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성 함락후 홍계훈과 전봉준의 동학군은 작은 접전이 많았고 적으나마 피해를
보고있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
"신들은 동의 할수없나이다!"
"그럼 淸군 을 불러들이자는것인가?"
:전하! 청군을 불러들인다는것은 일본을 자극하는일이옵니다!
김병학
그렇다면 일본군을 불러들이자는것이오이까
최익현: 좌상 대감?
"어전입니다! 언성을 낯추시지요."
"죄송합니다 마마...."
:전하 지금 홍계훈에게 파발을 뛰어 전주에서 화약을 맺게
민태호 하소서!
※화약=화해하는것을 약속하는것
"좋소 그리합시다..."
다그닥 다그닥!
"어명이요!"
:이런,,,전하와 마마께서 고중이 크시군아 여봐라!
전봉중에게 할말이있다 전하거라
이렇게 관군 장수와 동학군 총사령관 이 만나게된다.
:날 보자하셧소?
:전봉준... 그대는 이 전란을 어떻게생각하오?
:우리 농민들과 백성들은 싸움을 바라지않소 그렇지만
우릴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 탐관오리와 권력층들에 맞설뿐이오
우린 폭도가 아니외다 우린 혁명군이요
:그대들....화약 하시겠소?
:당치 않는소리! 당신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해코지하는걸
보고 만있으란거시오?
:지금 조정은 일본군이냐 청군이냐 이런 논의나 하고있소
만약 당신들이 싸우겠다면 싸워주겠소 하지만 화약한다면
요구의 다반수는 모두 들어주겠소
:그럼 내말하리다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숙원을 없애고 공동으로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 처리할 것,
③ 횡포한 부호를 엄중히 처벌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게 한 평양립(平壤笠)을
폐지할 것,
⑦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가할 것,
⑧ 무명의 잡부금을 일절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일본과 상통하는 자를 엄벌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면제할 것,
⑫ 토지는 균등하게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이다.
:이...이건.
"아따 못해주겠다는거유?"
:개남아!"
:자넬 다시 봤소 좋소 들어드리리다.
:고맙소이다. 우린 이제 해산하겠소 하지만 외적을
불러들이거나 또다시 고통받는 백성이있으면 우린 다시
일어날것이요
1894년 6월, 전주(全州)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이 관군과의 휴전조건으로 제시한 12개 조항의 정치개혁안이다.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관군의 반격으로 5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데 이어, 청군(淸軍)과 일군(日軍)이 개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리한 데다가, 청 ·일 양군이 충돌 직전에 있는 위급한 시기에 정부군과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선무공작에 순응하고, 폐정개혁안의 수락을 조건으로 강화하고 전주성에 철병하였다.
동학은 이를 실시하기 위하여 전라도 53개군에 집강소(執綱所)라는 일종의 민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동학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을 통하여 계급타파 ·인재등용 ·과부재혼 ·노예폐지, 탐관오리의 처벌, 천민차별의 철폐 등 그 일부가 수용되었다.
전봉준이 직접 재판했던모습
:지는 잘못이 없음매 저놈이 우리에게 뭔짓을 한줄 암매?
노비라 카고 매일 매질을했음매 내딸은 저놈에게
능욕당하고 참을 부모가어디있매?
:거...거짓말이야!
"닥쳐라!"
:이런 미친놈들! 니놈들이 죽을려고 작정을 했구나?
훗날이 두렵지않더냐!
전봉준은 주변 집강소들에 글과 언변에 재능있는 노비.농민.중인들을
두어 재판하게했으며 양반들은 재판에서 불리했다.
그들의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었고 죄를지은 양반은 응분의 댓가를 받았다.
하지만 에피소드도있는대 정말 정직하고 인품좋은 양반의 노비들은
주인을 떠나기 싫다며 노비문서를 불태우지말아달라했다는 말도있다.
그런 양반들은 상을 주었다.
전봉준의 이런행동으로 인해 돈많은 양반들과 신하들에겐
공동의 적이었다.
이러한 시국 일본과 청국은 고민에 빠지게된다.
淸
전주 화약후 청에서는 넘버원인 이홍장의 조선의 문제
에대한 해결책을 기다리고있었다..
"대인 이제 어떡게할까요?"
"차분히 기다리게 갑신년때 정변을 제합한건 우리야
아무리 우리가 이빨빠진 호랑이지만 발톱은 남아있다는걸 보여줬잔나"
(500명대 3000명인대?)
좀있으면 소식이오겠지 그때 출병한다!
日本
메이지 천황
"우리가 이제 손을 쓸수도 없게됬군 이토"
"폐하 신만 믿으소서..."
이토 히로부미는 은밀히 군대를 조직 텐진조약을 명분으로
조선으로 건너갈 생각을했다.
텐진조약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는 청·일 양국 간의 교섭을 통해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입장을 더욱 유리하게 전개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일 양국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신으로 하여 톈진에서 회담, 이른바 톈진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하 홍계훈도 없는지금 또다시 정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이홍장을 불러들이세요."
"알겠소.. 청군을 부릅시다."
이 선택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시작이었다.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텐진조약에 의하여 조선에서 청 ·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아니 왜 일본군이 들어온것이요?"
"텐진 조약을 잊었소이까? 하하하!"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전하 지금 형국이 어수선합니다 저희 일본이 도와드리지요"
"닥치시오! 농민군도 해산했고 이제 자네들은 없어도되오."
"아이구 저런 전란통에 정신도 혼미해지셨군요 저흰 도우러 온겁니다
미우라!"
순간 대기하고있던 일본군 수백명이 궁을 들이닥쳤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이게 무슨짓이냐!"
"전하~ 전하께서 심신이 고달프신거같습니다?
아버님께서 잘하실겁니다 하하하!"
(개색기들)
"아버님... 이런분이셨습니까? 권력이 탐났습니까?"
대원군은 말이없었다.
"............."
그리고...
"당장 전군에 일러 작전을 개시하라! 청군을 모조리 분쇄하라!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 당시 일본은 청국이 북양함대의 군사력이 증강이 미진한 사이, 자력으로 건조한 순양함,
철 갑함 다수를 포함하여 1894년 당시까지에 55척, 6만톤의 대해군을 건설하였다.
특히 북양 함대에는 1문도 없었던 최신의 속사포 155문을 갖추었다. 그 결과 1884년의 시점에
일본해 군은 북양함대에 비해 주력함의 평균시속이 1해리 빠르고 평균선령도 2년이 적었으며,
포 의 발사속도도 4-6배 우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고
7월 30일 아산을 점령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 15일에는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평양을 지키고 있던 청군 1만명을 패퇴시켰으며,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즉,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뤄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장군님!"
"일어나라 구국의 백성들이여!"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30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조종을 받는 조선 조정은
관군을 일본군과 함께 내려보낸다.
전봉준은 중대한 실수를 하게되는대 군대를 나눈것이다.
이들은 남쪽 의 후한을 없애기위해 전라 좌수영을 공격했지만 싷패
어쩔수없이 그냥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농민군은 4방향 동서남북 모든 쪽에서 공격하려했지만 북군이 깨지면서
작전은 틀어진다.
일본군과 관군은 4곳에서 최후의 방어진을 짜게되고..
최신식 기관총까지 동원하여 올라오는 농민군을 사냥하였다.
12.5 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무수히 죽어나아갔지만
그들은 애국심과 굳은의지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임하였다
도망가는자는 없었다.
전투과정을 지켜보던 전봉준은 눈물을 흘렸다
"아 이렇게 끝나고마는가..."
2만5000에 달하던 중앙군 전봉준의 휘하 병사들은 모두죽고
2차접전후에는 500명밖에 남지않았다.
전봉준의 절친이었던 김개남이 잡히고.
나라에대한 개념없는 양반들은 그들을 욕하기 바빳다.
순창의 한 주막
"이보게 경철이 자네가 날 좀도와주게"
"어쩌나? 나는 자네를 잡아야 쓰것는디?"
휘익!
쾅!
"전봉준! 나와!"
전봉준은 재기를 하려했지만 체포되고맙니다..
손화중도 잡히고 이들은 죽는날만을 기다리게됩니다.
전봉준 은 다음해 1895 년 4월 23일 처형 , 효수 되었다 .
전봉준 장군의 묘소입니다
정말 초라한 묘소...
눈물이나네요
정말 대단하신분인대.
1894년 12월 2일 동학농민군 전봉준 장군은 순창 쌍치 피노리에서 피체되어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최후를 마쳐 이곳 장내리 조소마을옆 야산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던 선생의 묘를 1994년 복원, 전봉준 선생단소로 단장되어 관리되어오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부친 전창혁 묘가 있다.
(베일에 감춰졌던 동학군의 전라 좌수영공격)
이다음글에 싣겟습니다.
자! 이제 끝을내야죠?
제가보기엔 전봉준은 민주투사였으며 공산주의자 입니다.
그는 정직햇고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생각한 의인입니다.
조정은 자신의 팔을 자른것이되었습니다.
이제 거칠것이없어진 일본놈들은 중전민씨 를 살해하게되고
아관파천한 고종을 대포로 협박하고
(아무튼머 자기가저지른일이니)
전라디언 전라디언 이런 저속하고 불결한말은
정말 일본놈이나 하는말아닌가요?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전라도를 지킨 이순신장군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질좋은 쌀을 생산하고있으며
통영 같은대에서는 우리가 항상먹는 김을 생산합니다.
전라도사람들은 정말 인심좋고 허울없는사람들입니다.
"지방놈. 지방에서온주제에" "촌놈"
예 저도 이런말 많이했습니다.
근대 전봉준을 자세히보고 광주 민주화를 보니 제자신이 미쳤었구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이말은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영령들을 욕되게하는것이지요
이제라도 전라도 사람들을 욕하지맙시다.
그들 덕분에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가있는것이니까요/.
첫댓글 12월에 전라도에내려가 녹두장군 묘소를들려 절을 하고올려합니다. 농민군의 숫자는 우리나라역사상 고려 조정에서모은 30만(물론 거란성종에게 털렸지만)이후 가장많은 숫자였습니다.
그치만 그많은수가 무장하기엔 턱없이부족한 병기때문에 하나의 패전원이이되지요
백성들의 우상 그는 우금치에서 않되는 싸움을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를 욕하지않았고 슬퍼해주며 심지어 노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노래로남은 영웅이지요
근데 공산주의자라고 하긴 조금 의문이 사실 전봉준장군은 청일전쟁 당시는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임진왜란을 룰모델로 삼았었죠 하지만 청나라가 너무 쉽게 발려서 병력의 여유가 된 일본군이 쉽게 격파가 되었구요 동학농민운동에대해서는 일부가 소설을 기초로한 그글에서 퍼온것도 있어서 공산주의자라고 하긴 어렵내요 공산주의자라면 왕실척결인데 왕실척결을 할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녹두장군요 자기가 양반자제가의 출신이였다고강조한 것도있었지요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는점에서 공산주의자아닐까요?ㅋ
그리 단순하게 말할만한게 아닌듯한데요; 그런개념이면 정약용도 공산주의자군요;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일단 계급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승만도 공산주의자...
통영은 전라남도와 가깝긴 하지만 경상남도입니다. ㅋ 뭐 남해전지역에서 김양식 하니깐 말씀하신 요지는 틀린게 아니네요 ㅎㅎ
폐정 개혁안 저거 말들 많던데 가짜다 진짜다하고 말이죠
고종이랑 민비가 쳐죽일 놈 맞죠. 광주사태보다 한 10배는 큰 스케일이니까 형량으로 치면 대한민국개가라있으나마나 법률로 쳐도 한 150년형이네요. 유럽이었으면 한 1500년형쯤 될듯. 프랑스였으면 걍 민씨성만 써도 다 사형. 저런 개호로새퀴들을 뮤지컬 만들어준 똘추들이 문화컨텐츠의 신주류랍시고 들이찬 형국이나(뭐 얘네들도 따지고보면 386세대) 386일부가 환국떡밥이나 풀고 있는 짓거리나 다른데서도 말했지만 얘네들은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무식함.
전라도 얘기 나와서 걍 하는 얘긴데... 저는 뼛속까지 경상도 사람인데, 광주 사람을 좋아합니다.. 광주 아가씨들이 유독 저한테 잘 대해주더군요...
서울 여자들보다 좋조...참고로전 서울사람입니다 ㅎㅎ
ㅋㅋ 전 경북사람이지만 제일 친한 친구가 광주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