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남편과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라파엘로부터 전화가 왔다.
"갓등 중창단 녹음을 위해 안산에 가야하는데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보다 밤에 그냥 거기 가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남편이 들을새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태워다 줄께."
집에 10시 가까이 되어서 귀가.
준비를 끝낸 라파엘이 짐을 들고 내려왔다.
"가자!"
10시 40분에 도착 예정이다.
운동하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늦은 밤이긴 하지만 난 운전에 자신이 있다.
"라파엘! 우리 성당은 보좌신부님이 계시니
강론할 기회도 없고 하지만
나라면 어떤 강론을 할까 항상 묵상해 뒀으면 좋겠어."
"난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니까
그것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 숨쉴 지가 강론 내용일 것 같아."
요즘 내 말에 대꾸를 할 때보면
엄마를 가르치려고 하고 날 선 비판을 할 때도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이젠 엄마가 신자로 보여서 조언이나 건의가
신학생 가슴에 어리석은 간섭이나 노담으로 여겨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훌쩍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거니 싶어 안도한다.
"캠프를 준비하다보면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쉬워.
그냥 신부님의 입만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요."
"그건 신부님들이 만든 것 같아.
신자들이 참여하고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해도 묵살당하기 일쑤거든.
시노두스 운동도 자꾸 기도를 시키고 말씀 하시는데
엄마는 신자로서 신자들보다 사제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
예산을 쥐고 계시는 신부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결국 일을 추진하는 건 불가능 하잖아.
게다가 우리 교회는 순명이란 단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가르치기도 해."
"엄마가 회의에 들어와 보지 않아서 그래요.
회의때 모두 입을 꾹 닫고 있다니까."
회의 참여를 해보지 않고 볼 기회가 없으니 입을 닫았다.
"혹시 평소에 네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조언하시는 신부님이 계시거든
그분을 기억해두고 친교를 유지하고 지냈으면 좋겠어.
어른 신부님들의 노하우를 참고해서 살아가면 든든하지 않을까?!
엄마는 너랑 대화하면
신자인 내 소견이 상황고려를 안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결국 그럴 땐 같은 일을 이미 해보신 분들의 조언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봐. "
"난 기본적으로 울타리를 크게 치고 신자들이 교회에서 맘껏 뛰어 놀게 해주고 싶어요.
난 게으르고 편하게 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열심히 사는 게 좋아.
이게 내 십자가인가봐요."
밤 늦은 길 귀가하며 생각이 많았다.
대학원을 마치며 갓등 중창단 녹음에 최선을 다하는 라파엘의 방식에
그저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성직자가 되겠다고 그 길을 선택한 아들을 보며 나는 누구일까 묵상한다.
'엄마도 아닌 것이 엄마인 나.'
교회는 대학 2학년때 이미 통보했었다.
"라파엘은 이제 자매님의 아들이 아님니다.
교회의 아들입니다. "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세태를 감안하면
같은 일도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편가름하는
유능한 신자들을 모두 만족시키기가 얼마나 힘드 일일 지 알기에
엄마는 자꾸 미련을 갖고 뒤돌아 보는 것이다.
게다가 내 기도는 탐욕스러우니까.
'그저 직업처럼 사제를 살아서는 안돼.
사제답게 살아야 해."
크고 작은 일을 추진할 때 그 일이 나를 성장하게 하는 은총임을 잊지 않고
주님 안에서 기도로 의지하고 버티며 성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집에 돌아오니 12시 20분이다.
라파엘이 방학이 끝나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집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해주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남편은
"어제 거기까지 다녀온거야?"
"네."
지하철 역까지만 데려다 주면 된다고 그이가 엊그제 얘기 했었다.
그의 질문엔 지나친 모정이라고 약간 비난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허나 방학때마다 훌쩍 성직자의 길에 가까워지는 놀라운 영성변화를 체감하는 밤 데이트.
남편이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여름방학엔 초 중 고 청년들의 하계캠프 준비하고 캠프가 끝나면 개학이다.
이렇게 온전한 대화를 나눌 시간은 이런 때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자식의 독립은 자녀양육의 목표라고 한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라파엘의 삶에 개입할 여지는 이미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둘만의 소소한 대화를 통한 작은 이해로
내 기도는 걱정 내려놓고 평화속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