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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한 친구에게서 아주 오래되었지만 걸작으로 여겨지는 매우 귀중한 그림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은 색이 약간 바랬고 군데군데 얼룩과 갈라진 부분이 있지만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분명 당신은 그 그림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매우 귀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대속으로 주신 것을 보면 우리의 생명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 3:16) 여호와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시 36:9) 사도 바울은 그 점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5, 28) 따라서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합니다. 그분은 사랑 많으시게도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주십니다. (사도 14:15-17) 하지만 여호와께서 우리의 생명을 기적으로 보호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신체적, 영적 건강을 돌보기를 바라십니다.—고린도 후서 7:1. 「파23.02」 20면 1-2항 |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as certain also of your own poets have said, For we are also his offspring. —사도 17:28. Barnes' Notes on the Bible For in him we live - The expression "in him" evidently means by him; by his originally forming us, and continually sustaining us. No words can better express our constant dependence on God. He is the original fountain of life, and he upholds us each moment. A similar sentiment is found in Plautus (5, 4,14): "O Jupiter, who dost cherish and nourish the race of man; by whom we live, and with whom is the hope of the life of all men" (Kuinoel). It does not appear, however, that Paul designed this as a quotation; yet he doubtless intended to state a sentiment with which they were familiar, and with which they would agree. And move - κινούμεθα kinoumetha. Doddridge translates this, "And are moved." It may, however, be in the middle voice, and be correctly rendered as in our version. It means that we derive strength to move from him; an expression denoting "constant and absolute dependence." There is no idea of dependence more striking than that we owe to him the ability to perform the slightest motion. And have our being - καὶ ἐσμέν kai esmen. And are. This denotes that our "continued existence" is owing to Him. That we live at all is his gift; that we have power to move is his gift; and our continued and prolonged existence is his gift also. Thus, Paul traces our dependence on him from the lowest pulsation of life to the highest powers of action and of continued existence. It would be impossible to express in more emphatic language our entire dependence On God. As certain also - As some. The sentiment which he quotes was found substantially in several Greek poets. Of your own poets - He does not refer particularly here to poets of Athens, but to Greek poets who had written in their language. For we are also his offspring - This precise expression is found in Aratus ("Phaenom.," v. 5), and in Cleanthus in a hymn to Jupiter. Substantially the same sentiment is found in several other Greek poets. Aratus was a Greek poet of Cilicia the native place of Paul, and flourished about 277 years before Christ. As Paul was a native of the same country it is highly probable he was acquainted with his writings. Aratus passed much of his time at the court of Antigonus Gonatas, king of Macedonia. His principal work was the "Phoenomena," which is here quoted, and was so highly esteemed in Greece that many learned men wrote commentaries on it. The sentiment here quoted was directly at variance with the views of the Epicureans; and it is proof of Paul's address and skill, as well as his acquaintance with his auditors and with the Greek poets, that he was able to adduce a sentiment so directly in point, and that had the concurrent testimony of so many of the Greeks themselves. It is one instance among thousands where an acquaintance with profane learning may be of use to a minister of the gospel. 반스의 성경 주석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 - “그분 안에서”라는 표현은 분명히 그분, 즉 우리를 지으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분에 의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의존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매 순간 우리를 지탱해 주십니다. 비슷한 정서가 플라우투스(5, 4,14)에서도 발견됩니다: “오 주피터여, 인간 종족을 소중히 여기시고 기르시는 분, 우리가 살고 모든 사람의 생명의 희망이 그분께 있나이다"(쿠이노엘). 그러나 바울이 이것을 인용문으로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 그들이 익숙하고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말하려고 의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다 - κινούμεθα 키누메타. 도드리지는 이것을 “그리고 움직인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동사는 중간 음성으로 우리 버전에서와 같이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에게서 움직일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지속적이고 절대적인 의존”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사소한 동작을 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그분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 καὶ ἐσμέν 카이 에스멘. 그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속적인 존재”가 그분께 빚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선물이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그분의 선물이며, 우리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존재 또한 그분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가장 낮은 생명의 맥동에서부터 가장 높은 행동의 힘과 지속적인 존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분께 의존하고 있음을 추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의존성을 더 강조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 또한 - 어떤 것들처럼. 그가 인용한 정서는 여러 그리스 시인들에게서 상당 부분 발견되었습니다. 너희 시인들 중에서 - 그는 여기서 특별히 아테네의 시인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글을 쓴 그리스 시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의 자손이니라 - 이 정확한 표현은 아라투스(“페이놈”, 5절)와 클린투스에서 목성에 대한 찬송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의 동일한 정서가 다른 여러 그리스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아라투스는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출신의 그리스 시인으로, 그리스도보다 약 277년 전에 번성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라투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고누스 고나타스의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주요 저작은 여기에 인용된 '페노메나'로, 그리스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어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주석을 썼습니다. 여기에 인용된 정서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연설과 기술, 그리고 그의 감사들과 그리스 시인들과의 친분은 그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정서를 제시할 수 있었고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시에 증언할 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불경한 학문을 아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수천 가지 사례 중 하나입니다. |
인간의 모든 사소한 동작과 활동 자체가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분리된 나 개인의 존재란 단 0.1% 도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모든 사물과 인간은 하느님의 양태(mode)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을 현상으로 나타낸 것이 자연과 자연 안의 모든 사물인 것이다. 이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핵심 교리이며, 심지어 유대교인이 아닌 이교들에게서 조차도 이러한 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바울의 이어지는 말에서 나타난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의 자녀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에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선천적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 근본적인 사실로부터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출발이 되며 어떤 미래를 바라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르는 윤리와 도덕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철학이 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한참 동안 어떤 논리나 도덕을 논하다가 나중에 비로소 신을 들먹거리는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리나 철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그의 윤리학을 다룰 때 맨 먼저 신의 본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 여럿이 존재할 수 있는가 또는 하느님은 왜 완전한가, 그리고 그가 유한한 존재라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가를 아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매우 핵심적인 중요한 명제를 제 1부 정리 15에서 선언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 1부 정리 15: 존재하는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다. 우리의 존재가 100% 신에게 의존되어 있으며 이 사실을 떠나서 우리의 존재는 아예 생각조차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성서 본문인 바울의 말보다 더욱 확연하게 표현되고 있다. 비록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 까지는 인정하더라도 정말로 나의 모든 세부적인 동작이나 생각, 이를테면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조차도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결정조차도 스피노자는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들어설 여지라고는 바늘 구멍 만한 틈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바꾸어 생각하면 이 사실로부터 인간에게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 의지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지금 존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결정하는 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고 나에 의해서 미래의 예정이 성립되기 때문이 내가 곧 예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정과 자유 의지는 서로 평행하면서 모순되지 않을 뿐더라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의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하느님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 우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우리 조상의 믿음과 발자취를 세밀하게 살핌으로써 최선을 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수동적으로 기다려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건설할 주체가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
질문:
1.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2. 예정과 자유 의지는 모순되는 것인가?
첫댓글 새벽에 작성해놓고서는 올린 줄 알고 자꾸 잊어버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