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윤영수 지음 / 지식파수꾼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개의 눈길이 있다. 남겨진 기록을 정면으로 꼼꼼히 바라보는 눈길이 있고, 기록의 이면을 찾아 분주하게 두리번거리는 눈길이 있다. KBS <역사추적>의 작가 윤영수는 두 번째의 눈길로 역사를 바라보았고, 기록의 이면을 찾아 수많은 자료를 퍼즐게임 하듯이 맞추어 큰 그림을 완성하였다. 또한 추적과 추리가 더해진 역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하고, 사진과 자료를 덧붙여 당대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①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신라 문무왕의 비문을 살펴보면 '투후 김일제'라는 인물과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던 박혁거세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국 서북 지역의 감숙성 무위시는 과거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400여 년간 몽골 고원과 만리장성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북방 민족인 흉노의 땅으로 그 중심 공원을 살펴 보면 투후 김일제의 석상이 서 있다. 원래 김일제는 흉노의 태자였는데 한 무제를 암살하려던 반란 세력 진압에 큰 공을 세워 한 무제가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으로 임명하는데 이때 부여된 직책이 투후였다.
성한왕은 문무왕과 그의 동생 김인문의 비석에도 또렷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 문헌이나 자료를 보면 문무왕의 15대 조상이자 흥덕왕의 24대 조상으로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성한왕은 투후 김일제의 7대 후손이라는 것이다. [한서] '김일제 전'을 보면 김일제가 김씨 성을 얻게 된 경위가 나오는데, 김일제가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흉노족의 자손이어서 중국에서 최초로 김씨 성을 갖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흉노족이 신성시한 황금은 북방 기마민족 흉노를 상징한다.
신라를 연 김알지와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알타이 산맥에 주목해 알타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금산(金山)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알타이 옆으로 흐르는 강을 아르치스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에서 '알지'라는 단어가 생성됐다고 보고 있다. 그 밖의 무덤양식, 흉노와 신라에서 사용되었던 동전 등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신라와 흉노가 연관성를 갖고 있다. 즉, 신라는 흉노의 후손이 세운 국가라는 것이다.
②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임금의 수라를 맡은 기구는 이조 산하의 사옹원이 중심이 되어 내시부와 내명부도 함께 만들었다. 수라를 맡은 최고 책임자는 종2품의 상선내시였다. 궁중에서 요리를 맡은 인원은 모두 400여명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왕과 왕비, 세자궁 등의 요리를 만들었으며 남녀의 성비는 14대 1정도였다. 수라간의 요리사들을 남자 위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왕의 신변보호라는 특수한 임무도 병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③그녀는 왜 죽음 택했나?
경남 창원에서 발견된 15호분에서는 순장된 것으로 추정이 되는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들은 1500여 년 전 가야인들로 추정되고 있다. 순장묘가 유독 옛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사라진 한시적인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순장은 전통적으로 유목민 풍습으로 한반도 남쪽 옛 신라와 가야 지역에만 한정돼 나타나고 있는데, 북방 유목문화에서 유입된 외래문화로 보인다. 신라 지증왕 때 순장제도를 전면 금지하고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 대신 토용을 대신 묻는 풍습이 이때 생겼다고 한다.
④남한산성에는 거대한 무기고가 있었다
조선의 성으로 알려져 있는 남한산성 터에서 신라의 기와가 다량 출토되어 이를 분석해 본 결과, 보통 조선의 기와는 아무리 크다 해도 40센티를 넘지 않는데 비해 여기서 출토된 기와는 63센티에 이르렀으며, 두께도 보통의 기와가 2센티 내외인데 반해 6센티의 두께를 갖고 있었고, 무게 역시 20킬로(보통은 4~5킬로)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곳에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남한산성은 축조방식으로 보았을 때 전형적인 7세기 통일신라 성벽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문무왕 때 한산주에 주장성이라는 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유사한 크기의 성을 찾다 보면 남한산성 밖에 없다. 또 기와에서 나온 명문 마산정(麻山停)이라는 글자 중에서 정(停)이라는 글자는 신라의 군사 조직을 가리키는 단어다. 건물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분석해 본 결과, 660년~880년 사이로 나왔는데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이 지금의 남한산성 자리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시기와 일치한다.
백제와 고구려를 굴복시켰지만 신라의 통일 대업은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 찾아 왔다. 당나라 주력군이 평양에 주둔 하면서 한반도를 삼키려 하자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선택한 것은 선제공격이었으며 임진강 이북에 형성된 전쟁터에 무기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무기고가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⑤의자왕 항복의 진실
중국에서 '백제'와 '웅천인(충남 공주)'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비명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예식진은 백제의 장군이었다. 백제 최후를 기록한 각종 기록을 보면 의자왕이 여러 성주들과 함께 항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및 <당서> 보다 200여 년 앞서서 기록된 <구당서>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의자왕의 항복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항복의 주체가 의자왕이 아닌 의자왕의 부하인 예식(예식진)이 주체가 되어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김일제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예식진의 묘비명에 김일제와 비교하는 문구가 나오는데 "김일제의 공을 어찌 예식진의 공에 비교할 수 있을까?"라고 언급하고 있고, 민족사학자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동맥이 끊이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여 가니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예식진이라는 장수는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 소정방에게 의장왕을 넘겨주고 당나라 장수가 되었던 것이며 결코 의자왕은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⑥그들이 대마도로 간 까닭은
서기890년대 대마도는 자주 출몰하는 신라해적으로 상당히 곤란을 겪었다. 당시 대마도는 은이 채굴되어 신라에 공물로 바치기 시작했는데 해적들이 침공한 지역도 바로 은광산과 매우 가까웠다. 신라 해적을 지휘하는 장군은 3명이었으며 그 중 한 명은 당나라 사람으로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과 같은 크고 작은 변란이 자주 일어나 나라가 아주 어수선하여 어디든지 이주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특히 신라의 서남해안은 섬이 많아 은신하기 좋고 신라의 중앙 권력이 미치지 않아 후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당나라 사람이 우두머리로 활동할 개연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근거지는 해류의 영향과 활동성을 감안해 보았을 때 대마도와 가까운 거제도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900년 후백제가 등장하면서 신라해적이 후백제 세력으로 흡수됨에 따라 이후부터 신라해적이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⑦이순신의 사람들
녹도만호 정운의 전시준비상태는 이순신을 탄복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인 해전이었던 옥포해전, 한산해전, 부산포 해전은 정운이 최선봉에 서서 가능할 수 있었다.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49세의 나이로 절명했다. 그의 위패는 현재 전남 고흥군 녹동항의 쌍충사에 안치되어있다.
47세에 전라 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고흥에 살고 있던 78세의 정걸이라는 인물을 찾아간다. 그는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퇴역 장군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선배 장군을 지침을 받고자 이순신이 찾아 갔으며 정걸은 이순신의 조방장 자리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고 한다. 조방장이란 장수의 자문역으로 이순신은 정걸을 영공(令公)으로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이순신과 정걸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29회나 나오는데, 정걸은 원로로서 뒷짐을 지고 자문만 구한 게 아니라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여 왜군을 맞기도 하였다. 특히 행주산성 싸움에서 전투 보급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뤄낸 인물이 정걸이라고 한다. 그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도 전투에 참여했다 전사했다.
송대립, 송희립 형제는 부산 해전에서 일찍이 전사한 정운 대신 이순신의 최 측근이 되어 전란 내내 이순신과 함께 했다. 이순신 최후의 현장에 이순신의 아들, 조카와 바로 송희립이 있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쓰러지자 송희립은 그의 죽음을 감추었고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대신 독전고를 울렸다고 한다.
⑧왕을 움직이는 것은 백성이다
흑산도 주민 김이수라는 인물이 정조 임금에게 탄원을 넣어 이를 관철시킨 내용으로, 당시 가혹한 세금으로 주민들을 괴롭히자 가혹한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김이수는 흑산도민을 대표해서 나주목으로 향했다. 닥나무세의 폐단을 바로 잡아 흑산도의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흑산도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이수는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격쟁제도가 있음을 알고 한양으로 올라가 행차 중인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민원을 제기했던 것이다. 사건 발생 후 현장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최종 결정을 내려 닥나무세금폐지를 이끌어 낸다.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저자 윤영수는 1964년 생으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KBS [역사의 라이벌], [소설 목민심서] 등을 집필했고,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 기획, 대본 작업에 참여했다. 역사 드라마 [명가(名家)], 특별기획 [자유인 이회영]과 [역사스페셜], [HD 역사스페셜], [한국사전], [역사추적] 등 50여 편의 역사 다큐멘터리, [환경스페셜], [KBS 스페셜], [KBS 차마고도: 극장판] 등을 집필했다. EBS [역사극장], [문학산책], [화인], [개항과 전쟁], MBC [반달가슴곰], [약초전쟁] 등 150여 편의 다큐멘터리와 뮤지컬 [논개], 희곡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