혔다. G7 정상은 24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화상 정상회담을 하고 이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우크라이나를 변함없이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한 뒤 "우리는 러시아의 불법적이고 정당하지 않으며 명분없는 전쟁을 규탄한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교, 경제, 군사적 지원을 강화하고, 러시아와 러시아의 전쟁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비용을 늘리는데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에르도안-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평화 정착을 위한 중재 의지를 밝혔다고 터키 대통령실이 24일 밝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와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공정한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며 "이스탄불에서 도달한 합의의 부활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29일 터키의 중재로 이스탄불에서 만난 러-우크라 협상 대표단은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러시아의 군사활동 축소 등을 포함한 평화안 초안을 주고받았으나, 최종 타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가 이웃국가인 몰도바 내 러시아 국민을 공격하려 한다며 보복을 시사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24일 성명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트란스니스트리아'(러시아식 표현으로는 '프리드네스트로비예')의 국경 주변에 포병을 배치하고 무인기 비행을 크게 늘리고 있다"며 "프리드네스트로비예의 러시아인, 평화유지군을 위협하는 어떤 행동도 국제법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몰도바 동부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러시아가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약 1천5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 미국이 러시아산 금속·광물·화학물질 등에 대한 관세 인상 조치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대러 추가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특히 대러 제재 조치를 위반한 제3국 기업들에 대한 수출 통제도 포함됐다. 은행 등 러시아 금융기관들과 수십 개의 러시아 국방 관련 단체, 러시아의 제재 회피와 관련된 30명 이상의 제3국 행위자 등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우리는 (특수 군사작전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가능한 한 빨리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날은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분쟁은 우크라이나 및 서방과 힘든 협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일종의 느슨한 합의로 끝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서 "이 같은 합의가 실제 국경에 대한 근본적 합의에 이르긴 부족할 것"이라며 "우리에 대한 위협에 맞서고 우크라이나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선 멀리 폴란드 국경까지라도 (우크라이나 군을) 밀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