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41]펜화작가 안충기의 『津津진진』이라는 책
『津津진진』이라는 책을 통독했다(왕육성 말하고 안충기 쓰다, 동아시아 2022년 4월 펴냄, 298쪽, 16000원). 두 글자 책제목과 빨간 색 표지만 보면, 에로소설인 것같았으나 ‘대체불가 펜화작가’ 후배가 자기가 썼다며 건네준 책인만큼 그럴 리는 없을 터. 『津津진진』은 <津津진진>이라는 중국요리집 사장(왕육성)의 육성肉聲을 받아 적고, 그의 삶(요리인생 50년)과 그의 독특한 음식점 경영철학 그리고 왕사장의 주변 이야기를 기자(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시각으로 정밀하게 취재해 기록한, 제목처럼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흥미진진興味津津’의 ‘진’자가 ‘다할 진盡’자가 아닌 ‘나루 진津’자임을 처음 알았다. 왕사장이 운영하는 중국집 상호商號 <진진>을 책제목으로 한 『津津진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조만간 꼭 가 맛을 보리라 결심도 했다.
아무튼 화교 왕사장의 ‘진진’ 작명作名 얘기부터 흥미로웠다. <진진>은 아버지의 고향 텐진과 그가 살고 있는 서울 양화진(마포의 옛이름)의 ‘진’자를 합한 것이다. 텐진은 서해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양화진은 서해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길의 입구이지 않는가. 단순한 두 글자를 한자로 합하니, 그가 살아온 중국과 한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긴 듯한, 의미심장한 상호라 하겠다.
1954년생 그가 2013년 12월 31일 코리아나호텔 중식 레스토랑 <대상해大上海> 운영을 접고,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그가 요리인생 40년, 28년 동안 고락을 함께한 <대상해>를 그만둔 것은 신분에 따라 어떤 손님도 차별하지 않고 한 사람을 마치 1만명처럼 생각하며 근면과 검소로 백년가게를 만들고자 한 꿈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마포 서교동 어느 골목에 작은 중국식당 <진진>을 개업한 게 2015년 1월. 출입구 옆 통유리에 쓰여진 안내문구가 자못 이색적이다.
“△진진은 한국과 중국이 만나는 흥미진진한 공간, 푸짐한 음식과 풍성한 이야기가 넘치는 놀이터라는 뜻도 있다. △왕육성 셰프는 코리아나호텔 중식당 대상해大上海의 오너를 지낸 40여년의 풍부한 현장경험을 갖춘 장인이다. 10년간 호흡을 맞춰온 황진선 셰프와 유려한 팀워크로 서비스한다. △엄선한 요리 10여가지만 제공하는데, 품질높은 제철 식재료로 만든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원가를 낮춰 착한 가격으로 모신다.”
그러니까, 손님을 왕처럼 받들며 중화요리 최고의 달인들이 품질 좋은 제철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최대한 착한 가격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문구로만 봐도 눈이 쫑긋, 귀가 솔깃해지지 않은가.
어쨌든 식당 입지조건으로는 최악인 그곳에서 그는 제자와 함께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경영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며 “안내문구가 진짜”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2년쯤 된 2016년 6월 어느날, 미쉐린 가이드의 보안保安을 요구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해 11월 <진진>이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 등록이 됐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등급이 별 하나. 제법 통이 큰 왕사장도 놀랐을 것이다. 미쉐린 가이드 기준을 보자. △별 세 개는 요리가 매우 훌륭하여 특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별 둘은 요리가 훌륭하여 멀리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별 하나는 차별화된 음식으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레스토랑에 부여한다고 한다. 미쉐린의 평가기준 5가지는 이렇다. △재료의 수준 △요리법의 풍미와 완벽성 △셰프의 개성과 창의성 △가격에 합당한 가치 △전체 메뉴의 통일성과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일관성. 이 기준은 △부대비용을 아껴 식재료 품질을 높인다 △고객 의견을 충분히 들으며 부족한 점을 채운 뒤 문을 연다 △일반 중국음식점이 내놓지 않는 요리를 선보인다 △호텔급 요리를 서민들도 부담없는 가격에 내놓는다 △주력메뉴를 계절별로 새로운 음식을 선보인다 △손님들의 쾌적한 식사를 위해 직원은 티 안나게 움직인다는 <진진>의 경영원칙과 비슷하지 않은가.
외국기관의 평가에 혹할 것도 아니고 '절대선'도 아니겠으나, 시사하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진진>은 처음 문을 연 날부터 오늘날까지 초심初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각오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게를 넓히자, 체인점을 내달라는 등 유혹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어찌어찌 본관에 이어 인근 신관과 <진진가연> <진진야연>으로 매장이 네 곳으로 늘었을망정,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왕사장의 초심은 끝까지 요지부동搖之不動할 것이라는 믿음을 백퍼(100%) 주고도 남는다. 변심을 한다면 사기꾼에 다름 아니리라. 저자도 책임져야 할 일.
요리책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며, 어느 음식점 사장의 자서전도 아닌 이 책을 읽고, 서평도, 신간 안내도, 독후감도 아닌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참 별난 책이다. 내가 놀란 것은 왕육성 사장의 육성기록도 그렇지만, 글쓴이 안충기의 필력이다. ‘정리의 왕’처럼 잘 써서 아주 멋진 책을 만들었다. 화교, 중국음식, 중식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개안開眼의 계기가 됐다. 어쩌다 먹방 프로에서 <목란>의 이연복 셰프가 자주 나올길레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이 책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구한말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부터 시작된 중국집 역사와 이제껏 대한민국에서 핍박받고 산 화교華僑들의 역사와 현황, 빛과 그림자도 엿볼 수 있다. 이야깃거리가 어찌나 풍성한지, 스토리 뱅크같다. 스토리 텔러가 따로 없다.
왕육성이 요리인생 50년 동안 만난 사람이 무려 100만명이라고 한다. 그가 만나 요리를 배웠던 전설적인 사부들과 중국집 이야기도 재밌고, '중국음식의 5대 천왕'으로 불리는 <짜장면, 짬뽕과 우동, 볶음밥, 탕수육, 만두> 뒷이야기도 재밌다. 무엇보다 마음에 쏘옥 드는 것은 그의 인생2막의 세 가지 희망이다. 좋은 재료와 좋은 음식으로 좋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요리사로 살겠다는 소박하지만, 달성하기 지극히 어려운 꿈을 무한정 응원한다. 일독 강추! 글머리에 이 책을 유려하게 써내려간 저자를 ‘대체 불가 펜화작가’라 칭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졸문을 참조하시면 좋겠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29]『처음 만나는 청와대』라는 신간 - Daum 카페
후기 1: 왕육성이 인생2막에서 추구하며 역설하는 ‘인생팔미人生八味'을 되새겨보자.
1미는 맛난 음식을 맛보는 것이고, 2미는 즐거운 일을 하는 것. 3미는 풍류風流을 즐길 줄 아는 것이며, 4미는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 5미는 봉사이다. 6미는 죽을 때까지 학생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며, 7미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8미는 그렇게 깨닫는 인생이 “쵝오(최고)”라는 것이다.
후기2: <미쉐린 가이드-서울편>에 등록시켜 <진진>을 졸지에 ‘미쉐린 스타’로 만들어준 <미쉐린 가이드>에 대해서도 상식 차원으로 알아두자. -----------------------------------------
1889년 프랑스의 앙드레 미쉐린과 에두아르 미쉐린 형제가 자동차산업에 큰 비전을 갖고 자신들의 이름을 딴 타이어회사를 설립했다고 한다. 자동차 여행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 정보를 주면 매출이 늘 거라고 생각해 ‘미쉐린 여행 안내책자(지도, 주유소 위치, 쉬는 곳의 먹을 곳과 잘 곳의 목록 등)’를 만들어 20년간 무료제공을 했다. 어느날 앙드레 미쉐린이 이 가이드북을 어느 회사에서 작업대 받침으로 쓰는 곳을 보고 크게 실망한 후, 1920년 부터 가이드북을 유료 판매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다. 이 가이드북은 어떤 경우에도 레스토랑 유료광고를 싣지 않는다. ‘미스터리 다이너’ ‘레스토랑 인스펙터’라는 비밀평가단을 모집하여 신분을 숨기며 익명으로 레스토랑을 방문, 음식을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이드북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해마다 3000만부가 팔리고 있으며, 전세계 30여개지역 레스토랑과 호텔 3만여곳을 평가하고 있는데, 음식의 질이 떨어지면 목록에서 삭제되기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