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봉 崔壽鳳(1894~1921)】「1920년 우편집배원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
1894년 3월 3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이명은 최경학(崔敬鶴)이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였고, 한문을 배웠다.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단군 관련 발언 등으로 퇴학당하였다. 1910년 사립 동화학교에 입학한 후, 교장 전홍표(全鴻杓)·교사 김대지(金大地) 등으로부터 항일의식을 키웠다. 1912년 동래 범어사의 불교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였다. 1913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중퇴하였다. 남만주로 가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7년에 평안북도 창성(昌城)의 사금광(砂金鑛)에서 광부로 근무하였고, 정주(定州)에서 우편집배원으로 일하다가 귀향하였다.
1919년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고인덕(高仁德)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가지고 돌아와 의열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20년 8월경 의열단원김상윤(金相潤)·이종암(李鐘岩) 등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을 계획하고, 고인덕으로부터 폭탄과 제조기 등을 받아 산속에서 폭탄을 제조한 다음, 송혜덕(宋惠德)에게 보관을 요청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 서장 와타나베 스에치로(渡邊末次郞)가 경찰들에게 훈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9시 40분경 밀양경찰서에 도착하였다. 폭탄 1개를 현관 오른쪽 창문 밖에서 경찰서 남쪽 유리창 안쪽으로 던졌고, 나머지 1개는 정면 현관 앞에서 복도를 향해 투척하였다. 하지만 1개는 불발되고, 나머지 1개는 위력이 약해 실내 물품 정도만 파손되었다. 탈출하다가 붙잡히기 직전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일제 순사가 읍내 병원으로 이송해 약 2주 후에 회생하였다.
1921년 2월 1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검사의 항소신청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그해 4월 16일 다시 사형을 받았다.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같은 해 7월 8일 오후 3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