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편____
은행을 손질하며
이향희
은행은 벤취 밑에도 사람들의 발 옆에도 계단에도 떨어져 있다. 심지어는 어떻게 예까지 왔나 싶게 나무와는 제법 먼 곳까지 떨어져 있다. 가급적이면 더 멀리 지경을 넓히고 싶었을까? 어미 나무의 양분을 뺏고 싶지 않은 효심이었을까? 열매들이 둥근 것은 번식을 위해 더 멀리 굴러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은행 역시 동그란 몸으로 열심히 굴러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껍질이 쭈그러든 것도 있고, 고무공처럼 탱탱한 것도 있다. 오가는 발길에 온몸이 으스러져 있는 것도 있다. 껍질이 으깨어져 있는 것은 냄새가 더욱 심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중에 똥냄새일까? 왜 껍질은 유난히도 부드러운 것일까? 그것 또한 번식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씨앗이 발아發芽를 위해선 껍질이 쉽게 까져야 할 테니 부드러운 것이고, 냄새가 고약한 건 혈액 순환에 좋은 성분이 많아 사람들이 다 먹어버릴까 봐 그런 것이라고.
씽크대에다 주워온 은행을 쏟아 부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열심히 으깨어 물을 붓는다. 찌꺼기와 알맹이를 분리하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어떻게 하면 쉽게 할 수 있을까? 문득 어릴 때 쌀을 일던 어머니의 조리질이 떠올랐다. 옛날 모양의 조리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 쇠그물로 된 건짐용 국자같은 걸로 대신했다.
소용돌이를 따라 가벼운 찌꺼기가 영락없이 걸려든다. 새삼 자신의 손놀림이 신기하다. 가볍게 손목을 돌리면 물살이 생기고, 조금 빨리 반복하면 소용돌이가 생겨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물살 따라 휘돌며 조리 안으로 걸려드는 것이다. 굳이 조리가 아니어도 좋다. 손잡이가 없는 소쿠리라도 훌륭한 조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이 새어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소용돌이
상대를 만난 싸움소마냥
원심력이 성깔을 부린다
멈추면 안돼
승부가 날 때까지
신명 오른 투우사
카포테 휘날리며 성깔을 휘젓고
유연한 손놀림이 부서진 힘의 파편을 낚는다
무거운 것은 무거운 것끼리
가벼운 것은 가벼운 것끼리
알맹이 가라앉히며
노란 회오리로 부유하는 껍질
조리 속에 낚여들며
마침내 갈라지는 알곡과 가라지
조리질 속에 나를 올려 놓는다
지키고 싶은 나와 버리고 싶은 나
카포테 휘날리며 나는 투우사가 된다
몸부림 치며 이지러지며
인생이 난무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현재진행형
내 안의 조리질
- 「조리질」 전문
욕심 낼 것과 버릴 것, 채울 것과 비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력. 무엇을 비우고 어떻게 채워야 하는 지를 실천하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한 가정의 가풍과 인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주부이다. 그러니 인품이나 마음가짐을 늘 가지런히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릴 적 우리네 어머니는 아침마다, 밥을 지을 때마다 곡식을 일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가족을 챙기고,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조리의 속삭임을 들으며 하루를 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리는 제齊 환공桓公의 ‘의기儀器’나, 가포稼捕 임상옥 선생의 계영배戒盈杯보다 훨씬 이전부터 주부 곁에 있는 ‘유좌지기有坐之器’였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기계로 다 골라낸다. 곡식이나 쌀을 일 필요가 없다. 조리도 잊혀진 지 오랜 이름이다. 기억의 저 바닥에 묻혀있던 조리질. 그 묵직한 울림을 유좌지기로 가슴에 새긴다. 누구였을까? 맨처음 조리를 만든 그는.
이향희 /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공저 『대한문학작가 선집』, 『일산에세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