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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73회>
왕건이 유금필을 곡도로 유배보내자 갈등을 빚어오던 신료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고 왕건의 숨은 의도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간다. 백제의 견훤은 후계자책봉에 관한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 하고 책사 능환은 최승우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신검을 도와달라 청한다. 한편, 유배길에 오른 유금필은 절망을 딛고 곡도를 고려의 새로운 수군기지로 탈바꿈시키고 고려의 책사 최응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는데...
씬 길
유금필이 유뱃길을 떠나고 있다. 군졸 둘이 그를 압송해 가고 있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백성1 세상에 유금필 장군이 누구신가? 천하의 충신이 유배를 가고 있다네.
백성2 황제폐하를 몇 번씩이나 구해낸 장수라지..?
백성3 아, 왜 아닌가? 소문이 자자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네. 풍채도 좋으네 그려.
백성1 헌데 왜 귀향살이를 떠난다는 말인가?
백성2 아, 폐하께서 하도 유장군만 찾으시니까 신료들이 화가 나서 참소를 했다네.
백성3 이런 세상에... 충신을 모함하다니..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그러는가?
그렇게 유금필은 가고 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여유롭고 넉넉해 보인다.
해설 유금필. 태조 왕건 집권 십여 년이 지나면서부터 그의 이름은 뚜렷하게 많은 신료들에 앞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전공은 누구보다도 확연하게 고려사 곳곳에 기록되고 있다. 그는 그리고 북방에 큰 힘을 발휘하여 여진족들과 흑수말갈족 등 여러 변방의 부족들을 대거 복종시키는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가 신료들의 질시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왕건은 그런 유금필을 귀향 보냈다. 당시 유금필이 귀향을 간 곳은 곡도, 지금으로써는 그 지명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황도인 송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만은 분명해 보인다. 왕건은 그를 겉으로 엄히 혼내면서 내심 공신과 권력을 가진 신료들을 경계하려 했던 것이다.
씬 황궁 외경
씬 동 광평성 안
김행선과 박술희가 마주해 있다. 추언규와 왕규가 보고 있다. 아무도 말을 못한다.
박술희 도대체 시중 어른이 되어 가지고 무얼 하셨다는 말씀이오?
김행선 아니, 박장군... 왜 힘도 없는 나를 붙들고 이러시오?
박술희 시중 자리는 신료들 중 으뜸이 아닙니까? 금필 형님이 죄가 없다고 왜 한 말씀 못하십니까?
김행선 아, 공신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달려드는데 나를 보고 어쩌란 말씀이시오? 씨가 먹혀야 말을 하지.
박술희 허허, 이런... 허면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고 하고 있는데도 그저 보고만 계시겠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까?
김행선 이보시오, 박장군. 당신도 내 나이 되어 보시구려. 시중이라는게 그저 허울 좋은 으뜸의 자리이지 그저 원로일 뿐이오.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겠소?
박술희 폐하도 그러하십니다. 아니, 삭탈관직도 모자라서 유배라니...? 유배가 뭡니까? 귀향살이를 보낸거 아닙니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다고 귀향을 보냅니까? 이래가지고 과연 누가 이득을 봅니까? 백제의 견훤왕 밖에 이득을 볼 사람이 없어요. 아니 그렇습니까? 시중어른, 아니 그렇습니까?
박술희는 탁자를 쾅쾅 쳐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김행선이 절절매며 이리저리 눈치만 본다.
추언규 아, 박장군... 그만 저.... 폐하께서...
박술희 닥치시오. 당신이 의형대령으로서 법을 집행하였겠다..?
추언규 아, 내가 집행하였소이까? 폐하께서 집행하신 것이지요. 제발 화좀 푸시고 말좀 하십시다.
왕규 진정하세요, 박장군. 아 우리들이야 정말 무슨 힘이 있습니까?
박술희 모두다 이렇게 발을 뺀다면 나도 생각이 있소이다. 생각이 있어요.
김행선 아하, 제발 진정하시구려. 진정하시오. 힘없고 늙은 우리만 가지고 이럴 것이 아니라 정 그렇다면 이번 죄안을 올린 그 공신들에게 가 보시구려. 이 늙은이와 우리 문신들은 아무 힘이 없어요, 글쎄...
박술희 정말 이렇게 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내 의형이신 신숭겸 형님은 전장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귀향을 가신 저 유금필 형님은 폐하를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몇 번씩이나 사지를 헤쳐나온 분입니다. 아니 상을 주지는 못할 망정 참소를 하고 귀향을 보냅니까? 이렇게 내편, 네편 갈라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아, 어쩌자는 것입니까?
김행선 아, 글쎄.. 왜 나를 가지고 자꾸... 박장군 제발 그만 하시구려. 아이구...
박술희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정 이런다면 나도 저들의 꼬투리만 기다리고 있다가 걸려들면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겁니다. 암요....
씬 동 어느 전각
홍유와 왕식렴, 배현경, 염상, 정윤 무들이 함께 해 있다.
염상 지금 박술희 장군이 시중부에 들어가 난리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무 그분은 유금필 장군의 의형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아버님이신 폐하와도 형제분들이십니다. 화도 날만 하지요.
배현경 아, 그렇다고 나이가 많으신 시중어른께 달려가서 난리를 쳐서는 아니 되지요.
왕식렴 이 사람도 이해는 합니다. 폐하의 의형제분 중 가장 성격이 괄괄한 분이니까요.
배현경 하지만 소장도 깜짝 놀랐습니다. 잠시 벼슬을 떼었다가 다시 붙이시면 되실 일인데... 아니 유배까지 보내시다니요?
홍유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폐하께오서 너무 쉽게 우리들의 청을 들어주시니 이상하기는 합니다마는....
왕식렴 소생도 그걸 느꼈습니다.
배현경 느끼다니요..? 무얼 말입니까?
왕식렴 폐하께오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의 청을 가납하시고 유배까지 보내셨습니다. 특별히 법이란 무엇인가를 조목조목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배현경 그랬지요. 그리 하셨어요. 그게 뭔가 이상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왕식렴 그렇습니다. 이상한 것이지요. 적당히 하실 일을 갑자기 부풀리고 크게, 그리고 요란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즉...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냐, 너희들의 말을 들어주마, 하지만 너희들도 조심하거라....
그제서야 배현경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크게 뜬다.
배현경 맞아요, 맞아요. 나는 뭔가가 계속 찜찜해 있는데 바로 그것이었소이다. 폐하께서는 의형제인 유금필 장군을 관직만 떼라고 청했는데도 유배까지 일부러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엄하시고 크게 혼을 내시면서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것은 누구든 다 이와 같이 벌을 줄 수 있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홍유 그렇지요, 그래요.... 그런 뜻이 있었습니다.
왕식렴 (고민이 많다) 이거 일이 조금 이상한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소이다. 뭔가가 이상한 쪽으로 가고 있어요.
염상 뭐가 말입니까?
왕식렴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무얼 생각하시는지 그 진의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곡도라...? 그 유배지도 그래요. 그처럼 요란하고 엄히 꾸짖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유배지는 고작 곡도였습니다. 황도의 바로 밑이에요.
배현경 정말 그렇습니다...?
왕식렴 폐하께서 마지못해 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꾸짖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것이에요.
씬 대전
왕건이 차를 마시며 두 황후를 보고 있다.
왕건 오늘따라 차 맛이 아주 부드럽고 향이 좋소이다. 드시구려.
유씨 차 말씀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니옵니다.
왕건 하하하.. 또 왜들 그러오?
유씨 황후마마와 신첩이 그토록 청을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헌데도 유금필 장군을 끝내 유배까지 보내셔야 했사옵니까?
오씨 해도 너무 하셨사옵니다. 유장군이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나라의 충신이라는 것은 백성들도 아는 일이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일이 무엇이옵니까?
왕건 황후께서는 그토록 신료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소이까? 그건 내가 미쳐 몰랐던 일이로구려.
오씨 비록 황궁 안에 있으나 어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겠사옵니까? 설사 신료들에게 실수를 하여 미움을 받았기로 그렇게까지 하실 수야 있사옵니까? 폐하의 의형제분이시옵니다.
유씨 영을 거두시고 유장군을 다시 조정으로 부르시오소서.
왕건 하하하... 이제 막 영을 내려 유배지로 보냈습니다. 황제라 해도 그렇게 쉽게 법을 처리한다면 손가락질을 받게 되지요. 당분간 유배지에 놓아두십시다.
두 황후 폐하....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나랏법이 워낙 엄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려.
오씨 어쩌다가 폐하의 사촌아우이신 왕식렴 공과 그리고 공신 홍유 공과 사이가 벌어졌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유금필 장군은 본래 말이 없으신 분이신데.....
왕건 기왕에 유배를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남은 사람들과 술이나 한잔 해야겠소이다. 이삼일 후에 함께 자리를 할 것이니 수랏간에 일러 주안상이나 잘 보아주시구려.
유씨 서경총관 왕식렴 공을 부르시는 것이옵니까?
왕건 아니오. 두 사람을 특별히 부르려고 하오. 식렴 아우와 홍유 장군 두 사람 말이오.
유씨 그 두 분이 유금필 장군을 죄주자 하셨다 들었사옵니다마는...
왕건 하하하... 아니오. 자, 그 이야기는 그쯤 하시고 차나 드십시다. 조정일을 가지고 황실 안의 황후들이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자, 드세요 어서...
두 황후 예, 폐하...
그러면서도 그들은 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왕건을 보고 있다.
씬 최응의 거소 외경
씬 동 거소 안
박술희가 씩씩거리며 최응을 보고 있다. 최응은 웃고 있다.
최응 무슨 일로 그리 화가 나셨습니까?
박술희 무슨 일....? 몰라서 묻는 것이오...? 병부령 쯤 되었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것이 아니오? 정말로 내 형님이신 유금필 장군이 유배를 가야 마땅한 일이였소이까?
최응 물론 아니지요.
박술희 아니라...? 아니라.....? 헌데 왜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정에서 가만히 있었소이까? 폐하께서 화가 나시어 소리소리 지르고 계셨는데도 병부령은 왜 입을 닫고 있었소이까? 소속된 장수가 유배를 가는 일이올시다.
최응 물론입니다.
박술희 물론...?
최응 박장군, 실은 그 모든 것을 소생이 폐하께 청한 일이올습니다.
박술희 뭐요, 병.. 병부령이 말이오..?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리 하셨다는 말이오?
최응 유금필 장군은 당대의 뛰어난 명장이십니다.
박술희 (갑자기 풀어지고) 그거야 그렇고 말고...
최응 그리고 남들이 세우기 어려운 전공을 계속해 세우고 계시니 질투와 시기를 받을 만 합니다. 이럴 때는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엄히 경계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박술희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구려. 좀 쉽게 말해 보시구려.
최응 즉, 이런 것이지요.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는 페하의 관심도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열심히 싸우고도 소외된 것 같은 공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박술희 뭐요...? 그래서 죄도 없는 내 형님을.....?
최응 들어보세요. 또 있습니다. 곡도는 황도에서 가까운 곳이지요. 그리고 취약지구입니다. 우리 고려의 수군은 주로 황도를 주변으로 해서 펼쳐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곡도는 백제가 들어오기 쉬운 길목 중 하나입니다. 이 기회에 취약한 군사적 길목도 재정비하면서 또한 유금필 장군을 쉬게 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가까운 유배지가 어디 있습니까? 불과 황도에서 몇 십리 아니 되는 곳입니다.
박술희 (생각해 보다가) 뭐 그건 그렇소이다마는...
최응 지금쯤 유장군의 죄를 청했던 공신들이 찔끔해 있을 것입니다. 유배는 유배인데 유배지가 황도나 마찬가지이고 분명히 벼슬만 떼자고 청했는데 폐하께서는 갑절이나 넘는 죄를 과장되게 물으셨습니다.
박술희 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열불이 나는 것이지요.
최응 일부러 그리 한 것입니다. 자, 그대들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 이제 화가 좀 들 풀렸는가? 그렇다면 앞으로 너희들은 어찌할 것이냐? 누구든 티없이 맑고 죄 없는 이 있으면 나와 보라. 폐하께서는 이렇게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박술희 옳거니... 세상에 살다보면 실수하지 않고 조그만 잘못하나 없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최응 바로 그것이지요. 지금 그대들이 던진 이 작은 돌맹이 하나가 결국은 그대들에게 돌아와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일은 결국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그대들의 일이다. 폐하께서는 그런 경고를 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박장군...?
박술희 허, 이거야 뭐가 뭔지....
최응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모든 신료들의 파벌싸움과 권력투쟁의 조짐을 미연에 그 끈을 잘라버리자고 하신 일입니다. 그 때문에 잠시 유금필 장군께서 고단하시고 힘이 드시겠지요.
박술희 뭐 그렇게 말을 하시니 알겠소이다. 더군다나 형님 폐하와 사전에 의견이 있었다 하니 더 할말은 없소이다마는...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일이올시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까지 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어이구, 이것 참....
씬 곡도
바닷가 선착장에서 유금필이 내려서고 있다. 장관이다. 평양성에서 보았던 족장과 추장들이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도열하여 서서 충성인 군호를 '충충' 하며 외치고 있다. 유금필이 혀를 찬다.
유금필 허허, 이런... 이렇게들 정신을 못 차리네 그려. 여기가 무슨 군대 사열장인 줄 아는가? 이런 쯧쯧쯧....
족장 어서 오시오소서, 장군.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유금필 왜들 이리 수선스러운가?
족장 장군께서 죄없이 이곳 곡도로 유배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변방의 여러 족장들이 환영을 나왔사옵니다.
유금필 죄인을 환영하는 법도 있다는 말인가?
족장 조정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으시는 지 모르겠사오나 장군께서는 영원한 우리 족장들의 어른이시고 대 추장이시옵니다. 아니들 그런가...?
족장들 옳은 말씀이십니다. 충..... 충....충.....
마치 무슨 축제처럼 족장과 오랑캐 군사들은 무기와 손을 치켜들고 들끓고 있다.
족장 우리는 지난번에 평양 길에서 장군을 향하여 만세를 불러드렸다. 그것이 죄라 하여 지금 유배를 오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장군을 존경하고 사모하느니라. 어찌 오래 사시라고 한 것이 죄라는 말인가? 다시 한번 만세를 부를 것이다. 유금필 장군, 만세... 만세... 만세...
족장들 만세.. 만세... 만세...
유금필 아, 그만, 그만... 어찌 이리들 경망스러운가? 참으로 그대들이 한번 혼들이 나고 싶은가?
그제서야 족장들이 모두 조용해진다.
유금필 그러니까 너희들을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너희들의 입으로 북방의 대 추장이라고 나를 불러주었다. 대 추장인 나는 명한다. 너희들은 고려의 영을 따라야 한다. 만세라는 것은 황제만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이다. 알겠느냐?
모두들 ...................
유금필 왜 말들이 없느냐? 알겠느냐, 이놈들아...?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비록 유배는 왔으나 나는 이곳 일대의 국방력을 점검하고 살펴보라는 임무를 띠고 온 것이다. 백제와 대치하고 있는 한 우리는 하루도 안심해서는 아니 되는 입장에 있다. 앞으로 나는 너희들과 합심하여 이 일대의 군사력을 점검하고 정비할 것이다. 모두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알겠느냐? 나를 돕고 고려를 돕는 것이 너희들이 일이다.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자, 이곳 곡도의 군영으로 가자. 이곳은 내 유배지가 아니라 새로운 군사적 전략지로서 변할 것이다.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 군인이란 언제 어디에 있으나 적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있지만 백제군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알겠느냐?
모두들 예, 장군.
유금필이 모처럼 흡족한 듯 끄덕인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백제 황도 외경
씬 동 대전
견훤이 술을 마시고 있다. 고비가 술을 따라 올리며 눈치를 본다.
고비 참으로 오랜만에 폐하를 뫼시고 어주를 따라 올리는 것 같사옵니다.
견훤 그런 것 같구려...
고비 한동안 전쟁이니 전투니 하는 것들을 잊고 조용히 지내다 보니 모두가 태평세월인 것 같사옵니다.
견훤 그렇지 않소이다, 승평부인. 아직 삼한이 전쟁 중에 있고 결국에 가서는 누군가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올시다. 이 조용함은 당분간이에요. 이제 곧 또 전투를 떠나야지.
고비 또 말이옵니까?
견훤 그렇다고 하지 않소. 자, 한잔 더 따라 보시구려.
고비 예, 폐하.
다시 술을 따르며 고비는 계속해 견훤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묻는다.
고비 폐하, 오랫동안 여쭙고 싶은 말이 있었사옵니다마는....
견훤 말해 보시구려.
고비 우리 금강이 말이옵니다.
견훤 금강이가 왜요..?
고비 황궁 안은 물론이고 신료들 사이에도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오서 우리 금강이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고 또한 어려움이 크신 줄로 아옵니다.
견훤 내 생각과 신료들의 생각이 같지를 않소이다...
고비 우리 금강이에게 후사를 잇게 하시려는 것이..... 폐하의.... 진심이시옵니까?
견훤 누가 그런 말을 하더이까?
고비 신첩이 왜 그런 눈치를 모르겠사옵니까? 이미 폐하께서 그리 마음을 정하신지 오래되신 것으로 아옵니다마는...
견훤 (큰 한숨) 아직 뭐라 말하기 어렵소이다. 내 생각은 금강이에게 많이 가 있는 것이 사실이오. 허나 신료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오.
고비 하지만 이 나라의 주인은 폐하가 아니시옵니까? 폐하께서 원하시면 그대로 하시는 것이옵니다.
견훤 내 아무리 황제라 하나 나라의 근간은 신료들이오. 저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한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비 이런 문제로 너무 오래 상심하심은 옳지 않다 사료되옵니다. 폐하께서 결정하시오소서. 그것이 황실을 편안히 하고 많은 잡음을 잠재우는 것이옵니다.
견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오. 먹은 마음대로 했다면 벌써 했을 것이오. 허나 이런 일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나와 신료들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고비 어쨌든 우리 금강이가 다음 보위를 잇는 것은 사실이 아니옵니까?
견훤 (한참 보다가) 허허허, 승평 부인...? 승평 부인도 욕심이 매우 크셨구려.
고비 그런 것이 아니오라.. 말은 무성하고 신료들은 서로 갈라지고 태자들 또한 어느 쪽이 다음 보위를 이을까, 긴장은 더해가고..... 견디기 어려워 여쭌 것이옵니다.
견훤 나도 알고 있소이다. 기다려 보시구려. 뭔가를 정하기는 정할 때가 되었소이다. 그런 때가 되기는 되었어요.
고민이 많은 그런 견훤의 표정에서....
씬 황후전
박씨와 신검이 용검, 양검과 함께 있다.
박씨 이보시오, 태자.
신검 예, 어마마마.
박씨 내 어제 보니 하루종일 격구로 시간을 다 보냅디다. 지금 태자께서 하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격구라니요?
신검 소자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장수들과 몸이라도 풀고자 한 일이옵니다.
양검 사실이옵니다. 그런 일로라도 마음을 풀지 못하신다면 형님께서는 벌써 속병이 나도 단단히 나셨을 것이옵니다.
용검 그러하옵니다, 어마마마. 형님의 끓는 속을 아무도 모를 것이옵니다.
박씨 모르기는 왜 모르냐? 이 에미는 압니다. 그럴수록 단단히 마음을 먹고 폐하의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지 않겠습니까?
신검 송악산에 있는 망부석에 등을 돌릴 수는 있어도 아바마마의 마음은 돌리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박씨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지요.
신검 열심히 하면 무엇하옵니까? 아버님의 마음이 이미 다른 곳에 가 계시옵니다.
박씨 압니다. 그저 금강이 밖에는 모르신다는 것을 이 어미가 왜 모르겠습니까? 지금도 승평 부인이 대전에서 폐하와 함께 요사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기가 죽어서는 아니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태자는 이 백제국의 후사를 이을 사람입니다. 정해져 있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오.
신검 소자가 원해서 되는 일이겠사옵니까? 칼자루를 쥔 것은 아버님이시옵니다. 그 칼로 어디를 치는가도 아버님이시옵니다. 소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박씨 (화를 낸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저러신다고 태자마저 비뚤어진다면 도대체 어찌 하겠다는 것입니까? 마음을 단단히 하세요. 이 나라는 태자의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태자의 것이에요.
신검들 ........... (한숨만)
씬 거리 (밤)
어두운 밤길을 등불을 밝혀들고 능환이 두 집사를 앞세워 가고 있다.
능환 아직도 길이 한참 남았는가?
집사 아니옵니다, 이찬 어른. 이제 거의 다 와 가옵니다. 저쪽 저 어귀를 돌아 나가면 바로 파진찬 어른의 댁이옵니다.
능환 어서 가세.
그들 그렇게 골목을 돌아간다.
씬 최승우의 집 외경 (밤)
씬 동 집 사랑
최승우가 호롱불 밑에서 책을 보며 참선하듯 앉아 있다. 그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무언가를 풀어서 주역의 괘를 맞추고 있다. (주역편 참조) 다시 몇 장을 넘기고 또 보면서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러다가 붓을 놓고 아주 오랫동안 긴 한숨을 쉬며 허공을 본다.
최승우 거듭해 몇 번을 살펴보아도 올해부터 내 운이 점차 적막강산으로 가고 있구나. 갈수록 해쳐나갈 길이 어두워지고 있어. 허허.... (사이) 해가 바뀔 때마다 주역으로 쳐보는 점괘가 아닌가? 허나 이처럼 답답하고 힘들어 보인 해는 없었느니..... 앞으로 삼 년 안에 흉사가 겹쳐있구나. 갈 때가 서서히 오는 모양이야.
촛불이 일렁거린다. 최승우는 곰곰이 생각이 많다. 또 중얼거린다.
최승우 (책을 계속 넘겨보며) 폐하의 운도 점괘는 불길하기가 마찬가지이고 보면 백제국에 분명히 환란이 온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어찌되는 것인가?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춘다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백제에 와서 무엇을 이루었다고 신년의 점괘는 이렇게 불길한 것만 보여주고 있을꼬...? (사이) 하긴 그렇다. 고창 전투가 끝나고 부터 이 백제는 가라앉고 있어. (한숨) 가라앉고 있어. 헌데 점괘마저 앞으로 삼 년을 조심하라.... 조심하라....?
그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최승우가 돌아본다. 소리들이 들려온다.
소리 이 밤중에 뉘시오....
집사 (E) 이찬 어른께서 오셨느니라. 파진찬 어른께 아뢰어라. 이찬 어른께서 오셨느니라.
최승우가 흠칫한다. 그리고 주역 책을 덮어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한다.
최승우 손님이 오신 모양이로구나. 뫼시어라.
소리 예, 파진찬 어른.
씬 동 집 마당
대문이 열리고 능환이 들어선다. 집사들은 마당에 남는다. 그 마루로 방안에서 최승우가 나온다. 두 사람은 서로 본다.
최승우 이찬 어른이 아니십니까? 밤이 늦었는데 어인 일이시옵니까?
능환 그저 심사가 답답하길래 차 한잔 얻어 마시러 왔네.
최승우 안으로 드시오소서.
능환 그리 하세.
그들 안으로 들어간다.
씬 다시 동 집 사랑
두 사람이 찻잔을 놓고 마주해 앉았다. 한 모금 마시다가 능환이 말한다.
능환 이렇게 뜬금 없이 찾아와서 놀랐겠네 그려.
최승우 허허허.. 놀랄 일이야 뭐 있겠사옵니까?
능환 조정에서 할 이야기가 있고 또 우리가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고 할 이야기가 있네 그려. 오늘은 내 특별히 작정하고 왔네.
최승우 말씀 하시지요.
능환 당나라의 유학길에서 돌아오던 자네를 조정에 천거한 것은 나일세.
최승우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능환 폐하께오서는 이제 나를 늙었다, 버리시고 외면하시네마는 나는 아직도 폐하께 충성하고 백제에 목숨을 맡겨 놓은 사람일세.
최승우 계속 하시오소서.
능환 어느덧 폐하는 환갑의 보령을 넘기셨고 벌써 예순하고도 여섯이 되셨네. 나를 보고 늙었다 하시지만 실은 폐하께서도 이미 노인이 되신지 오래이실세. 그렇지 아니한가?
최승우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이옵니까?
능환 이 나라의 장래일세. 다음 후사를 정해야 한다는 것일세. 때가 너무 늦었고 더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야.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최승우 소생이 말이옵니까?
능환 그 동안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틈이 많았어. 서로가 힘을 합쳐도 모자라는데 어려움만 계속해 늘어갔어. 허나 그것은 내 탓은 아닐세. 폐하께서 그리 만드신 것이지. (한숨)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야. 나는 평생 내 주군이신 폐하를 위하여 그 신발끈을 매리라 결심하고 살아왔는데 폐하께서는 어느덧 나를 잊고 버리셨네.
최승우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능환 신검 태자를 다음 보위에 정하는 것은 국법에도 맞는 것이고 또한 인륜의 이치에도 합당한 것일세. 헌데도 폐하는 그것을 외면하시네. 우리 늙은 신하들이 충언을 올려도 그것 모두가 권력에 대한 아집이라고 핍박하신다네. 이제 이 나라가 어찌될지 걱정이네. 나를 도와주게. 아니 이 어려운 정국을 도와주게나.
최승우 그 때문에 오신 것이옵니까?
능환 그렇다네.
최승우 한 나라가 중요하옵니까, 아니면 인정이 더 중요하옵니까?
능환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네. 신검 태자는 재목이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금강 태자만 결코 못하지 않으시네. 정해진 자리가 도둑 맞는다면 결코 이 황실과 나라가 편해지지 않을 것일세.
최승우 폐하의 마음은 완전히 끝이 나셨습니다.
능환 알고 있네. 그것을 자네가 도와달라는 것일세.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라는 것이야. 한번만 더....
최승우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하였사옵니다. 고창 전투에서 말이옵니다. 알고 계시옵니까?
능환 정해진 대권을 도둑 맞으려 하고 있네. 격한 감정으로 본다면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야.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자식이 아버지가 미워서 그랬겠는가? 아마도 금강 태자 때문이었을 것일세. 한번 일세. 단 한번 뿐일세. 도와주시겠는가?
최승우 .......... (눈을 감고 대답이 없다)
능환 내가 알기로 자네도 금강 태자보다는 신검 태자를 더 추천하였다고 들었네. 자네가 한번 더 기회를 만들어 주게나. 이 나라를 위해 내가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일세.
최승우 열번 해서 아니 되는 것이 한번 더 기회를 준다고 되겠습니까?
능환 부탁하네. 나는 이 나라의 장래가 신검 태자마마에게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일세. 폐하께서는 나이가 드셨네. 이제 이 국정은 바뀌어야 하네. 그래야 통일대업도 이룰 수 있을 것이야. 폐하께서는 너무 늙으셨어.
최승우 (한참만에)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능환 그건 자네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내가 부탁하는 것은 지금 돌덩이처럼 굳어진 폐하의 저 마음을 돌려달라는 것일세. 이렇게 끝장내지는 말아달라는 것일세.
최승우 알겠사옵니다. 이찬 어른께서 마지막이라 하시니 소생 또한 마지막으로 폐하께 말씀을 올려 보겠사옵니다.
능환 고맙네. 고맙네 파진찬... 고려가 신라의 군권을 모두 가져가 버렸네. 신라와 고려가 합치는 것이 눈 앞에 왔다는 것일세.
최승우 알고 있사옵니다.
능환 백제의 위기가 오고 있는 것일세. 우리가 왜 이렇게들 수십 년을 싸우고 있는 것인가?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일세. 헌데 우리가 그 싸움에서 뒤지고 있어. 이 암울한 정국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네. 그것을 도와달라는 것일세. 신검 태자마마만이 하실 수가 있네. 폐하는 이제 아니야.
최승우 한번 뿐이옵니다. 아시겠사옵니까? 기회는 한번 뿐이옵니다. 그 한번은 소생이 마련해 보겠사옵니다. 더는 어렵사옵니다.
능환 알겠네, 알겠네 파진찬 이 사람아... 내가 오늘 이곳에 온 보람이 있네.
최승우 그러나 이찬어른께서는 또 다시 소생을 원망하실 것이옵니다.
능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최승우 우리는 그런 운명이지요. 어차피 폐하께서는 아무리 기회와 변명을 드려도 그 본 마음이 바뀌지는 않으시옵니다. 그렇다면 이찬 어른도 저에 대한 원망을 버리지 못하실 것이 아니옵니까? 아니 그렇사옵니까?
능환 물론 그럴 것일세. 허나....
최승우 자, 차가 다 식었사옵니다. 드시오소서. 그래도 소생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나라를 위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것만으로 오늘 이 밤은 아주 흡족하옵니다. 허허허..... 드시오소서, 어서 드시오소서.
능환 고맙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본다. 그리고 찻잔을 든다.
씬 고려 황궁 외경 (낮)
씬 동 대전
왕건이 최응과 함께 마주해 있다. 그리고 올려온 장계들을 본다. 거기 김행선과 추언규, 왕규들도 함께 해 있다.
왕건 (장계 보며) 허허, 이거... 우릉도(울릉도)에서 까지 사신이 왔다는 말인가?
김행선 예, 폐하. 우리 고려국의 위용과 폐하의 위엄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옵니다.
왕건 작은 섬나라가 지방의 토산물까지 가지고 왔다 하니 갸륵하오. 그곳의 호족인 백길을 정의 벼슬로 삼고 토두로 하여금 정조 벼슬을 삼아 섬을 잘 다스리게 하도로 하시오.
김행선 예, 폐하.
왕건 (다시 장계를 본다) 이번에는 북미질부성(경북 홍해) 성주 신달이라는 자가 항복을 하였소이다 그려. 개지변(울산)에서 항복하기를 청한다...?
왕규 예, 폐하. 그 동안 신라의 주변에 남아있던 호족들이옵니다. 폐하께서 서라벌에 다녀오신 이후, 모두들 고려에 항복해 오고 있사옵니다.
왕건 잘 훈계하여 충성을 다짐 받도록 하시구려.
왕규 예, 폐하.
왕건이 장계들을 놓으며 묻는다.
왕건 박술희 장군이 시중부에 가서 난리를 쳤다구요?
김행선 아, 그거야 뭐... 의형제 분이 답답하게 되셨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옵니다마는...
왕건 이런 못된 것이 있는가? 연세가 많으신 시중께 결례를 했다 그 말씀입니까?
김행선 아,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나이 많다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그저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받고 더러는 화풀이 대상도 되어주고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허허허....
왕건 그래도 그렇지, 이런 쯧쯧쯧.... 이보게, 병부령..?
최응 예, 폐하.
왕건 그래, 유금필 장군은 유배지에서 수형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하던가?
최응 예, 폐하. 열심히 그 죄를 반성하고 군사들과 더불어 땀을 흘리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왕건 그래야지. 죄를 지었으면 그 값을 받아야지, 암...
추언규 하지만 유배는 너무 심하신 것 같사옵니다. 적당하신 때에 그만 사면해 주시오소서.
왕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리 내 아우라지만 그것은 아니 됩니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 댓가를 받아야지, 암...
추언규 그래도 폐하... 아무래도 그.. 형벌이 너무 과하시옵니다. 유배라는 것은....
왕건 경은 법을 집행하는 의형대의 수장이오. 그런 마음 약한 소리는 그만 하시구려. 그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만들 가 보시오.
김행선 그래도 폐하.. 한번 더 재고를 하심이...
왕건 아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행선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박술희 장군도 그렇고 또 신료들 간에....
왕건 돌아들 가 보세요, 그만... 유금필 장군은 지은대로 죄를 받는 것이올시다.
김행선 허, 이것 참....
그때, 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E) 폐하, 서경 총관 왕식렴 공과 홍유 장군께서 드셨사옵니다.
왕건 들라 하라. 자 그만들 가 보세요. 우리는 할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왕식렴과 홍유가 들어선다. 서로 묵례를 나눈다. 모두들 어색하다.
왕건 그만들 가 보시라니까요..?
김행선 예, 폐하. 자 들 가십시다. 병부령도 가십시다.
최응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폐하.
왕건이 끄덕인다. 그들이 물러간다. 가면서 최응은 미소를 짓는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왕식렴과 홍유가 눈치를 보며 절을 하고 앉는다. 왕건이 두 사람을 보며 웃는다.
왕건 참으로 적조하였소이다. 홍장군...
홍유 아, 예, 폐하..
왕식렴 어인 일로... 찾아계셨사옵니까?
왕건 이 사람아 꼭 일이 있어야 보는 것인가? 모처럼 술이나 한잔 하자고 부른 것일세. 곧 술상이 올 것이야. 그래 요즘들 어떤가? 편안들 하신가?
홍유 무슨 말씀이신지...?
왕건 그냥 묻는 것이올시다. 그냥 말이올시다. 허허허....
홍유들 .............?
씬 병부 관아 안
배현경이 박수문 형제, 염상, 윤신달들과 함께 마주해 있다. 고개를 외로 꼬며 오락가락 한다.
배현경 이상한 일이야. 폐하께오서 왕식렴 공과 홍유 장군을 부르셨다...? 그것도 별 이유없이 술한잔 하시자고 말이오...
염상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오이까?
박수문 그건 그렇지 않지요. 아 그 두 분이 유금필 장군의 유배와 관련이 있지 않사옵니까?
윤신달 그건 그래요. 폐하께서 뭔가 분명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겝니다.
박수경 틀림없을 것이옵니다. 소생도 그리 보옵니다.
배현경 시중 어른과 의형대령, 병부령들이 유금필 장군의 유배 건으로 대전으로 먼저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형량이 과하다는 것이지요. 헌데 호되게 야단만 맞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거 도대체 뭐가 어찌되는 것인지...
박수경 소생의 생각으로도 이번 유금필 장군의 일은 좀 과하다고 여겨지옵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변방의 족장들이 죄를 진 것이옵니다. 삭탈관직에 유배까지 가시다니요...? 허허, 이것 참..
배현경 하긴 좀 과하기는 했지요. 유배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말이올시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실꼬...?
씬 동 대전
왕건과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다.
왕건 자, 드십시다. 그 동안 참 적조했습니다.
두 사람 아, 예, 폐하...
왕건 그리고 식렴아우는 그 동안 서경일을 총괄하느라 애를 많이 썼네 그려. 그곳에 학교도 세웠고 성도 넓게 고쳤고 또 백성들도 많이 불러들여서 제 2의 도읍지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어.
왕식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의당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왕건 어디 그 뿐인가? 아우는 누구보다도 아끼던 왕신 아우를 나라를 위해 그 목숨을 내어 놓았어. 나는 그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네.
왕식렴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토록 칭찬을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왕건 내 그래서 왕신 아우를 위해 절을 짓고 스님으로 하여금 명복을 빌게 하였다네. 그리 알게.
왕식렴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그리고 홍유 장군..?
홍유 예, 폐하.
왕건 나는 지금도 가끔씩 경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홍유 무슨 말씀이신지....
왕건 경은 개국공신이고 일등공신입니다. 그야말로 이 고려에서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홍유 .............. (뭔가 심상치 않다) 폐하......?
왕건 한쪽은 내 사촌 아우이면서 서경을 크게 이루어 놓은 신료이고 또 한쪽은 개국공신이면서 전장터마다 나아가 큰 공을 세우는 대장군이올시다.
두 사람 ...............?
왕건 두 사람 모두 왜 그토록 유금필 장군과 의가 상했는지 모를 일이올시다. 과연 유금필 장군이 유배를 갈만한 죄를 지었을까요?
왕식렴 폐하, 그것은 저....
왕건 자, 우리 오늘 그것을 한번 천천히 논의해 보십시다. 천천히 마시면서 말입니다.
두 사람 .................... (긴장)
씬 최응의 거소
최응이 웃고 있다. 최지몽이 보고 있다.
최지몽 무엇이 그리 웃읍사옵니까, 병부령 어른?
최응 폐하께오서 아주 연극을 잘 하시네 그려.
최지몽 예.....?
최응 유금필 장군을 가까운 곡도에 보내 놓으시고서 신료들을 은연 중에 다잡고 계시니 말일세. 지금 대전에서 왕식렴 공과 홍유 장군이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야. 하하하...
최지몽 그거야 다 병부령께서 권하신 일이 아니시옵니까?
최응 물론 그랬지. 이 나라가 다 잘 되자고 꾸민 일일세. 아무튼 생각대로 되어 가는 것 같네 그려. 혼을 내서 나무라기 보다는 스스로 깨우쳐 알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폐하께서는 그러한 소기으 목적을 다 이루고 계시네 그려. 하하하....
최응이 끄덕이며 찻잔을 들다가 무심코 자신의 손을 본다. 손이 벌벌 떨고 있다. 그리고 뭔가 가슴이 타는 것을 느낀다. 최지몽이 놀란다.
최지몽 왜 그러시옵니까, 병부령 어른...?
최응 왜 갑자기 가슴이 이리... 타는지 모르겠네 그려..... 가슴이....
최응은 괴로워한다. 최지몽이 놀라서 부축한다.
최지몽 괜찮으시옵니까?
최응 아닐세... 아까부터... 오한이 들기는 했네마는... 괜찮을 게야. 차를 다시한잔 따라주게.
최지몽 예.. (차를 따라주며) 많이 괴로우신 것 같사옵니다. 의원을 부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최응 아닐세. 아무래도 고뿔이 좀 걸린 것 같네 그려. 괜찮을 게야. 자, 드세...
최지몽 의원을 부르시오소서, 병부령 어른.
최응 아닐세. 아니야.. 괜찮을 것이야. 자, 어서 차나 드세. 조금 있으면 대전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일세.
씬 다시 동 대전
왕건이 술을 따라 준다. 두 신료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왕건 드세요...? 어서들 드세요..? 식렴 아우 무얼 하는가? 들지 않고...
왕식렴 예, 폐하.
홍유 예, 폐하. (조금 마신다)
왕건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하세. 이보게, 식렴 아우?
왕식렴 예, 폐하.
왕건 식렴 아우는 서경을 다스리는 총관이야. 그곳에서는 황제 대신이야. 그리고 유금필 아우는 북방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장군이야. 모두다 나라를 위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어쩌다가 그리 되었는가?
왕식렴 폐하... 신은 다만 다른 뜻은 없사옵고... 유장군이 신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을 책하였을 뿐이옵니다.
왕건 그렇다 치세. 허면 홍장군...?
홍유 예, 폐하.
왕건 공신이라 하여 제 할말만 다하고 주변의 신료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나무라려 한다면 과연 세상이 공을 어찌 보겠소이까? 공신이니까, 일등공신이니까 저리한다 그리들 말하지 않겠소이까?
홍유 (식은땀을 흘리며) 소신은 그런 것이 아니오라...
왕건 황제의 아우라 하여 권력을 행사하려 하고, 나라의 공신이라 하여 주변을 제압하려 든다면 이 나라가 과연 어찌 되겠소이까?
홍유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신은 단지 어느 장수 한 사람이 많은 공과를 독점하는 것이 위태롭다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옵니다. 살펴 헤아리시오소서.
왕식렴 신 또한 그러하옵니다. 누구 한 사람의 오만과 권력의 남용은 경계해야 할 것이기에.....
왕건 그렇지가 않아. 내 이제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개인적인 섭섭함이 더욱 컸기 때문이야. 북방에서는 서경총관이 최고의 벼슬인데 금필아우는 그것을 뛰어넘고 있었지.
왕식렴 ....... 폐하..?
왕건 홍유 장군은 누구보다도 전장터에서 그 이름과 용맹함을 드러낸 장군이었소이다. 그런데 금필 아우가 앞에 나타났던 것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이런 것들이 잘못되면 힘겨루기가 되고 결국은 권력 싸움이 되는 것이외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오. 그렇지 않소이까?
두 사람 ..........폐하..?
왕건 다시 말하오. 권력은 무상한 것이오. 덧없는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권력은 덧없는 것이란 말이오.
<173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