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2학년. 이쯤 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악기를 가르치거나 다양한 공부를 가르치는 등 교육열을 올린다. 수녀님들은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일종의 문화생활 체험) 보육사 선생님과 함께 노래에 맞춘 동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콘셉트는 빨간색 빵모자에 하얀 스타킹을 한 꼬마 아이들과 폴라티 차림으로 멜빵을 걸터 입은 눈사람이었다. 우리가 리허설에 참석할 땐 단체로 오와 열을 맞춰 하모니카를 불었다.
어느 날 수녀님은 두 명의 선생님을 소개해주셨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보육원)에 도착하니 모르는 여선생님 두 분이 우리 반으로 찾아왔고 자신을 음악 선생님이라고 소개하셨다. 선생님들은 우릴 보고 반갑게 인사하셨고, 눈을 마주친 우린 겸연쩍은 듯 인사를 했다. 선생님들 역시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았다. 활발한 친구들은 순간이동 능력을 갖춘 퀵실버처럼 어른들 주위로 어슬렁 거렸다.
"여기 왜 오셨어요?"
"어쩐 일로 여기에 왔어요?"
호기심이 두려움을 찍어 누르다 못해 소멸시키는 것이 일상이라 우리는 새로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한한 호기심으로 다가간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어쩌면 나는 많은 질문을 하여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암묵적으로 상쇄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 그 호기심이 우리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 선생님께서는 악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랑을 얻는다고 하셨다.
2~3개월간의 긴 하모니카 수업은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약 2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24명의 아이들이 두 반으로 나뉘어 A반 B반으로 한 클래스씩 수업을 진행했고 우리 반은 A반이었다. A반은 큰 선생님 담당, B반은 키 작은 선생님 담당이었다. A반 선생님은 덩치가 크셨고 장난치는 걸 좋아했으며 인자한 성격이셨다. B반 선생님은 지금의 유행을 앞서가듯 히피펌과 비슷한 연한 갈색의 머리스타일이었다. 머리가 신기했던 아이들은 선생님 주위로 모여 머리를 만질 때도 있었다. 지루할 때는 지루하게, 재미있을 때는 재미있게 배운 '배움의 시간'이 훌쩍 자라 청년의 뜀박질로 저 멀리 달아났다.
처음 하모니카 청소를 배운 때완 달리 어느새 아이들은 하모니카를 닦는 손놀림이 능숙해졌다. 하모니카를 자주 불면 침이 고여 내부가 흥건해진다. 연설을 할 때에, 또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 입과 마이크에 침이 고이듯 하모니카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모니카 내부를 열어 닦는 것을 소독법이라고 한다. 관악기를 예로 들면 리코더, 플루트를 청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악기처럼 하모니카도 주기적으로 상하지 않게 소독청소를 해야 했다. 침이 오래 남으면 냄새가 나거나 부식되기 쉽기 때문이다. 누구든 부식된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들지 않을 테다.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소중한 후각을 보존하려면 소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야 했다. 이는 음악계의 미식가로 되기 위한 중요 과정이었다.
아날로그 감성 속 하모니카 연습생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리허설 초반에는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연습을 하던 도중 체육관이 떠나도록 울었다. 창피해서 더 울었다. 아이돌을 보면 센터에 위치한 사람의 춤 선에 집중할 수 있게 카메라 줌인이 된다. 리허설 중 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고 나는 하필 메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무대 공포증이 이런 걸까? 소심했던 내가 가운데에 서다니. 엄청 떨렸다. 수녀님은 그런 내가 긍정적일 줄 알고 센터에 두신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무대에 올라서면 강한 조명을 받아 피부가 온통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유독 피부가 까매서 비비크림을 잔뜩 바랐고 허연 얼굴로 기계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본주의 미소. 무대에서 공연하는 친구들이나 형, 누나 동생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 딱 정면만 바라보면서 공연을 진행했다. 머리는 하얘졌지만 열려있는 귀로 친구들의 하모니카 음을 간신히 따라잡으면서 영혼을 불어넣었다. 연습하는 시간이 늘다 보니 어느덧 떨지 않게 되었다. 실수가 많이 고쳐졌다. 더 이상 수녀님과 선생님께 고생을 시키지 않아 앞서 불현듯 다가오던 불안감을 덜 수 있었다.
하모니카를 배운 지도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나 그해 겨울이 다가왔다. 가을부터 시작해서 했던 하모니카 수업생들은 준수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담당 엄마 수녀님은 무대 준비와 기획과 구성을 하셨고, 공연 준비를 잘하셨다. 덕분에 우리도 공연을 열심히 연습하여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러 다녔고, 놀이공원에도 꽤 자주 갔다. 어느 하루는 방심을 하던 때가 있었다. 몇 번의 무대공연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콧대가 높아진 시기, 하모니카 공연으로 수상을 많이 받아서 시설 내 수녀님들의 이목이 집중되던 시기였다.그 해 겨울, 주교님께서 공연을 보러 오신다는 소식이 들렸다. 주교님은 가톨릭에서 한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이시다. 매주 주말인 일요일 아침에 미사 진행을 관장하시는 신부님보다 한 단계 더 위인 분이고 표현하기엔 조금 껄끄럽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도 좀 더 위다. 주교님을 앞에 두고 공연을 시작하는데 너무 떨렸다. 겨우 곡 3개만 완주하면 끝나는 게임인데 괜히 긴장되고 떨렸다. 척수를 기점으로 뻗어 난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 가지에 매달린 새들이 모두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곡은 총 3가지로 진행이 되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코', '창밖을 보라'. 약간의 몸동작도 가미해서 단체로 삐걱거리는 로봇 같지도 않은 춤을 췄다. 벨리댄스를 추는 아이돌이 된다는 게 아마도 그런 느낌일까나.
첫 번째 곡 '징글벨'은 잔잔한 춤사위와 함께 모두가 무대의 양 옆에서 등장했다. 곡이 끝나면 까치발 댄스가 시작되었고, 이때 리듬이 빨라지면서 눈사람이 달려 나와 하얀 쫄바지를 입은 우리의 민망한 복장을 가려주길 기다려야 했다. 눈사람이 무대 중간에 도착하면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창밖을 보라'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하모니카 연주자들이 무대를 장식하는 동안 눈사람이 연주와 함께 망나니 같은 춤사위를 부렸다. 춤추는 눈사람은 어설픈 하모니카 연주와 하나 된 듯 무대를 즐겼다. 그야말로 부드러운 골격을 가진 하모니카 로봇군단이었다. 삐꺽거리면서 연주를 진행하던 우리들은 관객들의 눈 요깃거리 혹은 재미란 특성규격에 맞춰 성황리에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두 녀석은 융합하여 썩 괜찮은 시너지를 내었다. 딱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랑'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결국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고 공연장 뒤에서 교구단체의 축복을 받았다.
"아이고, 다들 공연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이들은 자라서 장차 하느님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될 겁니다! 아멘!"
교구 단체로부터 받은 많은 선물들이 한 쪽에 쌓여져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대한 물총과 장난감, 한 달은 충분히 즐길 정도의 많은 먹거리들... 공연 후 미사 중 연주자들의 이마 위로 검게 그어진 십자가에 힘을 입었다. 천주교 신자로서 한껏 성스러워지는 것 같아 잠시 다른 세상에 있는 영혼이 된 기분이었다.
그 해 겨울방학에 공연을 마친 후 우린 상금을 통해 수녀님을 선두로 롯데월드로 놀러 갔다. 그 특혜는 단지 놀이동산에 갔던 거지만, 별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감정들은 영롱한 곡옥처럼 좋은 기억이라는 방주에 담을 수 있었다. 기억의 방주가 두려움의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노아의 부드러운 노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