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와 두 사람
/김정희와 이상적]
1944년 여름,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패색이 짙었고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둔 미군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수시로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미군기 습격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일본인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던 전쟁 통에 한 조선인이 일본의 수도 동경을 방문했다. 나이 마흔 둘의 서예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손재형이었다. 목적지는 도쿄 우에노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의 집이었다. 후지스카와 손재형은 구면이었다.
“결국 또 그 얘기를 하러 온 건가요?”
후지스카는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그러자 손재형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게 세한도(歲寒圖)를 팔아 주십시오.”
후지스카의 얼굴이 더욱 결연해졌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추사 김정희 매니아로 유명했고 일본으로 건너올 때 세한도를 비롯한 추사의 작품들을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값지고도 사연 있는 작품, 자신도 아까워서 1년에 몇 번 들여다보지 않을 세한도를 달라니. 후지스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세한도를 팔라고 조르던 이 조선인이 일본까지 찾아와서 내 집 문지방을 넘다니. 후지스카는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절대로 안 되오. 그냥 돌아가시오.”
손재형은 의외로 선선히 물러나는 듯 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 하직 인사를 올리기에 웬일인가 싶었는데 손재형은 엷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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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일’은 쉼 없이 계속됐다. 손재형은 하루도 빠짐없이 후지스카를 방문했고 녹음기처럼 말을 되풀이했다. “세한도를 주십시오, 세한도는 조선에 있어야 합니다. ” 그렇게 100여일 동안 손재형은 후지스카를 찾아왔고 머리를 숙였다. “세한도를 주십시오.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누그러진 후지스카는 이미 자신의 몸이 쇠약하니 죽은 뒤 유언을 통해 당신에게 인도하마 한 발 물러섰으나 손재형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세한도를 자신에게 팔아 달라고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마침내 후지스카 치카시가 졌다. 댓가도 없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긴 것이다.
“선비가 아끼던 것을 어찌 값으로 따질 수 있으리. 돈은 됐소. 보존만 잘 해 주시오.” .
후지스카가 조금만 더 결심을 늦추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세한도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한도를 양도한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후지스카의 집이 불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후지스카 치카시는 아들에게 “조선의 보물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아들은 2006년 사망하기 전 아버지가 모았던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현금 200만 엔까지 더해 왔다. 손재형의 정성에 대한 감동이 그 아들 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리라.
세한도를 손에 넣은 손재형의 기쁨으로 돌아가보자. 조심스럽게 그림을 펼치는 그의 눈은 그림을 비출 듯이 빛났고, 온전히 드러난 세한도 앞에서 다시금 가슴은 심하게 고동쳤다. 겨울 칼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황량한 여백에 얹힌 허름하고 구멍 뚫린 집 한 채, 그러나 엄동설한의 칼바람에 흔들림 없이 섰고, 그 가지에 달린 잎들도 무성하고 싱싱한 소나무와 잣나무 4그루.
추사 김정희의 필법과 화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 귀물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해방 조선에 퍼졌고 많은 이들이 그림을 보기를 원했다. 그 가운데 손재형은 당대의 석학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정인보와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이들로부터 발문을 받는다.
이 세 명의 발문은 세한도에 바쳐진 마지막 배관기(拜觀記) 즉, ‘절하면서 보았던 기록’이다. 그 앞에는 한때 그림을 소장했던 김석준과 청나라의 명사 16명이 세한도를 보고 남긴 감상들이 줄줄이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세한도를 다 펼치면 길이는 무려 14미터에 달한다.
물론 이 길디 긴 화폭에 처음으로 글씨를 쓴 이는 김정희 본인이다. ‘세한도’(歲寒圖)라고 예서체로 쓴 제목 옆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쓰여 있다.
이 우선(藕船)은 이상적 (李尙迪, 1803~1865)이라는 이의 호(號)다. 즉 “이상적은 이 그림을 감상하시라.”는 제목이면서 이 세한도가 이상적을 위해 그려졌다는 김정희 본인의 선언이다. 그럼 이상적은 어떤 이유로 세한도의 주인공이 됐던 것일까. 추사 김정희로부터 그 사연을 풀어가 보자.
추사 김정희는 경주 김씨다. 경주 김씨라면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집안으로 세도를 부렸으나 정조 이후 등장한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밀려나는 집안이다. 그러나 김정희가 과거에 급제할 때만 해도 조정에서 축하를 보내올 만큼 위세 높은 가문이었다.
김정희 역시 젊어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으며 총명한 만큼이나 지적인 욕구에 그득한 사람이었다. 10대 때 북학파의 태두라 할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스승이 교유한다는 청나라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우던 그에게는 간절한 꿈이 하나 있었다. 청나라에 들어가 스승 박제가처럼 쟁쟁한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홀연 한 생각 일으켜 (慨然起別思)
사해에서 널리 지기를 맺고 싶네 (四海結知己)
만약 마음 맞는 사람을 얻게 된다면 (如得契心人)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네 (可以爲一死)
하늘 아래 명사가 많다 하니 (日下多名士)
부럽기 그지 없어라 (艶羡不自已)”
1801년 네 번째로 북경을 방문하게 되는 박제가는 제자가 지은 시를 청나라 학자 조강에게 보였다. 요즘 이런 아이가 내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네 하며 어깨도 족히 으쓱거렸으리라. 타는 목마름으로 연행(燕行), 즉 북경을 가 보고 싶어하던 김정희에게 기회가 왔다.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뽑힌 것이다. 김정희는 사신 수행원으로 자원하여 압록강을 넘는다.(1809) 김정희의 나이 24살이었다.
북경은 완전히 신천지였다. 고루한 성리학에 사로잡혀 행여 다른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사문난적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던 조선 선비 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다.
우선 김정희는 청나라 당대의 대학자 완원과 사제관계를 맺는다. 김정희의 아호는 72가지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완당(阮黨)이라는 호는 완원의 제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또 당시 금석학의 1인자였던 옹방강의 초대를 받아 그가 모으고 보유했던 진귀한 자료를 직접 대면했을 때 김정희는 그야말로 새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이 신선한 만남을 통한 에너지 때문이었을까. 그는 조선 곳곳에 널린 옛 비문들을 통한 과거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북한산 비봉 정상에 오랫 동안 방치돼 왔던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이었다. 김정희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서 새 땅을 굽어보던 신라 진흥왕의 웅혼한 흔적을 천 삼백년만에 밝혀 냈다. 그는 이후 각지를 방문하며 문무왕비, 무장사비 등 옛 비문들을 연속 발견했고 그 비문을 탁본으로 떠 청나라에 보냈다.
당시 청나라의 중심 학문은 옛 문헌의 정밀한 고증을 지상과제로 삼는 고증학이었던 바, 김정희가 보내온 탁본은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김정희는 일약 청나라에서 그 이름을 드날리는 몇 안되는 조선 사람이 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류 스타’ 였던 셈이다. 김정희의 동생 김명희가 청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 사람들이 형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김정희는 서른 네 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1830년, 추사 나이 마흔 다섯에 그의 탄탄대로에는 결정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윤상도라는 이의 옥사에 아버지 김노경이 연루돼 고금도로 유배된 것이다. 집안의 기둥이 부러지는 충격이었고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김정희 가문에 대한 임금의 신뢰는 여전히 높아서 김정희는 이후로도 벼슬살이를 했고 1840년 그의 나이 쉰 네 살에 다시금 중국에 사신으로 갈 기회를 얻는다. 머리는 반백이었으나 김정희의 가슴은 또 한 번 싯푸르게 젊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