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의 순서 / 구석본 음식이 나오면 나의 냄새를 지워야 한다 스테이크 냄새만 풍겨야 한다 죽은 것의 죽은 냄새만 풍기는 시간이어야 한다 허기를 숨기고 나이프로 천천히 고기를 썰어 놓아야 한다 그다음 와인 잔을 들어 앞에 앉은 그대와 함께 ‘위하여’를 외친다 ‘무엇을’이 생략된 ‘위하여’는 허공을 맴돌다가 식탁 조명의 그늘 안으로 슬며시 숨어들고 웃음 안에 숨겨 두었던 야성이 깨어난다 침묵이 육즙처럼 흐르는 동안 생략된 (무엇을)에 (나), (너), (우리)를 한 번씩 번갈아 넣어보면 이번에는 함께 외치던 ‘위하여’가 생략된다 미완의 건배사를 입속으로 삼키면 다시 솟는 허기, 칼과 포크를 들어 생략된 그 무엇을 노리면 서로가 안으로 삼켜버린 그 ‘무엇’이 홀로 냄새를 피운다. — 계간 《詩로여는세상》 2024년 봄호 ----------------------
* 구석본 시인 1949년 경북 칠곡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75년 《시문학》 등단. 시집 『지상의 그리운 섬』 『노을 앞에 서면 땅 끝이 보인다』 『쓸쓸함에 관해서』 『추억론』 산문집 『시야, 다시 그리움으로』 『언어의 안과 밖』 등. 1985년 〈대한민국문학상〉, 2000년 대구문학상, 2008년 대구광역시문화상(문학부문) 등 수상 고등학교 교사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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