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엄 상익 변호사 에세이 갤러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황혼기에 들어선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볼 글이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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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즈음 한적한 해변 근처에 있는 실버타운에 묵으면서 글을 쓰고 있다. 살아 보니까 예전에 생각했던 양노원 개념과 전혀 다른 것 같다. 주거는 독립된 아파트와 같다. 밥은 공동식당에서 먹는다. 청소도 빨래도 해준다. 나를 묶는 규칙도 없다. 굳이 있다면 서로 서로 과거를 얘기하면서 잘난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말자는 불문율이었다. 인생의 노년은 세상의 기준이 모두 스러지고 평등한 세상인 것 같다. 공동식당 내 뒷자리에 앉은 여성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교감 선생으로 있다가 퇴직을 했어요. 혼자 사는데 아침이면 반찬을 사기 위해 마트에 가고 밥을 해야 했어요. 밥먹고 설거지를 하면 곧 점심시간이 다가와요.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면 다시 저녁을 해 먹어야 하는 일이 반복되더라구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싱크대 앞에서 해방되고 싶더라구요. 그러다 실버타운에 오니까 편해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 안에서 노년의 삶을 관찰하고 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은 연금이나 퇴직금으로 여생을 살 능력이 있는 중산층이 많은 것 같았다. 아직은 건강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보니까 늙어서도 일이 중요한 것 같다. 노년의 고통 중 하나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직장에서의 정년퇴직은 세상에서 퇴출당하는 것이고 사회와의 단절이었다. 나는 그들이 인생후반부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있다. 매일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미 그건 오락이 아니었다. 악기연주나 미술이나 문학은 오랜 시간 시간을 투자해서 그에 대한 지식이 제법 있어야 했다. 아무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노인들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늙어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지만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 출신의 노인이 요양원을 찾아가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신문을 읽어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여교사 출신 할머니가 유치원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걸 화면에서 보기도 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었던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지막에 되 갚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성취감과 기쁨을 보상으로 받을 게 틀림없었다.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팔십대의 노의사는 일주일에 이틀씩 이웃노인들의 진료를 맡고 있다. 죽을 때까지 현역인 것이다.
평생 해오던 자기 일을 계속하는 노인도 많다. 교대역 네거리에 있는 빌딩에는 매일 실버타운에서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팔십대의 변호사가 있다. 노인이 되었어도 그는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고등법원장 출신인 그는 돈을 떠나서 힘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늙어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은 돈을 떠난 작은 자선들이 아닐까. 자선은 꼭 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가능한 작은 자선이 많다.
실버타운에서 지팡이를 짚고 식당으로 가는 몸이 불편한 노인을 부축해 주는 걸 봤다. 동료 노인들에게 떡이나 귤을 돌리는 인정도 체험했다. 자선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돕는 것이다. 거창한 게 아니다. 자식이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노인에게 위로의 한마디도 자선이다. 검소하고 맑은 삶이 담겨있는 법정스님의 수필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빈의 기쁨을 주었다.
어떤 소설가는 자기 소설이 빵이나 밥이 되지는 못하지만 세상에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글은 펜으로 작은 선을 행하는 것 같다. 젊은 날 몸에 누추한 옷을 걸치고 판자집에 살면서 마음에 하늘의 복음을 안고 이웃에게 그 기쁨을 전했던 김진홍 목사도 선한 일을 한 사람이다. 자선은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오히려 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담당자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밥시간 이외에는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는 노인들이 있는데 도대체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관념이 젊어서부터 박히지 않으면 늙어서 작은 선한 일들을 하기가 쉽지 않다. 중학교 다니는 손녀가 나를 찾아왔다. 제일 반가운 손님이다. 아침에 일어나 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손녀를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다. 손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할아버지 ! 나 매일 수업이 끝난 후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쓰레기들을 치워보면 어떨까?”
“혼자만 그런 일을 하면 힘들고 시간을 뺏기지 않을까?”
“괜찮아 힘도 안 들고 시간도 몇 분 안 걸려.”
손녀는 이미 어떤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작은 선을 일찍부터 시작해서 평생 모으면 천국 영주권은 보장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