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비, 길이, 높이, 깊이
에베소서 3:14-2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0주일이다. 삼복 무더위가 계속된다. 게다가 프랑스 파리올림픽이 열려 많은 사람들에게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될 것이다.
개회식 하일라이트 장면을 보았다. 12년 전 영국 런던 올림픽 개회식이 문학을 소재로 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면, 이번 파리 올림픽은 과거의 영화롭던 프랑스에 대한 자랑을 엮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아우른 자산이 부러웠다.
아마 한국인들은 아직도 대한민국(ROK)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PRK)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럽인들의 무분별에 화가 났을 것이다. 언젠가는 남과 북이 합해 한반도 올림픽을 치룰 날도 올 것이다.
그나저나 간밤에 올림픽 펜싱 사브레에서 금메달을 딴 오상욱 선수 덕분에 약간 화가 풀렸다. 또 탁구 혼합복식 16강전에서 독일을 4:0으로 이겼다. 성큼 자란 신유빈이 주인공이다. 참 대단한 일이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은 기량이 자기 나라에서 최고 수준이다. 그들은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정확하도록 지난 4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된 선수들이다.
100년 전에 열린 파리 올림픽에서 현재의 올림픽 슬로건을 만들었다. ‘보다 빠르게(Dititus), 보다 높게(Aitius), 보다 힘차게(Fortius)’이다.
1)
오늘 에베소서 본문은 마치 올림픽 경주처럼 ‘너비, 길이, 높이, 깊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인생 역시 올림픽 경주와 같이 외로운 경쟁을 한다. 내 삶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와 씨름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내게 은총을 베푸시길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으로 나를 만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운동선수들처럼 남들과 경쟁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나를 개방하고, 나를 양보하고, 나를 낮춤으로써, 내게 베푸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내 삶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때는 사력을 다하는 올림픽 선수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본문은 바울의 중보기도의 내용이다. 바울은 모든 민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모든 창조물에게 이름을 주시듯, 나에게 고유한 인격과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필론은 “작품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나’라는 존재, ‘나’라는 작품, 곧 나라는 이름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손길이 깃든 그림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은 무엇인가? 장 라 프랑스는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음을 기뻐하는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찬양은 내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도록 인도한다.
바울의 중보기도는 인간의 겉모습이 아닌 속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마더 테레사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기도는 우리가 매일 섭취해야할 영양분이다. 겉모습, 내 육신을 위해 하루 세끼 일용할 양식을 챙기듯이,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하나님과 영적 대화가 필요하다.
속사람은 무엇인가? 바울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겉모습과 속사람이 있다. 겉모습은 누구나 보이는 그대로이다. 속사람은 겉모습으로 평가할 수 없다. 속사람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인격의 중심, 인간의 마음이다.
흔히 사람의 마음은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한다. 잘 다듬으면 그 값을 따질 수없을 만큼 귀한 보석이 되지만, 다듬지 않고 두면 쓸모없는 돌맹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한다는 것은 영적 성장에 관한 말씀이다. 겉모습이 커지면 다이어트를 한다. 속사람은 자랄수록, 충만할수록 유익하다. 성령은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도우셔서 강건한 삶을 누리게 하신다.
2)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혜 ‘은’(恩)자, 내리사랑 ‘총’(寵) 자를 사용한다. 은총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이다. 사람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사랑이다.
한마디로 ‘넘치는 충만’이다. 값없이 주시는 그 사랑은 내 속사람을 기쁨으로 채우고,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17).
예수 그리스도를 속사람, 곧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다. 바울은 뿌리를 박고, 터를 잡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모시고 그 사랑의 진실을 ‘너비, 길이, 높이, 깊이’를 깨달아 알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그릇을 헤아림만큼 채우라는 것이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오늘 성서일과 시편 본문에 따르면 어리석은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감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의 삶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 그 어느 지점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지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지각있는 존재를 찾으시고, 그는 지각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의 시선과 지각있는 자의 시선이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은 그 존재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을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지혜와 기도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의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 오래된 것인지, 높은지, 깊은지를 깨달아 알게 한다. 그 사랑의 광대함, 그 넘치는 충만을 누리게 한다.
바울은 이런 삶을 위해 기도한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엡 1:9-11).
‘너비’는 무엇인가?
흔히 인간관계가 좋고, 친구가 많은 사람을 가리켜 발이 넓다고 한다. 그 넓은 발을 이용해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하고, 즐거운 인생을 산다. 돌아보라. 그 넓은 관계망 속에서, 그 넓은 이해관계 속에서, 그 다양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느끼는가?
‘길이’는 무엇인가?
사람은 자신의 연륜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나 나이의 길이로 위, 아래를 따진다. 나이에는 달력 나이가 있고, 건강 나이도 있고, 자각 연령이 있는가 하면, 심리적 나이도 있다. 그래서 나이값을 하네, 못하네, 말한다. 돌아보라. 그 길이를 자랑하는 내 삶의 굽이굽이에서 나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느끼는가?
‘높이’와 깊이는 무엇인가?
누구나 높이를 추구한다. 한편으로는 깊이도 관리한다. 높이와 깊이는 모든 사람들의 양면이다. 한편으로 욕망의 실현을 위해 날마다 힘겨운 까치발을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의 속사람이 느끼는 갈증 해소를 위해 영혼의 두레박을 내리기도 한다. 나는 어느 높이에서, 어느 깊이에서 내 속사람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함을 찾을 수 있는가?
바울은 내 인생의 모든 지점과 영역, 한계와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도한다.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19) 구한다.
그러나 누구나 평생 깊이만 추구하는 수도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적 발전소는 필요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빛은 스스로 밝혀야 한다.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를 통해서 그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3)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20)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크기, 즉 ‘너비, 길이, 높이, 깊이’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대개 사람은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의 비중으로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가 없어지면 그 사람이란 존재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권력이, 경제력이, 모모한 능력이 그 사람이라면, 그 권력이, 그 경제력이, 그 모모한 능력이 없어지면 그 사람도 없어지는 것인가?
사실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존재 안에 있는 속사람의 크기이다. 속사람의 크기가 정말 그 존재의 크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큰 사람을 큰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이 큰 사람은 다른 이를 크게 한다. 사랑이 큰 사람은 다른 이도 살릴 수 있다. 사랑이 큰 사람은 자기 속사람이 자라도록 한다. 다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싹틔우고 그 사랑이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충만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라, 경험하라, 주신 만큼 품으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특별한 도를 닦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영적 지각이, 사랑의 지각이 예민할 필요가 있다.
어제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1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행동의 날’ 대회 참석을 위해 임진각에 다녀왔다. 행사 중 몇 차례 비가 긋고 지나갔다. 말 그대로 폭염도 장난이 아니었다.
임진각 평화의 종 앞 광장에서 파주, 동두천 접경지역의 목소리도 듣고, 통일대교까지 행진하였다. YWCA 참가자들이 가장 많았다. 새벽부터 광주에서 한 차로 왔다는 여성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더욱 평화를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내게 맡겨진 사명과 함께 늘 내 몫의 일을 고민한다. 평생 같은 걸음으로 주님의 평화를 향하는 일이었다.
늘 명심한다. 가짜 시대 정신에 영합하지 않고, 진짜 예수님의 뜻과 사랑, 충만하심을 구하는 일이다. 고마운 것은 내게 그런 일을 할 수단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번 여름에 내년도 공과를 주문받았다. 감리교 전국여선교회 월례공과와 기독교가정생활위원회 주일분 52일치이다. 이미 하늘양식도 4과를 집필하였다.
공과를 디자인하면서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성경의 12가지 주제로 복음서에서 찾아보았다. 그 너비, 길이, 높이, 깊이 그리고 충만하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갖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신다. 가족, 친구, 일용할 음식, 눈물, 아픔 그리고 말씀, 묵상, 그리움, 공감, 소망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먹기만 하면 내 삶의 어느 구석이든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의 중심은 모든 곳이고, 하나님의 경계선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내 삶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를 통해 하나님을 구하라. 찾으라. 그 충만하신 은총을 누려라.
하나님을 만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되어가고 무한히 커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은 내 속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런 속사람이 충만하기를!
하나님의 그런 충만하심이 여러분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