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문화재]
(84) 적멸보궁이 있는 정선의 정암사
2023-03-01 신정일 기자
제천을 지나 영월에 접어들고 동강을 지나 석항에 접어든다. 정선군 신동읍에서부터 길은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진다. 사북,고한에 접어들며 빗 줄기 속에 불빛들이 명멸하고 신 새벽에 도착한 정암사는 빗소리에 잠겨 있다.
정선 정암사 (신정일 기자)
정선 정암사 (신정일 기자)
새벽 두시 반 보살님의 안내를 받아 요사채에 들어가 불을 켠다. 넓게 펼쳐진 방. 따뜻하다. 아직 가을의 초입에 이 따뜻함이 마음에 드는 것은 비가 내리는 탓이리라. 벌써 9주째 주말마다 내리는 비. 글쎄 세월이 하수상한 지 지구온난화라는 기상이변 탓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세월 속에 나는 지금 멀고도 먼 강원도 땅 정선 고한의 정암사 요사채에 앉아 떨어져 내리는 낙수물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리를 잡고 눕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새벽예불을 기다린다. 문득 도량석치는 소리가 빗소리에 실려오고 문을 열고 나서자 한 스님이 도량석을 치며 적멸보궁을 돌고 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정암사 적멸보궁 안으로 들어간다. 부처님이 안 모셔져 있는 데도 적멸보궁안은 생각보다 좁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새벽예불을 준비하고 나는 동쪽 구석에 앉아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자꾸만 높아지는 빗소리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어디에서부터 저 소리는 시작된 것일까? 그침이 없이 들리는 저 시냇물 소리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또 뚜렷하게 들리는 저 목탁소리 나는 그 목탁소리를 들으며 정암사의 적멸보궁에서 정암사의 설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했던 때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라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5대 적별보궁중의 한 곳으로 정암사의 .창건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28대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자장율사에게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그 말을 듣고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하고 말 한 뒤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서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와서 “내가 자장을 보러 왔다” 고 하는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늙은이를 쫓아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하고 탄식하면서 그가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편, 자장이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서 그 절이름을, 갈래사(葛來寺)라고 지었다고 전해져 온다. 그래서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 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 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숴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에,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심귀영례, 지심귀영례...”
새벽예불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이제 졸립다. 한 숨도 안자고 달려온 머나먼 길 걸 어찌 피곤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새벽예불은 한 시간 20분이 지나도 끝날줄을 모르고 이제 일어나리라 마음먹고 벽 모서리에 손을 짚자 아뿔싸 이 따가움. 필시 벌은 아니고 무엇일까.? 쐐기였던가보다. 손은 금세 벌집을 쑤신 듯 따갑기 이를 데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스님이 염불에는 정신이 없고 젯밥에만 정신이 있다”는 말처럼 나 역시 새벽예불에는 정신이 없고 못잔 잠타령만 하고 있었으니 부처님께서 쐐기를 보내어 내게 경고를 내리신 모양이다. “나여 좀더 진득하도록 도와 주소서”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신정일 기자)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신정일 기자)
살며시 적멸보궁을 나오자 다시 들리는 빗소리, 지금껏 비는 그 침이 없이 내리고 있었구나. 아침 공양을 마치고 수마노탑을 향한다. 며칠을 두고 내린 물이 큰 계곡물처럼 흐르는 다리를 지나 천천히 수마노탑이 있는 산길로 향한다. 정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한다. 마노 앞의 수(水) 자는 자장의 불심에 감화된 서해 용완이 마노석을 동해 울진포를 지나 이곳까지 무사히 실어다 주었기에 ‘물길을 따라온 돌’이라 하여 덧붙여진 것이다. 이 탑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와 백성이 복되게 살기를 기원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칠층모전석탑인 이 탑의 1층은 마노석을 15단으로 쌓아 높이 103cm, 한 변이 178cm 되게 만들었으며, 층수가 한 단계 높아질수록 그 크기는 줄어들고 있다. 탑의 1층 남쪽면 중앙에는 1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문비가 있으며, 문비는 철제 문고리도 장식돼 있다.
지붕돌은 낙수면에 층단이 있는 전탑의 양식을 따랐고, 추녀 폭은 전탑 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편이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1층에서는 7단으로 되어 있으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한 단씩 줄어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낙수면의 층단도 1층에서는 9단이지만 층을 거듭할수록 한 단씩 줄어 7층에서는 3단이 되었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노반 위에 갖가지 청동제 장식이 완전하게 얹혀 있고. 각 지붕돌의 네 모서리에 풍경이 가지런히 매달려 있다. 빗속에 바람이 불고 그 풍경이 청량한 소리를 내는 시간 먼데 산 위에 흰 구름이 문득 외롭기 그지없다.
수마노 탑은 전체적으로 그렇게 큰 탑은 아니지만 그 수법이 정교하다. 한편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새겨진 연화무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 탑은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탑의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정암사 비명에 의하면 18세기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지난 1972년 해체·복원된 이래 지반이 기울고 있어 몇 년 전에 전면 보수를 하였다. 한편 1972년 해체 수리 당시 탑지석(塔誌石)과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절을 세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석가의 신물(信物, 사리·치아·염주·불장주·패엽경 등)을 ‘세 줄기의 칡이 서린 곳’에 나누어 각각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 중생들의 탐욕을 우려한 자장율사가 불심이 없는 중생들은 금탑과 은탑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숨겨버렸다고 하는데 가끔씩 못골마을의 못위에만 나타난다고 한다. 정암사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으니 그간의 어디에 금탑과 은탑이 있을 것이라고도 전한다.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신정일 기자)
앳된 서 보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차에 오르려 하자 할머니 한 분과 아침 공양시간에 보았던 노스님이 고한까지 태워다 달라고 한다. 젊은 스님들은 자동차가 있지만 법력이 높지 않거나 절을 소유하지 않은 노스님들은 자동차는커녕 유숙할 곳도 마땅치 않다고 한다. ‘어데서 오셨느나“는 나의 물음에 논산에서 왔다고 한다. 냄비 하나 얻으려고 왔는데 냄비도 안준다고 투덜거린다. 고한에 가서 십리쯤 걸어가면 절이 있는데 그 절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냄비가 있으면 하나 얻어 가시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스님은 냄비스님인가 보다. 말끝마다 냄비타령만 하고 있으니, 그래서 가까운 금산사는 가셨었느냐고 묻자 냄비를 얻으려고 갔더니 냄비는 안주고 돈만 5만원을 주더라고 말씀하신다. 오만원이면 냄비 몇 개 사지 않으냐고 말씀 드렸더니 그런 냄비가 아니라 한다. 세상이 싫어서 평범하게 살 것을 거부한 채 입산하여 50여 년간 수행한 스님이 밥과 국을 끓이는 냄비에게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내 마음은 착잡하다.
그렇다면 이 삼십여년 간 떠 돌아다닌 나는 얼마나 벗어났는가. 생각하는 사이 버스는 고한에 이른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물한리와 고토리를 병합해 만든 고한과 사북 은 7.80년대 나라 안에 이름이 높던 탄광지대였다. “인생의 마지막에 막장을 간다”는 말이 있을만큼 이것 저것 하다가아무것도 안될 때 마지막으로 가는 곳, 이곳을 찾아 왔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꿈과 사랑이 새카만 석탄물로 흐르던 이 사북, 고한이 광산경기의 쇠퇴로 스러져 가다가 폐광 산업 활성화의 일환으로 강원랜드라는 정선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강원도의 꿈으로 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로또복권처럼 인생역전을 꿈꾸며 왔던 사람들이 자신의 자동차와 자신의 꿈을 저당 잡힌 채 헤어나지 못하는 이 사북, 고한에 물이 불어선지 물은 새카맣게 흐르지 않고 맑은 물로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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