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에 갇힌 자전거 (2024.9.10)
미송 송유창
가파른 등산길을 젊은 바이커는 거친 숨소리 없이 오른다. 자전거는 용도와 가격이 다양해지면서 교통수단이 아닌 운동기구로 변신하고 있다. 자전거를 보다 시민이 많이 이용하도록 행정관서마다 경쟁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전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쓰임새가 다양해지면서 교통수단으로 용도는 분명 떨어지는 장비가 되었다.
70년대 자전거는 면사무소나 파출소 공무용이거나, 양조장이나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 타는 교통수단이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자전거포(舖) 일가 아저씨의 권유로 은빛 나는 새 자전거를 사 오셨다. 큰돈 함부로 쓰는 분이 아닌데 덜컹 구입한 것이다. 나도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 자전거로 등교할 수 있다고 상상하니 내심 아저씨가 무척 고마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뭔가 큰 오산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지 않을 때도 아버님은 곡식이나 잡다한 농기구를 넣어두는 광에다 넣고, 자물쇠까지 꽉 채워 두기 때문이다. 타는 법을 배워 등하교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아버님은 농사일 중에도 틈틈이 자전거를 고방에서 꺼내 정성스럽게 닦으셨다.
아버님 자전거로 타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어머님께 하였지만, 자전거만큼은 어머님도 내 편이 아니었다. ‘자전거만 타게 해주면 더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는 다짐도 통하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틈나는 대로 고방에 갇힌 자전거를 만지작거리며, 타고 씽씽 달리는 내 모습만 상상하다 소 꼴을 먹이러 가야 했다. 동네 친구들도 “자전거 샀다는 데 한 번 타게 해 주라”거나, “자전거 있는데 왜 학교에 타고 가지 않느냐”는 등의 말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안 계실 때 잠깐이라도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워 보려고 자전거 열쇠를 찾으면, 어디에 두셨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타는 법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나머지, 아버님이 들에만 가시면 집 안 구석구석 자전거 열쇠를 찾아다녔다. 어두컴컴한 고방의 그릇 틈새뿐만이 아니라 아버님이 평소 잘 다니는 동선(動線)을 따라 들쑤시며 돌아다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님의 자전거로는 타는 법을 배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문득 자전거를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아버님이 자전거 열쇠를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웃 동네에서 자전거로 통학하는 반 친구를 꼬드겨 우선 배우기로 하였다. 대신 그 친구의 웬만한 숙제는 내가 다 해주기로 약속하였다. 방과 후에 중학교의 넓은 운동장에서 그 친구가 뒤에서 잡아주어 나는 초스피드로 왕초보를 면할 수 있었다.
하루는 그 친구의 자전거를 몰고 집까지 왔다. 어머님이 내가 자전거 타는 실력을 보시면, 아버님께 말씀드릴 것이라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슨 급한 심부름이라도 생기면 열쇠를 내게 주도록 어머님이 말씀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상도 빗나갔다. 아버님은 면(面)내 아는 분의 길흉사나 방앗간에 가실 때나, 아니면 시장(市場)에 가실 때만 자전거를 꺼내 타셨다. 시장에 가실 때도 어머님은 지름길인 점고개 길로 걸어 가시게 하고, 아버님은 자전거를 타고 싱하니 혼자 가시곤 했다. 다녀오신 후에는 반드시 마당에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마치 1급 정비사마냥 기름걸레로 바퀴의 흙 한 톨까지도 깨끗이 닦았다. 이처럼 아버님이 자전거를 아끼시는 모습을 보고 나면, 나는 감히 한번 타고 싶다는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님은 내가 자전거를 타려 할까바 그러신 것일까. 가장으로서 아니면 혼자만 가지고 싶은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 그렇게 하신 것일까. 아니면 아들에게 자전거가 위험한 교통수단이라고 생각하신 것일까. 중학교 내내 나는 아버님의 자전거를 단 한 번도 타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고등학교를 다니며 방학 때나 고향 집에 내려와 자전거를 타 본 기억이 전부다. 그때는 이미 그런 욕망이 정점을 지난 데다 헌 자전거가 된 이후였다.
군인이 되고 결혼하여 내가 원주에서 근무할 땐 막내딸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니 군인아파트 출입구에 세워둔 자전거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나 있었다. 막내딸에게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릴 때의 아버님 자전거가 갑자기 떠올랐고, 굉장히 큰 재산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내가 비록 어린 긴 했으나, 잘못 간수한 아이에게 따끔한 야단 한번 치지 않은 아내가 훨씬 더 못마땅했다. 아내는 원주에서 근무가 끝나고 나면 다음 근무지로 이사 갈 때, 짐 하나가 줄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며 딸을 감싸는 듯한 말을 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내 생각이 아버님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자전거가 우리 집의 가장 큰 재산이었는데...’ 하고 말이다. 잃어버린 자전거는 찾지도 못했고, 막내딸에게 새 자전거를 사주지도 않았다. 내 아이들까지도 남들이 타는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보게만 했다. 자전거를 ‘사치품’으로 여기는 대물림을 한 셈이다.
이제 그때의 아버님보다 많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토록 오랫동안 ‘고방에 갇힌 자전거’의 비밀을 알 것 같다. 아버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과 편리한 것을, 최소한 아까워서 내어 주실 줄 몰랐던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어린 아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며, 외면 또는 침묵으로 자전거에 몰입했던 아버님었던 것이다. 중절모에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자전거를 타시던 아버님. 두루마기의 옷깃이 행여 자전거 바퀴에 걸릴세라 허리 뒷 춤에 양쪽을 묶고, 이웃 동네의 상가(喪家)에 가시느라 깨끗이 손질한 은빛 자전거를 타시던 아버님. 이륜의 자전거로 동구 앞의 신작로를 달리시던 그때 당신의 모습은 안개 속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학(鶴)과 다르지 않았습니다.(끝)
첫댓글 우리가 중학시절 중고 자전거 한대
값은 3000원정도고 중고라도 상
태가 좋은것은 5000원으로 기억
됩니다.
당시 통학시 자전거는 학교인근
자전거 정비소에 맡긴후 학교까
지 걸어갔지요.
자전거가 비에 젖으면 브레이크가
잘 듣지않았고, 나는 자전거를 타
면 자전거 핸들에 양손을 놓고 운
동장을 서너바뀌돌거나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팔굽혀피기도 했
고요.
자전거로 좁은 논두렁을 신나게 달
린 기억도 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