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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묵상글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오너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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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너라>
“오너라.”(마태 14,29)
나
너를
늘 그렇게
바라보며
나
너에게
늘 그렇게
가듯이
너
나를
늘 그렇게
바라보며
너
나에게
늘 그렇게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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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앞에서 나도 보고 너도 보는 겸손 < 2023.08.08 05:40 >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 때문에
모세의 친형제들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며 한 말이고,
이 때문에 아론과 미리암은 꾸지람을 듣고 미리암은 큰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 자체는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세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며 스쳐 가는 바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이 말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의 문제일 것입니다.
동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방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종종 동족 결혼을 원하시는 것으로 구약이 얘기하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방 여인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 중에 이방 여인들이 있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선민의식이라는 것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오늘 아론과 미리암은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것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비방하기에 벌을 받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어지는 말씀이 모세의 겸손을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모세는 겸손했고 이들은 교만했기에 벌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잘못을 구실로 자기들이 모세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모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교만 때문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 채비가 되어있는데
모세의 결혼을 구실이나 빌미 삼은 것일 겁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번역이 영어 번역입니다.
“Miriam and Aaron spoke against Moses on the pretext
of the marriage he had contracted with a Cushite woman.”
우리도 교만하면 다른 사람 특히 지도자를 제칠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흠집을 찾아내어 지도자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은 지도자를 교만 때문에 비방하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반기를 든 정도가 아니라
모세를 뽑으신 하느님께 반기를 든 것입니다.
모세가 겸손했다는 것은 모세가 늘 하느님 앞에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들이 교만했다는 것은 그들은 늘 모세 앞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겨져도 하느님 앞에 있는 것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에 종종 교만합니다.
그리고 교만하기에 어떻게든지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잘못이 없으면 흠집을 내서라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도 보고 이웃도 보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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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바다의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또 <욥기>에서도 하느님을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로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현현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돛을 올리고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요,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너라!”(마태 14,29)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안전한 배에서 내려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떠받쳐주던 물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리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전한 배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달라고도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은 들어 다시 주님이신 예수님께 향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1,26)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1,31)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풍랑이 이는 길을 떠나야 하고,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앙의 도약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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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바라보라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좋은 일도 있지만 어려운 일도 감당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자체에 매달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맙니다. 누구나 곤경에 빠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깨어 있어라.’ 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청을 들어주셔서 베드로를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그 안에서 정신을 차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얻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눈을 감으면,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시련을 만나서 어려움만 생각하면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센 바람이 부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문제는 곧 은총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구원을 선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부디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져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을 믿으면 발등을 찍히지만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주님은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믿음으로 손을 댄 사람들이 구원받았듯이, 우리도 그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모든 어려움,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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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자들이 밤을 새워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보아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공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존경 받을 때보다는 실패 했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때, 비난 받을 때에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을 새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고난의 순간에 함께 해 주는 친구가 정말 고마운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1997년 IMF 때입니다. 저도 IMF의 파도를 맞았습니다. 은행 대출이자가 17%였을 때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머물 수 있는 전세금이 필요했고, 은행에서 대출 받았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었던 동창들이 제게 선뜻 비용을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1년 뒤에 동창들에게 빚을 갚았고,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입니다. 저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작년 8월 서품 31주년을 기념하며 타코마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창 한 명이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왔기에 별 거리낌 없이 신부님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저도 코로나 증상이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에 걸리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탐승이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모시고 뉴욕으로 와서 함께 지냈습니다. 신부님은 코로나에서 회복되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신앙은 대상을 중심으로 하면 종교가 됩니다. 신앙은 행동을 중심으로 하면 이정표가 됩니다.
주변을 보면 1인 3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사랑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과 소중한 일을 식별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유지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눕니다. 3가지 일을 하면서 더 큰 성과를 얻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서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입니다. 신문사를 운영하고, 홍보하고, 좋은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부르클린 신자들께서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의 장례미사도 도와드렸습니다. 고인의 유족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장지에 함께 갔던 봉사자들이 기꺼이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퀸즈 성당의 미사도 도와드립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신문 홍보를 하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댐이 무너지는 것은 태풍으로 물이 넘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구멍으로도 커다란 댐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아주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강한 군대를 가졌던 조조가 작은 군대를 지닌 제갈공명에게 패배한 것은 부하를 믿지 못했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조조에게 의심이라는 아주 작은 씨앗을 주었습니다. 조조의 마음에 들어온 의심이라는 씨는 조조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훌륭한 장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미르얌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의심했던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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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키는 첫 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배부름은 주님을 인간적인 세상의 통치자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배부르게 해주는 사람이 최고인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세속적인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경제 성장,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세속의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자제들 역시 주님의 그런 모습 안에서 세속의 왕의 모습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시고 주님 자신은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주님은 영적인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순종하는 그런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주님 스스로 세속의 왕이 아닌 세상 모든 권한을 지닌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배부름이 아닌 믿음에 관하여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나의 어려움과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주시는 분으로만 보고 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들 들어주어야 하는, 소원을 빌면 램프에서 나타나는 요정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이시며 다른 이름을 지니지 않으십니다. 즉 주님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소유할 수 없으며 주님만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십니다.
우리 영을 통해 영적으로 다가오시는 우리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삶을 늘 새롭게...
미국의 사회, 노동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삶은 늘 새롭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움은 늘 새롭기 때문이고
배움은 늘 새로운 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배움은 삶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습니다.
배움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매년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우려 합니다.
올해도 무언가 특별하고, 즐겁고, 놀라운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삶을 새롭게 하고 싶다면
배워보세요.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시작해보세요. 삶이 새롭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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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휴대전화 가게 앞을 지나가다 보면 이런 글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휴대폰 공짜, 거저 드립니다.”
솔직히 공짜 휴대전화가 있을까요? 약정, 부가서비스 등에 가입하다 보면 결국 제값 내고 휴대전화를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길거리에 ‘공짜’를 외치면서, 안 사면 손해이고 바보라고 말하면서 지금 밑지고 파는 것이라는 장사꾼을 종종 봅니다. 정말로 손해 보면서 물건을 파는 것일까요? 아파트값이 곧 올라서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다더라, 어느 주식을 지금 사면 거저 돈 버는 것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이런 불로소득이 세상에 진짜로 가득한 것일까요?
반백 년 넘게 살면서 나름 깨우친 것이 있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의 공통점은 땀 흘려 얻은 것이 아닌 공짜만을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주님께 공짜를 바랍니다. 땀 흘려 노력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자기에게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사랑만을 외치고, 자기가 원한 것만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짜 심보가 과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을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공짜로 주십니다. 하지만 공짜가 진짜로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냥 저절로 내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탄 배가 밤새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없이는 이렇게 시달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생하는 제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호수를 걸어서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에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을 꾸짖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합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바라는 우리의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청 역시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절망에 빠졌을 때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고,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청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두려움 속에 빠지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주님의 공짜 사랑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작은 시련에도 쉽게 넘어지고 마는 부족한 믿음은 아닌가요?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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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은 대부분 사소하고 기억되지 않는 친절과 사랑의 행위로 채워진다(윌리엄 워즈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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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기도와 회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
“선택, 훈련, 습관”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포르트칼 리스본에서의 제37차 세계 젊은이 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후 로마로 귀국중 기내에서의 회견 기사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Lisbon WYD was a “beautiful”experience’(리스본에서의 세계 젊은일날 행사는 아름다운 체험이었다)
문득 30여년전 강론시 세수대야 바닥의 영문 글씨를 보고 강론에 인용했던 신선한 말마디,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이었습니다. 이어 생각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명시,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과연 인생 끝나는 날, 인생 아름다웠다고 고백할 자 몇이나 될런지요? 리스본에서의 교황님 강론중 떠오른 말마디 하나도 생각납니다. “기쁨은 선교다. 기쁨은 훈련(training)을 필요로 한다.” 요즘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영적 삶의 구조, “선택-훈련-습관”이란 말마디와 더불어 “끊임없이” “한결같이”란 두말마디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어제 신문 칼럼 끝대목의 경고도 생각납니다.
“아직 인류가 살 곳은 지구뿐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명작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고의 안감독님은 말씀하셨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기후위기 막기를 포기하는 순간,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인류의 삶은 끝난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무서운 말마디, 부단한 훈련의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영성생활은 끝난다. 그러니 죽을때까지 멈춰서는 안되는 영성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삶이 얼마 안남았다는 자각에서 강론중 요즘 많이 강조하는 제목중 하나가 “여정”입니다. 또 하나는 “삶의 중심”입니다. 이번 세계 젊은이의 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석했던 이집트 청년의 인터뷰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나는 중심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중심입니다. ‘내가 언제든 하느님 가까이 있음을 발견할 때, 나는 참으로 잘 살게 됩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보다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으면 혼란과 복잡의 무질서의 어둠에서, 늪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이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부제로는 “기도와 회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 그리고 “선택, 훈련, 습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하느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살았던 분이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요, 아예 하느님 중심과 일치되어 사셨던 분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12-13세기 스페인 출신의 성 도미니코 사제 역시 주님과 참 가까웠던 성인입니다. 알비파, 발두스파, 카타리파 이단의 영적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에 교회의 필요에 응답해 탁발 수도회인 성 도미니코 설교자회를 설립한 분입니다. 청빈한 삶과 말씀의 연구와 설교로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수도회 회원들의 주업무였습니다.
1221년 8월 6일 블로나의 수도원에서 치열했던 만 51세 생애를 마치면서 제자들에게 한 유언은 “서로서로 형제들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였습니다. 세상을 떠날 무렵 유럽에는 60여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500명의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234년 사후 13년만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입니다. 또 성 도미니꼬와 도미니꼬 수도회는 묵주기도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주님을 닮아 겸손과 믿음이요, 자비와 지혜의 참삶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인데 모세가 바로 그러합니다. 하느님은 잠시 질투의 무지에 빠져 탈선해 있던 미르얌과 아론을 꾸짖으며 모세를 적극 두둔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이어 미르얌에게 벌로 악성 피부병을 주시자 아론은 즉시 회개와 더불어 모세에게 기도를 청합니다. 기도와 회개를 잊어 무지의 어둠에 빠졌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아론과 미르얌입니다.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 주십시오.” 하느님 중심에 늘 가까이 살았던 모세에게 기도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하느님 없는 모세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숨쉬며 살아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있음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결과가 믿음과 겸손이요, 자비와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끊임없이 하느님 중심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믿음과 겸손, 자비와 지혜의 한결같은 훈련으로 이들 덕목을 습관화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후에 신속한 주님의 처신에서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공성이불거, 노자의 말처럼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군중을 돌려 보내고 제자들은 떠나 보내고 자신은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 관상과 활동의 리듬은 너무나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낮의 활동후에는 밤의 고독과 침묵의 자리에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친교로 자신을 충전시키는 일이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일치로 영안이 활짝 열리니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곤궁중에 있는 제자들을 보자 즉시 개입합니다. 호수위를 걸으니 말그대로 하느님과 일치된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과 제자들과의 문답이 여전히 큰 가르침이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늘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야 말씀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에 주님 향한 눈길을 잃자 즉시 물에 빠져들면서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말마디들도 좋은 묵상감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부족하기로는 민수기의 미르얌과 흡사한 베드로입니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자 비로소 내외적 평화와 안정입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애초부터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할 믿음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이런 기도와 회개, 믿음의 여정을 통해 크게 깨닫고 배웠을 믿음과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일정이 참 분주합니다.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자 모든 병자들이 그분께 다가왔고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합니다. 새삼 외딴곳에서 날마다 밤마다 전존재를 아버지의 영으로 충전시킴이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됐음을 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한(whole)” 구원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즉 기도와 회개, 겸손과 믿음, 자비와 지혜의 삶을, 그리고 온전한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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