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뿌리로 자란 필리핀 아이돌, 세계서 통했다
빌보드 7주간 1위 화제 ‘SB19’
한국기획사+현지인 멤버 조합
“4년 훈련 내내 악플 시달렸지만 꿈 향해 달리니 이젠 롤모델로”
팝계에 파란을 일으킨 필리핀 아이돌 그룹 SB19은 “케이팝 역시 세계시장에 매력을 증명하는 데 시간이 걸렸듯 피팝(P-pop) 역시 이제 막 우리가 문을 열었고 긴 여정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스텔(보컬), 파블로(랩, 리더), 저스틴(보컬), 켄(보컬), 조시(랩, 보컬). 쇼비티 제공
10년 전만 해도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 정상을 밟으리라 예측한 이는 거의 없었다. 몽상가들의 입지전은 기적이 완성된 후에야 기록될 뿐이다.
필리핀에 다섯 청년이 있다. 그들의 도전은 처음부터 비웃음만 샀다. 케이팝이 부상할 때조차, 동남아시아는 영원한 팝의 변방이라고, 소비국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필리핀 신화 속 괴물인 마나낭갈은 자신의 신체를 분리합니다. 상반신이 하늘을 날 때도 하체는 땅을 딛죠. 저희 노래 중 ‘Mana’가 그에 관한 곡입니다. 저희도 마나낭갈처럼 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것을 다짐합니다.”(파블로)
4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 스튜디오. 옹기종기 모여 앉은 20대 남성 다섯 명의 얼굴은 앳되고 태도는 겸손했다. 하지만 눈망울과 입담에는 활기를 넘어 도전자 정신이 넘실댔다. 동아일보와 화상 독점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그룹 SB19(파블로, 조시, 스텔, 켄, 저스틴). 동남아 음악계 태풍의 눈이다. ‘피팝(P-pop·필리핀 팝)의 선구자’를 자처한 이들의 손에 동남아 팝의 역사가 새로 쓰인다.
지난해 미국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 아리아나 그란데 등과 ‘톱 소셜 아티스트’ 후보에 올랐다. 이 시상식에서 동남아 가수가 후보에 오른 것은 최초다. 지난달엔 빌보드 ‘핫 트렌딩 송스’ 차트에서 신곡 ‘Bazinga’로 7주간 1위에 오르며 방탄소년단의 ‘Butter’가 가진 최장기 정상 기록을 잠시 꺾었다.
“빅뱅과 소녀시대의 팬으로 시작해 방탄소년단의 ‘봄날’을 듣고 ‘Danger’의 춤을 따라하며 연습했습니다.”(파블로)
2018년 데뷔한 SB19은 케이팝 노하우와 필리핀 인적 자원의 결합이다. 한국 연예기획사 쇼비티가 필리핀에 진출해 현지 인재를 뽑아 훈련시켰다. 그룹명의 ‘19’은 한국(82)과 필리핀(63)의 국제전화 국가번호의 각 자리 숫자를 더한 숫자. ‘SB’는 피팝 사운드의 한계를 깬다(‘Sound Break’)는 포부.
꿈만 같을 뿐 다섯 명의 출발은 달랐다. 성격, 음악 취향, 배경은 물론이고 출신지도 민다나오섬의 카가얀데오로부터 마닐라 인근 말라본까지 제각각.
“다른 섬에서 와 각자의 방언을 쓰던 저희는 연습생 신분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겹게도 다퉜죠. 이젠 다섯 개성이 색깔처럼 조화를 이뤄 SB19의 음악 세계를 만듭니다.”(파블로)
래퍼이자 리더인 파블로가 작사 작곡을 한다. 멤버 전원이 함께 안무와 뮤직비디오 콘셉트를 만들어간다.
“4년 가까운 훈련 기간, 데뷔 초기까지도 저희는 주변의 수많은 의구심과 악성 댓글에 시달렸습니다. 친구들처럼 고교 졸업 후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죄송했죠. 때로 돈이 없어 길에서 자고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신뢰하며 허황돼 보이는 꿈을 향해 달렸습니다.”(조시)
결국 드라마를 써냈다. 최근 필리핀에는 SB19을 롤모델로 한 그룹이 잇따라 출현한다. 다섯 청년이 꿈에만 그린 ‘피팝 월드’가 열린다.
“필리핀에는 노래와 춤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그간 우리 대중문화계가 정치와 유착하거나 일부 기업의 독과점 문제를 겪으며 정체해 있었을 뿐이죠. 이제 시작입니다.”(파블로)
SB19은 21일 0시 10분(20일 밤 12시 10분)부터 KBS 1TV에서 방영하는 한-아세안 온라인 음악 축제 ‘ROUND in Korea’를 통해 한국 공중파에 처음 출연한다.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등 11개국 대표와 한 무대에 선다.
임희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